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와 워즈워드의 자연관
이언 김동수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는 만물을 생성하고 변화하게 하는 근본 원리이고, 이 도를 지키고 따르는 것이 덕(德)이라 하였다. 모양도 없고 소리도 없어 어떤 것에도 지배 받지도, 의존하지도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무위(無爲)의 자연. 때문에 이 무위의 자연을 본 받아 지배하려 하지 않고 자발성에 맡기게 되면 세상이 저절로 좋아지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와 맹자의 기본 사상은 성선설이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육체가 인간의 성품을 둘러싸고 있어서 인간의 행동이 악(惡)해진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는 수양과 배움을 통한 인위(人爲)의 학문을 주장한 반면, 노자는 일체의 인위적인 행위를 가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자는 무위(無爲)의 자연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자는 상대적 분별에서 오는 가치관을 부정했다. 고저, 장단, 강약과 같은 이분법적 판단은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일 수가 없다. 그것들은 모두 만물의 변화과정 중에 드러나는 표면적·일시적 현상일 뿐, 사물의 참된 성질이나 가치가 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道)는 인간의 감정이나 기대, 의지에서 독립되어 인간의 일에 대하여 무정하고 냉담하기에 언제나 공평무사하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결국엔 자연의 품에 안겨 공평무사하게 흙이 되기 때문이다.
노자는 물의 덕성이 도에 가깝다 하여 물을 특히 좋아 하였다. 상선약수(上善若水)가 그것이다. 물은 항시 낮은 곳에 머물며 만물을 이롭게 하고, 남과 다투지 않는 부쟁(不爭)의 덕을 지녔다. 낮고 약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세상의 강한 것을 부린다. 낮고 약한 것은 언제나 강하고 적극적인 방향으로 변해가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하지 않고 희망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무(無)를 유(有)의 우위에 두었다. 만물의 본체는 무(無)이며 무에서 유가 나오기(有生於無) 때문이다. 이는 무용지용(無用之用)에서 볼 수 있듯, 무와 유를 일원론적으로 통찰하는 관계론적 세계관이다. ‘무위(無爲)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는 무위이치(無爲而治)나, 다스리지 않고도 교화하는 무위이화(無爲而化)의 통치사상도 이러한 무(無)의 철학에서 비롯된 덕목이다.
노자는 주나라의 장서실에서 주하사(柱下史)의 일을 맡아 많은 책을 열람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정치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온갖 추악상을 다 목격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에 대해 물었다. 이때 노자는 공자의 허명과 교만을 지적하고, ‘군자는 올바른 때를 얻으면 자리에 나아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떠돌아다닌다’. ‘뛰어난 상인이 값진 물건을 감추듯, 군자는 덕이 있어도 겉모습이 바보같이 보인다.’ 그대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야망을 버려야 한다고 충고한다.
70세 경에 노자는 진(秦)나라로 가서 은둔할 것을 결심하고 황하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때 그곳의 수문장인 윤희가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저술을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도덕경』 상․하 두 편을 써서 도(道)와 덕(德)에 관한 5천여자의 글을 남기고 떠났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노자 『도덕경』이 탄생하게 되었다.
『노자』에 나타나는 세속적 가치에 대한 강한 부정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자연스러움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욕망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자연성을 들어앉히는 수양의 길을 의미한다.
어지럽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회가 덧씌운 비본질적인 것, 인위적인 모든 것을 덜어내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것이 바로 만물에 깃든 ‘도(道)’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노자는 말한다. 인위를 버리고 자연그대로를 추구하라고, 이것이 바로 노자의 핵심 사상인 무위자연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워즈워드와 동양적 자연관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 이는 널리 알려진 워즈워드(英)의 시로서 우리 국민들이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이다. 그의 시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온 데에는 그의 남다른 자연 사랑에 있다.
워즈워드는 평소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동양적 자연관을 갖고 그 안에 어떤 영적(靈的)인 힘이 있다고 보았다. 자연을 묘사할 때에도 보이는 현상보다 현상 너머의 세계에 깃든 신비스러움을 그 안에서 찾고자 하였다. 가시적 대상에서 오는 감각적 기쁨은 영속성이 없지만,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감동은 인간을 보다 깊고 높은 단계로 고양시켜 주는 힘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으면서도 자연이 베푸는 감동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한 생을 살다 간다. 그러나 워즈워드는 무한한 자연 속에서 그 어떤 이법이나 질서를 체득하여 만물과 자아(自我)를 연결시켜 그 안에서 어떤 생명감을 찾고자 하였다.
자연을 하나의 타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그것과 하나가 되어가는 깨침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객체인 ‘자연’과 주체인 나의 마음’이 영적으로 교감되는 경지, 그 감동과 법열의 순간을 시로 승화시켜보고자 하였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자연은 스스로 자연을 자연이게 끔 하는 무한 존재의 근기가 들어 있다고 보았다.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은 영적 기운을 과학적으로는 포착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감정을 정화시켜주면서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 주는 스승이라 보았다. 그래서 인간을 보다 큰 우주 자연과 연결시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세계를 삼신사상(三神思想)을 지향하고 있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
나 어릴 때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으리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경건함으로 이어져 가기를
- 윌리암 워즈워드, 「무지개」 전문
어릴 때도 그러했고, 어른이 된 지금도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한다. 과거의 나(어린이)와 현재의 내(어른)가 ‘무지개’라는 상징적 매체를 통해 하나의 일체감으로 이어져 있다. 세상은 변해도 그 근원적 본질은 영속되어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워즈워드는 이러한 영속성의 근원을 ‘경건함’이라 여겨, 어렸을 때 자연 속에서 느꼈던 그 감동을 잃지 않고자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그 유명한 싯구(詩句)를 남겼다.
워즈워드는 ‘영혼(sprit)’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어린 시절 들판이나 냇가에서 느꼈던 힘(자연 속에 깃든 영혼)이 우주의 강력한 에너지가 되어 우리의 생(生)을 지배하는 근본원리로 작용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숲에도 정신이 있다’고 하였다. 이 또한 만물에는 영혼이 들어 있다고 보는 애니미즘과,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사상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저녁나절 ‘굴뚝새 소리’를 ’대기의 고요한 정령‘이라고 하는가 하면, 이 새를 ’보이지 않는 새(invisible bird)‘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자연을 하나의 생명체로 여겨 그 안에 어떤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기에 워즈워드에게 있어서의 자연은 그냥 자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 정령과 일체된 신성(神性) 그 자체로 종교적 경외감마저 담지하고 있다.
워드워즈는 단순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인이 아니다. 자연을 하나의 인격체로 여겨 거기에서 위로와 감동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 ‘자연의 시인’이다. 자연과 영혼,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존재(presence)로 충일되는 도(道)의 세계, 여기에 워즈워드의 시가 있고 자연이 있다. (이언 김동수: 시인)
첫댓글
워즈워드 시에서 노자의 세계관을 읽으신 사유가 돋보입니다.
자연의 근원적인 본질은 인간의 영혼에 새겨집니다.
자연과 영혼이 하나로 충일한 도의 세계를 밝히신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건필을 빕니다
해피!
이구한 드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