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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수 향나무
나무나이 : 600년 나무높이 7m, 나무둘레 2.2m 지정일자 :1982년 10월 15일
명부전 (冥府殿)
지장보살을 본존으로 하여 염라대왕과 시왕(十王)을 모신 법당으로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곳입니다.
명부전 (冥府殿) 편액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그리고 시왕들의 모습
명부전에 봉안한 지장보살 뒤에는 지장시왕도가 걸려있습니다. 지장시왕도에는 사자(使者)와 판관(判官)이 함께 묘사되고 그 뒤로 시왕이 좌우 각각 5왕씩 서있습니다. 지장보살의 바로 아래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 사천왕(四天王), 범천(梵天), 제석천(帝釋天) 등이 도열해 있습니다.
지장보살과 좌우에 도명존자(導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지장보살
도명존자(導明尊者)는 중국 양주에 있는 개원사의 승려 도명화상이 지옥사자에 의해 지옥에 불려가서 지장보살을 직접 본 후, 이 세상으로 돌아와 자신이 저승에서 본 바를 세상에 알리고 그림으로 그린 연유로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무독귀왕(無毒鬼王)은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준다고 합니다. 한 브라만의 딸이 무간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찾으러 갔을 때 무독귀왕이 나타나 어머니와 함께 있던 이들이 모두 천상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감명을 받은 딸이 미래 겁이 다하도록 육도의 중생을 구원하리라는 서원을 세우고 나중에 다시 태어나 지장보살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장보살의 전생 이야기 속에 지장보살의 안내자로 등장한 무독귀왕은 이런 연유로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1대왕인 진광대왕부터 제10대왕인 전륜대왕까지 시왕(十王)이 있습니다.
지장보살 삼존상 양쪽에 저승의 판관 시왕들이 앉아 있습니다.
왼쪽에 홀수 시왕, 오른쪽에 짝수 시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18세기 후반 지장보살상과 함께 만들었다고 하니 200년이 넘은 목상들입니다.
인간이 죽으면 이승에서 지은 선업과 악업에 대해 심판을 받는데 시왕이 이를 관장합니다.
죽은 자는 시왕 중 7명의 대왕에게 순서대로 각각 7일씩 49일 동안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업을 많이 지은 자는 49일 이후 3명의 대왕에게 다시 심판을 받는데, 죽은 후 100일이 되는 날은 제8 평등대왕, 그리고 1년이 되는 날에는 제9 도시대왕, 3년째에는 제10 오도전륜대왕의 심판을 받아 총 3년의 기간 동안 명부시왕의 심판을 받습니다. 생전에 죄를 지으면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불가에서 49재를 지내는 것이 여기서 연유했다고 합니다.
제1전 진광대왕전
도산지옥을 다스리는 시왕.
사후 7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칼선다리를 타거나 혹은 칼산을 걷게 하는 벌을 내립니다.
제3전 송제대왕전
한빙지옥을 다스리는 시왕
사후 21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매서운 추위와 얼음 계곡에 가두는 벌을 내립니다.
제5전 염라대왕전
발설지옥을 다스리는 시왕이자 시왕들의 우두머리
사후 35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의 혀를 뽑아 소가 밭을 갈게하는 벌을 내립니다.
시왕 중 가장 대중에게 잘 알려진 염라대왕입니다.
판관
관복을 갖추고 두 손을 포갠 자세로 시왕의 판결을 보좌하는 역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제7전 태산대왕전
거해지옥을 다스리는 시왕.
사후 49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산 채로 톱질하는 벌을 내리며 그리고 육도윤회 중 어디로 갈지 정합니다.
제9전 도시대왕전
풍도지옥을 다스리는 시왕.
사후 1주기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살을 찢는 칼바람을 맞게하는 벌을 내리며 패소하지 않은 망자들을 1년간 체류해 선한 일을 하도록 시킵니다.
녹사
판결을 기록하는 녹사는 두루마리를 들고 전령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저승사자
사자는 망자의 죄를 판별하는 전령(傳令)이자 집행지로 조선후기 명부전의 사자상은 대개 감재(監齋) · 직부(直符) 사자 형식이 주를 이룹니다. 장대와 문서를 지니고 관복 차림과 절제된 표정을 통해 공정한 집행자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문 좌우에는 코믹한 얼굴을 한 금강역사가 하나씩 서 있습니다
제2전 초광대왕전
화탕지옥을 다스리는 시왕.사후 14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끓어오르는 무소 솥에 삶아버리는 벌을 내립니다.
