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이 주신 목소리로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던 성악가 배재철..
한 때 그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성악가였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갑상선암수술..
배재철 교수는 목소리를 잃은 비운의 테너가 돼버렸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인생이 이것으로 끝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좌절을 기적으로 만든 하나님의 휴식시간이었다
잃어버렸던 목소리로 인해 아름다운 천국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배재철교수...
기적을 만드는 오페라 카수/배재철 지음
2009년 11월 / 252쪽 / 12,000원
▣ 저자 배재철
한양대 졸업 후 이탈리아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했다. 유럽의 여러 성악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거듭하며 데뷔했다. 헝가리 국립 오페라 극장, 빌바오, 핀란드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벌, 비스바덴 오페라 하우스, 자르브뤠켄 오페라 하우스, 뒤셀도르프 라인 오페라 극장 등에서 <토스카>, <라보엠>, <나비부인>, <루치아>,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등을 부르며 오페라의 본고장에서도 대성공을 거둔다. 일본에서는 2003년 9월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플라시도 도밍고 주최 콩쿠르 입상, 도밍고를 감동시킨 세계 최고의 테너로 급부상하며 ‘아시아에서 100년에 한번 나오는 목소리’로 찬사를 받았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힘든 시련과 고난을 겪은 성악가 배재철과 그를 지켜준 사람들이 엮어가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뛰어난 가수에서 멋진 예술가로 다시 태어난 그의 삶의 이야기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2005년, 그는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갑상선 암에 걸린다. 오페라의 본고장인 유럽의 여러 성악 대회와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던 그가 영국 《더 타임즈》에서 ‘아시아에서 100년에 한 번 나오는 목소리’로 찬사를 받던 바로 그 시기였다. 암 적출 수술을 하면서 소리를 낼 때 필요한 3가지 주요 신경이 모두 떨어져 나간다. 음악 역사상 이렇게 가혹한 시련을 겪은 성악가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련을 극복한 오페라 가수 역시 없을 것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목소리를 잃어버린 그는 많은 일본 팬들의 지원을 받아 교토대학교 잇시키 노부히코 교수의 집도로 성대기능 회복수술을 받는다. 힘든 재활훈련을 받는 모습이 한일 양국에서 다큐멘터리 <NHK 하이비전 특집>, <프리미엄 10>, <KBS 스페셜> 등을 통해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했다. 2008년 기적적으로 목소리를 회복, 재기에 성공한 그는 기적의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로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1부 세계 정상에 선 한국인 오페라 가수
2005년 독일, 테너로서 절정을 맛보다
“100년에 한 번 나오는 목소리”
한국으로의 금의환향
일본 무대, 와지마와의 만남
2부 나를 키운 1만 시간의 연습 시간
<누가누가 잘하나>로 등극하다
교회, 내 연습실이자 놀이터
교수 제자 누르고 1등 하겠다
군대에서의 발성 연습
1등 졸업의 꿈을 이루다
나를 키운 1만 시간의 연습
이탈리아 유학 생활
3부 정상에서 찾아온 암
공연 중에 목에 이상이 오다
생명입니까? 목소리입니까?
독일 극장의 기다림
다시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와지마, 독일로 날아오다
4부 내 목소리를 듣고 울던 일본 팬들
꿈의 목소리를 잃게 할 수 없다
세계 최고의 의시에게 성대복원 수술을 받다
NHK 방송, 다큐멘터리 찍다
암에 걸린 지금이 좋다
다시 무대에서 노래를 할 줄은...
5부 기적을 만든 힘
성대가 마비된 성악과 강사
“일본에만 가면 나는 여전히 가수”
스스로에게 했던 말, 참 장하다
영혼으로 노래하는 가수
1부 세계 정상에 선 한국인 오페라 가수
100년에 한 번 나오는 목소리
“브라보! 브라보! 브라보!” 극장을 가득 메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2005년, 독일 자르브뤼켄 극장, 베르디의 <돈 카를로> 초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기대 이상으로 공연도 잘되고 관객들의 반응도 폭발적일 때 그 기쁨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가 없다. 분장실에서 분장을 지우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 소리가 예전과 확실히 차이가 나. 확신에 찬 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 같아. 아, 이런 게 바로 내가 추구하던 소리가 아닐까?’ 수많은 오페라 무대에 올랐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마치 산악인이 에베레스트나 히말라야를 등반한 것과 같았다.
