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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동력자들 보시면서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요즘 갑자기 밀어닥친 황사 때문에 요즘 꽃 구경했던 그 좋은 계절이 벌써 지나간 것 같이 느껴지는데 그러니까 하라고 할 때 빨리빨리 하셔야 돼요. 이제 아마 황사가 내일 이제 좀 이렇게 물러간다고 하니까 어제 이렇게 잠깐 걸어보니까 이제 철쭉이 여러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하나님이 네 연산홍 연산홍 철쭉 아니래요? 네 연산홍 저도 철쭉 연산홍 헷갈려요. 아무튼 그 꽃 이렇게 아주 전투적으로 피는 꽃 그 꽃이 이제 춘천을 뒤덮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러분들을 위한 선물 꼭 누려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 안에 거짓말 두 번째 시간으로 이제 말씀을 나눠보려고 하는데요. 그냥 교회 안에 거짓말하니까 뭔가 좀 어색하시죠? 뭐 교회 안에 거짓말이 있어? 근데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사용하는 단어들 문장들 그리고 우리의 신앙 이런 것들이 의외로 있어요. 네 지난주에는 우리가 예수 믿으면 복받아요라고 하는 그게 맞는 말인데 그 안에 함정들이 있다는 거죠. 그 복의 개념에 잘못된 개념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요. 일단 믿어보세요.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일단 믿어보세요. 여러분들 전도할 때 여러분들 전도 대상자들한테 그냥 한번 오기만 해봐. 그리고 잘 안 믿어진다고 그러면 그냥 와서 듣다 보면 믿어져 일단 믿으면 보이는 거예요.
저도 옛날에 이런 식으로 많이 말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생활하는 사람은 너무 과학적인 거 너무 이성적인 거 찾는 거 아니야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그냥 말씀하시면 말씀대로 믿는 거예요. 믿으면 보여. 우리 이렇게 많이 이야기하고 고백했잖아요. 그쵸 이 말이 그런데 맞기도 하지만 틀릴 수도 있다고 하는 부분을 오늘 좀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약간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의 시각으로도 우리가 하는 말들을 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는 지금 신앙 안에 거하고 있다 보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크리스찬의 언어가 있습니다.
저기 정치인들도 그런 이야기하던데요. 여의도 사투리가 있다고 그러니까 정치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여의도 사투리를 쓴대요. 그 말이 뭐냐면 무슨 말을 해도 이 뒤로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되고 막 그런 말을 아마 의미를 하나 봐요.
근데 교회 사람들도 크리스찬 사투리가 있어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익숙한데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뭔가 말을 할 때 이 사람들이 그게 무슨 말이야 이렇게 이야기도 하고 오해하기도 할 수 있는 말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이 말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냥 일단 믿어봐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올까요? 어떻게 일단 믿어 내가 눈 뜨고 보고도 요즘에는 믿지 못하는 세상인데 어떻게 눈을 딱 감고 그냥 일단 믿어봐 한마디로 어쩌면 그냥 니가 가지고 있는 생각 다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오기만 해 그러면 돼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예전에 신앙인들 가운데는요. 성경이 뭔가 말하는데 거기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은 좀 약간 악한 마귀 들었다고 막 이렇게 그냥 믿어야지 어디서 질문을 하냐고 막 이렇게도 진짜 했던 기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근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이 마치 그런 내용 같아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하박국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죠. 언뜻 보기에는 이 말씀은 일단 믿는 것으로 시작해야 믿음에 이른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살아오는 과정 속에 또 여러분들이 이제 직분이 어느 정도 되다 보면 신앙의 연수가 어느 정도 되다 보면 질문을 잘 못해요. 왜냐하면 질문했을 때 그것도 몰라라고 하는 약간 무시를 받을까 봐
근데 여러분 성경에서는요 우리에게 그냥 무조건 믿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믿기 전에 궁금해해야 된다는 거예요. 회의 회의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회의감이라고 하는 회의감이라는 단어를 아시죠? 의문 이라는 단어하고 연결할 수 있는데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기 전에 이런 의문 궁금증, 회의감 이런 것들이 있어야 그것이 나에게 믿음으로 이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건데 그냥 덮어놓고 믿는다. 그게 굉장히 좋은 믿음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르고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믿는 거일 수도 있다는 걸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의심 질문, 혼돈 궁금증 무엇이 됐든지 간에 여러분들의 신앙의 삶의 여정 속에 이런 것들이 혹 일어나면 이거 악한 사단 마귀야 이렇게 누르려고만 하지 마시고요. 이걸 해결하려고 한번 우리가 한번 해보는 거예요. 도전해 보는 거예요.
