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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여행 둘째 날, 10시가 되었는데도 아침 안개가 안 걷힌다. 부곡은 계곡에 푹 파묻힌 데다 온천 열기 때문에 안개가 많을거라며, 고개를 넘어 간 영산에도 마찬가지로 세상이 온통 희뿌옇다.
건륭(乾隆) 45년 庚子(정조 4년 1780년) 3월에 만년교가 건립되었음이 다리 북쪽의 비에 기록되어 있다.
영산(靈山)만년교(萬年橋) - 보물 제584호
영산 남천에 놓인 무지개다리(虹橋, 虹蜺橋)로 예전부터 있던 나무다리가 큰물에 자주 떠내려가자 조선 정조 4년(1780년) 백성들이 힘을 합쳐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체의 장식이 없이 실용성에만 초점을 맞춘 듯 수수하고 소박한 멋이 느껴지는 다리이다.
옛 영산 고을의 선정비들. 지금은 창녕군의 면에 불과하지만, 영산은 고려 때부터 시작해 조선시대 내내 영산현을 유지했던 고을이었다, 만년교 옆에는 영산의 역사를 말하듯 영산을 거쳐 간 현감들의 공덕비, 선정비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영산석빙고(石氷庫) - 보물 제1739호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보관했다가 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빙고로 언뜻 무덤처럼 보인다.
내부는 땅을 깊게 판 다음 안쪽 벽을 석재로 쌓고, 천장 역시 석재로 무지개 모양으로 쌓아 올려 만들었고 환기구멍을 내었다.
현존하는 석빙고는 모두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구조가 거의 비슷하며 경주, 안동,·창녕, 영산, 청도, 현풍석빙고 등이 남아 있다. 현재 유독 경상도 지방에만 석빙고가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 조선시대 서울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어 관원을 두어 관리했지만, 지금은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충남 홍성에서 빙고 유적을 봤고 최근에는 부여에서도 빙고 유구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석빙고가 아닌 내구성이 약한 목빙고라 원형보존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오니 그 새 안개가 걷혔다. 만년교 옆에 늘어진 저 수양벚꽃 가지에 꽃이 필 때 다시 와봐야지~~ ^^
만년교 위로 영산이란 지명을 낳게 한 영취산(靈鷲山)이 흐릿하게 보인다.
창녕 답사의 추억
꼭 10년 전인 2006년 내가 창녕에 답사를 왔을 때 첫 답사지인 만년교 다리 위에서 길눈이는 "물이나 강은 분리와 단절을 의미하며 그 위에 놓인 다리는 세속과 깨달음의 세계인 저 건너 언덕 즉, 피안(彼岸)을 연결하는 의미다."라며 이런 하천에 다리를 놓는 것은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은 아주 중요한 공덕 즉,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며 초보 답사객을 혹하게 끌어들였다.
길눈이는 이어서 다리에서 바로 보이는 저 산 이름이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던 영취산이고 이곳 지명 영산 또한 영취산에서 나왔다며 좀전의 월천공덕과 부처님을 바로 연결하는 꼼수도 선보였었다.
그 10년 전의 길눈이는 다름 아닌 우리 카페지기 유현님~~ ㅋㅋ
신라 진흥왕 척경비(拓境碑) 국보 제33호
초딩 때부터 창녕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른 게 진흥황순수비이다. 북한산비, 함경도에 있는 마운령비와 황초령비, 이렇게 네 개의 진흥왕순수비 중의 하나이다.
신라가 비화가야를 병합한 후 진흥왕 22년(561년)에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행차하여 확장한 국경을 돌아보고 새로운 영토에 대한 정책 등을 밝힌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다른 비들과 달리 내용에 '순수관경(巡狩管境 임금이 나라를 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이 보이지 않아 영토 개척을 기념하는 척경비(拓境碑)라고 부른다.
진흥왕이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고 세운 비슷한 성격의 비에는 단양 적성비도 있다.
삼국통일 이전의 비들이 대부분 그렇듯 자연석의 한 면을 반반하게 다듬고 글자를 새겼고 비문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 선을 둘렀다.
원래 있던 자리는 화왕산 기슭인데 1914년 발견되어 후에 현재의 만옥정공원으로 이전하였다.
비의 왼쪽 부분의 글자가 비교적 잘 남아있고 오른쪽 부분은 마멸이 심하다. 다행인 것은 첫머리의 '辛巳年二月一日立' 이 뚜렷하게 남아있어서 언제 세웠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비의 뒷면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의 모습이다.
첫머리에 '辛巳年二月一日立(신사년 2월 1일 세움)'으로 시작하는 비문은 전체 643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고 한다(하지만 맨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몇 자 되지 않는다).
내용은 대략 세 가지로,
1. 진흥왕이 창녕의 비사벌국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대한 사실.
