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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두 번의 패배 (5)
초나라는 남방(南方)에 위치해 있다. 지금의 호남성과 호북성 일대를 영토로 하고 있는 형만(荊蠻)의 나라이다. 형만이란 형(荊) 땅에 사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형만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楚)나라는 야만족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덧 옛날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우면서도 거친 문화 풍토에 중원의 발달된 문명을 받아들였다. 이제는 중원을 능가하는 힘과 문화와 문물을 보유하게 되었다. 야성과 문명의 조화이다. 이를 이루어낸 군주가 초무왕(楚武王)이다.
초무왕이 재위 51년으로 죽고, 그 아들 초문왕이 뒤를 이었다.
초문왕(楚文王)은 아버지가 이룩한 힘을 바탕으로 주변의 여러나라들을 모두 흡수했다. 국력이 더욱 세졌다. 수도도 단양(丹陽)에서 영으로 옮겼다. 영은 지금의 강릉으로 호북성 사시(沙市) 서쪽에 위치해 있다.
초나라엔 장강(長江)이 흐른다. 양자강이라고도 한다. 장강은 글자 그대로 긴 강이다. 수백, 수천 지류가 장강으로 흘러든다. 지금의 양양성을 지나는 한수(漢水)도 장강의 지류 중 하나이다. 한수는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한수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원이다. 초(楚)나라에게 있어서 중원 진출은 꿈이다. 예전에는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된 그 무렵에는 막연한 꿈이 아니었다. 중원은 바로 코앞에 있었던 것이다.
초문왕(楚文王)은 그 꿈에 도전한 최초의 초나라 지도자이다.
한수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처음으로 만나는 중원국가가 신(申)나라다. 신나라는 지금의 남양 땅. 남양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제갈공명이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은 곳이 바로 남양 땅 융중이 아니던가. 그러나 이것은 이때로부터 880년 후의 일이다.
신(申)나라는 중원의 소국이지만 한때 대국의 꿈을 키운 적도 있었다.
서주의 마지막 왕인 주유왕 때가 신나라의 절정기라도 할 수 있었다. 그때 신나라 임금인 신후(申侯)는 국구로서 포사를 몰아내고 썩은 주왕실을 개혁하려 들었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아쉽게도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증유(未曾有)의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를 유발해내고 말았다. 이제 신(申)나라는 꿈을 잃어버린 나라가 되었다.
중원진출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초문왕(楚文王)에게 그 신나라는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다. 실제로 신(申)나라는 초나라와 중원을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해 있었다.
마침내 초문왕(楚文王)은 군대를 일으켜 신나라를 침공했다. 중원 여러 제후국들의 거센 저항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무도 신나라의 위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신(申)나라가 그만큼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당시 중원의 나라들은 오로지 제 앞가림을 하기에 급급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초문왕은 싱거울 정도로 손쉽게 신(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 진출의 관문이라랄 수 있는 남양 땅을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 초문왕 2년의 일이었다. 중원의 나라로는 제양공 10년에 해당하는 해였다.
- 다음은 채(蔡)나라다.
채나라 역시 중원국 중에서는 초나라와 가장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채나라는 만만치 않은 제후국이었다. 후작의 작위를 받은 나라로서 국력도, 주왕실에 대한 친밀도도, 주변 제후국 간의 교류도 활발했다. 한마디로 쉽게 멸망시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초문왕(楚文王)은 잠시 자신의 야망을 숨기고 채나라의 동태를 살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 무렵 채나라 임금은 채애공(蔡哀公)이었다.
이름은 헌무(獻舞). 채애공은 일찍이 진(陳)나라 공녀 규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 이웃 나라인 식(息)나라 임금 식후(息侯) 역시 진나라의 둘째 공녀인 식규에게 장가를 든 바 있었다.
이를테면 채애공(蔡哀公)과 식후는 동서지간이 된 셈이다.
그런데 식후의 부인 식규는 보기 드문 천하절색으로 그이름이 높았다. 한 번은 식규가 친정인 진나라로 근친갈 때 채(蔡)나라를 경유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채애공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몹시 기뻐했다.
"처제가 우리나라를 지나간다고 하는데 내 어찌 한번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는 식규를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그 대하는 태도가 몹시 음흉스러웠다. 은밀히 손을 더듬기도 하고, 말끝마다 음탕한 이야기로 희학질을 할 뿐 조금도 손님으로 대하는 빛이 없었다. 한마디로 성희롱이었다. 식규는 분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길로 채(蔡)나라를 떠나버렸다.
그 후 식규는 친정에 들렀다가 식(息)나라로 돌아와서는 남편인 식후에게 채애공의 음흉한 언행을 모조리 일러바쳤다. 식후가 크게 화를 냈음은 물론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채나라로 쳐들어가고 싶었으나 식(息)나라는 채나라에 비해 훨씬 소국이었다. 국력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쟁을 벌였다가는 오히려 식나라가 패할 것이 뻔했다. 이에 식후는 한 가지 계책을 마련하고 초문왕(楚文王)에게 사자를 보내어 조공을 바침과 동시에 은밀히 고했다.
