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데스크를 하겠다고 신청해놓고, 막상 현장에서 인터뷰를 청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친 데스크가 많았습니다ㅠㅠ
그럼에도 사범생님 데스크만은 꼭 들리려고 했어요. 테이블 위에 책갈피에 오며가며 여러번 시선을 뺏겼거든요. 자개로 장식하고 옻칠로 마감된 책갈피. 팬시점에서 볼 수 있는 공산품의 반짝임이 아니라 자연의 빛이 담겨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공장에 자재가 있었어요
"원래 저희 아버지가 자개장 공장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런 자재들이 다 집에 있고, 취미 삼아 시작하게 됐죠. 한 7, 8년 됐네요."
어릴 때부터 집 안에 전복 껍데기며 옻칠 도구들이 쌓여 있었을 사범생님. 근데 그게 당연한 풍경이었으니 오히려 늦게 빠져드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께 기술도 좀 배우셨냐고 여쭤봤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버지는 그냥 상품을 만들던 분이셨죠. 근데 기술 자체는 큰 차이가 없어요. 어느 정도 고도화되냐 아니냐, 어떤 계통이냐 이런 차이지, 산업적으로는 같은 영역이니까요."
아버지의 기술이 취미로 이어진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옆에서 보고 자란 게 나중에 자연스럽게 손으로 나온 것 같았습니다.
나전칠기와 별개로 어릴 때부터 만년필은 좋아했어요
사실 자개와 만년필은 쉽게 이어지는 조합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범생님은 자연스럽게 두 세계를 연결하셨어요.
"저는 원래 어릴 때부터 필기구를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만년필을 썼거든요. 그러다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만년필에 나전칠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모으다 보니까 '내가 한번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만년필 컬렉터가 나전칠기 장인으로 이어지는 경로. 생각해보면 정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좋아하는 물건 안에 아름다운 기술이 담겨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직접 해보고 싶어지는 마음. 저도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참고로, 만년필에 직접 나전칠기를 입히시는 건 아니냐고 여쭤봤더니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년필 자체가 이미 완성도가 있어요. 거기다 자개를 잘 놨을 때 잘 되면 본전이고, 뭔가 잘못되면 티가 그대로 나고. 섣불리 손댔다가 망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낫더라고요."
완성된 물건을 알아보고 보이는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않는 신중함이 이런 섬세한 공예를 7, 8년을 꾸준히 취미로 해오실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전복에서 빛을 꺼내는 일
데스크에 올려놓은 재료들을 보여주시면서 설명해 주셨는데, 이 세계가 이렇게 깊은지 몰랐습니다.
"이게 전복 껍데기를 1차 가공한 거예요. 부위에 따라 다 쓰거든요. 이걸 또 슬라이스를 치는데, 작두처럼 생긴 기계로 썰어요. 그렇게 얇게 만들어진 조각들을 색깔이랑 너비 따져가면서 골라서, 이렇게 똑똑 끊어가면서 만드는 거죠."
손 안에 펼쳐진 자개 조각들이 빛에 따라 초록, 파랑, 분홍으로 달라졌습니다. 같은 조각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다 달라지는 게 신기해서 한참 들여다봤어요.
칠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범생님은 카슈칠(캐슈넛 추출물?)과 옻칠을 구분해서 쓰신다고 하셨어요.
"카슈칠은 방부제를 넣어야 칠이 되고, 옻칠은 방부제 없이도 그냥 그대로 칠이 돼요. 근데 가격 차이가 굉장히 많이 나거든요. 그래서 시중에서 옻칠 제품을 접해보신 분들이 많지 않아요."
그리고 칠을 입히는 붓 이야기가 정말 놀라웠는데요.
"이게 사람 머리카락이에요, 인모붓. 옻칠이 점도가 높아서 미술 붓으로는 칠이 올라가지 않거든요. 그래서 인모로 만들고, 연필 깎듯이 계속 깎아서 써요." 우리나라에서는 인모붓 만드시던 분이 돌아가셨다고, 지금은 일본에서 수입한다고 하셨습니다. 몰랐던 세계가 이렇게 깊이 이어져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어요.
이 책갈피, 하루 종일 걸렸어요
테이블에 놓인 책갈피들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한 면에는 규칙적인 기하학 무늬, 다른 면에는 산수화처럼 흐르는 무늬. 같은 끊음질 기법인데 두 가지 완전히 다른 표정이 한 물건에 담겨있었어요.
"이 기하학 무늬는 우리나라 나전칠기에서 많이 쓰는 전통 문양이고, 이건 장롱에서 보이는 산수화 같은 거예요. 끊음질이라도 성질이 다르죠. 기하학은 컴퓨터로 찍어낸 듯한 정교함이 나와야 되고, 산수화 쪽은 리듬감이 있어야 해요. 두 가지를 하나에 담아서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여쭤봤습니다.
"저는 취미로 하는 거라서... 이거 하면 하루 잡아요. 눈도 아프고 힘들기도 하고, 그 이상은 못 하겠더라고요."
하루를 꼬박 들여 만든 책갈피. 그런데 놀라운 건, 판매를 안 하신다는 거였습니다.