2003년 영국 카디프 극장에서 했던 <라 보엠> 공연 당시 영국의 《더 타임즈》에서 내 목소리에 대해 극찬을 한 바 있다. “로돌포의 아리아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고 ‘하이 씨 High-C’ 고음을 완벽하게 소화한 테너이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다.” 내 음악 인생 최고의 극찬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노래를 해오면서 나에겐 단 한순간의 만족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처음으로 내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바야흐로 날개를 달고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동유럽과 북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폭넓은 활동을 펴나갔다.
한국 무대는 예술의 전당에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으로 데뷔한 이후 ‘떠오르는 신예’로 평가받으면서 해마다 한국에 들어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한국 무대에 서는 것은 유럽 무대와 달리 긴장감이 점점 커졌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암으로 쓰러지기 네 달 전인 2005년 5월 잠실올림픽 홀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오페라 아리아를 발레 공연과 함께 들려주는 독특한 공연이었다. 발레리나 강수진 씨와 함께 한 공연이라 독일에서 활동하던 내게는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해주었다.
일본 무대, 와지마와의 만남
와지마 토타로. 내게 전화를 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다. “선생님은 제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입니다. 저는 일본 도쿄에서 작품을 하기 위해 주역 테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창한 이탈리아어로 일본에서 꼭 한번 <일 트로바토레> 작품을 공연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저는 이번 공연에 메조소프라노 피오렌차 코소또 선생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이미 출연을 허락하셨고 남자 주역을 찾아 수소문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재고의 여지없이 하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코소또 선생은 마리아 칼라스와 동시대에 활동한 세계적인 성악가로, 성악가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대가였다. 와지마라는 기획자가 어떤 사람이길래 코소또 선생을 무대에 세울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일본에서의 첫 공연은 남달랐다. 갈라 콘서트 형식으로, 오페라 의상을 입지 않고 각 장면들에 나오는 아리아를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스탠드 오페라였다. 색다른 무대였다. 코소또 선생과 한 무대에서 노래를 하면서 나는 계속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뜨거운 열정과 예순 여덟의 나이에도 호흡을 잃지 않을 정도로 꾸준한 연습의 흔적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실력가가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델 모나코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 ‘골든 트럼펫’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테너에 내 목소리를 비유해 주신 것이다. 와지마도 첫 공연을 마친 나에게 극찬을 했다. “<일 토로바토레>의 주인공 만리코를 소화할 수 있는 테너는 극히 드뭅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일본에서의 공연은 해외 어느 무대에서보다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평론가들도 좋은 평가를 해 주었다. 사실 그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와지마의 탁월한 기획력 덕분이었다. 와지마는 전형적인 공연기획자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이번 공연도 무대를 떠난 코소또 선생에 대한 애정으로 기획했다고 한다. 와지마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노래와 오페라,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해 한층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와 성악가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신뢰는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밑바닥의 뜨거움까지 끄집어내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래 이면의 세계와 의미에 대해 눈을 뜨게 해주었다.
와지마에게 음악은 특별한 의미였다. 그에게 음악은 치료제였고 위로자였다. 그리고 행복을 느끼게 해준 매개체였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와지마는 힘들거나 외로울 때 오페라 음반을 들으며 상처를 달랬다고 한다. 아버지가 준 상처를 아버지가 두고 간 전축과 음반으로 달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가 게이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음악기획사 일을 본업으로 삼은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음악에서 발견한 치유와 행복의 경험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다는 열망이 그가 일을 하는 이유였다. 그리고 나를 아끼는 이유였다.
