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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00 알람시간에 맞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제일 첫 번째 확인사항은 태백산 생활지수 이었다. 어제 20:00 예보상황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그럼 그렇지 이었다. 두 번째 확인사항은 우리 카페 목요산행신청방이었다. 행여나 반가운 불청객의 방문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아니올시다. 이었다. 총무님이 계셨다면 빈자리를 다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겠지만 다음 주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마지막 절기라고 할 수 있는 大寒이 지난 20일 지났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立春(2. 4)을 코앞에 둔 절기에 맞이하는 태백산 정기산행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산행환경을 예고할 수 있었다. 주 초 동해안지역에 발효된 대설특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기상 변화를 예의 주시해 보았지만 영서지역은 걱정 뚝이었다. 다음 주 설(31일)을 쇠고 나면 벌써 2월이 시작되면서 입춘을 넘긴 시점에 갑오년 시산제로 이어진다. 연중 가장 추운 달이라는 최한월 1월도 이제 일주일 남짓 남았지만 이달 말까지 강추위는 없을 것이라는 기상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금년 겨울은 칼바람 맞으며 쌍방울 요란하게 울릴 일은 없겠구나 하는 잡념에 잠시나마 빠져보기도 하였다.
- 매 년 한겨울 심설산행과 더불어 태백 눈꽃축제기간에 맞춰 정기적으로 찾는 산이 태백산이다. 금년에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태백산은 매번 버스 한 대 정원이 늘 모자라는 실정이었는데 오늘은 의외의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총무님 안 계신 빈자리의 티가 역력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신청하신 분 중 여섯 분이 무단으로 계약을 파기하신 빈자리를 혜성과 같이 나타나신 네 분께서 그 빈자리를 메워 주신 덕분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춘천을 출발하였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춘천시내 호반산악회와 산사랑산악회의 정기산행 일정이 중복되었다. 일정뿐만 아니라 코스까지도 유사하였기 때문에 은근히 경쟁심에서 유발되는 부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 금주는 지난 1971년 이후 42년 만에 가장 높은 겨울 기온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태백산의 생활지수를 보면 영상 1도에서 영하 12도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해발 1,567m 고지의 날씨치고는 상상을 뛰어넘는 포근한 날씨였다. 2년 전 오늘은 장군봉에서 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안부 구간을 경유하면서 눈보라와 함께 휘몰아치는 칼바람을 피해 하단 한편에 밥자리를 폈다가 곧바로 걷어치우고 곧바로 하산길에 올랐었는데 오늘은 그 당시의 상황과 너무나 비교되는 일상이었다. 기상개황은 오전에 구름이 조금 끼고 오후에 구름이 많이 끼는 것으로 예보 되었지만 상황은 정 반대로 전개되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와 함께 일상을 열수 있었다.
- 오늘 버스 대기 주차장은 행사장 밖 대형주차장으로 예고하였다. 그러나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권 희 성 기사님의 배려 덕분에 당골 제2주차장을 확보하는 행운을 얻었다. 당골 입구를 지나면서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생생 뉴스를 전하는 본인 스스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제2주차장에서 당골입구 주차장까지 내려오는데 소요시간 20여분 상당을 손쉽게 벌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기본코스와 병행코스를 병행하여 운영하면서 총 운영시간을 5시간30분으로 잡고 15:30 제2주차장 하산을 예고하고 들머리에 들었다.
<화방재(어평재)>
- 빠른 길 찾기 정보에 의하면 영월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연상, 석항, 녹전, 상동을 경유하여 목적지로 안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천에서 태백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태백문곡소도동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를 타고 오늘 들머리인 화방재 정상에 도착하였다. 거리상으로는 31번 국도를 타는 것이 가깝겠지만 편의성이나 시간상으로는 태백시를 경유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 화방재는 혈리에서 어평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 하늘금으로서 31번 국도가 지나간다. 또한 백두대간의 길목이면서 태백산에서 함백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기도 하다. 흔히 어평재라고 부르는 이 고개는 해발936m이다. 고개마루 부근에 진달래, 철쭉이 무성하기에 화방재(花房岺)라 불린다고 한다. 일명 화방재를 정거리재라고도 한다. 화방재 정상 어평주유소 뒤로 사길령매표소로 진입하는 탐방로가 있다. 들머리 계단길은 안전로프가 설치되어 있어 진입로 식별이 용이하다. 적설량은 지금까지의 한겨울 심설산행 중 가장 적을 듯 싶었다. 탐방로는 이미 선구자들의 발길에 눈길이 잘 다져져 있어 아이젠발이 잘 받았다. 스패츠까지 착용할 필요 없는 현장의 상황에 만족하였지만 정상일원 눈꽃이나 상고대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하는 아쉬움을 예견할 수 있었다.
<사길령매표소>
- 10:15 사길령매표소 경유
- 들머리에 든지 13분만에 사길령매표소를 경유하였다. 매표소 직전에 있는 백두대간 사길령 비석이 눈길을 끌었다. 비석 뒷면에 사길령 유래가 새겨져 있다. 태백산도립공원내에는 당골, 유일사, 백단사, 사길령에 매표소가 있다. 이 지점에 매표소관리사무소, 태백산등산안내도, 간이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있다. 여기서부터 영봉 천제단까지 4,1km이다. 유일사매표소와 유사한 거리다. 다만 화방재에서 이 지점까지 13분 상당 소요거리가 차이가 나는 점이다.
- 사길령매표소에 도착하면서 관리요원의 영접을 받았다. 예전에는 운 좋게 입장료를 절감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올시다. 이었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경로우대나 원호대상자를 파악해 둔 것이 적중하였다. 본인이 파악한 대로 11명이 면제되고 30명의 단체입장료 각 1,500원씩 총 45,000원을 납부하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당연히 낼 것을 내면서도 강도에게 빼앗기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인지 아직도 모를 지경이다. 내려오는 버스 내에서 입장료에 관한 얘기가 오가면서 “지난번에도 안 냈으니 오늘도 내지 맙시다.” 라는 의견에 대해 그러면 지난번에 안 낸 입장료까지 오늘 다 받으면 어찌하느냐면서 웃음보가 터지기도 하였다. 어떻든 행여 나가 역시 나로 끝나면서 입장료에 관한 해프닝은 씁쓸한 판정패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 바람에 후미 중 후미 신세가 되었다.
- 태백산 사길령(四吉嶺)은 태백산 북쪽 백두대간 등마루에 위치하여 옛날 경상도로 통하던 고갯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태백산 꼭대기로 나있는 천령(天嶺) 길을 통해 왕래하였으나 길이 높고 험하여 고려시대에 와서는 지금의 사길령으로 새로이 길을 내면서 새길령이라 하였다. 사길령은 교통의 요로였기에 오가는 길손들이 영로(嶺路)의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당우(堂宇)를 짓고 태백산령께 제사하기를 천여 년이 지났으며, 지금까지 매년 음력 4월15일에 태백산산령님께 국태민안 및 우순풍조와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제사하고 있다.