제4전 오관대왕전
검수지옥을 다스리는 시왕
사후 28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칼날 숲을 헤메게 하는 벌을 내립니다.
제6전 변성대왕전
독사지옥을 다스리는 시왕.
사후 42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들을 싸움박질을 하게 만들고 지옥의 이름 그대로 독사 구덩이에 떨어지는 벌을 내립니다.
판관
시왕이 심판을 돕는 판관
제8전 평등대왕전
철상지옥을 다스리는 시왕.
사후 100일에 망자들을 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못 침상에 높히고 못에 관통당하는 벌을 내립니다.
제10전 오도전륜대왕전
흑암지옥을 다스리는 시왕이자 10대 지옥왕 중에 끝판왕.
사후 3주기부터 망자들을 재판하며 패소한 죄인을 감각박탈, 즉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고, 아무런 고통도 느낌도 없는 영원한 무감각의 상태에 갇히는 벌을 내립니다.
녹사
저승사자상
명부전 금강역사
사찰 입구의 금강역사가 세속의 악기운을 막는 존재라면,
명부전의 금강역사는 생과 죽음, 업과 깨달음의 경계를 지키는 수호자입니다.
봉송각(奉送閣)
이곳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시는 영가님들을 극락세계에 태어나시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입니다.
봉송각(奉送閣) 편액
신륵사 봉송각 지장보살상
지장보살상
지장보살을 모셨는데 한 손에는 지옥의 문이 열리도록 하는 힘을 지닌 육환장(六環杖)을, 다른 한 손에는 어둠을 밝히는 마니주(摩尼珠)를 들고 있습니다.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
조사당은 고려 말에 창건되어 조선 초에 중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현종(顯宗) 12년(1671)에 중수된 것입니다. 조사당은 사찰 중심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조사당은 팔작지붕에 다포식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정면 1칸·측면 2칸으로 세웠습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합니다.
정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측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입니다.
조사당 주련
禪指西天爲骨髓 (선지서천위골수) 선禪은 부처님 태어나신 서천을 잊지 말고 마음속 깊이 새기고
敎設東土作笙簧 (교설동토작생황) 불교의 가르침은 동방의 나라에 넓게 퍼지도록 하라
조사당(祖師堂) 편액
편액 글씨를 쓴 작가와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단정한 해서체가 매우 격이 높은 글씨입니다.
조사당에는 지공, 나옹, 무학 세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나옹의 스승이 지공, 나옹의 제자가 무학으로 이들은 고려시대 삼대화상(三大和尙)으로 일컬어질 만큼 불가에 큰 영향을 끼친 스님들입니다. 이중 나옹화상은 따로 목조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67호)
여주 신륵사 삼화상진영은 신륵사 조사당에 보존되어 있는 세 폭의 초상화로 지공화상(指空和尙 ?~1363), 나옹 화상(懶翁 和尙 1320~1376),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가운데는 지공 화상, 왼쪽은 무학대사, 오른쪽은 나옹 화상의 영정을 그렸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 좌상입니다.
이 삼화상진영은 신륵사의 중요한 인물인 나옹 화상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입니다. 현재 전국 사찰에 전하는 1000여 점의 진영 가운데 삼 화상을 그린 진영은 매우 드물어 희구한 자료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지공화상(指空和尙 ?~1363)
목조 나옹화상
신륵사 성보 대장에 그 기록이 나온 것입니다.
‘나옹상이며 병자년(1636년) 2월 어느날 나무로 만들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나옹상이 들고 계신 법구 명칭은 그냥 주장자의 한 형태라고 합니다.
크기는 높이 84.8cm, 무릎 폭 60.6cm이며 대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
나옹선사는 이름이 많습니다. 출가 전 이름은 그렇고, 출가 후 법명은 ‘혜근(惠勤)’입니다.
법호가 ‘나옹’이며 ‘보제존자’는 공민왕이 내린 호(號)이고, 시호는 ‘선각국사(禪覺國師)’입니다. 여기에 선사(禪師)와 화상(和尙, 승려의 경칭)까지 붙어서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때론 헷갈리기도 합니다.