2003년의 첫 만남부터 2005년까지 단독 콘서트가 여러 차례 거듭되면서 일본에서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40대 이상이었다. 위로와 용기와 격려가 필요했던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아리가또, 아리가또” 하며 인사를 해 주었다. 그들의 따뜻한 눈길과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나는 무언가를 느꼈다. 차가울 것만 같았던 일본, 그리고 일본인. 그들은 결코 차갑지 않았다. 내 마음을 적시고도 남을 만큼 사랑이 가득한 사람들이요, 사랑이 필요한 땅이었다.
2부 나를 키운 1만 시간의 연습 시간
<누가누가 잘하나>로 등극하다
나는 흑석동에서 자랐다. 우리 동네는 잘살지도 않았고, 교육열이 높지도 않아서 나와 내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이 아니라 교회에서 모였다. 늘 어울려 놀던 친구들도 노래를 좋아해 교회에서 어린이 중창단까지 만들었다. 어느 날 큰형과 같이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외국 사람들이 근사한 무대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다. 멋있는 옷을 입고 화려한 조명 밑에서 노래하는 그 모습은 나에게 그야말로 ‘신세계’ 같아 보였다. 난생 처음 듣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들게 하는 깊은 목소리가 내 온몸을 감쌌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이탈리아의 호세 카레라스의 콘서트였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편이 아니던 내가 동네에서 유명해진 사건이 생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노래만큼은 누구보다 잘한다는 자신감이 슬슬 생길 무렵이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노래경연대회를 했는데 나도 꼭 그 무대에 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친구와 함께 방송국에 갔다가 본선까지 진출한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흰 물결이 밀려오는 바닷가에서”로 시작하는 동요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심사위원 중 한 분이 “이 어린이는 소리가 좋아서 장래에 성악가가 되면 좋겠습니다”라고 심사평을 했다. 심사평도 기분이 좋았는데 월말대회와 기말대회에서 장려상까지 받은 것이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는 그룹과 공부보다는 예능 기질이 있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보면 열등감이 생기긴 했지만, 노래만큼은 내가 잘하니까 당당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사셨던 부모님은 내게 레슨을 시켜주시지는 못했지만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으셨다. 돈이 없어도 언제나 열심히 살아가며 만족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학교보다는 교회를 활동무대로 해서였는지 공부 못한다는 소리보다는 노래 잘한다는 칭찬을 받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교회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존감 그리고 부족한 것보다는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선물해 주었다.
나를 키운 1만 시간의 연습
1988년에 나는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학생이 되었다. 대학 문턱을 밟기 전까지 음악과 노래는 내게 꿈의 세계였다. 행복한 꿈을 꾸는 것처럼 기분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입학과 동시에 음악은 내게 처절한 현실이 되었다. 콩쿠르가 뭔지도 모르는 채 음대에 다니는 큰형 친구에게 달랑 두 곡 레슨을 받고 합격한 나와 달리 동기생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레슨을 받았고 고등학교 시절 이미 한두 번 콩쿠르에 출전한 경험들이 있었다. 나는 뒤늦게나마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무슨 말인지도,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연습을 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레슨에 꾀를 부리거나 연습을 게을리하거나 빠진 적이 없었다.
빡빡한 연습을 하면서도 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데는 임현수라는 친구의 도움이 컸다. 혼자 자취를 하던 현수에게는 LP 음반과 전축이 있었다. 그 전축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가곡을 들으며 현수와 밤을 세워 나눈 이야기들은 그 어떤 이론 수업보다 진지했다.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방에서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라면을 끓여먹으며 음악평론가가 무색하리만큼 밤새 진지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연습이 쌓일수록 내 목소리를 잘 분간할 수 있었다. 아침의 목소리, 오후에 땀 흘리며 나와 싸우는 목소리, 저녁나절 온종일 땀 흘리며 지켜 온 연습실을 울리는 충만한 목소리. 그 섬세한 차이를 내 귀가 듣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아는 미세한 차이였다. 지독한 연습벌레만이 알 수 있는 땀 냄새, 그 달고 기분 좋은 냄새가 지금도 아련하다.