<태백산 산령각비문>
- 10:35 태백산 산령각 경유
- 사길령매표소에서 약 20여분 소요되었다. 이 지점에 태백산산령각, 태백산산령각유래 안내판, 천제단 3,6km, 유일사쉼터 1,9km, 사길령매표소 0,5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산령각 주변은 제설작업이 말끔하여 예전보다 신선함과 새로움으로 다가섰다. 여기서 후미일행과 합류하여 동행하였다.
- 사길령 산령제는 매년 음력 4월 15일 지역주민들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태백시 혈동 사길령 산령각에서 제를 지낸다. 태백산 사길령(四吉嶺)은 태백산 북쪽 백두대간 등마루에 위치하여 옛날 경상도로 통하던 고갯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태백산 꼭대기로 나있는 천령(天嶺) 길을 통해 왕래하였으나 길이 높고 험하여 고려시대에 와서는 지금의 사길령으로 새로이 길을 내면서 새길령이라 하였다. 사길령은 교통의 요로였기에 오가는 길손들이 영로(嶺路)의 무사안전을 위해 고갯마루에 당우(堂宇)를 짓고 태백산령께 제사하기를 천여 년이 지났으며, 지금까지 매년 태백산산령님께 국민태안과 우순풍조와 마을의 안녕을 빌며 제사하고 있다.
- 제를 지내게 된 유래를 살펴본다. 태백산정상으로 이어지는 산마루로 나 있는 길이 사길령이다. 옛날 강원도와 경상도로 통하는 큰 길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길이 불편해서 고려시대 때 새로운 길을 뚫었는데 옛길 대신 새로이 길을 뚫었기에 ‘새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고개를 ‘샛길재’라고 하여, 강원도와 경상도를 오가며 장사하던 보부상들에 의하여 건립된 산령각에서 매년 제사를 지낸 것에서 유래되었다. 여기에는 전설도 있다. 옛날 고갯마루에 도적이 성행하였고, 범이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것도 비일비재하여 고갯마루에 산령각을 짓고 안전을 기원했던 곳으로 영월 땅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조선 제6대 임금이신 단종대왕이 사후 그 혼령이 되어 태백산의 산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새길재(또는 사길령) 산령각의 신위는 다른 산령각의 신위와 다르게 단종대왕이라고 하여 산령각 내부에는 백마를 탄 어린 임금이 그려진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길령 산령제는 음력 4월 15일 오전 11시경 ‘사길령태백산산령제 계회 주최로 제를 지내며, 헌관으로는 보통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성균관유도회 황지지회장)순으로 200여명의 주민들이 함께 모여 제를 지낸다고 한다.
- 여기에는 전설도 있다. 옛날 고갯마루에 도적이 성행하였고, 범이 나타나 사람을 해치는 것도 비일비재하여 고갯마루에 산령각을 짓고 안전을 기원했던 곳으로 영월 땅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조선 제6대 임금이신 단종대왕이 사후 그 혼령이 되어 태백산의 산령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고, 새길재(또는 사길령) 산령각의 신위는 다른 산령각의 신위와 다르게 단종대왕이라고 하여 산령각 내부에는 백마를 탄 어린 임금이 그려진 탱화가 안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유일사 쉼터>
- 11:23 유일사 쉼터 경유
- 산령각에서 50여분 소요되었다. 산령각을 출발하여 컨디션 난조를 보이시는 톰보이님께서 이 구간 첫 번째 갈림길인 유일사매표소 갈림길에서 하산길에 올랐다. 갈림길에서 유일사매표소까지 0,5km 정도 되었지만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안전하산을 당부하고 헤어지면서도 동행자 없이 단독 하산에 대한 안쓰러움을 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쉼터 직전 암봉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돌탑 한 기가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돌탑주변은 산객 접근을 막기 위해 철조망이 처져 있어 돌탑에서 유일사 경내 조망은 접어야만 했다. 이 지점에 간이매점, 천제단 1,7km, 유일사매표소 2,3km, 사길령매표소 2,4km를 알리는 이정표, 유일사 100m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또한 유일사 전용 생활필수품 운반용 허름한 케이블카가 눈길을 끌었다. 유일사쉼터는 유일사매표소에서 진입한 산객들과 합류 지점이기 때문에 예상대로 혼잡을 이뤘다. 지금까지는 우리 일행 분들께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즐겼는데 여기서 부터는 아니었다.
<유일사>
- 유일사는 지난해 둘러본 것으로 갈음하고 눈 팅으로 끝내고 말았다. 왕복 0,2km/20분 정도만 투자하면 족하였지만 쉼터에서 대웅전 지붕만 내려다보면서 만족하는데 그쳤다. 행여나 싶어 동행하시던 일행 분들에게 그 뜻을 물어본 즉 반응이 없었다. 무반응을 부정으로 접수하고 본인까지 꾀를 부리고 말았다. 유일사는 유일사매표소에서 2,4km, 유일사쉼터에서 0,1km 지점에 있으면서 탐방로 급사면으로 살짝 비켜 앉아 있기 때문에 좀처럼 탐방기회를 잡지 못했었는데 지난해 탐방기회를 잡았던 것이 빌미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사실은 후미 신세만 아니었더라도 몇 몇 분에게 동행을 권유해 보았을 것이다.
- 유일사는 태백시 문곡소도동 47번지에 위치하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에 속한다. 태백산 백단사에서 이소선이 백일기도 중에 사찰을 창건하라는 부처님의 현몽을 받고 1959. 4. 10 현 위치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유일사매표소에서 입산하여 0,5km쯤 올라가다가 이정표설치지점 갈림길에서 진행방향 오른쪽으로 2km 정도 올라가거나 능선안부 갈림길에서 접근할 수 있다. 유일사는 태백지역의 유일한 비구니 사찰이다. 경내에는 법당, 인법당,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 요사채 등이 있다.
<주목군락지>
- 11:45 주목군락지 안부 경유
- 쉼터에서 20여분 남짓 소요되었다. 쉼터를 지나 급사면으로 이어지면서 주목군락은 시작된다. 이곳 안부에 이르러 주목 고사목이 군락을 이루면서 시원한 조망과 함께 극치를 이뤘다. 바로 이 지점 요소요소가 포토 존으로 기능하는 곳이다. 눈꽃과 상고대가 만발하면 맞은편 함백산과 매봉을 배경으로 태백산하 설경을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이 운집하는 명소이다. 오늘도 그 흔적이 역역하였지만 앞서 예견한 대로 현장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그분들이 선점했던 자리를 산객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 비교될 뿐이었다. 이 지점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주목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지점 중 핵심 요충지였기에 잠시 머물면서 마음속에 그림으로 고이 담아 놓고 장군봉으로 향했다.