물론 건강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냥 회의주의자적인 회의는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냥 해결하려고 하는 의도 없이 뭔가 이거에 대한 정말 갈급함 없이 무조건 회의적인 말만 하는 사람들은 이건 문제가 됩니다. 그런 회의를 말하는 건 아니에요. 또 어떤 이들은 무신론적인 불신앙을 기준으로 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사람들도 있어요. 신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질문을 던지면 신앙적인 건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죠.
근데 또 때로는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불신앙적인 생각이 있어서 그런 회의감을 갖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런 분들은 대부분이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소망하는 바 하나님께 간구했던 어떤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때 왠지 모르는 그런 회의감들 왜 응답이 안 되지 하나님은 나를 나를 버리신 건가 막 이런 식의 불신앙의 마음이 들어오면서 생기는 그런 회의감들은 좀 주의해야 될 필요가 있어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이 회의감이라고 하는 것은요. 우리의 신앙을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내 안에 일어나는 의문 질문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여러분들 인생에 있어서는 여러분들 지금 나는 이대로 살아가도 되는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혹시 던져보고 살아가고 있나요? 그냥 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먹고 하루 일과를 보내고 저녁에 들어가서 씻고 자고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그냥 아무 의식 없이 살아가고 있는 혹시 그런 일상이라면 나의 인생을 좀 뒤돌아볼 필요도 있죠.
내가 그러기 위해서 이 땅에 만들어진 게 아닌데 물론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뭔가 목적을 가지고 의미를 가지고 그런 일을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그냥 아무런 의식 없이 그냥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는 모습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인생일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만약에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이 미팅을 한다고 한번 생각해 볼게요. 고민을 미팅할 때 미팅 나갈까 안 나갈 고민 첫 번째 먼저 고민하겠죠. 나가기로 결정하고 나면 무슨 옷을 입을까 또 어떻게 꾸미고 갈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첫인상을 보고 아 저 사람이 호감형인가 아닌가 막 여러분들 막 나름대로 분석하고 거기서 뭔가 이렇게 분류할 거 아니에요? 그렇죠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들 마트에 가서 그냥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사십니까?
아니죠. 물건이 이게 내게 필요한 물건인가 아니면 저렴한 물건인가 비교하고 분석하고 하면서 내가 취할 것들을 취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내가 지금 어떠한 나의 신앙의 상태에 있는지 좀 나의 삶을 점검해 보면서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면서 또 성경을 읽으면서도 질문을 좀 던지면서 그렇게 우리가 가야 우리의 삶에 훨씬 더 유익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요 질문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여러분들 자녀가 어렸을 때 키울 때 질리도록 애들이 질문 던진 적 혹시 기억이 있으신가요? 너무 오래전이라 잊으었죠. 엄마 이거 뭐야 냉장고 이거 뭐야 텔레비전 또 이거 뭐야 냉장고 계속 물어보잖아요.
근데 그 질문을 던지는 그 아이들을 우리가 계속 답변을 해주고 칭찬해주고 어렸을 때 그러다가 조금 더 크고 났을 때 우리가 거기서 이제 우리가 실수한 게 뭐냐면 얘네들의 질문을 막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부모님들도 아이들이 좀 크면서 질문을 막아버리고요. 선생님들도 1학년 때 질문을 그렇게 막 손들고 질문하던 애들이 나중에는 질문을 못하잖아요. 손을 안 들어요. 손 들면 괜히 챙피당할까 봐 그러니까 문화가 계속 애들이 뭔가 질문을 하게 하고 궁금하게 하고 그거를 해결하려고 하게 하는 그런 교육의 문화,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는 그런 문화가 돼야 되는데 우리 문화 자체도 질문을 못하게 점점점점 잘하면서 막아버립니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의 삶에서도요. 직장 생활할 때 뭐 궁금한 것 좀 이렇게 계속 물어볼 수도 있잖아요.
