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문장 부호 앞에 고개 숙이면서 / 이원우
얼마 남지 않았다. 부쩍 이 말에 정감이 간다. 자왈(子曰) 칠십이종심소욕하여 불유구라(七十而從心所欲不喩矩라). 바야흐로 이순을 넘기기 직전 당연하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아버지께선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제법 먼 동네에서 오는 청장년들에게까지 한문을 가르치셨다. 나는 그 때 <천자문>을 거쳐 <동몽선습>이며 <명심보감>등을 공부했다. 비록 어정쩡하게 끝났지만.
삼랑진으로 이사하고 나서도 당신의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었다. 구름처럼 모여드는 친구들로.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만 이병(罹病)하여 자리에 누우신 것이다. 그리고 끝내 일어서지 못하고 어느 추운 겨울날 저승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회갑도 못 넘기신 연세에…….칠십이종심소욕하여 불유구라 했는데, 그 일흔을 십 년이나 앞두신 당신께서 어찌 눈이나 제대로 감으셨을까? 내 나이 들어 예순을 넘겨서 한숨-안도인지 서글픔인지 모르지만-을 크게 한번 쉰 이유가 그렇게 따로 있는 셈이다. 그러고 나서 다섯 해 뒤 엄마가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엄마가 65세이셨다. 내 나이가 그렇게 되었을 때 또 한 번 큰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나는 몇 년 동안 사경(死境)을 헤매고 있었다.
기적이다. 그러던 내가 내일 모레 칠십이라니. 너무나 까마득히 높은 곳인 줄 알았는데 비록 휘주근한 걸음걸이지만 세월의 막대기를 휘휘 내두르며 오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버지께서도 겪지 못하셨던 ‘칠십종심소욕불유구’의 뜻인들 어찌 알랴. 그러나 어찌 한탄만 하고 앉아 있으랴. 미리부터 읊조려 보고 싶은 건 당연하다. 자왈 七十而從心所欲하여 不喩矩니라(공자가 말씀하셨다. “내 나이 칠십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84년 여름호 <한국 수필>을 통해 모자라기만 한 내가 문단에 나왔다. 5년? 아마 그 정도 문을 두드린 끝에 딴 세상을 본 것이다.
그런데 조경희 회장의 평은 조금은 혹독했다. ‘해운대의 기적(汽笛)’이라는 신변잡기, 워낙 열성을 보이니까 마지못해 추천 완료라는 선물을 준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 글에서 나쁜 버릇을 지적해 주었는데, 뜻밖에도 영탄(詠嘆/ 詠歎), 즉 쓸데없이 여기저기에 느낌표(!)를 썼다는 것이다. 내가 들여다보아도 아닌 게 아니라 ‘아’로 인한 상처투성이였다. ‘와’와 느낌표의 커플이 난무하는 뒤죽박죽의 현상을 내 글에서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컸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자.
나는 그 혹평에 완전히 동의했다. 그로부터 느낌표는 반이 아니라 대폭으로 줄었다. 내가 춤추고 박수하는 못난 꼬락서니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싶은 절박감을 실천에 옮기는 세월이 30년인데, 그러나 아직도 춤=영탄, 박수=느낌표의 제대로 된 위치조차 모르겠다. 주눅? 지금도 당연히 든다.
대신 긍정적인 파장도 만만찮았다. 어느 때부터인지 수필에서 대화를 끌어다 넣는 작법에서 뛰쳐나온 것을 하나의 사례로 들고 싶다. 그런 식으로 행(行)을 바꾸어 묶으면서까지 별 중요하지도 않는 시시콜콜한 말들을 “ ”로 묶다 보면, 어느 새 원고량이 15장을 넘는다는 계산에서이기도 하다. 표현을 바꾸면 까짓 현실감쯤은 능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말줄임표는 정말 남발되고 있더라, 너 나 할 것 없이. 눈에 거슬리기 십상이라는 게 나만의 느낌은 아니리라. 책장을 넘기면서 한 페이지에 그 녀석이 네댓쯤 얼굴 보이기 예사인데, 그게 아름다울 리 만무하다. 그리고 그 녀석의 바른 얼굴은 ‘…….’,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 그저 물 흐르듯이 책 한 페이지에 한 개쯤? 그게 정답이리라.
대신 ‘다’로 끝나는 고질적인 일본식 문장을 바꾸려 애쓰다 보니 물음표(?)를 조금은 자주 끌어오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모든 문장이 ‘다’로 막을 내린다면 끝장을 본 셈일지도 모른다. 그런 밋밋함이야말로 우리가 몰아내야 할 대상은 아닐는지.
참, (,)에 앞에서는 갈팡질팡한다. 한글학회 부산 지회장을 역임했던 박홍길 교수는 여기에 대해 확고부동한 이론을 갖고 있던데, 나는 그 근처에도 못 가서 무턱대고 적당한 데에 찍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초등 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곁눈질하고 있다. 수시로 책장을 넘기면서 깜짝깜짝 놀란다. 세상에, 거기에 온점(.), 반점(,), 느낌표(!), 물음표(?) 등을 묶어서 ‘문장 부호’라고 해 두었다. 일흔이 다 된 나이까지 여태 월점으로만 고집해 왔으니 낭패 아닌가? 틀린 건 아니로되 ‘월점’은 70점짜리밖에 안 된다. 자탄이 나온다. 이래 갖고서야 43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고 어찌 남 앞에 나서랴.
그러고 보니 한문에는 월점이 없는 것 같다. 손에 잡히는 <명심보감> 한 권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펼쳐든다.
馬援曰 終身行善 善猶不足 一日行惡 惡自有餘
마원이 말했다.
“죽을 때까지 착한 일을 하여도 착함은 모자라고, 단 하루라도 악한 일을 하면 그 아이 저절로 남는 법이니라!”
이렇듯 우리말로 풀이해 놓고 대비하니 따옴표와 반점, 느낌표가 어우러져 보기에 아름답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내 식대로 한다면, 이 한 문장으로 족하다. 마원이 말했는데, 죽을 때까지……………남는 법이 없다고.
석 달 남았나 보다. 진짜 七十而 어쩌고저쩌고 할 날이. 아버지와 엄마께는 공자의 말씀을 그대로 고해 올릴 테고, 나 혼자서는 따로 그 소회라도 적어 볼 생각이다. 각종 문장 부호, 초등 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일기 교과서에 나오는 온점, 반점, 느낌표, 따옴표, 작은따옴표, 말줄임표에다가 쌍점(:) 정도는 얼굴들을 내미는 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문장 부호라는 게 말 그대로 문장에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 같다. 녀석들 아니 그들이 적재적소에서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내 무슨 배짱으로 고개를 숙이지 않으랴. 일흔에 이르러 그걸 조금 깨달았다. 만시지탄이다.
16장 / 2011년 1월 14일
이원우(’79 김승우 발행 <수필 문학> 초회 추천-서울대 차주환 교수 추천/ ’84 <한국 수필> 2회 천료-조경희 회장/ ’97 <한글 문학> 소설 신인상-서울대 구인환 교수 추천/ 지은 책 1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