이 정도 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많아요
"이거 얼마에 판매하세요?" 하고 여쭤봤을 때 돌아온 대답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판매 안 해요."
아니, 이 퀄리티인데요? 하고 다시 여쭤봤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정도 하시는 분들은 굉장히 많아요" (→ 이건 거짓말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취미로 하는 거니까요. 조기 축구를 돈 벌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똑같아요. 이게 돈하고 연결되는 순간 이렇게는 못 해요."
펜후드 전통인가? 파카51님의 영향인가? 펜쇼에 오면 이런 분들을 많이 보게되네요. 뭔가 그것 자체가 좋아서 그냥 하고 계신 분들. 평소 세속에 찌들어 있다가 펜쇼에 오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원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까만 아크릴판에 바로 자개를 놓겠지만, 이 책갈피들에는 칠만 여러 겹이 올렸다고 합니다. 시간을 생각하면 절대 돈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만들고 계신 거예요.
"보통 자개를 하시는 분들도 이렇게 작은 것에 이렇게까지 하시지는 않죠. 저는 그냥 혼자서 연습하려고 하는 거예요."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만들기 위해서 계속 하고 계신 분. 그래서 오히려 이 물건들이 더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잠깐 아차 싶은 게 있었어요. 이런 책갈피면 사람들이 하나에 5만원에도 살텐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하루 꼬박 정성들여 만든 게 5만원이 아니라 10만원이라도, 책갈피 치고는 비싸겠지만 창작의 노력과 가치에 비하면 턱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쩐지 "이 책갈피를 누가 얼마를 주겠어요?" 하고 쑥스럽게 웃으시던 그 미소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하루를 꼬박 들여 만든 취미이자 창작품에 돈으로 가치를 매기기 시작하면 의미도, 흥미도, 즐거움도 모두 사라지고 그냥 돈벌이 수단으로 변질될 뿐이니까요. 그저 하는 것 자체로 좋은 어떤 것을 찾은 사람은 멋있어서 좋아집니다. 어쩐지 웃는 모습이 정말 맑으셨어요. 다음 가을펜쇼에서는 사범생님 데스크에서 오셔서 작품 이상으로 밝은 미소를 꼭 보고 가실 걸 추천드립니다.
필사
인터뷰 마무리 즈음에 테이블 한쪽에 빼곡한 글씨가 가득한 노트가 보였어요.
"신영복 선생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필사예요. 몇 년 걸렸죠."
만년필을 쓰고, 나전칠기를 하고, 신영복을 필사하는 사람. 어딘가 일관된 흐름이 느껴졌습니다. 손으로 하는 것들, 시간이 걸리는 것들, 결과보다 과정이 있는 것들.
"편집 글이라 쉬울 줄 알고 시작했는데, 편집 글도 꽤 힘들더라고요."
글씨가 세련되고 힘이 있었습니다. 잘 쓰려고 애쓴 글씨가 아니라, 글씨도 누구에게 잘 보이려 꾸민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손으로 꾸준히 써온 글씨. 멋있고 부러웠습니다.
마치며
사범생님 데스크에서는 좋은 걸 사는 게 아니라 좋은 걸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었어요. 차분하지만 즐겁게 머물게 되는 데스크였습니다.
사고 싶다는 마음보다, 이걸 어떻게 만드는 거지 궁금한 마음이 더 컸거든요. 그게 취미로 하는 것들이 가진 힘인 것 같습니다. 팔기 위해 만든 게 아니라, 만들고 싶어서 만든 물건들은 다른 느낌이 있어요. 가을 펜쇼에도 또 오실거라고 합니다.그때는 어떤 새 작품을 가지고 나오실지, 또 어디까지 솜씨가 올라간 솜씨로 어떤 작품들을 가져오실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첫댓글 데스크별로 인터뷰 하고 글로 남겨주신 덕분에 미처 몰랐을 얘기들 잘 읽고 있습니다. +_+ 감사합니다~
대단한 고수분들이 참 많네요. 덕분에 눈호강 잘했습니다.
안알록님! 귀한 후기 보고 또 보면서 어떻게 답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다 보니 너무 늦었습니다. 제가 말이 많아서 고생 많으셨겠어요. 그날 같이 한참 들어준 자제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 뒤늦게 드립니다ㅎㅎ
제 얘기가 이렇게 길게 나와 있으니 부끄럽습니다. 글씨칭찬까지... 감사드려요ㅎㅎ
장인이나 고수라는 호칭은 너무 가당찮고요~ 업으로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저는 아마추어입니다ㅎㅎ
그리고 거짓말이 아니고 저보다 훨씬 더 잘하시는 분들이 천지사방에 산재해 계시답니다ㅎㅎ 저는 열심히 연습하고 있잖아요ㅎㅎㅎ
다음 기회에는 저도 안알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어요ㅎㅎ 처음 뵈었는데도 따뜻하고 반가운 시선으로 인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도 어여 늦은 후기를 써봐야겠습니다ㅎㅎ
얘기 듣는 내내 재밌었어요. 시간가는 줄 모르게 들었는데 어떻게 잘 담을 수 있을까가 고만이었습니다ㅎㅎ 쭈뼛쭈뼛 다가갔는데 환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