근데 괜히 물어보는 사람들은 왠지 실력이 없는 것 같고 뭔가 뒤떨어진 것 같고 그러다 보니까 괜히 아는 척하느라고 혼자 이렇게 그렇게 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요. 우리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궁금해하게 만드셨어요. 그러니까 각자의 수준과 방향에 따라 생각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그 생각과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그 생각과 방향대로 각자 생각하고 질문 던질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소그룹 모임을 할 때도요. 모임을 하면서 각자 나눔을 할 때 뭔가 이렇게 수준이 다 다를 수 있어요. 분명히 a라고 하는 거를 말씀 중에 나눴는데 어떤 사람은 b를 이야기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거를 잘못 봤네 a 말했는데 왜 b를 이야기하고 있어 이렇게 질책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어떻게 b를 봤어 이렇게 하면서 격려해주고 칭찬을 물론 완전히 사이비 이단 같은 잘못된 길로 말을 하면 그거는 좀 잡아줘야 되겠지만 좀 다른 시각으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 존중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우리가 지금 전도 대상자들을 찾는 이라고 우리가 이름을 이렇게 좀 부르고 있잖아요. 그 찾느니라고 하는 의미를 좀 제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드리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함몰되어 살아가려고 하지 않고 자신과 세상 그리고 뭔가 자기가 모르는 세상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면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찾는 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찾는 이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러니까 한마디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냥 아무런 의식 없이 살아가고 그냥 아무 생각 없는 그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약간 찾는 이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거고, 찾는 이는 그런 삶을 살면서도 뭔가 허기지고 갈증이 나고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요. 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요. 그런 갈증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을 찾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찾는 이들은요. 그 뭔가를 찾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걸 찾을 기회가 옵니다.
근데 그 기회를 옆에 있는 우리가 도와줄 수 있으면 참 그게 우리에게 은혜죠. 그래서 찾는 이가 찾은 이가 돼요. 찾은 이 이제 자기의 답을 발견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찾는 이는 계속 질문을 던져야지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요즘 세월호 10주기가 어제 지났고요. 또 이태원이 요즘 참사에 대한 이야기도 또다시 반복적으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이제 그런 관련된 책자나 이런 영상들을 이렇게 보면 참 우리가 우리하고 너무 먼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래서 10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우리에게는 정말 희미해진 기억으로 남아 있는데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있더라고요.
근데 그런 충격적인 삶을 경험했을 때 사람들이 대부분 무슨 질문을 던질까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죽고 난 이후에 무엇이 있을까 여러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죽음 뒤에 지옥과 천국 마치 공식처럼 외우고만 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제가 많은 분들을 장례를 이렇게 치는 좀 경험들이 목회를 하다 보니까 있는데요. 신앙생활을 막 하는 과정에서 장례를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그 과정에서도 보면요. 그때 마지막 때가 딱 됐을 때 그분이 어떤 신앙으로 살아왔는지가 좀 더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히 믿는다면 죽음 이후에 천국을 믿는다면 물론 고통은 있죠.
아프잖아요. 죽는 그 순간에 막 숨도 헐떡거리고 뭔가 몸의 경직도 일어나고 아프고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뭐가 있어요? 소망이 있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고 죽음은 그 나라로 넘어가는 관문이라고 하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과의 그 차이가 거기서 이렇게 발생할 수 있는 거예요.
근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죽음의 현장들을 보면요. 질문들이 생깁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이렇게 돈만 벌려고 살아가는 게 나의 인생이 맞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참된 가치란 뭘까 막 이런 궁금증들이 막 일어납니다. 어쩌면 코로나19도 우리에게 그런 질문들을 많이 만들어 놓은 그런 좋은 시기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근데 여러분 이런 진지한 질문들이 이렇게 일어나려고 하다가도요. 우리 문화가 이 질문들을 누른다고 그랬잖아요. 우리의 삶의 문화를 보면 우리 주변에 온통 즐겁고 정신없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들을 즐겁게 하고 정신없게 만드는 요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 주간 삶을 살면서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들이 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에게는 텔레비전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취미 생활이 될 수도 있고 오락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우리가 즐길 만한 거리들이 요즘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근데 그런 것들이 우리가 뭔가 진지하게 고민하려고 했던 그 생각들을 희미하게 만들어버려 에이 그거 그리고 외면해버리고 또 잊어버립니다. 또 나중에 그 시점이 됐을 때 주일날 요즘 우리가 불강력적인 어떤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아요. 아유 골치 아퍼 아우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너무 머리 아파 그리고 그냥 밀어넣어버려요.