- 그 무렵 손소리통이 요란하게 울렸다. 뒤에 쳐져있던 용 환 경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산상에 울려 퍼졌다. 내용인즉 컨디션이 좋지 아니하여 유일사매표소로 하산 하신다는 전갈과 함께 후미 세 분께서 상당히 뒤 처졌다는 첨언이 있었다. 알았다! 오버! 로 응답을 마치면서도 오늘 하산일정에 먹구름이 끼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 여기서 주목에 대해 살펴보고 넘어간다. 朱木은 주목과에 속한 상록 침엽 교목이다. 큰 주목은 높이 22미터, 지름 2미터에 달한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고 큰 가지와 원대는 적갈색이며 껍질이 얕게 갈라진다. 잎은 나선 모양으로 달리는데 옆으로 벋은 가지에는 깃처럼 두 줄로 배열되며, 표면은 짙은 녹색이다. 꽃은 잎겨드랑이에 달리며, 4월에 핀다. 기구, 조각, 건축재 또는 붉은빛의 염료로 쓰고, 정원수로 재배한다. 고산 지대에서 자라는데 우리나라, 일본, 사할린, 대만,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학명은 Taxus cuspidata이다.
-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고 할 만큼 생명력이 길고 끈질긴 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태백산, 함백산, 계방산, 소백산, 오대산, 설악산 등 높은 산악지대나 추운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그 중에서도 태백산의 주목 군락지는 그 규모에서 앞선다. 태백산의 주목 군락은 장군봉에 이르기 전과 문수봉을 지나면서 절정을 이룬다. 특히, 겨울철 태백산에 눈이 덮이면 주목에 덮인 눈들과 함께 멋진 설경을 보여 준다. 태백산의 겨울 산행과 더불어 한겨울이면 사진작가들이 이 설경을 담기 위하여 이곳에 올라 작품 활동에 여념이 없다. 이곳의 주목은 매 그루마다 이름표를 붙여 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다. 태백산에서 자라는 주목은 2,805주이며 그 중 높이 11m이상 되는 것은 49주이고 지름 1m이상 되는 나무도 15주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름이 가장 큰 나무는 1.44m로서 수령은 500년 이상으로 우리나라에서 주목 서식지중 가장 대단위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목은 태백산을 대표하는 나무로서 설경은 장관을 이룬다. 주목은 고산 지대에서 자라며 높이 20m, 지름 2m에 달한다. 한국ㆍ일본ㆍ중국 동북부ㆍ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한다. 일본산으로 원줄기가 곧게 서지 않고 밑에서 여러 개로 갈라지는 것은 눈주목(var. nana)이라고 하며, 잎이 보다 넓고 회색이 도는 것은 회솔나무(var. latifolia)라고 하며 울릉도와 북쪽에서 자란다. 원줄기가 비스듬히 자라면서 땅에 닿은 가지에서 뿌리가 내리는 것은 설악눈주목(T. caespitosa)이라고 하며 설악산 대청봉 근처에서 눈잣나무와 같이 자란다.
<장군봉 정상석>
- 12:14 장군봉 도착
- 유일사매표소에서 장군봉까지 50여분 상당 소요되었다. 유일사를 경유하지 아니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장군봉의 높이는 1,567m로 태백산의 최고봉이다. 지금까지 태백산 한겨울 심설산행을 하면서 장군봉 능선에 오르면 늘 칼바람과 사투를 벌렸었는데 오늘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훈풍에 돛을 달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듯 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포근하고 따사로움을 느꼈다. 재작년에는 장군단 돌담 벽에 붙어 칼바람을 피하면서 일행들을 맞이했었는데 오늘은 옷깃을 여미기는커녕 재킷 옷섶을 확 풀어 제치고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넣고 객기를 부릴 정도로 비교되었다.
<장군단>
- 장군단은 유일사방향에서 올라가면서 첫 번째 맞이하는 천제단이다. 천왕단을 기준으로 북쪽 약 300m 지점에 위치한다. 편마암(片麻岩)으로 만들었으며 높이 2m, 둘레 20m로 타원형(楕圓形) 석단(石壇)이다. 남쪽에는 제단 위로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매년 개천절(開天節)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천왕단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原形)이 잘 보존되어 있다. 높이로 봐서 태백산의 주봉인 셈이다. 태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주목과 고사목이 많아 겨울에 흰 눈이 덮이면 장관을 이룬다. 장군봉과 영봉 0,3km 능선구간 나뭇가지와 고사목에 설화와 상고대가 만발하여 마치 흰 꽃밭을 연상하게 하는 곳이다. 여기서 북쪽의 죽미산(竹嵋山:917m), 남쪽의 일월산(日月山:1,219m)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낙동강의 여러 지류가 여기서 발원한다. 여기서 뒤에 따라 올라오던 일행 분들과 합류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가 영봉으로 발길을 돌렸다.
<태백산 정상석>
- 12:20 영봉 천왕단 도착
- 화방재에서 영봉까지 1시간20여분 상당 걸렸다. 지난해에도 장군봉에서 0,3km 능선 구간을 지나면서 오늘과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어 딴 세상에 온 듯 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다르다면 적설량에서 비교될 뿐이었다. 이 구간에서 눈이 이 정도라면 눈이 없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었다. 겨울은 겨울이되 태백산의 겨울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적설량으로 봐서 3월 중순쯤의 상황으로 느껴졌고, 구름 한 점 없는 높푸른 하늘에서는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겼다. 강원도에서 눈의 대명사로 꼽히는 태백산에서 눈꽃이나 상고대에 대한 기대를 접는 대신 눈이 모자라게 사방으로 하늘금을 그으면서 전개된 시원한 조망권을 확보한 것으로 충분히 보상 받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여겨졌다. 천왕단 앞 광장 바닥이 맨바닥을 앙상하게 들어낸 모습은 겨울산행에서 처음이지 싶었다.