2학년을 마치고 군 복무를 했는데 발령을 받은 곳이 우연히도 공군기지의 비행기 엔진 테스트를 하는 초소 옆이었다. 엔진소리가 머리가 멍할 정도로 대단했다. 소리를 크게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나는 엔진 소리에 뒤질세라 발성연습을 했다. 2년의 기간이 낭비되는 시간인 것 같아 불안했는데 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연습실을 독차지했던 셈이었다.
복학을 하자 군대에서 터득한 호흡과 트인 목소리로 연습에 자신이 생기던 차에 기회가 왔다. ‘이대웅 콩쿠르’였다. 지금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인정받고 있는 대회로 ‘한국성악경연대회’라고도 불린다. 콩쿠르에서는 대개 교수들이 가르치는 4학년 제자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나는 교수가 아닌 강사의 제자였고 3학년이었음에도 수상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3년에는 제33회 ‘동아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했다. 여기에서의 우승은 장래 보증수표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들은 1만 시간의 연습량을 채운 사람들이라는 내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뒤돌아보니 정말로 1만 시간의 땀과 눈물을 쏟았던 것 같다.
나는 졸업과 함께 단돈 70만 원을 손에 들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학비를 받지 않는 베르디 음악원을 선택했는데, 나는 이곳에서 아내를 만났고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3부 정상에서 찾아온 암
공연 중에 목에 이상이 오다
동양인으로서 에이전트에게 에이스 대우를 받으며 계속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유럽 무대의 기대주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던 2004년, 우리 가족은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독일의 자르브뤼켄으로 갔다. 이 도시는 규모에 비해 음악적 관심이 풍성하여 다양한 오페라들이 시립극장을 통해 공연되고 있었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이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자르브뤼켄 극장으로 오면서 나는 어느 때보다 왕성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극장에서 나의 위치는 독보적이어서 극장에서나 시민들에게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오페라 가수로서 더없이 좋은 환경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듬해인 2005년, 극장은 베르디의 작품 <돈 카를로>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극장에서 서정적인 목소리를 갖고 있는 테너는 나밖에 없어서, 소프라노는 2명이 캐스팅되어 서로 번갈아 할 수 있었지만 테너는 나 혼자 소화해야 했다. 연습도 혼자 다 감당해야 해서 육체적으로 힘들고 심적으로도 계속 긴장되었다. 오프닝 공연에 이어 두 번째 공연까지 무사히 마치고 세 번째 공연을 올리기 직전, 내 목에 이상이 왔다. 목이 아픈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고음이 나오지 않고 베이스 음색이 나왔다. 너무 무리를 했나 싶었지만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보면 알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혹이 있군요. 일단 초음파 검사부터 해야겠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재촬영과 조직검사를 했고 결과는 바로 나왔다. 의사 앞에 앉아 있는데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갑상선암입니다.” 설마 했는데 막상 듣고 나니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수술은 가능합니다. 단, 수술을 하게 되면 목소리가 상할 수도 있습니다.” 의사는 목소리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경우라고 했다.
3~4시간 예정이던 수술은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처음 초음파를 찍었을 때는 혹의 크기를 3~4cm로 추정했는데 수술할 때 열어보니 7cm여서 의사들도 놀랐다고 한다. 암이 림프까지 전이되어 림프를 다 걷어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오른쪽 성대의 신경과 오른쪽 횡경막의 신경을 절단했다. 수술실 밖에서 3시간이면 끝날 줄 알고 기다리던 아내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수술이 끝나지 않자 불안했다고 한다. 수술실 문이 열리면서 의사가 아내를 찾았다. “당신 남편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목소리가 중요합니까?” 아내의 대답은 당연히 나의 생명이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아무것도 모른 채 마취되어 있던 내게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소리를 잃은 오페라 가수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생각하는 것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곰곰이 돌아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문제는, 노래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노래 말고는 그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 자락 희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비인후과 치료와 음성재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치료라고는 하지만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회복이 되고 있는지를 점검받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담당 의사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무너진 성대를 세울 수 있는 수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성대 수술에 관한 자료를 찾던 중 한국인이 쓴 논문에서 ‘이싯키 타입 1, 2, 3’이라는 용어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그 수술의 이름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싯키라는 이름으로 보아 일본인이 개발한 수술법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돌연 마음이 바빠졌다. 하루하루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정도로 낙담 속에서 지내던 것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수술법을 만든 일본인 의사에게 수술을 받으면 성공률이 더 높지 않을까?’ 내 머릿속에선 이미 일본인 의사와 면담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다. 설령 성공률이 낮더라도 그 창시자에게 가서 수술을 받고 싶었다.
