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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근대지향의 태동과 주변지식인의 자각 - 연암(燕岩)에서 노신(魯迅)에 이르기까지
서 론
연암 박지원(燕岩 朴趾源, 1737―1805)은 18세기 한국 실학의 대표적인 사상가와 북학(北學)파의 선구자인 동시에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열하일기(熱河日記)』와 같은 문학작품으로 18세기 한국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연암의 문학이 한국고전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 특수성이라면 “실학(實學)”이라고 하는 시대선각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그 사상의 문학화를 실현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수많은 평자들이 연구를 통하여 밝힌 바와 같이 “경세치용(経世致用)”,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과 같은 실학의 주장들은 한마디로 근대지향성으로 규정할 수가 있다. 앞선 시기의 이익(李瀷), 홍대용(洪大容) 그리고 비슷한 시기의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17세기 말 ~ 18세기에 한국에서는 기존의 주자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기반을 둔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 형성되었으며 오늘의 시각에서 돌이켜볼 때 그것은 분명 전통과 현재에 대한 회의와 부정이었고 미래에 대한 지향과 전망이었다.
연암의 경우 서사문학에 속하는 장르인 소설과 기행문을 선택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명확한 사건과 인물형상을 통한 사상의 전달을 시도하였다. 중세신분제도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 「양반전(兩班傳)」, 무역부국(貿易富國)을 역설한 「허생전(許生傳)」, 유교문화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 「호질(虎叱)」,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인간성의 소외(疏外)를 보여준 「광문전(廣文傳)」 등 연암의 작품들을 짚어보면 현실에 대한 연암의 비판은 가히 전방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암의 문학의 이상의 특징들은 이미 수많은 연구를 통해서 자상하게 밝혀진 바이다. 본 논고에서 주목하려는 바는 동아시아적인 범주에서 연암이 가지는 선각자지식인의 위치이다.
중세 이후 한국은 중국에서 전래된 유교가치관의 전면적인 수용으로 줄곧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문명의 주변부(periphery)로 존재해왔다. 중세 말, 서방열강의 식민지확장에 의한 강제개항, 주권상실, 식민지화 등 중국과 한국이 겪은 근대화과정 역시 비슷했다. 한마디로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인 동질성과 내재적인 연관성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서방식민주의가 동아시아에서의 본격적인 확장을 앞둔 18세기 후반 한국의 북학파문인들의 텍스트를 통하여 우리는 중국이라는 중심에 앞선 주변지식인의 자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영향권 아래 놓여있던 한국은 동일한 문화권에서 처한 부동한 위치로 하여 그 문화적 전통의 변화를 불가피적으로 앞둔 시점에서 중심보다 앞서 주변이 자각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계기가 바로 한국에서 북학파의 등장이다. 18세기 이후 연암을 비롯한 북학파문인들은 중화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주변지식인의 자각을 이루어냈고 그 결과 중국에 앞서 보다 명확한 근대지향성을 담은 문학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 점은 연암과 중국문화근대화의 기수(旗手)로 불린 노신(魯迅)의 경우와의 비교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8세기의 중화문명의 주변부인 한국에서는 연암과 같이 확고한 근대지향성을 가진 작가와 작품들이 등장했지만 중국에서는 뒤늦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와서야 출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주변부의 자각이 중심에 비해 선행할 수가 있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또한 20세기 초의 중국에는 노신과 같은 선각자지식인들이 일어나 철저한 근대의식에 입각한 봉건문화타도론(打倒論)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조선에는 노신과 같은 철저한 비판적 지식인이 출현하지 못했을까?
한마디로 본 논고의 목적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연암과 노신의 문학작품에 대한 비교문학적인 고찰을 통하여 찾아보려는 것이다. 비교문학의 analogous연구는 “주제학(主題學)연구”의 한 갈래로 동일한 주제에 대한 부동한 문화권에서의 구체적인 표현과 대응을 연구한다. “analogous연구는 서로 상이점을 강조하는 대조성비교(對比)와 주로 공통점을 강조하는 유사성비교(類比)를 망라하고 있다. 대비는 작품들이 갖고 있은 각자의 특징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데 치중하며 유사성비교는 문학의 일반법칙 혹은 모형을 귀납하는데 치중한다.” 본 논고는 analogous연구를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하여 연암의 대표적인 작품인 「호질(虎叱)」, 「광문전(廣文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과 노신의 대표적인 작품인 「광인일기(狂人日記)」, 「아Q정전(阿Q正傳」, 「축복(祝福)」등 작품을 비교하면서 부동한 시대, 부동한 국가와 민족에 속한 두 작가의 텍스트에서 보이는 사상적, 주제적 측면의 동질성 및 그 의미적 관련성에 대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시도하였다.