나옹 화상(懶翁 和尙 1320~1376)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내부 귀공포
내부 귀포를 보면 첨자의 끝을 둥근 곡선으로 다듬은 교두형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조선 전기 다포식 건축에서 흔히 나타나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운문 조각과 장식성이 더해집니다.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 동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7호)
여주 신륵사 건륭삼십팔년명(乾隆三十八年銘) 동종(銅鍾)은 1773년(영조 49)에 만든 동종으로 높이는 93.6cm이고, 폭은 66.2cm입니다. 용뉴가 쌍룡으로 되어 있고 조선 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원형 범자를 연과과 보살상 사이에 배치하거나 하대의 연화 덩굴무늬를 중간에 배치하는 등 신륵사 범종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입니다.
종에 새겨 기록을 통해 종을 만든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선 후기 범종 형식과는 다른 다양성이 나타나므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습니다.
용뉴
용뉴가 쌍룡으로 되어 있고, 조선 후기 범종의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면서도 원형 범자를 연곽과 보살상 사이에 비치하거나, 하대의 연화 덩굴무늬를 중간에 비채하는 등 신륵사 범종만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조사당(祖師堂) 측면
조사당(祖師堂) 뒷면
앞에 있는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4호)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승탑(神勒寺 圓球型 石造 僧塔) 은 명부전과 조사당 사이 서편 언덕에 있으며 주인을 알 수 없는 두 기의 석조 승탑 중 하나입니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승탑은 둥근 공 모양을 한 탑신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원구형 승탑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탑신에 명문을 새겨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지만 이 승탑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어떤 승탑인지 알수 없습니다.
승탑으 아랫부분인 기단부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중대석과 상대석이 올려져 있습니다. 상대석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중대석에는 팔각의 모서리에 새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킨 모양의 연주문형 기둥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 위의 옥개석(屋蓋石)은 기왓골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용머리 4개가 사방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옥개석 위의 상륜부는 가로로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무늬가 새겨진 받침 위에 2단의 보륜과 그 위에 1개의 보주가 올려져 있습니다.
승탑의 형식으로 볼 때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아름다운 문양이 비교적 세밀하게 있어서 중요한 문화재 자료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승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95호)
여주 신륵사 팔각원당형 석조승탑(神勒寺 八角 圓堂形 石造 僧塔)은 원래 신륵사 조사당 뒤 북쪽 구릉 너머에 있었는데, 1966년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입니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흔히 부도 또는 사리탑이라고도 부릅니다. 이 탑의 탑신부 안쪽에서 사리를 모신 사리합이 발견되었지만, 탑신에 승탑의 주인공을 표시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서 주인은 알 수 없습니다. 그 대신 각 면에 문비형과 범자를 도드라지게 새긴 점이 특이합니다.
이 승탑은 통일 신라 시대부터 유행한 팔각형의 탑신 위에 건축물의 지붕에 해당하는 옥개석을 얹었기 때문에 팔각 원당형 승탑이라고 부릅니다.
승탑의 아랫부분인 기다눕에는 사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이 차례로 올려져 있습니다. 하대석에는 연꽃무의가 아래로 향하게 새겨져 있고, 중대석은 무늬가 없는 둥근 모양이며, 상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위로 향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위의 옥개석 용머리 끝에는 여덟 개의 큼직한 귀꽃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위의 상륜부에는 복발, 보륜, 보주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원형석이 차례로 올라가 있습니다.
이 승탑은 탑의 형식으로 볼 때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승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보제존자 석종 오르는 길 입구의 소나무숲
보제존자 석종(石鐘), 석등(石燈), 석종비(石鐘碑)
보제존자(普濟尊者)는 호가 나옹(懶翁), 법명이 혜근(惠勤 1320-1376)인 고려 공민왕 때 승려로서 흔히 나옹선사(懶翁禪師)라고 불립니다. 무학대사가 제자이며, 지공(指空), 무학(無學)과 함께 3대 화상(和尙) 중 한명입니다. 보제존자는 공민왕이 내려준 법호이고.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보제존자 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 石鍾碑) (보물 제229호)
이 비는 고려 말의 승려 보제존자 나옹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비입니다.
석종부도를 조성한 내용과 나옹선사를 추모하는 내용을 기록한 묘비로서 목은 이색(李穡) 이 글을 지은 해서체 비문입니다.