와지마, 독일로 날아오다
평소 누구보다 나를 잘 이해하고 격려해 주던 와지마였기에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 그에게 화상으로 전화를 걸었다. “와지마! 나야.”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성대가 도와주지 않았다.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는 내 목소리를 듣던 와지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충격이 꽤 컸던 모양이었다. 와지마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재철, 기다려. 내가 갈게.” 나는 와지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이리로 오겠다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 테니 가서 얘기하자.” 더 이상 대화가 힘들다는 것을 알았는지, 와지마는 그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와지마가 온다고 한다. 독일로.
‘그래, 와지마라면, 와지마라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알 수 없는 강력한 기대감이 밀려왔다. 짧은 통화였지만 그 동안 와지마가 내게 보여주었던 여러 모습들이 지나갔다. 와지마는 늘 나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해 주었다. 내게 와지마 같은 음악적 친구가 있다는 것이 더없이 든든했다. 독일로 오겠다는 그의 한마디는 와지마가 독일까지 와야 하는 이유를 나 스스로 묻고 또 묻게 만들었다. 와지마가 늘 하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면, 세상 모든 만남에도 이유가 있다고. 일본인인 그와 한국인인 나. 그와 나를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대입시켜 보기도 처음이었다.
4부 내 목소리를 듣고 울던 일본 팬들
꿈의 목소리를 잃게 할 수 없다
“와지마! 정말 왔구나. 네가 오다니 정말 고맙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어. 전화 끊고 바로 일 정리하고 온 거야.” 와지마는 띄엄띄엄 말하는 내 목소리를 듣자 추운 겨울날 어린아이 혼자서 밖에 나가 떨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만나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단다. 와지마는 마음이 나보다 더 바빠 보였다. 추위에 떠는 아이 같은 나를 어떻게든 따뜻한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데 온 신경을 쏟는 듯했다. “고맙다, 와지마!”
“재철!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는 뭔가 큰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 어려서부터 나는 그런 일들을 많이 겪었어. 때로 그 목적이 너무 멀어 안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은 반드시 기적을 낳는다는 걸 알아. 이런 일이 너한테 일어난 데는 큰 목적이 있을 거야.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해. 힘내. 내가 도울게!” 그날 밤, 와지마는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일본에 전화를 걸어 수술을 창시한 이싯키라는 의사를 수소문했다. 다행히도 그 의사를 찾을 수 있었고 직접 통화도 했다. 그리고 수술 여부도 알아보았다. 그의 진심은 언제나 나를 감동시켰다. 와지마는 일본으로 가서 의사를 만나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세계 최고의 의사에게 성대복원수술을 받다
내가 일본에 간 것은 수술만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수술비와 체재비 등을 고민하던 내 사정을 잘 아는 와지마는 정말 ‘다 알아서’ 해주었다. 음악가로서의 내 존재를 일본에서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며, 작은 대화형 콘서트를 기획했다. 일본의 유명 여배우들과 함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라는 주제로 낭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와지마는 이 콘서트의 입장료와 이전에 했던 일본 공연 영상을 담은 DVD를 판매해 일부를 치료비로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 음악회는 나에게 음악가로서 다시 한번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도대체 내게 일본은 무엇일까. 일본에서 내가 얻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드디어 수술 날이 되었다. 이싯키 박사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나에게 몇 가지 주지사항을 일러주었다. “당신이 예전에 내던 소리를 되찾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마세요. 수술을 한다고 해서 성대가 완전히 복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수술실에는 와지마가 같이 들어가 주었다. 이싯키 박사가 와지마에게 부탁한 것이다. 그동안 내 목소리를 들어온 와지마에게 수술 중간 중간 내 목소리의 톤과 소리를 들으며 가장 좋은 소리가 나도록 수술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부분 마취를 하고 있어 의식과 모든 감각이 살아 있었다. 몹시도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에 와지마가 옆에 있어 마음이 진정되었다.