-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영봉 정상일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제당골, 사길령매표소, 백단사매표소, 유일사매표소, 당골 등에서 올라온 산객들이 정상에서 합류하면서 혼잡을 이뤘다. 정상석이나 천왕단 한배검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남기는 모습들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새치기와 겹치기연출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에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을 맛보았다. 오늘은 디카 없는 홀가분한 세상이었으므로 마음속에, 가슴속에, 머릿속에 그 모습을 고이 새겨 넣고 부담 없이 즐겼다. 가끔은 디카에서 해방되어 그냥 보고 즐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 태백산 정상 표석은 태백산의 장엄함, 위대함, 역사성을 표현하기 위해 태백산의 글씨를 太자는 북위서체, 白자는 행서체, 山자는 고문자체로 썼다고 한다. 그 어느 산의 정상표석 보다도 크고 장엄하며 위엄이 있어 보였다.
- 태백산은 태백산맥의 종주(宗主)이자 모산(母山)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함경남도 원산의 남쪽에 있는 황룡산(黃龍山)에서 비롯한 태백산맥이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두타산(頭陀山) 등을 거쳐 이곳에서 힘껏 솟구쳤으며,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소백산맥이 분기된다. 태백산의 북쪽에 대덕산(1,307m), 서쪽에 백운산(1,426m)과 매봉산(1,268m), 서남쪽에 장산(1,409m), 북쪽에 함백산(1,573m), 동쪽에 연화산(1,171m)· 백병산(1,259m) 등이 시원하게 조망되는 곳이다. 또한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낙조는 장엄하여 세속을 떠난 천상계를 연상케 하고 맑은 날 멀리 동해 바다를 볼 수 있는 것도 태백산이 가지고 있는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 정상에서 당골 병행코스팀과 문수봉 기본코스팀으로 제대를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화방재에서 들머리에 들기 전 산행일정 안내를 하면서 정상에서 당골로 곧바로 하산할 뜻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파악할 당시만하더라도 정상에 올라가봐야 알겠다는 식으로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막상 정상에 오르고 나니 10여명이 넘는 분들이 망경사를 경유하여 곧바로 하산할 뜻을 밝혔다. 먼저 하산하신 분들을 감안하면 20여명은 족히 될 듯 싶었다. 문수봉 팀을 하단 점심식사 장소까지 먼저 출발시키고 뒤처진 후미 세 분과 합류하기 위해 잠시 머물다가 고문님에게 바통을 넘기고 곧바로 문수봉 팀과 합류하였다.
<천왕단(한배검)>
- 천제단에 대해 살려보고 넘어간다. 천제단은 국가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되었으며 태백 8경 중 제1경이기도 하다. 천제단은 옛 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설치한 제단으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옛 기록에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3산 5악(三山五岳)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이라하고 제사를 받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산(靈山)으로 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태백산 정상에 위치한 천제단은 천왕단(天王檀)을 중심으로 북쪽에 장군단(將軍檀), 남쪽에는 그보다 작은 하단의 3기로 구성 되었으며 적석으로 쌓아 신역(神域)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있는 천왕단은 자연석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3m, 좌우폭 7.76m, 전후폭 8.26m의 타원형이며, 녹니편마암의 자연석으로 쌓아져 있는데 윗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다. 이러한 구도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 때문이다.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상고시대 부터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초기에는 혁거세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기림왕은 춘천에서 망제(望祭)를 올렸다.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 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 곳은 본토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한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천기(天旗)와 28수기(宿 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꺾는 일을 금하고 있다.
- 영봉 천제단 한배검에 대해서 살펴본다. 천제는 매년 10월 3일 낮 12시 태백산 영봉 천제단에서 봉행된다. 주최는 대한민국 천제보존회가 하고 태백문화원이 주관한다. 천제는 일 년에 딱 한번 하는 제례행사이다. 하늘에 영험과 소원을 빌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그런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곳 천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음복 때 내려주는 제물을 먹으면 행운이 따른다고 하여 서로 먹으려고도 한다. 또한 소지는 개인들이 천제단에 올리는 禮로 각 가정의 행운과 가족의 행복, 건강을 기원한다.
- 천제단은 천왕단을 중심에 두고 3기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 300m 지점에 장군단, 남쪽 300m 지점에 하단이 있다. 3개 제단이 북에서 남으로 일직선상에 있는데, 영봉(1560m)에 위치한 천왕단은 자연석으로 쌓여진 높이 2.4m, 둘레 27.5m, 면적 66㎡(20평)의 타원형이다. 태백산의 정상인 장군봉(1567m)에 위치한 장군단은 세로의 직사각형, 측면은 삼각형으로 천왕단보다 조금 작은 규모. 하단은 장군단보다 작은 규모로, 가로의 직사각형이다. 태백문화원 김강산 원장에 의하면 3개의 제단은 그 형상이 각각 ○ △ □으로, ○은 하늘, □은 땅, △은 사람, 즉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한다고 한다. 천제단은 단순하게 돌을 쌓아올린 건축물이 아닌 셈이다. 천왕단은 하늘에, 장군단은 사람에, 하단은 땅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천제를 지낼 때는 살아 있는 소를 바쳤는데, 제단 앞에 매어놓고 내려 왔다. 이때 뒤를 돌아보면 소가 아까워 그런다며 신이 벌을 준다고 했다는데, 3일 후 다시 올라가 소를 거두어 썼다고 한다. 하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태백산을 찾지 못할 때는, 멀리서 태백산을 향해 망제(望祭)를 지냈다고 한다. 신라 기림왕은 변방이 심상치 않던 시절, 춘천에서 태백산을 바라보고 망제를 지냈는데 낙랑과 대방이 항복하고 모든 것이 원만히 이루어졌다고 한다(삼국유사). 이후 태백산은 바라보고 정성껏 제사만 하여도 감응하는 영산(靈山)으로 여겨졌다. 조선시대에는 천제를 지내느라 오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어깨가 부딪치고 앞 사람의 뒤꿈치를 밟을 정도였다고 한다. 옛 기록에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3산 5악(三山五岳) 중의 하나인 북악(北岳)이라 하고 제사를 받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산(靈山)으로 섬겨 왔음을 알 수 있다.
- 단군조선시대 구을(丘乙)임금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 제단은 상고시대부터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으로 단군조선시대에는 남태백산으로 국가에서 치제하였고, 삼한시대에는 천군이 주재하며 천제를 올린 곳이다. 신라초기에는 혁거세왕이 천제를 올렸고 그 후 일성왕이 친히 북순하여 천제를 올렸으며 기림왕은 춘천에서 망제(望祭)를 올렸다.
-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방백수령(方伯守令)과 백성들이 천제를 지냈으며 구한말에는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우국지사들이 천제를 올렸고,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은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고 일제때는 독립군들이 천제를 올린 성스런 제단이다. 지금도 천제의 유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산꼭대기에 이같이 큰 제단이 있는곳은 본토에서 하나밖에 없다. 천제단은 다른 이름으로 구령단(九靈壇) 또는 구령탑(九靈塔)이라 하고 마고탑(麻姑塔)이라 하기도 한다. 특히, 해마다 개천절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받드는데 중앙에 태극기(太極旗)와 칠성기(七星旗)를 꽂고 주변에는 33 천기(天旗)와 28수기(宿 旗)를 세우며 9종류의 제물을 갖춘다. 이 주변의 계곡 일대에는 치성을 드리는 기도처 로 사용된 크고 작은 적석탑과 석단들이 있으며 함부로 짐승을 잡거나 나무를 꺾는 일을 금하고 있다.