"채애공(蔡哀公)이 주왕실만 믿고 대왕께는 조공을 바치지 않는데, 어찌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만일 대왕께서 우리 식(息)나라를 공격하시면 저는 즉시 채애공에게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채애공은 원래 경망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러 달려올 것입니다. 채애공쯤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사세가 이쯤되면 어찌 채나라가 대왕께 조공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식후의 계책을 들은 초문왕(楚文王)은 무릎을 치면서 기뻐했다.
"바야흐로 채(蔡)나라를 우리 조공국으로 삼을 기회가 왔구나."
그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식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
식후는 계책대로 얼른 채애공에게 구원을 청했다.
과연 채애공은 아무것도 모르고 동서(同壻)인 식후를 돕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그들이 막 식나라 경계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양편 골짜기에 숨어 있던 초나라 복병이 일시에 쏟아져나왔다. 채애공은 기겁을 하여 황급히 식성(息城)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식후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채군을 영접하기는 커녕 오히려 성벽 위에서 소나기 같은 화살을 처부어대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식후에게 속은 것을 안 채애공은 분노했으나 때가 너무 늦었다. 그는 초나라 군사를 피해 달아나다가 끝내는 신야(莘野)들판에 이르러 초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채애공(蔡哀公)은 초나라 도성인 영으로 끌려갔다.
초문왕은 흐뭇한 가운데에서도 중원 여러 제후들에게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두 눈을 부라리며 명했다.
"저자를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삶아라. 내 그 고기를 먹어보리라!"
이 무슨 무지막지한 명인가. 채애공(蔡哀公)은 기절초풍했다. 펄펄 끓는 가마솥을 보자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바지를 흠뻑 적셨다. 좌우에서 병사들이 양팔을 잡아 끌었다. 채애공은 이제 죽는가 싶어 두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초나라 신하 중에 육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바른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초문왕(楚文王)이 채애공을 가마솥에 넣어 삶아 죽이려는 것을 보고 분연히 일어나 간했다.
"왕께서는 잠시 신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왕은 장차 중원에 뜻을 품고 계십니다. 만일 왕께서 채애공(蔡哀公)을 가마솥에 삶아 죽인다면 이 소문을 들은 중원의 여러 제후들은 한결같이 공포에 떨며 우리 초나라를 무서워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공포로써 그들을 제압하시려 합니다만,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저들의 중오와 분노만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왕께서 중원을 다스리시려면 두려움보다는 덕을 먼저 베푸셔야 합니다. 이번이 그 좋은 기회입니다. 채애공(蔡哀公)을 살려서 돌려보내십시오."
하지만 초문왕은(楚文王) 이미 마음을 정했음인지 육권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육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왼손으로는 초문왕의 소매를 움켜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초문왕의 목에 대고 다시 외치듯 말했다.
"신은 차라리 왕과 함께 죽을지언정 차마 살아서 왕이 중원 여러나라로부터 멸시받는 꼴을 보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목에 시퍼런 칼날이 와닿자 초문왕(楚文王)은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두 손을 휘저으며 연신 육권을 향해 부르짖었다.
"그대 말을 듣겠노라. 그대 말대로 할 터이니 어서 칼을 치우라."
이렇게 해서 채애공(蔡哀公)은 죽음 직전에서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살벌했던 궁정 안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육권이 다시 초문왕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왕께서 신의 말을 들으시어 채애공(蔡哀公)을 죽이지 않은 것은 우리 초나라의 복입니다. 하오나 신이 왕을 협박한 것은 중죄에 해당합니다. 바라건대 왕께서는 신을 죽여주십시오."
육권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초문왕(楚文王)은 물론 다른 신하들은 한결같이 어리둥절하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게요? 그대가 보여준 행동은 하늘에 떠있는 태양도 무색할 정도의 충성심이오. 과인이 어찌 그런 충신을 처벌할 수 있으리오."
하지만 육권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왕께서는 비록 신(臣)을 용서하실 수 있지만, 신은 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돌연 들고 있던 칼로 자신의 오른발을 끊었다. 끊어져나간 다리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육권은 이에 아랑곳 없이 고개를 돌려 궁정 안의 모든 신하들을 향해 외쳤다.
"신하 된 자로 왕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 자는 나처럼 되리라!"
초문왕(楚文王)은 대경실색했다.
이보다 더 통렬한 충신이 있을까.
그는 애초에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을 뉘우치며 얼른 의원을 불러 육권의 다리를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육권은 다리 상처가 아물었으나 보행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초나라 전역에 퍼졌다. 초문왕(楚文王) 역시 그의 드높은 충성을 기리기 위해 잘려진 육권의 다리를 왕실에 소중히 보관하는 한편, 그를 태백(太伯)이라 존칭하여 불렀다.
태백이란 큰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쯤되면 중원 진출을 향한 초나라 사람들의 각오와 집념이 어느 정도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형만(荊蠻)이라는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