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固城 李氏) /이교(李嶠)1301년(충렬왕 27년)∼1361년(공민왕 10년). 고려의 문신. 시호: 문열(文烈)
초명 : 군서(君偦) 자호 : 자 모지(慕之) 호 도촌(桃村)
이교(李嶠)1301년(충렬왕 27년)∼1361년(공민왕10년).고려의 문신. 시호: 문열(文烈) 문중자료
도촌공파 파조
판밀직사사감찰대부(判密直司事監察大夫) 이존비(李尊庇)의 손자이다. 원나라의 금부(金符)를 받고 만부장(萬府將)이 된 판삼사사(判三司事) 박지량(朴之亮)의 외손이고, 철원군 이우(鐵原君 李瑀)의 아들이며, 충혜왕의 배향공신인 정당문학 이조년(李兆年)의 사위이다. 충숙왕 때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시어사(侍御史) 등을 역임한 후 형부상서로 있던 공민왕 6년에 황태자 생일을 맞아 축하 사절단을 이끌고 원나라에 다녀왔다. 공민왕 9년에 어사대부로 있을 당시 국자감시를 관장하여 박계양 등 99명의 인재를 뽑았다. 아들 림과 희필이 무장으로 우뚝 서 홍건적과 왜구 소탕에 앞장섰고, 손녀딸이 우왕의 근비로 책봉되었다.
도촌 이교(李嶠)는 아버지 이우(李瑀)와 어머니 함양박씨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이 군서(君偦), 자는 모지(慕之), 호가 도촌(桃村)이며, 충렬왕 27년(1301)에 태어나 19세가 되던 충숙왕 7년(1320)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는 출사한 이래 당대의 명사 민사평(閔思平)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민사평이 도촌의 방문을 받고, 취중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지은 시 한 수가 전해내려 온다.
행촌의 아우가 도촌이니 / 杏村之弟是桃村
나를 형으로 섬겨 한 집안과 다름없네 / 事我爲兄似一門
취중에 만나 정이 더욱 두터워졌거니와 / 醉裏相逢情更重
대낮 창문가에서 깨어날 때 여전히 혼미하리라 / 午窓睡起尙昏昏
민사평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래 여러 관직을 거쳐 충혜왕 때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진 뒤 충정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던 공으로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 호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도촌 이교와 민사평이 각각 문과에 급제한 시기가 비슷하고, 그 이후 정치적 고비마다 동지적 입장을 취한 것으로 추정된다. 6살 연장이었던 민사평은 이교를 한 집안 동생으로 여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고백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행촌 도촌 양선생 유허비각 (경남 고성읍 서외리)
충정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그의 숙부이던 공민왕이 고배를 마시고 절치부심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정치적 격변기에서 민사평은 충정왕을 옹립하는 세력으로 활약했었고, 이후 충정왕의 사부(師傅)로 활약했었다. 이는 행촌 이암의 정치적 행보와도 일치한다. 충정왕 시절 이암이 정방제조를 맡았을 때 민사평 역시 함께 임명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촌 이교 역시 그의 형이나 절친했던 민사평과 함께 충정왕 세력으로 활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공민왕 6년에 “형부상서 이교를 원나라에 보내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라는 내용과 “공민왕 9년 9월에 어사대부 이교가 박계양(朴季陽) 등 99명을 뽑았다.”라는 《고려사》 기사가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공민왕이 즉위한 이후에도 그의 적극적인 정치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자료상으로만 본다면, 형부상서로 있을 당시 원나라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 후 어사대부를 역임하는 동안 지공거가 되어 공민왕 9년(1360)에 실시된 과거시험을 주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교는 문과를 통한 출사자였기에 개인의 능력과 그의 문재를 바탕으로 당시 조정 내에서도 매우 비중 있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공민왕 10년(1361)에 생을 마감했다. 일생을 함께 했을 민사평이 죽음을 맞이한 2년 후였다.
한편 고려말기 시험관과 급제자 관계는 좌주와 문생이라 하여, 부자간처럼 돈독한 관계를 지속하던 것이 관례였다. 그 관계는 주로 정치적으로 연결되었던 것이 보통인데, 이교가 공민왕 9년(1360) 당시 최고 성적으로 급제했던 박계양을 문생으로 두었으니, 이교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박계양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계양은 고려 말 3은(隱)의 한 사람이었던 이숭인과 같은 노선을 견지했던 사람이다. 창왕이 즉위한 후 이숭인은 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영흥군(永興君) 환(環)의 진위를 변론하다가 반대파 간관들의 탄핵으로 귀양 갔는데, 이 때 박계양 역시 이숭인과의 관계 때문에 함께 탄핵 받아 귀양을 갔다.