한창 수술을 집도하던 이싯키 박사가 나에게 노래를 해보라고 했다. 인공적으로 오른쪽 성대를 늘여서 왼쪽 성대와 붙여놓은 후였다. 그 순간 하나님께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내게 노래할 수 있는 새로운 목소리를 주신다면 하나님께 가장 먼저 그 목소리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아,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내 새로운 목소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순간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나는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다. 수술실에 나지막이 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음정과 소리가 어느 정도 힘있게 나왔다. 성대마비뿐 아니라 횡경막 신경까지 끊어져 발성도 호흡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 노래라 나는 가슴이 벅차 올랐다. 박사님은 내가 호흡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비된 횡경막이 회복되고 있다며 기적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계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NHK 방송, 다큐멘터리 찍다
독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와지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철! 좋은 소식이야. NHK에서 너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겠대.” 그의 목소리가 흥분된 것 같았다. 일본 최고의 방송국에서 곧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성대복원 수술 과정은 이미 촬영돼 아침 프로그램에 15분 정도 소개되기도 했다.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겁자 NHK에서 아예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와지마는 내가 달리 준비할 것은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저 하루하루 노래 연습하는 것과 점점 나아지는 목소리를 카메라에 잘 담으면 된다고 격려했다. 포기하지 않는 와지마의 후원이 나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NHK 촬영팀이 독일로 왔다. 난생 처음 나의 24시간이 숨김없이 카메라에 담기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테너가 되고 싶어 수많은 무대에 섰을 때도 텔레비전 방송이 24시간 나를 촬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절망적이고 보여줄 것이 없는 이 시기에 누군가 나의 삶을 보겠다고 하니 아이러니였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카메라는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아무도 날 지켜봐 주지 않는다면 피를 쏟으며 소리를 내는 것 같은 나의 지독한 싸움이 너무 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 렌즈가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일본 팬들의 눈망울 같았다. 와지마가 고마웠고 일본인들의 말없는 사랑이 고마웠다. 내 노래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나에게 관심을 보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2007년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 와지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NHK에서 촬영한 2년간의 다큐멘터리가 12월 29일에 2시간 동안 방송된다는 것이었다. 2년간 힘겹게 지탱해온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방송은 2008년 6월 한국의 KBS가 <그의 잃어버린 목소리 - 테너 배재철의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KBS 스페셜’ 60분 프로그램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5부 기적을 만드는 힘
성대가 마비된 성악과 강사
2007년 12월 나는 한양대에서 성악과 강사 제의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바리톤 고성현 교수님이 마련해 주신 자리였다. 독일에 공연차 오셨을 때 내 얘기를 듣고 도와줄 방법을 이리저리 고민하셨다고 한다. 나를 도와줄 또 한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나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를 잃은 후 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예전처럼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제자들에게 잊지 않고 가르치는 것이 있다.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네가 노래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연습하도록 해봐.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서 노래하는 게 달라지는 걸 느낄 거야.”
한편 한국으로 돌아오자 와지마하고도 한층 가깝게 느껴졌다. 그는 나의 재활을 돕는 재기 무대를 열어주었다. 일본에서 나는 ‘목소리를 잃은 비운의 가수’가 아니었다. 나에 대한 와지마의 기대도, 객석에서 나의 노래를 기다리는 팬들도 그러했다. 객석에 앉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눈을 마주칠 때마다 나는 말없이 전해주는 그들의 격려를 느낄 수 있었다.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많이 기다렸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세계 어느 무대에서 나를 이토록 기다리고 있을까. 평범하기 그지없는 성악가와 팬들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친밀할 수 있을까.