여러분 근데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답을 못 찾는 거예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가 나의 삶에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하는데 나의 삶의 목적은 뭐지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가 이곳에 세워졌는데 하나님이 이곳에 세우신 목적과 뜻이 무엇이지 계속 저도 여러분들도 뭔가 계속 답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그냥 처음에 덜커덕 믿습니다 하고 믿는 사람들은요. 극히 소수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도 사람들이 궁금증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지 내가 볼 때 저 사람은 분명히 나보다 더 힘든데 왜 저렇게 뭔가 다르지 이런 것도 궁금증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어요. 출발점에서의 우리가 완전한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은 거의 드뭅니다. 출발점에서는요. 처음에는 의심, 의문, 회의감 이것이 절반, 또 궁금증, 뭔가 믿어보고 싶은 의지하고 싶은 마음 절반 이런 상태에서 시작했다가 점점점점 이 의문들이 해결되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이죠. 찾으니 아까 제가 찾는 이 우리가 전도 대상자로 삼는 사람들을 찾느니라고 했잖아요. 우리는 지금 찾는 이에서 찾은 이가 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찾은 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아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나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무언가를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모를 때마다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내 인생의 근본 문제의 해결자가 하나님이시구나 이거를 발견한 사람들이 바로 찾은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찾은 이는 그러면 그냥 깨닫는 걸로만 끝나게 될까요? 아니죠. 얘는 찾았으니까 그 찾은 걸로 자기 삶의 기준이 되고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찾았다고 하는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찾고 난 이후에 그 찾은 것이 나의 삶에 적용되고 내가 그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가면서 또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가면서도 계속적인 어떤 질문거리들이 회의감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또는 내 동력자들에게 내어놓고 같이 풀어가면서 이걸 해결해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찾은 이가 되고 난 이후에도요. 우리에게는 궁금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또 회의가 필요합니다. 아니 불가피합니다. 근데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회의에는 큰 특징이 있는데 뭐냐면요. 찾은 이들에게 찾아오는 회의 가면은 큰 특징이 뭐냐면 바로 우리의 연약함이 그 가운데 반영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뭔가 갑자기 확 이렇게 뭔가 나는 신앙 안에 살고 있는데 뭔가 확 다가와요. 의문같이 질문으로 그러면 그것이 먼저 내 안에 내 연약함인가를 먼저 살피셔야 됩니다. 어렸을 때 가정 안에서의 좀 갈등이 많은 분들, 특히 아버지와의 갈등의 관계가 심한 분들은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잖아요. 근데 그 개념 자체가 이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 하면서 뭔가 그 아버지가 주는 그 놀라운 은혜를 막 누릴 때 자기는 못 누리는 거예요.
이것도 어떤 자기의 삶의 삶의 흔적 상처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연약함이죠. 그럴 때 하나님 내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됩니까 하면서 찾아가 보는 거죠. 두 번째로 이런 회의와 질문은 우리의 신앙을 자라나게 한다는 거예요. 그냥 일단 믿어 그게 아니라 진실된 질문이 내게 일어나야 됩니다. 아니 왜 이 성경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렇게 살아갔는데 나는 왜 그렇게 못 살아갈까요? 나도 나도 나름대로 하나님 이렇게 다 살아가려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 믿음의 동력자들 보면 어떤 권사님은 어떤 장로님은 이렇게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존경스러운데 왜 나는 그게 안 될까요?
여러분들 질문 던질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통과 고난 가운데 갖게 되는 회의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다가올 때는 회의적인 마음이 더 많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왜 나는 열심히 신앙생활했는데 나는 열심히 봉사했는데 나에게 이런 고난이 다가온 걸까 왜 나한테 이런 아픔을 주실까 회의감이 들 수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그 손길을 경험하고 느낄 때 우리는 더욱더 성숙한 믿음으로 가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근본 가장 기본적인 우리의 질문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분, 내가 나와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라고 하는 궁극적인 질문을 계속 던져야 됩니다.
여러분 다 아신다고요?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 수가 없는 분이에요. 여러분들이 지금 경험한 만큼만 아시는 겁니다. 우리는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부를 발견하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또 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지 그분이 나를 통해 무얼 하길 원하십시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한 믿음으로 내가 건강하게 세워져서 또 나처럼 그런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떠한 연약한 이들을 돕고 세워주는 내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그런 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요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죠 여러분들 인생을 두 번 사시는 분 아무도 안 계시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가 가보지 않은 그 길, 그 길을 벌써 예수님은 걸어가셨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길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질문을 던졌을 때 언제든지 답변을 드실 수 있는 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건 너무 행복한 거예요.
여러분들이 문제를 푸는데 아무리 내가 해도 해결이 안 되는데 옆에 선생님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방에 해결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해가 쏙 되겠죠. 마찬가지 우리의 삶에 늘 나의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변을 주실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여러분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갈 때 그냥 오늘 하루를 그냥 열심히 살았어 이걸로만 끝나지 마시고 오늘 하루의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지 오늘은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셨지 질문하고 또 그 과정 속에 궁금한 거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고 이러면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더 성장하고 성숙한 귀한 신앙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