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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T에 승선한 5연대 1대대 병력(김종원이 지휘하던 대대. 야인시대 그 새끼 맞음. 이새낀 전투도 못하고 상륙도 못하고...)들이 직접 여수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14연대 반란군에 의해 격퇴당했고, 보성-광양에서의 교전 역시 반란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제대로 진격을 하지 못했음.
결국 각개격파를 시도하긴 했는데, 서울(아마도 이승만을 의미)에서의 참을성 없는 행동과 명령들로 인해 굉장히 조잡한 공격들로 전락했고, 그 결과 적지 않은 적들을 놓쳤다고 지적함.
광양-보성의 경우는 그나마 충성파 대대들이 반란군을 각개격파해서 가두긴 했는데 앞서 이야기한 -런-의 참을성없는 명령들을 군에 내리는 바람에 포위망 구성도 못하고 그대로 지리산으로 런하는거 방치함. 당연히 얘들이 게릴라로 변하는건 매우 불보듯 뻔한 수순이었고.
결국 10월 25일, 서울에서 기갑연대가 출동했음. 이들은 한국군 최정예부대이자, 가장 많은 중화기와 기갑장비를 보유한 부대로 상당히 많은 기대를 가짐. 실제로 이들은 여수에 있던 반란군 주력부대 28일까지 압도했음.
3일 간의 격전에서 기갑연대는 보유한 20여 대의 장갑차량과 50구경 기관총 10정, 그리고 30구경 기관총 15정을 바탕으로 반란군을 화력으로 제압했음. 다른 4개 보병연대들은 중화기와 포병이 부족해서 반란군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함.
기갑연대는 전사자 10명, 부상자 15~20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반란군을 제압하는데 성공하긴 했음.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임. 기갑연대의 장갑차량들이 시가지 진입하면서 여수 시가지 들어와서 건물이고 뭐고 무차별적으로 파괴함.
민간인 피해(부수적 피해)인 셈.
-After the recapture of Yosu, one advisor recalled, “many [civilians] died from the [ROK] recon[naissance] troops [we] advised . . . at least I think [we] concluded that our people, not fully trained, tended to spray buildings with machine gun fire and needless casualties resulted.”-
이런 기록도 남아있는데, 기관총 사격을 'spray' 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에지간히 쏴버린 모양임. 미군도 이러한 한국군의 기동에 지적을 가했음. 장교들은 부대 간애 있어 제대된 공격조율조차 못하고 있고 피아구별도 철모에 흰 광목천 묶는 간단한 방법만 준비해서 진압군끼리의 오인 교전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됨.
진짜 이런 기록들보면 화가 절로 남. 그냥...광기의 시대 그 자체같음. 교전 지역 내의 민간인? 그냥 잠재적인 빨갱이정도로 판단하던 미친 시대임. 어째 글이 10.19 사건 당시 기갑연대만 코멘트한거 따려고 했는데, 문서들 보다보니까 전반적인 것들이 쭉 나와서 졸라 화가 나네.
출처
FIGHTING IN A KOREAN WAR: THE AMERICAN ADVISORY MISSIONS FROM 1946-1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