“일본에만 가면 나는 여전히 가수”
그 콘서트 이후로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내 회복의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하나님은 나를 엄청난 무대로 부르셨다. 다시 일본이었다. 그동안 일본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은 와지마가 진행한 일이었으나 이번 일은 그와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나를 부른 무대는 우리나라의 온누리교회와 일본 현지 교회가 연합하는 “러브소나타”라는 문화행사 형태의 전도집회였다. 온누리교회는 CGN 채널을 통해 온라인과 위성으로 이 집회를 방송한다고 했다. 오페라를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찬송가도 제대로 부를 수 없는 상황에서 교회집회에 나가고 싶지 않았으나 나를 또 일본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2008년 8월, 피시피코 요코하마 국립대 홀에서 열린 <요코하마 러브소나타>는 5천 명으로 예상했던 행사에 6천 명이 참석해 빈자리가 없었다. 한국에서 주최한 문화행사를 보러 온 많은 일본인들로 열기가 뜨거웠다. 와지마는 언제나처럼 나를 격려하러 찾아와 주었다. 나를 향해 맞춰진 조명 아래서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을 모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에 전율을 느꼈다. 예전처럼 힘있는 목소리와 긴 호흡으로 부르지 못하고 음도 많이 낮춰야 했지만,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불렀다. 찬양의 가사에 실린 순전한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닿기를 기도하면서 노래했다.
내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와지마가 다시 한번 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말해주었다. 오코하마에 이어 아오모리와 나가사키에서 열린 세 번에 걸친 ‘러브소나타’ 무대를 통해 나는 달디단 눈물을 흘렸고, 와지마는 하나님에 대해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일본과 한국의 상처 난 관계를 사랑으로 회복시켜 보려는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님과 교인들의 노력이 와지마에게도 고맙게 느껴진 것 같았다. ‘러브소나타’라는 말은 성악을 하는 나에게도 익숙한 표현이었다. 와지마에게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지.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게 사랑이잖아. 그냥 주는 거. 그게 사랑이야. 그래서 음악도 예술도 다 사랑이야. 목적이 같으니까. 하지만 인간은 하지 못하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도 있는 것 같아. 그게 기적이고 그게 신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
영혼으로 노래하는 가수
일본에서의 ‘러브소나타’ 행사가 끝날 무렵, 와지마는 나를 위한 공연을 기획했다. 300명 정도의 관객이 홀을 가득 채웠고, 나는 낮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성가와 우리나라 가곡 <얼굴>을 포함해 8곡을 불렀다. 앙코르 곡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더니 관객들이 너나없이 기립박수를 쳐주었다. 첫날 공연이 끝나자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던 NHK에서는 저녁 9시 뉴스에 우리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어젯밤 기적의 무대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주님! 이 고마운 일본인들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하지요?’ 속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와지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라던 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넘치도록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의 사랑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시 돌려주는 것이리라. 하나님은 내 목소리를 바꾸신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셨다. 사랑의 파도가 내 마음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기쁨이다. 나는 다시 노래할 이유를 찾았다. 목소리를 잃은 아픔의 시간들은 그저 노래 잘하는 성악가로 살아갈 뻔했던 내게 노래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고통 가운데 감춰진 삶의 신비들을 조금씩 꺼내 사람들에게 들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제 나의 꿈은 거대하지 않다. 예전에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로 가는 데 의미가 있었다면 지금은 그 가는 길 자체에 의미가 있다.
본 도서요약본은 원본 도서의 주요 내용을 5% 정도로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원본 도서에는 나머지 95%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보다 많은 정보와 내용은 원본 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라며, 본 도서요약본이 좋은 책을 고르는 길잡이가 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