따라서 이교의 문생이던 박계양이 온건파 사대부였던 이숭인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하는 매우 돈독한 사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물론 박계양이 급제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교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박계양이 이숭인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 했다는 것은 이교의 영향력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숭인은 이교의 처 성주이씨와 가까운 친척(사촌 큰오빠의 손자)이기도 했다. 물론 이인임이 이교의 처조카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지만, 이인임과 이숭인은 정치적 입장과 노선을 각기 달리 하고 있기도 했다.
도촌 이교 선생 단소(경남 고성 회화면 웅곡)
이교는 충혜왕 배향공신이던 이조년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양가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세족으로 성장하여 고려말기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이조년의 선대는 성주 지역 호장 출신이었다. 이조년의 아버지 이장경은 좌시중부원군(左侍中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나 원래는 성주 지역 호장이었고, 조부 득희(得禧)와 증조 돈문(敦文) 역시 호장을 지냈으니, 대대로 성주 지역의 향직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이장경의 다섯 아들이 나란히 급제하여 출사하면서 크게 현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이조년이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었고, 이조년의 손자대에 이르면 좌시중 이인임을 비롯하여 이인복 등을 배출하는 등 고려 말 최고 반열의 가문을 이루었다.
이런 인연으로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이인임의 지원을 얻어 이교의 손녀이자 이림의 딸이 우왕의 근비가 되었다. 이렇듯 이인임이 고종사촌 이림의 딸을 왕실과 혼인케 하였던 것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계산도 함께 작용했으리라 생각되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이림을 비롯한 고성이씨 가문의 정치적 지원 또한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교의 두 아들 이림(李琳)과 이희필(李希泌)은 물론이고, 사위들도 대체로 문신보다는 무인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이 많다. 따라서 급제를 통한 상경종사와 문신으로 족세(族勢)를 크게 일으킨 선조와는 달리 이교의 자손들은 무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교의 장녀는 동지밀직(同知密直) 유번(柳藩 : 菁川君, 진주유씨)에게 시집갔다. 당시 고성 이씨와 진주 유씨와의 혼인관계를 살펴보면, 유번의 8촌인 유염이 이림의 사위였다. 그리고 이들 모두 공양왕 원년에 일어난 김저(金佇)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림과 함께 유배된 사실에서, 고성이씨 도촌계와 정치적 노선을 함께하는 동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림의 사위였던 유염(柳琰)은 조선개국 후에도 여전히 정치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교의 2녀는 검교시중 경보(慶補 :청주경씨)에게 시집갔다. 청주 경씨는 고려 말 최대의 문벌을 자랑하던 가문 중의 하나였는데, 그 중심에는 문하시중 경복흥(慶復興)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고성 이씨와 청주 경씨 사이의 혼인관계를 보면, 이교의 사위가 된 경보는 경복흥의 아들이었고, 이희필의 사위가 된 경습은 경보의 조카이자 경복흥의 손자였다.
공민왕 때 신돈의 등장으로 경복흥이 수문하시중에서 밀려나자, 이희필은 경복흥과 함께 신돈 제거 모의를 함께 할 정도였다. 따라서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압박이 도촌계에 밀려들자, 이교의 사위였던 경보에게까지 파급이 미쳤다. 그는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에다 회군공신(回軍功臣)이기까지 했지만, 윤이·이초 옥사에 연루되어 결국 유배를 당했던 것이다.
이교의 3녀는 판흥농사사(判興農寺事) 정숙(鄭璹 : 서산정씨)에게 시집갔다. 정숙의 아버지는 정세충(鄭世忠)인데, 그는 신종 때 호부시랑으로 금나라에 천수절(天壽節) 축하 사절로 다녀왔고, 충혜왕 초에는 행촌 이암과 함께 전주(銓注)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정숙의 증조는 정인경(鄭仁卿)으로 몽고어 통역관으로 있으면서 가문을 크게 일으켜 《고려사》 열전에도 등재되었던 인물이다.
특히 정인경은 동녕부를 재차 고려에 귀속시키는데 큰 공을 세워 관직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던 인물이었는데, 충렬왕 5년에는 이존비와 함께 원나라 황제 생일을 축하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따라서 양가의 접촉은 이미 선대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교의 4녀는 문하찬성사 문달한(文達漢 : 남평문씨)에게 시집갔다. 문달한은 평장사 문극겸(文克謙) 6세손으로, 『고려사』 열전에도 입전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우왕 때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찬성사에 올랐고, 공양왕 때에는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지만, 이림의 척족이란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귀양가서 죽었다. 따라서 이교의 넷째 사위였던 문달한 역시 그의 처족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 하다가 생을 마감한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