(중화학 총론)
박정희의 중화학은 선진국 건설의 역사적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부제~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적 영웅이다)
박정희는 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에 성공하고 혁명공약 1항에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 2항에서 UN헌장을 수호하며 각종 국제협약을 존중하는 국가를 만든다고 했다.
4항에서 국민을 빈곤과 기근에서 해방시켜 자주국가를 설립한다고 약속했다.
박정희는 그의 혁명정부에서 빈곤에서의 해방을 위한 제1보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박정희가 혁명을 이르킨 61년도의 한국은 1인당 GNP가 81달러여서 말레이시아 281, 필리핀이 268달러로서 한국은 이들 나라보다 3배나 못 사는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였다.
거기에 남한은 김일성의 호시탐탐 남침을 노리는 원시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대치 상태에 있었다.
이리하여 한국은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빈곤 국가로서 전 세계에서 최빈국으로 낙인찍힌 희망과 용기 없이 좌절과 패배 속에서 헤매고 있는 국가였다.
여기서 보리고개란 말은 참으로 처절한 말이다. 가난한 농가는 봄이 되면 양식이 떨어진다.
당장 먹을 저녁거리뿐만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먹을 양식이 없다. 초근목피로 죽을 쑤어 먹는다.
너도 나도 다 못 먹는다. 보리가
추수될 때까지 못 견디면 죽는다. 보리가 추수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계속된다.
박정희 장군은 구악을 일소하고경제개발에 착수한다고 하고 정부가 생기기도 전인 61년 12월 말에 울산공업단지 건설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62년 2월 3일 울산군 삼일면과 방어진면 일대를 공업지역으로 지정하고 정유공장, 비료공장, 종합제철과 발전소가 입주하는 당시로는 국가 최대의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기공식 치사에서 " 4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한 공업도시를 건설하여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번영을 재현하여 민족부흥의 터전을 마련한다"라고 했다. 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 기공식 치사인가!
이 울산 공업단지는 5년간의
기간에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그리고 발전소를 건설하여 한국 최초의 공업단지를 건설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당초의 종합제철은 항만이 좁아 포항으로 이전했다.
73년 이 단지에 석유화학 공장을 건설하여 중화학에 의한 울산 석유화학 공업단지로 지정하였다. 중화학은 이에 추가하여 현대조선과 현대미포 조선을 조선공업 단지로 지정하고 자동차 공업단지에 이어 온산비철 금속공업 중화학단지가 지정되어 울산은 한국 최대의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박정희의 울산공업단지 건설이 혁명정부의 성공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이 되었다
혁명정부는 이와 동시에 농본지국가에서 탈피하는 공업입국과 수출제일주의를 근간으로 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1962~1971년의 경제개발은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60년대의 1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8.8%였고 수출은 40%대의 성장으로 61년 4천 만불에서 시작하여 64년에 기념비적인 1억 불을 달성하고 70년에 10억 불의 고지를 점령하였다.
우리들 자신이 먼저 놀랬다. 이리하여 패배와 좌절감에서 벗어나서 자신감이 생겼다.
박정희는 집권 초기 10년의 기간에 국민을 기근에서 해방시켜 최빈국에서 대도약하여 개도국으로 뱔전하였다.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희망과 위기와 시련의 70년대를 맞이했다.
한국의 경제사회는 60년대의 과도 과속의 경제발전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인플레를 유발했다.
예를 들면 10억 불을 수출하기 위하여 불가항력적으로 20억 불을 수입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72년에는 대통령 긴급명령인 8.3 조치를 실시하여 기업을 살리는 경제 행정조치를 시행했다.
여기서 8.3 초치가 이것이 전부인양 떠들썩 하지만 8.3 조치는 대통령의 기업을 살리는 행정조치에 불과했다.
