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제105화,
(영조5)
원릉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왕위에 머물렀던 조선 최장수 왕의 능이지만 비교적 능역이 아담하고 단출하게 조영된 능이다.
웬지 다소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평생 검약과 절제를 덕목으로 삼았던 그의 살아생전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는 능이다.
원릉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하나로 둘러진 난간석 안에 쌍릉을 조성했다.
조선 왕릉은 일반적으로 상중하 3계단으로 나뉘어 중계에 문인석을 하계에 무인석을 세웠는데 영조의 능은 중계와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인석을 같은 단에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또한 무인석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기에 위풍당당한 모습보다는 어쩐지 유약한 장수의 자태를 보이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영조는 숙종의 2남 서자로 태어나 1699년(숙종25년) 6세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1)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는 궁중 하인 중에서도 직급이 가장 낮은 무수리 출신이었다.
어미의 천한신분 때문에 그는 왕자이면서도 이복형이던 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으며 오랜 동안 궁궐외곽의 초라한 집에서 어렵게 자랐다.
어미에 대한 영조의 효심을 전하는 한 설화를 소개한다.
숙종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최씨는 빈의 예우조차 받지 못하고 양주 땅 어느 산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가 매우 초라했다.
때문에 이를 마음 아파했던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오랜 노력 끝에 어미 묘를 소령원(昭寧園)으로 승격시켰다.
어느 날 영조가 궁을 나와 잠행하던 중 향나무를 팔고 있는 나무꾼에게 어디서 나무를 캐왔느냐 물으니,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릉이 있는 양주 고령산에서 캐왔노라 했다.
무식한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해 능이라고 말했는데 항상 어미 묘를 능으로 바꾸고 싶어 했던 영조는 소령릉이란 소리에 감격하였다.
하여 향나무를 비싼 값에 사주고 나무꾼을 소령원 능참봉에 제수했다 전한다.
영조가 연잉군에 머물던 18세기 초 조선 조정은 중종 이후 2백여 년간 지속돼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러 당파대립이 극에 달해 있었다.
과열된 당쟁은 목숨까지 내걸며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죠.
숙종 조의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고 정권을 잡은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며 이들의 치열한 권력다툼은 경종이 왕위를 잇는 과정에서 피바람을 몰고 왔다.
숙종 사후 왕권을 쥐락펴락했던 신하들로 인해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연잉군과 소론이 지원하던 세자는 왕위를 둘러싼 당쟁에 휘말려야 했다.
이때 세자는 장희빈의 자식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고 연잉군은 어미가 천민 출신이라는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장희빈을 제거한 노론은 후일에 발생할지 모를 세자의 보복을 차단하고자 세자의 병약함을 내세워 숙종으로부터 왕세자의 뒤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는 명을 받아냈다.
이러한 노론의 술책은 왕권을 뒤흔드는 목숨 건 모험이었다.
그들로 인해 왕세제에 오르게 된 연잉군은 허약한 경종이 요절해 자신이 왕위를 넘겨받거나 경종의 왕위를 넘본 역당으로 몰려 죽어야하는 운명적 기로에 서있었다.
경종이 재위 4년간 소론을 지원하는 동안에 노론은 왕세제를 통한 대리청정을 실행해 정권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경종 즉위 이듬해 노론은 왕의 다병무자(多病無子)를 이유로 후계자를 정할 것을 주청하면서 경종을 잇는 숙종혈통은 연잉군 밖에 없음을 들어 숙종 계비 인현왕후에게 도움을 청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하지만 이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