2. 왕이 신하들에게 왕의 통치 이상과 포부를 밝히고 백성들을 잘 이끌도록 신하들에게 당부.
3. 왕을 수행한 신하 42명의 관직, 출신지, 이름, 직위 순으로 적었는데, 신라 17관등의 계급이 차례대로 나와서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만옥정공원
진흥왕 척경비가 있는 만옥정공원은 화왕산을 배경으로 오래된 벚나무들이 울타리를 한 아담한 공원으로, 창녕읍 내에 있던 여러 문화재가 옮겨와 자리하고 있어서 야외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든다.
퇴천리 삼층석탑 창녕읍 퇴천리 민가에 무너져 있던 것을 보수하여 옮겨 세웠다.
창녕 객사
중앙에서 파견된 관원들이 묶는 숙소이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국가의 기념일에 수령이 관원들과 하례를 올리는 장소가 객사다.
창녕객사는 여러 차례 옮겨지며 좌우에 딸린 익사도 없어지고 높이도 낮아져서 권위 있던 객사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데다가, 기둥과 지붕만 남아서 휑한 느낌이 든다.
척화비 병인양요(고종 3년, 1866)와 신미양요(1871)에서 잇따라 외세를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1871년 외세와의 화친을 경고하며 전국 곳곳에 세웠던 척화비가 이곳에도 있다.
창녕의 선정비 여기에도 역대 창녕현감들과 관찰사 등의 선정비들이 늘어서 있다. 다른 곳들과 달리 비석 앞에 이름과 재임기간을 적어 놓은 표석이 놓여 있다.
창녕현감을 지낸 인물 중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도 있는데 그의 비도 있는지 찾아볼걸.... ^^
하병수 가옥
창녕읍 술정리에 있는 이 초가는 큰방과 작은방 사이에 마루가 있고 부엌까지 네 칸인 一자형 홑집이다.
집의 전체 구조는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되어있는데 이 초가는 안채에 해당한다.
현 소유주의 18대 조상이 세종 7년(1425)에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던 자리에 있는 이 집은, 건물 종도리에 '乾隆二十五年(건륭 25년'이란 묵서가 있어 영조 36년(1760년)에 지어졌거나 보수 했음을 알 수 있으니 250년이 넘은 집이다.
1968년 중요민속문화재 지정 시 소유주의 이름을 따서 '하병수 가옥"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명칭을 변경되었지만 대부분 여전히 예전 이름 그대로 불리는 것 같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인 지붕인데 볏짚이 아닌 억새로 이엉을 얹은 샛집이다. 볏짚으로 한 지붕은 해마다 새로 올려주어야 하지만 억새로 올린 지붕은 이삼십 년쯤은 간다고 한다. 전날 화왕산 정상에 넓게 펼쳐져 있던 억새가 떠오른다.
천장 구조 마루와 부엌의 천장은 지붕구조 그대로 드러난 삿갓천장이다.
훤히 드러난 서까래 위에 대를 쪼개 엮은 산자를 올리고 다시 겨릅대(麻骨 삼나무의 껍질을 벗겨낸 속 줄기)를 엮어 덮고 그 위에 억새로 이엉을 이었다, 천장 산자 위에 흙을 덮지 않고 이엉을 바로 얹은 건새집이다.
아직 사람의 손길이 남아있는 깔끔함에 안심이 되고 집 안 텃밭이 아직 가꾸어지고 있음에 마음이 푸근하다.
조상이 물려준 초가를 애지중지 살뜰히 가꿔온 분들에게 존경의 마음이 절로 난다.
어르신은 아직 안녕하실까?
10년 전 답사 때 집주인인 하병수님이 "제가 하병수올시다" 라며 직접 집안 내력과 건물에 관해 설명을 해주셨었다(사진 오른쪽 우산 아래 뒷짐을 지고 계신 분).
이번에 보니 대문에 어르신과 아드님의 이름인 듯한 문패 두 개가 위, 아래로 이어 걸려 있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 - 국보 제34호
통일신라 석탑의 완성형으로 평가되는 불국사 석가탑에 비견될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석탑이다.
단순한 직선을 가로와 세로로 엮은 듯한 졀제미를 한껏 발산하는 8세기 중엽의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역사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명작이다. 다만 상륜부가 통째로 없어졌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창녕읍 내 술정리는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 선조 때 창녕현감을 지내며 지은 정자를 '술정(述亭)'이라 한데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 주택가에 있던 예전과 달리 주변을 발굴 후 넓은 면적을 잔디밭으로 조성해 놓았다.
탑 주위에도 아주 넓게 보호 울타리를 눌러 놓아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탑을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에 탑 바로 옆에서 사진 찍던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술정리 서 삼층석탑은 보수 중
크게 모자람이 없음에도 같은 동네에 빼어나게 잘 난 이웃이 있어 비교되고 못하다는 평가를 들어야 하는 서러움.....