8.3 조치는 헌법 73조에 의거 경제안정을 위하여 긴급조치를 한 것으로서 사채지불을 동결하여 월이자 1.3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전환토록 한 것이었다
그 후 후속조치로서 74년에 5.29 조치를 발동하여 기업을 공개할 것을 지시한 특별명령을 내린 것으로 사채를 제도금융으로 흡수하여 증권시장을 육성하는 계기로 만든 것이다
가장 민주적인 방법으로 당시 대통령실 경제 1( 김용환 수석)에서 당면한 현실적 경제난국을 해결한 정책이다.
정부는 이와는 상관없이 72년에 81년 목표로 수출 53억 불 달성의 3차와 4차 5개년 계획을 합친 10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시행에 들어갔다
경제기획 당국은 70년도에 수출 10억 불을 달성한 국가가 10년 후인 81년에 5배에 해당하는 53억 불을 달성하고 8.8%의 연평균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은 장밋빛 계획이라고 부르고 자화 자찬하며 작성자 모두가 훈장을 받았다.
박정희 정부는 71년의 대통령 직선 후 정치적으로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72년 10월 국내외의 친북 반미파와 골수 좌파세력의 소동과 북으로부터의 남침 준동에 대천을 목적으로 하여 헌법을 개정하여 정당정치 활동을 금하는 유신 헌법을 공포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도 81년까지 보장되었다.
희망의 70년대를 향한 박정희 정부는 연초부터 정치 사회와 경제적으로 다각적인 시련에 봉착한 것이다.
박정희는 73년 연두기자 회견에서 기존의 10개년의 목표를 뒤엎는 81년도에 1인당 국민소득 1,000불과 100억 불 수출 달성을 목표로 하는 이른바 박정희의 중화학 정책을 선언했다.
박정희의 중화학은 공업구조개편론에 근거하여 중화학 공장을 건설하여 공업구조를 노동집약 공업에서 자본집약 기술공업으로 상향조정해야 된다는 공학적인 원리 원칙에 의거 출발 추진되었다.
한국의 중화학 업종은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의 6개 업종으로 하고 이들 공업에 대한 공장이 가득 찬 공업단지를 건설한다고 했다.
중화학 선언과 동시에 선언된 국민의 과학화 선언에 의하여 연구소 단지를 중화학과 동시에 건설한다고 했다.
중화학 선언은 6개 공업 단지와 연구소 단지가 건설될 때 중화학의 목표인 중화학 공업화도 이룩되고 수출 100억 불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중화학은 선진국의 전유물이지만 하기에 따라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중화학 공업화 정책은 중화학의 사명이고 국가가 추진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국가적 사명이 된 것이다.
박정희의 중화학은 10년의 기간을 요하는 프로젝트여서 유신으로 정권이 보장됐기 때문에 중화학이 선언된 것이며 결과적으로 중화학의 성공여부가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출발된 것이다.
박정희는 60년대에 국민을 기근에서 해방시키고 세계 최빈국에서 해방시켜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지만 70년대에 반민주적인 유신으로 정권을 잡았으니 유신기간에 무엇을 성취하여 조국에 남겼는가로 영웅이냐! 그렇지 않으면 평범한 장기집권자인가를 결정하게 되었다.
72년 유신으로 정권이 보장됐으니까 73년 중화학이 착수되었고 중화학은 유신의 책임
이 되어 박정희의 유신과 중화학과는 분리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전인 잘 사는 국가 건설을 위하여 박정희의 친정사업으로 대통령실의 T/F 팀과 중화학기획단과 정부의 모든 기관이 동원되고 관계획, 민실천의 원칙하에 국민 총화로 추진하여 목표의 두 배 이상의 실적을 거두었다.
목표연도인 81년에 수출은 목표의 2배인 200억 불을 달성하였다. 100억불 수출목표는 4년 빨리 77년에 달성하였고 1인당 국민 소득은 1,000불 목표치에 비하여 1,630불을 달성하였다.
세계 경제발전사 상에 없는 기적 같은 실적을 이루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이끄는 굳건한 기반을 구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