- 천왕단 앞 문수봉방향 안내판에 있는 안축의 “칠언율시” “등태백산”을 살펴본다. 긴 하늘 바로 지나 자연 속에 들어서니 그제야 알고 보니 절정에 올랐구나. 한 덩이 흰 해는 머리위에 나직하고 몸이 구름 쫒아가니 내가 학을 탄 것인가 길이 벼랑에 걸렸으니 하늘 오르는 사다리인 듯 비와서 만 골짜기 물이 휘몰려 넘치니 굽이져 도는 오십천을 건널 일이 걱정이다.
- 태백산은 예로부터 신령한 산으로 여겨져 왔기에 여러 개의 사찰과 토속신앙의 기도처가 있으며, 여기서 연유한 전설이나 민담이 남아 있다. 먼저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자장에 얽힌 다음과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자장이 태백산 갈반지에서 문수를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노거사(老居士) 한 사람이 누더기 가사를 입고 칡삼태기에 죽은 개 한 마리를 담아들고 와서는 자장을 보러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자장이 그 행색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 하여 내쫓으니 노거사가 말하기를, “자장이 해탈의 경지에 든 사람인 줄 알고 찾아왔는데 아직도 그 경지에 들지 못하였구나. 사람을 잘못보고 왔으니 돌아가겠다.” 하고 삼태기를 땅에 내려놓으니 죽은 개가 사자가 되어 이를 타고 빛을 내면서 가버렸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빛을 좇아 남령(南靈)에까지 올라갔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진정(眞定)의 출가수도도 그 배경이 태백산으로 되어 있다. 진정이 졸오(卒伍)에 있으면서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중 당대의 고승 의상이 태백산에서 법연을 연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가고자 하였으나, 차마 어머니를 두고 갈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못하였다.
- 태백산에서 천제를 올린 기록을 살펴본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 五世檀君 丘乙, 壬戌元年命築壇干太白山遺使致祭
(5세 단군 구을 임술원년에 태백산에 천제단을 축조하라 명하시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하게 하였다)
▶부도지(符都誌)
- 復興祭市之法建天符小都於南太白築壇於中臺
(제시의법을 부흥키 위해 남태백산에 천부소도를 건설하고 가운데 봉우리에 천부단을 쌓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逸聖尼師今 五年十月 北巡親祀太白山
(일성왕 5년 10월에 왕이 친히 태백산에 올라 천제를 올렸다)
基臨尼師今 三年三月 至牛頭州望祭太白山樂浪帶方兩國歸服
(기림왕 3년3월에 왕이 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고 망제를 올렸으니 낙랑과 대방이 항복하여 왔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 太伯山載府西南新羅擬五岳爲北岳有祠名曰太伯天王堂諸郡人民春秋祀之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남쪽에 있는데 신라때 오악 가운데 북악이라 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신사가 있는데 이름하여 태백천왕당이라 한다. 여러 고을 백성들이 봄, 가을로 천제를 올린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太白山 新羅時北岳載中祀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繫牛於神座前狼狼不顧而走曰如顧之神如不恭而罪之過三日府收其牛而用之名之曰退牛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리던 곳이다. 산꼭대기에는 세간에서 말하는 천왕당이 있어 강원도와 경상도의 인접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한다. 제사를 할 때에는 신좌 앞에 소를 매어놓고 3일이 지난 후에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가 쓰는데 이름하여 퇴우라 한다)
太白山祠 在山頂俗稱天王堂本道及慶尙道傍邑人春秋祀之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이르기를 천왕당이라 한다. 강원도(본도)와 경상도의 인근 고을 사람들이 봄 가을로 제사한다)
▶ 척주지(陟州誌)
- 太白山在府西百二十里神羅北岳載中祀風俗信鬼其絶頂作天王祠春秋大祀
(태백산은 삼척부의 서쪽 120리에 있는데 신라때 북악으로 중사의 제를 올린 곳이다. 세간에 신을 믿는 풍습이 있어 산꼭대기에 천왕사를 짓고 봄, 가을로 크게 제사한다) <자료출처: 태백시청>
<단종비각>
- 지난해는 선발팀과 동행하면서 영봉 정상에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막간을 이용하여 단종비각과 용정 및 망경사 경내를 살펴볼 겨를이 있었다. 그러나 금년에는 후미에서 시작하여 중간그룹과 동행한 관계로 그럴 겨를이 없었다. 병행코스로 하산하신 분들을 위해 이 구간 주요 볼거리인 몇 몇 곳 자료를 살펴보고자 한다.
- 태백산 용정에서 천제단 쪽으로 100m 정도의 거리에 단종비각이 있다. 비각 내에 안치된 비석의 전면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 각자하였다. 비각의 전면에는 “단종비각”(端宗碑閣)이라 쓴 현판이 걸렸으며 탄허스님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영월에 유배오자 호장이 태백산의 머루,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하였는데 어느 날 진상차 영월로 가는 도중 곤룡포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묻자 나는 태백산으로 가느니라 하고 사라져 버렸다. 호장이 영월 땅에 도착해 보니 단종이 그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로부터 단종이 승하한 뒤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전해지게 되었고 그 후 주민들이 의논하여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산신령으로 모시기로 하여 매년 음력 9월3일 제를 지내고 있다.
- 단종(端宗, 1441년 음력 7월 23일 ~ 1457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휘는 홍위(弘暐)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폐위되어 죽어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 졌으나 거절당했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묘호와 시호가 올려 져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郭孝大王)이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이며, 조선 왕조 최초의 왕세손이기도 하다.1452년부터 1455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452년부터 1453년까지 김종서가 섭정하였고 1453년부터 1455년 퇴위할 때까지 숙부 수양대군(훗날 세조)가 섭정하였다.(위키백과)
<망경사 대웅전>
- 망경사는 정상에서 0,4km지점 양지바른 곳에 있다. 여기서 문수봉이 바로 코앞에 건너다보인다. 이곳이 이곳을 지나는 산객들의 단골 밥자리인데 오늘은 아니었다. 시간대로 봐서 겨우 11:10을 갓 넘긴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망경사와 용정각은 보수공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음에도 출입을 금지하는 금줄이 처져 있었다. 출입이 허용돼 보았자 겨우 사진 한 컷 담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정상에서 내려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우리나라 3대 영산(靈山)인 지리산, 소백산(小白山)과 함께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알려진 태백산(太白山) 천제단 아래 해발1,470미터 지점에 자리한 망경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다. 신라 진덕여왕 652년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자장이 함백산 정암사(淨岩寺)에서 노년을 보내던 중 현재의 망경사터에 문수보살 석상(石象)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암자를 지어 그 석상을 모셨다고 전해온다. 1950년 6.25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나중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속건물로는 대웅전과 용정각, 요사채, 객사 등이 있다.