그렇다, 술정리 서 삼층석탑이 그런 경우이다. 같은 절터도 아니고 아무 관련도 없이 단지 같은 동네에 있다는 이유로 설움을 당하는데다, 위치도 동삼층석탑은 창녕읍 중심지에 있지만 직선거리 600m쯤 떨어져 있는 서삼층석탑은 옆에 논도 있고 변두리 티가 팍팍 난다
거기에 국보와 보물이라는 격에도 차이가 있다 보니 답사객들도 서탑은 생략하기 쉬울 것 같다. 안 그래도 볼 것 많은 챵녕이 아니던가~~
그래서 처음 찾아가는는데 길까지 잘못 들어서 빙빙 돌고 좁은 골목길을 헤매서 가보니 이런.....
보수공사 중이다. 쩝!
"지금 경상도 탑들은 보수 중"이라고 누가 하시더만..... ^^
술정리 서 삼층석탑 - 보물 제520호 <사진 :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교동, 송현동 고분군 - 사적 제514호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가야에 대해 언급하며 비화가야는 지금의 창녕이라고 각주를 달았다. 문헌자료가 별로 없는 비화가야이기에 송현동과 교동에 남아 있는 수십 기의 큰 무덤들은 창녕이 옛 비화가야의 중심임을 알려주는 대표적 유적이다.
창녕읍의 동북쪽 목마산의 낮은 기슭의 고분군을 창녕과 청도를 잇는 국도가 둘로 나누고 있어 이름도 교동군과, 송현동고분군으로 나뉘었지만 원래는 하나이다.
1910년대부터 일제는 발굴을 빙자한 도굴로 이곳에서 엄청난 양의 유물이(마차 20대, 화물 기차 2량이 넘었다고 한다) 출토되었지만 발굴보고서 헌 장 남기지 않았고 유물들도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고 한다.
고분 발굴에서 금은 세공품이 쏟아지자 이어서 도굴꾼들이 달려들어서 대부분의 고분이 파괴되었고, 농경지 개간, 도로 개설 등으로 많은 고분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굴식돌덧널무덤
고분들은 대부분 굴식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墳)이다. 굴식돌덧널무덤은 깬돌로 삼면의 벽체를 만들고 판돌로 천장을 덮어서 굴처럼 만들고, 시신이 든 관을 넣고 입구를 막는 방식의 무덤으로 가야시대의 전형적인 무덤 양식이다.
이런 양식의 무덤들은 도굴하기가 쉬워서 더더욱 도굴이 심했을 것이다.
서쪽 고분군의 북쪽 언덕 위에도 크고 작은 고분 여러 기가 건너다보인다. 예전에도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방치되어 있던 고분들을 최근에 정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발굴을 통해 그동안 농지로 개간되고 지형이 변해 평지화되었던 고분들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교동, 송현동 지역의 고분은 200여 기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창녕에는 교동, 송현동 고분군 외에도 영산고분군, 계성리고분군 등에도 많은 가야 고분들이 있다.
고분군을 둘로 나눈 국도에는 차가 많이 다녀서 길 건너 박물관으로 건너기도 조심스럽다. 도로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두 토막 난 고분군을 합칠 수는 없는 걸까?
창녕읍내 어디에서나 바라보이는 화왕산. 능선 위로 화왕산성의 하얀 성벽 일부가 바라보인다.
사진 왼쪽 큰 건물 지붕 위, 산에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방화선을 두른 것처럼 틈이 이어진 곳이 창녕의 또 다른 산성인 목마산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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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음... 꼼수라니... 난 한문으로만 된 <동국여지승람>에서 천축 승려 지공이 이 산이 인도의 영취산과 닮아 이 산의 이름을 영취산으로 했다고 이름붙였다고 했을 뿐이고...
월천공덕은 다리뿐만 아니라 관룡사 반야용선의 용선 역시 강을 건너 극락으로 가게 하는 월천공덕의 의미를 지닌다고 했을 뿐인데... ㅋㅋㅋ
지공이 창녕엔 뭐하러 갔누?
만년교에서 월천공덕 애기하면서 용선대까지 연결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꼼수를 누가 모를줄 알고~~ ㅋㅋ
@추임새 글쎄요... 왜 고려말 지공이 창녕에서 인도를 떠올려야 했을까요?
글구 여태까지 만년교 월천공덕과 용선대를 이어서 설명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이건 아주 순수하고 멋진 문화적 독창성이지 그걸 꼼수라 하면 ... 꼼수 맞네... 클클클~~~
@유현 알아! 안다고요~ 탁월한 길눈이란걸~~ ㅋ
지난 여름에 양주 회암사에서 지공의 승탑을 봤다는~~^^
저 하병수가옥 답사때 저도 있었던듯 한데. . . 사진. 글. 추억 잘 보았습니다.
아, 그때 계셨었나요?
하긴 전국답사라 경상도 분들이 많긴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