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스테메 Episteme 认识型
두 명의 난장이가 등장하고 개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이 그림은 세계미술사에 기록된 명작 중의 하나로 ‘회화의 신학’, '예술의 철학', ‘회화로 무엇을 나타낼 수 있는가를 자신감 있고 치밀하게 표현한 벨라스케스의 걸작’이라는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실재와 환상, 인간과 사물의 관계가 불확실한 것 같으면서도 강렬하게 드러난 이 작품은 1656년 스페인의 벨라스케스가 완성한 [시녀들(Las Meninas)]인데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을 남긴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1599 - 1660년)는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M. Foucault, 1926 - 1984)의 [사물의 질서] 첫 장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같은 제목인데 이렇게 시작한다. ‘화가는 그의 캔버스 약간 뒤편에 서 있다. 그는 모델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첫번째 붓을 움직이지도 않았겠지만 마치 마지막 붓으로 마무리하려는 것과 같이 보인다.’ 이어 푸코는 섬세하게 화가와 캔버스와 작품의 구도와 인물들에 대하여 분석하고 설명한다. 다소 기괴하기도 하고, 환상적이기도 하며, 사실적이기도 한 이 특별한 작품을 분석하면서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에피스테메는 그리스어 ‘안다(to know)’ 또는 ‘인식한다’라는 동사 επιστήμη에서 유래했는데 기술과 과학의 어원인 techne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또한 에피스테메는 고정된 인식과 편견이라는 의미의 독사(doxa)와 비교되는 개념이다.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지식의 근원이 되는 선험적인 것(a priori) 또는 지식의 담론이라고 말했다. 또한 에피스테메는 한 시대의 인식론적 틀이며 무의식에 잠재하여 보이지 않는 원리이다. 이처럼 푸코는 ‘사람들은 왜 시대마다 달리 판단하고 인식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사물/담론에는 질서가 있으며 그 질서의 틀 속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에는 유사성의 에피스테메가 있었고 고전주의 시대에는 표상의 에피스테메가 있었으며 근대에는 실체의 에피스테메가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푸코는 이 개념을 과학적이지만 과학은 아닌 인식의 장치(apparatus)라고 보면서 이데올로기를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사물의 질서(The Order of Things)]는 출간될 당시의 제목이기는 하지만 원래는 [담론의 질서]였다. 푸코의 책 출간 직전에 같은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에 푸코는 [사물의 질서]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후 많은 학자들이 사물(thing)과 담론(discourse)의 개념에 대해서 수차례의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에서 보듯이 사물은 담론이나 정신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사물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고정되었다. 푸코는 모든 사물/담론에는 표면적으로 드러나거나 표상되는 현상이 있고, 내면에는 그런 현상을 가능케 하는 정신이나 사상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푸코는 현상과 본질을 연결해 주는 인식과 인지의 방식을 에피스테메라고 명명했다. 그러니까 에피스테메는 사물/담론의 관계들과 그 관계가 성립하는 판의 문화적 유사성과 등가성을 설명하는 또 다른 에피스테메다.
푸코는 벨라스케스의 [하녀들]을 통하여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읽어내고, 담론의 질서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치밀하게 분석했다. 하지만 에피스테메는 눈밭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햇빛에 녹으면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 시대의 내면과 심층이기도 하다. [사물의 질서]의 부제인 ‘인문과학의 고고학’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과 담론의 에피스테메는 푸코 철학의 본질이다. 한편 에피스테메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paradigm)과 비교된다. 패러다임이 과학의 구조나 틀을 의미하는 반면 에피스테메는 과학담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담론이다. 또한 에피스테메는 시대를 관통하는 근원이자 원리이고 법률이자 규칙이다. 하지만 두 개념은 모두 가스통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균열(epistemological rupture)의 영향을 받았다.
김승환(충북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