고려 후반기의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를 보여주는 비의 몸체 즉 비신(碑身)은 대리석이며 아래의 비대와 지붕인 옥개는 화강암입니다.
비문은 이색(李穡)과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짓고 썻는데 단정한 필치가 돋보입니다. 뒷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제자와 시주자의 명단, 중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적혀 있습니다. 비는 2단의 지대석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비좌를 얹어 비몸을 세웠으며 비몸 양옆에 기둥을 세운뒤 그 위에 지붕 모양으로 된 개석(石)을 얹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새로이 유행한 석비형식으로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도 같은 형식입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은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탑입니다.
나옹이 신륵사에서 1376년(고려 우왕2년)에 입적하게 되어 1379년(우왕 5년)에 제자들이절 뒷편에 세운 사리탑입니다.
이 석종은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고려 말기의 승려 나옹(懶翁, 1320~1376)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부도(浮屠)입니다. 공민왕의 왕사였던 승려 나옹이 고려 우왕 2년(1376)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경상남도 밀양영원사로 가던 중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제자들이 우왕 5년 절을 크게 다시 짓고 절뒤의 좋은 자리를 택해 부도를 마련하였습니다.
부도의 기단위에 돌을 깔고 기단의 앞면과 양쪽면에 2단의 계단을 설치 하였는데, 계단에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 위에 모셔진 이 석종의 모양은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분에서 수평이 되었으며 맨 꼭대기에는 보주(寶珠)를 조각하였습니다.
보제존자 석종(神勒寺 普濟尊者 石鐘) (보물 제228호)
나옹선사 입적 3년 후인 1379년에 건립된 부도(높이 1.9m, 지름 1.1m)로서 종 모양이라고 해서 석종이라 하였습니다. 부도의 형태가 통도사 계단사리탑과 비슷하며 종 모양 탑신 꼭대기에 화염문을 본뜬 보주(寶珠)가 얹혀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부도의 형태는 조선을 거쳐 오늘날의 일반적인 부도가 된 원형으로 간주되어 보물 제22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종모양의 부도는 통도사, 금산사, 용연사, 봉암사 등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 부도는 특히 통도사와 금산사와 같이 일종의 계단탑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진 종모양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 줍니다. 부도 뒤편에 있는 보세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의 내용에 의해 이 석종이 만들어진 시기를 고려 우왕 5년(1379)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神勒寺普濟尊子石鐘 앞 石燈)(보물 제231호)
이 석등은 보제존자 나옹(懶翁)의 부도를 밝히기 위해 서 있습니다. 평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이 석등은 일반적인 석등과 마찬가지로 화강석을 사용하고 있으나 등불을 앉히는 화사석은 납석(곱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높다란 팔각형의 지대석 위에 놓인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하대석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간주석(竿株石)에는 연주문(連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그 안에 亞자형의 안상(眼象)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석종부도를 밝히는 도구인 공양구(供養具). 석등은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 즉 무명(無明)을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화사석은 조각을 위해 대리석을 사용하였습니다. 단순한 석종과는 대조적으로 석등은 8각형으로 섬세하고 화려하게 장식함으로써 조화를 이룹니다. 높이 1.93m. 고려말기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상대석에도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연꽃을 새겼습니다. 납석으로 된 화사석은 높게 만들어졌는데, 반룡문(蟠龍文 )을 새긴 원형기둥과 화창(火窓), 비천(飛天), 창방(昌枋), 평방(平枋) 등을 가득 조각하였습니다. 팔각형인 지붕돌 위에는 복발(覆鉢)과 보주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 석등은 나옹이 신륵사에서 세상을 떠난 뒤 부도를 세웠던 고려 우왕 5년(1379)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려 후기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무덤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 되고 있습니다.
극락대전 앞 향나무는 사찰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해주는 상징적인 나무로 적멸보궁 앞마당에 자리해, 참배객들이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법당을 향해 갈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나무로 향나무는 불교에서 장수와 청정함을 의미하며, 부처님 앞에 향을 피우는 행위와 연결되어 신성한 기운을 더 하며 고려말 나옹화상과 조선왕실의 원찰로 오랜 역사를 지녔는데, 이 향나무 역시 오랜 세월동안 사찰과 함께 살아온 자연 유산으로 전해지는 나무입니다.
불이문
카페연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