<용정각>
- 지금까지 용정에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 마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기회를 잡나 싶었는데 결국 오늘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용정 급수전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용정은 태백산 망경사(望鏡寺)옆에 있는 우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샘이다. 물이 솟아 나오는 지점은 해발 1,470m정도의 고지대이고 또한 우리나라 100대 명수 중에서 가장 차고 물맛이 좋고 가장 높은 곳에서 솟는 샘이다. 샘에다 용정각을 짓고 용신에 제사를 올리기에 용정이라 한다. 일설에는 이 우물이 용왕국과 통하여 있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 물로 천제를 올릴 때 제수(祭水)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곳 용정은 낙동강 발원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때부터 태백산 천제단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때 이 샘물을 제수(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물)로 사용하였는데 용궁에 연결되어 있어 가물 때나 장마 때나 수량이 한결 같고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물이 혼탁해 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하단>
- 12:30 하단, 점심식사
- 하단은 오는 문수봉 기본코스팀 점심식사 장소로 예고된 지점이다. 영봉에서 고문님에게 후미일행 합류라는 부담스런 바통을 넘기고 하단에 도착해 보니 이미 밥자리를 펴고 점심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도착하자마자 각자 준비해 온 정상주가 한 순배 돌면서 이미 삐리리 전율이 흐르면서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엄습해 왔다. 시방부터 이러면 안 되는 데를 뇌까려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으리. 이었다.
- 하단은 영봉 천왕단에서 남쪽 부쇠봉방향 3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밀양박공지묘비 바로 뒤에 있는 하단은 옛사람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설치한 3기의 천제단 중 하나이다. 천왕단에서 망경사를 거쳐 곧바로 하산할 경우 하단은 그냥 지나친다. 하단은 천왕단이나 장군단에 비해 규모가 가장 작고 이름도 알 수가 없어 하단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양지바르고 칼바람을 비켜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지날 때면 언제나 산객들의 밥자리로 이용되는데 오늘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장갑을 벗고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하다 보니 너무 지체하였다는 느낌이 들면서 발걸음을 서둘렀다.
<부쇠봉>
- 13:30 부쇠봉 경유
- 부쇠봉은 매년 경유 지점으로 지정하면서도 사실상 회피하거나 무관심속에 간과하는 곳이다. 지난해에는 본인 혼자 부쇠봉갈림길에서 백두대간길로 진입하여 능선으로 우회하여 경유하느라 무진 애를 먹었었던 경험이 있다. 금년에는 부쇠봉갈림길에서 직진하다가 샛길로 접어들어 부쇠봉을 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올 요량이었다. 그러나 회장님을 비롯한 선발팀은 이미 앞서가신 상황이었고 동행한 일행은 부회장님을 비롯한 진주님이 고작이었다. 부쇠봉갈림길을 지나면서 부쇠봉에 대한 언급 없이 무조건 앞에서 부쇠봉 방향으로 진로를 선도하였다. 진로를 벗어난 것을 감지하신 부회장님께서 한 말씀 하시면서 그제야 지척에 있는 부쇠봉을 경유하자고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부쇠봉 능선길은 짧은 반면 눈보라에 의한 눈더미가 허벅지를 넘었다. 오늘 일정 중 눈다운 눈 맛을 본 셈이다. 두 분 모두 부쇠봉은 처음이라면서 기뻐하는 모습들이었다. 단체기념을 남기자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고작 3명의 난리 부르스 이었다. 그 순간 안내도우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과 보람을 느낀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본다. 앞서가신 분들과 함께하지 못한 점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먹음 으면서 발길을 돌렸다.
- 부쇠봉 구간에서 빠져나와 정상쾌도에 진입하여 단체산행팀과 합류하면서 지체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 맨 후미에 서신 노익장 한 분께서 어디서 오셨느냐고 말문을 여셨다. 저희는 춘천에서 왔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라는 질문에 우리는 서울에서 왔는데 우리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산악회 회원입니다. 오늘로서 1,100회가 넘는 정기산행횟수를 자랑하고 있습죠. 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하단에서 있었던 사안을 얘기해 주셨다. 원래 천제단 구내에서 취사행위를 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산에서의 취사행위는 자제해야 한다는 말씀을 강조하시면서 춘천에서 오셨다는 분들과 하단에서 취사행위와 관련하여 옥신각신하면서 의견이 분분하였었다는 얘기를 듣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점심식사중인 두 분을 하단에 남겨두고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저의 일행은 제가 후미이기 때문에 아닐 것입니다. 라고 부정을 하면서도 그 분들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보았다. 대충 듣고 넘어가기에는 시사 하는바 컸기에 지금껏 가슴에 앙금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 부쇠봉은 해발 1,546,5m이다. 천제단이 있는 수두머리와 문수봉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이 봉우리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가 소백산맥의 시초가 된다. 옛날 신라 때 이곳 산봉우리에서 남으로 뻗은 산등으로 길이 있어 경상도와 강원도를 통하는 요로(要路)였다. 고려 때 그 길은 천평으로 해서 새길령으로 넘어 혈리로 소도로 통하게 새로이 개척하자 이 길은 아주 작은 소롯 길로 변했고 천제를 지내러 오는 경상도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였다. 이 산봉우리는 해발 1,546.5m로 그동안 우리나라 지도에 태백산 높이로 잘못 인식되게 한 봉우리이다. 또한 이 산봉우리는 중국(中國)의 태산(泰山)과 높이가 같은 산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부쇠봉의 뜻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근처에 차돌이 있어 부싯돌(부쇳돌)로 사용하지 않았나 의심도 되고 그 부쇠를 부소로 보아 단군의 아들 부소왕자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영봉이 단군께 제사지내는 장소라면 그 아래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가 그 아들봉일 것이고 전하는 말에 부소(扶蘇)가 구령탑을 쌓았다고 한다.
