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멜 수도회
이스라엘 서북부 갈릴리 지방의 갈멜 산에서 베르톨더스(?~1195)가 1154년 창립된 가톨릭의 수도회이다.
갈멜 산은 이미 구약시대에 대예언자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가 기도의 장소로 선택했던 곳으로, 초대교회 때도 이들 예언자들의 모범적 생활을 따르려는 열성적인 은수사(隱修士)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6세기에는 이미 수도원이 세워졌다.
122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정식으로 회칙을 인정받았고 1247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로부터 원초적 은수 정신과 사도직 실천을 겸비한 탁발수도회로 최종 승인되었으며 여자수도회도 설립되었다. 16세기에는 개혁운동이 일어나 개혁을 따르는 맨발의 갈멜 수도회와 개혁 이전의 규칙을 따르는 완화된 갈멜 수도회로 양분되었다. 한국에 진출해 있는 가르멜수도회는 남녀 모두 맨발의 갈멜 수도회(개혁 갈멜)에 속한다.
공동생활을 하면서 기도·절식(節食)·침묵을 통하여 사랑의 정신에 철저할 것을 목적으로 한 관상(觀想) 수도회로서, 수도사 가운데는 많은 신비 사상가가 배출되었고, 가톨릭의 신비사상에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16세기 에스파냐가 낳은 아빌라의 성(聖) 테레사(1515∼1582)나 십자가의 성(聖) 요한이 유명하다. 세계 각지에 수도원을 가지고 있으며, 남자 수도회는 수천 명, 여자 수도회는 1만 수천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갈멜 수도회도 프란체스코 수도회, 삼위일체 수도회, 튜튼 기사단, 하복회 등과 같이 대표적인 탁발 수도회 중 하나이다. '탁발(托鉢)'이란 개념은 성 프란체스코의 청빈한 수도생활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가 죽은 후 유럽 전역과 아시아로 급속하게 전파되어 13세기에 이미 서유럽 각지에 수도회가 설립되고, 수사(修士)의 수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의 청빈사상을 이어받아 수도사들 자신이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탁발에 의존하였으나, 수도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노동만으로는 생활할 수 없게 되자 갈수록 탁발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후 탁발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화해를 거듭하면서 정주적(定住的), 관상적(觀想的) 생활을 버리고 탁발 행각에 나섬으로써, 설립 당시의 기본 이념은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시민 속에 파고들어가 시민과 더불어 일체가 되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의 경우 1939년 프랑스에서 나온 가르멜 수녀 3명이 서울특별시 혜화동에서 처음으로 가르멜 생활을 시작하였고, 수사들은 1974년 8월부터 활동하였다. 갈멜 수녀원은 8개이며, 수사들은 5개 공동체에 48명이, 재속회는 21개 단위 재속회에 3,000명이 넘는 회원이 있다.
갈멜 산(Mt. Garmel)
이스라엘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불쑥 튀어나온 부분이 갈멜 산 지역이다. 높이는 보통 500m, 폭이 10km로 뻗은 산맥의 산악지대 전체를 갈멜 산 지역이라 부른다. 갈멜 산은 제일 높은 곳이 해발 546m, 엘리야 교회가 있는 무흐라카는 해발 486m로 샤론과 이스르엘 두 평원 사이에 높이 솟은 산이다. 수목이 우거졌고, 산 아래 기손 강이 흐르며, 지중해까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갈멜 산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포도원’이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은 갈멜 산이 아름답고(아가 7:6, 이사 35:2) 풍요한(예레 50:19) 명산이라고 기록했다. 갈멜 산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할 때 아세르 지파에 속했으며, 여호수아가 이 산중에 있던 ‘요크느암’ 왕을 격멸했다(여호 12:22).
북 왕국 이스라엘 아합 왕은 시돈 왕(지금 레바논)의 공주인 이세벨과 왕실 결혼을 했다. 그녀는 바알 신을 섬기는 광신자로, 왕권을 이용하여 자기가 믿는 신을 이스라엘에 확산하여 종교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예언자 엘리야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BC 860년 바알 신 중심지였던 갈멜 산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참신과 거짓 신을 분별하는 대결에서 승리하는 동시에 키손 천에서 저들을 전멸하였다(1열왕 18:19~40). 그 후 엘리야가 일곱 차례 기도하여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지중해에서 떠올라 큰비가 내리기도 했다(1열왕 18:41~46).
엘리야가 이 산에 있을 때 아합 왕의 아들 아하즈야가 엘리야를 잡으러 50부장과 50명을 두 번 보냈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죽였다(2열왕 1:9~12). 엘리야가 승천한 후 엘리사가 잠시 이 산에서 머물렀으며, 수넴 여인을 만나 함께 그 집에 가서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기도 했다(2열왕 2:25, 4:25~35).
엘리야가 단신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대결하여 승리한 곳은 갈멜 산줄기 중 무흐라카(Muhraqa)라 부르는 산 정상이다. 무흐라카는 ‘불의 장소’ 또는 ‘불이 내려온 곳’이라는 뜻이다.
무흐라카 산에는 오른팔을 높이 들어 칼끝이 휘어진 칼자루를 잡고 서 있는 엘리야 석상이 있고 그 받침대 앞면에는 라틴, 아랍, 히브리 세 언어로 엘리야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갈멜 산줄기를 따라 지중해 방향으로 내려가면 전망 좋은 위치에 갈멜 수도원이 있다. 엘리야 동굴이라고 전해지는 동굴을 중심으로 세워진 수도원이다.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이 동굴을 중심으로 갈멜 수도회(Carmelite Order)가 생겼고 그 후 수도원 건물이 섰다.
오늘날 이 수도원은 전 세계 갈멜 수도회의 중심이다. 엘리야 동굴은 엘리야가 아합 왕을 피해 숨었던 곳이며, 아기 예수와 그 가족이 애굽에서 돌아올 때에 이 동굴에서 지내다가 나자렛으로 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