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첫 유정독서모임, 커먼즈 필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교시에는 이어령교수의 <침묵과 소음>을 함께 읽었습니다.
침묵과 소음의 의미와 그들 사이의 차별성, 침묵과 정적의 비교와 대조를 해보았습니다. 침묵과 소음은 서로 홀로일 수 없고 공존함으로써 서로의 존재의미를 부각시키는 것, 침묵은 소음으로 하여 살아나고 소음은 침묵을 생성합니다. 소음없는 침묵이 죽음이라면 소음은 살아 있음의 표증입니다. 사람의 언어는 침묵 속의 소음이고, 언어는 그 사람이 살아있음의 증명이며, 시인의 언어에는 침묵과 소음이, 죽음과 삶이 공존합니다.
시인의 언어는 침묵( 무기력과 무관심, 증오와 원망 등등)을 깨뜨리는 소음이 되어야 하고 외로운이들에게,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와 격려와 힘이 되어야 합니다.
정목인 수필가의 <빗소리>는 오랜만에 빗소리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을 떠올려보게 하는 서정적이고 명상적인 글이었습니다. 삭막한 도회지 생활에서 의식하지 못했던 빗소리를 농촌의 잔치집에서 듣게 되고, 그 빗소리에서 연상되는 기억들을 떠올립니다. 빗소리는 우리 영혼을 촉촉하게 적셔주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숨결을 느끼게 해준다네요.
최승호 시인의 <투명한 새>는 죽음과 망각과 폐허에서 마침내 찾게되는 희망, 꿈에 대한 기원을 노래하고 있군요. 육안이 아닌, 오직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투명한 새에게서 시인은 생명과 꿈과 새로운 우주를, 그리고 위로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군요.
고정희 시인의 <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 >에서 시인이 보고 느끼고 바라는 여백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듯 합니다. 고인이 된 어머니의 뒤로 보이는 여백,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뒤로 보이는 여백,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이 세상 떠난 뒤에 남겨질 사람들에게 우리들도 여백으로 남고 싶다는 희망사항이라고 해야할지 염원이라고 해야할지, 여백은 참으로 아름답고도 쓸쓸하네요.
2차시에서는 김유정의 <잃어진 보석> 11장부터 15장까지 읽었습니다. 추리소설이란 수수께끼의 제안, 가짜 정보의 제시와 성급한 판단이 불러온 오해와 함정들이 얽히면서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어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 해결의 열쇠를 찾아내게 됩니다. 15장까지의 전개에서 보면 지금 한참 가짜 정보와 성급한 판단들이 남발되고 있습니다.
알벤송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해가는 하버드 법대출신의 팔방미인격인 방소, 지방검사 조막함, 경부 히이스 외에 몇 사람의 탐정들, 이들은 1차 자료인 증거물만 가지고 범인이라고 속단을 하는데 방소의 경우는 아닙니다. 그는 과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범인을 찾아갑니다. 현재까지는 알벤송의 집에 손가방을 남긴 구레야양, 알벤송의 절친 바이부, 구레야의 약혼자 리곡구 대위가 혐의가 짙은 범인의 선상에 놓여 있습니다.
다음 독서모임은 7월 25일 목요일 14:00에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열차에서 진행됩니다. 김유정의 <잃어진 보석> 16장부터 끝까지 읽게 될 것입니다.
7월의 마지막 목요일,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야간 모임 마치고 한창 출출하던 판에 금지선생이 크래카를, 민정 선생이 직접 부친 애호박전(도래적)을 꺼내놓았습니다. 오랜만에 먹는 애호박 도래적이 맛있었습니다. 모두 입에 하나씩 물고 그 배뜩한 맛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도래적', '배뜩하다' 모두 국어사전에는 없지만 춘천지역에서 사용하던 어휘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