<문수봉>
- 14:10 문수봉 경유
- “문수(文殊)”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준말로 여러 부처의 지혜(智慧)를 맡은 보살로 풀이한다. 또한 석가여래를 좌측에서 모시며, 오른쪽에서 모시는 보현보살과 더불어 삼존불(三尊佛)을 이룬다. 오른손에 지검(智劍), 왼손에는 연꽃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나 경궤(經軌)에 따라서는 다른 것을 가졌거나 다른 형상으로써 설명되기도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때 자장율사가 문수봉에서 문수보살상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아무런 곳에도 문헌으로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정선군 고한읍의 정암사에서 자장이 입적한 사실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사실을 이곳에다가 확대 견강부회한 것이 아닌가 한다.
- 문수봉은 태백산에서 조망이 제일 좋은 곳이다. 우리 일행이 경유해 온 장군단, 천왕단, 망경사 일원이 시원하게 건너다 보였고 함백산 정상이 거침없이 한눈에 건너다 보였다. 문수봉 정상 너덜지역에는 정상 표주 뒤 큰 돌탑을 비롯하여 총 다섯 기의 돌탑을 옹기종기 정교하게 쌓아 놓았다. 정상일원은 여기도 영봉 천왕단이나 정상석 주변상황과 별 차이가 없었다. 같은 시간대에 단체 산행팀과 합류하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인증 샷을 남기고 지체하지 아니하고 소문수봉으로 향했다. 남은 하산구간 4,3km를 1시간2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 에 당도해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문수봉은 태백산 동쪽 봉우리로 해발 1,517m이다. 문수봉은 산봉우리가 바위 너덜로 조성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옛날 이 산봉우리의 바위로 문수불상을 다듬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수봉 위에는 돌이 많다. 그 돌무더기를 멀리서 보면 마치 눈이 쌓여 있는 듯하다하여 태백산의 이름이 이곳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척주지에 다음 내용과 같이 게재되어 있다.「태백산 가운데 가장 높고 큰 것이 문수산이다. 꼭대기에 크고 작은 돌무더기가 있어 바라다보면 흰 눈이 쌓여 있는 듯 하여 문수사력산이라 한다. 산꼭대기에 부처의 유적(문수상을 이곳에서 조성)이 있고 태백산의 실지 이름이 이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 옛날부터 태백산에는 절이 없었다. 그것은 민간신앙의 본거지였고 정상에 천제단이 있기에 외래종교를 거부한 민족적 자존심의 현장이었다. 태백산에 문수상을 안치한 작은 암자가 생기게 된 것은, 병자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서, 민폐가 심한 천제를 지내지 못하게 하고, 청의 간섭으로 우리의 주체사상이 잠시 좌절된 틈을 타고 요승 충학이란 사람이 천왕당을 불 지르고 그 아래에 작은 절을 세우고 봉화 땅 물야의 문수산에 있던 공벽암의 문수상을 옮겨와 안치한바 있었으나 그 후 폐허가 되고 말았다.
- 문수상은 6.25사변 전까지 만경사터에 있었으나 공비토벌을 위해 작전상 주둔했던 군인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문수상은 발파되어 버렸다. 부서진 문수상의 돌조각은 용정우물 윗쪽 산등에 쌓여져 있는데 태백산에서는 볼 수 없는 돌비늘이 석인 화강암 조각들이다. 이것으로 봐도 문수상은 문수봉 꼭대기에서 조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임을 입증한다 하겠다. 30여 년 전 정가터 아래에 대왕암이란 절이 있을 때 문수봉의 돌로 불상을 조성하려다 좌대만 다듬다가 만 것이 문수봉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소문수봉>
- 14:22 소문수봉 경유
- 소문수봉은 문수봉에서 0,8km지점에 위치해 있다. 소문수봉직전 금천갈림길2지점에서 0,5km 지점에 위치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경유할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소문수봉 1,465m, 당골광장 3,5km, 천제단 3,8km, 문수봉 0,8km를 알리는 이정표 외에 특별함은 없다. 다만 태백시일원 시원한 조망은 모자람이 없다. 여기서도 인증 샷을 남기자마자 하산을 서둘렀다. 소문수봉을 출발하면서 병행코스팀 의 고문님으로부터 당골 눈 축제장에 도착하였다는 전갈이 날라들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듯 뜀박질이 시작되었다. 갑자기 뛰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혹시 본인을 제척해야할 상황인 듯 싶어 속도를 늦추다가 따라붙느라고 땀을 흠씬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뜀박질도 잠시 뿐이었다. 일령횡대로 행진하는 단체산행팀을 만나면서 그 분들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춰야하는 상황이 상당시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문수봉갈림길에 접어들면서 활로가 열렸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단체산행팀을 추월하고 말았다.
- 그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바로 앞서 계시는 부회장님에게 수작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부회장님 시방 좀 추웠으면 좋겠지요? 칼바람이 10분 정도만 불어서 얼굴이 좀 시렸으면 좋겠는데 어떠세요. 라고 연이어 질문공세를 펼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사실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하단을 출발하면서 부회장님께서 애지중지하는 핑크색 마스크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찾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능청을 떨었던 것이다. 하산하시면서 연신 배낭그물망에 손을 넣었다 빼다를 반복하시는 행동을 보면서 아하! 이제 돌려줘야하는 때가 되었음을 감지했던 것이다. 한참을 그냥 내려오시던 부회장님께서 갑자기 돌아서서 본인 얼굴을 쳐다보시면서 혹시 대장님이 제 마스크 주워가지고 계신 거 아니에요? 라는 역공을 펴셨다.
부회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라고 태연한척 하였지만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들키고 만 셈이었다. 싱겁게 끝나고 말았지만 그 바람에 어느새 제당골 막바지에 이르렀다.
- 제당골 입구 다리 왼쪽으로 문수봉 3,6km, 당골 0,7km를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면서 문수봉 선발팀을 이끄신 회장님으로로터 눈꽃축제장 노래자랑코너 무대 앞에 자리하고 있다는 전갈이 날라들었다. 현위치 제당골 통과! 오버! 로 교신을 마치면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여유 있게 홈인할 수 있는 시간대이었다.
- 15:10분을 넘기면서 눈꽃축제장에 이르렀다. 매년 축제기간 중에 일정을 잡아 눈 팅이나마 거치면서 보아온 탓에 보다 더 새로운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항상 신선함으로 받아들여졌다. 노래자랑 무대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흥으로 넘쳐났다. 김 성 해님께서 신청을 해 놓으시고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평소 즐겨 부르시는 애창곡 한 곡조가 짱하고 흘러 퍼지면서 모두님들의 흥겨운 율동이 함께 어우러져 무대분위기를 사로잡았다. 하루일상을 흥겨움으로 갈무리 해 주신 김 성 해님과 흥겨운 분위기를 연출해 주신 모두님들 덕분에 본인 또한 하루의 피로를 싹 가실 수 있었다.
- 제21회 태백눈꽃축제는 당골일원에서 열렸다. 당골(堂谷)은 태백산 정상에서 소도동쪽으로 뻗어 내린 계곡으로 태백산 중턱 용정에서 발원한 물과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이 합쳐져 개울을 이루며 흐르는데 약 3㎞로 경사가 완만하고 계곡에 반석이 많아 놀기 좋으며 계곡의 물은 차디차서 한 여름에도 손발을 1분도 담가두지 못한다. 계곡을 따라 많은 당집(신을 모셔 놓고 받들어 위하는 집)이 있어 당골마을(계곡)이라 하며 계곡 내에는 신선암, 병풍암등의 명소와 높이 50여 미터의 기암절벽이 솟아있는데 그 모양이 흡사 장군이 칼을 차고 서 있는 것 같은 형상이라 장군바위라 불린다. 공원 내에는 동양최대의 석탄박물관과 눈썰매장, 중요 민속자료 등 여러 관광자원이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오늘 하산예정시간인 15:30 정각에 후미일행 분들이 제2주차장에 발도장을 찍으면서 오늘도 원뻥 신세를 모면하였다. 제2주차장을 확보해 주신 권 희 성 기사님의 배려 덕분이다.
공원 내는 물론이고 축제기간 중이기 때문에 현장 하산행사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산행사는 귀로 버스 내에서 간소하게 치르기로 하고 귀로에 올랐다.
Ⅳ. 주요볼거리
<국조성전>
- 오늘은 후미와 동행한 탓에 국조성전 경내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국조성전을 비롯하여
제21회 태백눈꽃축제 행사개요와 석탄박물관에 관한 자료를 주요볼거리 자료로 소개하고자 한다.
- 국조성전은 우리 겨례의 시조(始祖)인 단군(檀君) 할아버지를 모신 성역(聖域)으로서 그 이름을 단군성전(檀君聖殿)이라 한다. 단기 4308년(서기1975년) 국조단군봉사회(國祖檀君奉祀會)가 구성되어 단기 4315년(서기1982년) 이 지역의 뜻있는 분들이 성금으로 성전(聖殿)을 창건하였다. 단기4326년(서기1993년)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의거 성전(聖殿)을 개축하여 국조단군봉사회(國祖檀君奉祀會)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10월3일 개천절(開天節)에 단군제례(檀君祭禮)를 지내고 있다. 성전(聖殿)의 규모는 전체 대지면적 2,370㎡에 성전(聖殿)이 62.4㎡ 기타 부대시설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전(聖殿) 안에는 단군(檀君) 할아버지의 영령(英靈)과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여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기리고 있다.
- 단군(檀君 또는 壇君)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자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시조로 추앙받았으며 대종교 등의 종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환검(桓儉)이라고도 한다. 단군은 직책으로 보이며 왕검, 왕험(王儉)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역사서 중에 하나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나오는 한민족의 으뜸가는 조상의 이름이다. 단군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세종실록, 동국통감 외기 등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에 아사달(阿斯達) 또는 평양에 도읍을 두고 고조선을 건국하여 1000여 년 동안 다스렸다고 전해지며 단군의 뒤를 이어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고 한다. 단군은 고조선의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1000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이미 단군은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누대에 걸친 국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 단군에 대한 기록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삼국유사이다. 삼국유사에는 중국의 역사서 위서(魏書)와 현전하지 않는 한국의 역사서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을 전하고 있다. 위서에는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두고 조선(朝鮮)을 건국했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에는 단군의 출생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간략한 생애가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단군은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며 후에 다시 아사달로 수도를 옮겨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가 조선에 오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돌아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으며 그때 나이가 1908세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단군은 ‘제단 단(壇)’으로 표기되어 있다.<자료출처 : 위키백과>
<제21회 태백눈꽃축제 행사개요>
- 제21회 태백산눈꽃축제가 태백산도립공원 일원에서 위와 같이 열리고 있다.
<석탄박물관>
- 석탄박물관은 태백시 문곡소도동 166번지에 위치하며 1997. 5. 27일 개관하였다. 우리나라의 주요 에너지 자원이었던 석탄의 모든 것을 한곳에 모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는 곳이다. 석탄의 탄생과 석탄산업의 발전, 태백의 희귀광석 그리고 고생대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변천사를 관람객의 입장을 고려하여 자동모니터를 이용, 이해를 빠르게 하고 있다. 7개의 실내 전시실과 지하전시실 1개, 옥외 야외 전시실 각 2개등을 갖춘 석탄박물관으로 규모면에서 세계최대이다. 특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여 빠른 속도로 실제 수직갱 1,000m를 내려가는 효과를 연출하며 갱도 내에서의 붕락사고 위험을 가상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보는 것 뿐 만 아니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기존 전시관의 전시 방식에서 탈피, 도입부에서부터 동적인 분위기를 유도하고, 주 관람 대상인 청소년 및 저학년 아동들의 심리와 행동특징 등을 고려하여 관람시설을 제작하였다.
- 탄전지대의 본산인 태백이 석탄산업 합리화에 의해 40개가 넘는 탄광 등이 모두 문을 닫고 겨우 한 두 개만 남게 되자 국가기간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던 석탄의 역할과 그 역사적 사실들을 한 곳에 모아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전시 연출하여 역사적 교육의 학습장으로 활용하며, 아울러 우리들에게 잊혀져가는 석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고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한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국내 최대의 석탄 박물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Ⅴ. 특기사항
- 오 경 희님 돼지고기볶음 안주 협찬
- 황 영 관님 소수 1상자 협찬
- 권 희 성기사님 당골제2주차장 주차 주선
Ⅵ. 산행을 마치고
<눈 조각 전시장>
- 화창하고 포근한 날씨와 함께한 태백산하에서의 눈부셨던 일상은 지난해에 이어 갑오년새해에도 이어졌다. 추우면 추운대로 각별한 추억을 남기지만 포근하면 포근한 대로 그 느낌이 새로움으로 각인된 일상으로 오래 기억하고자 한다. 기본코스와 병행코스를 구분하여 운영한 탓에 통제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정운영에 적극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의 수고로움 덕분에 안산, 즐산 할 수 있었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 오늘은 본인 스스로 카메라 없는 일상에서 해방되기도 하였고, 포토 존이나 목 좋은 명소를 지나면서 동행하신 분들에게 영상자료로 추억을 남겨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함께 맛보았다. 디카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나니 보는 것 또한 더 많았고 그 느낌 또한 남달랐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보고 느끼면서 마음과, 가슴과, 머릿속에 담는 것으로 만족한 일상이었지만 본인의 빈자리 메워주시느라 분주하셨던 고문님, 회장님, 부회장님께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모두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