1. 18세기의 동아시아 ―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폭풍전야
18세기 동서양의 변화를 본 논고에서 전반적으로 어우른다는 것은 사학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분명 분에 넘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18세기와 19세기의 세계적 흐름을 동아시아와 서양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면 18세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즉 동아시아에 대한 서방문명의 확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였고 19세기 서양열강들이 동아시아에서의 대규적인 식민지확장을 연계시켜보면 18세기의 동아시아는 가히 외래세력(문화적인 힘과 물리적인 힘의 복합체)의 충격으로 전통 자체가 와해되는 결과를 앞둔 “폭풍전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14세기의 르네상스와 함께 흥기하기 시작한 자본주의상공업을 바탕으로 한 자산계급세력은 15세기의 종교개혁, 17세기의 영국자산계급혁명을 비롯한 일련의 자산계급혁명을 거쳐 18세기 프랑스대혁명을 최고조로 유럽에서 봉건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우세를 점하게 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자산계급의 이러한 발달사는 신항로의 개척과 신대륙의 발견 및 식민지확장을 동반하였었다. 동시에 신항로의 개척에 따라 서양으로부터 동양 특히는 동아시아로의 여행이 한결 수월해졌고 그에 따라 천주교의 선교사들이 이교도사회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를 목적으로 동아시아로 찾아왔는바 선교사들의 활동은 본격적인 식민지확장에 선행했다. 예를 들면 16세기 전반기의 스페인선교사 프랜시스 ․ 사비엘(Francis ․ Xavier(1506 ~ 1552), 16세기 후반기의 이탈리아 나폴리출신의 선교사 미첼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1543 ~ 1607) 그리고 유명한 리마두(利瑪竇) 즉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22 ~ 1610)가 있다.
이들 중 마테오 리치는 선교를 위해 중국복식을 하고 동양의 성인(聖人) 공자(孔子)와 예수의 관련성을 강조하는 등 여러모로 유교전통이 뿌리 깊은 중국에서 천주교의 전파를 위하여 노력했던 인물로 동서양문화교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또한 중국인들이 서양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선교활동을 하는 과정에『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기하원본(幾何原本』, 『천학실의(天學實義)』등 서적을 번역하는 등 동양에서 서양문물의 전파에 있어서도 많은 기여를 했던 인물로 “서세동점”의 역사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공헌을 했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천문학, 수학 등 과학기술이 동양에 전파될 수 있었는바 그중 선진적인 천문학은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을 중시하는 중국문화의 구미에 부합되어 보다 신속하게 동양의 지식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다.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서양학문에 대한 서양선교사들의 번역과 소개는 18세기에 이어 19세기에도 계속되었고 그 결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는 “구도(求道)”를 최종목표로 하는 비(非) 실용적인 학문전통과는 확연하게 이질적인 이른바 “서학(西學)”이 전래되었다. “서학”의 형성은 동양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수천 년 동안 불변의 절대적 지배담론이었던 유학(儒學) 및 중화중심주의 역사관과 우주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가졌고 지어는 그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가능해졌다.
서양의 활약상에 비해 동아시아의 18세기는 겉으로 보건대 큰 변화를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청(淸)은 18세기 강희(康熙,1661~1722), 옹정(擁正,1722~1735), 건륭(乾隆,1735~1795)을 잇는 “태평성대”를 맞아 정치, 경제, 문화에 있어서 동양최강대국의 지위를 엄연히 유지하고 있었다.
서양문명의 유입으로 주변세계에 대한 청의 인식이 어느 정도 바뀔 법도 하지만 실학(實學)의 발흥과 같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긴 했어도 그것 역시 송명이학(宋明理學)에 고유한 사상에 대한 발휘일 뿐 중국사회와 학문패턴의 변화를 일으킬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의 실학은 18세기 실증(實證)과 고증(考證)을 중시하는 고거(考據)실학의 발전으로 이어져 『사고전서(四庫全書)』와 같은 고전문화백과전서의 편찬을 이루어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중국에서는 “서세동점”에 대한 위기감으로 서학(西學)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외국의 장기를 따라 배워 외국을 제압하자(師夷長技以制夷)”와 같은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변법(変法) 등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18세기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후유증을 점차 치유해가면서 경제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의 회복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구가 점차 증가하고 수공업, 상업 특히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대외적으로 조선은 청(淸)과의 상대적인 평온관계와 일본과의 제한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층에 있어서 조선은 양반관료지배체제의 모순이 확대되었고 전통적이고 세속화한 유학(儒學)풍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움트고 있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서학의 전래로 가치관과 학문전통의 변화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당쟁으로 주자성리학이 날로 공담(空談)화와 허학(虛學)화 되어가는 학문적 현실에 비판을 가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학문이 실학이었고 그 실학의 형성과정에 촉매(触媒)의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중국을 거쳐 유입된 서학이었다. 대내적으로 자국학문의 쇠퇴와 대외적으로 연행(燕行)을 통한 중국학문과 중국에 유입된 서학에 대한 접촉으로 전통에 대한 비판과 미래에 대한 지향을 동시에 보여준 실학사상이 형성되게 되었다. 이익(李瀷), 홍대용(洪大容)의 “지전설(地轉說)”과 같은 일반우주론에서 정약용(丁若鏞)의 농업중심론, 연암의 중상론(重商論)과 같은 치국(治國)사상, 그리고 북학파(北學派)의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의 극복 등 실학자의 주장은 비록 실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비(非) 주류 지식인들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조선의 전통학문에 대해서는 가히 전복(顚覆)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18세기의 동아시아는 표면에 있어서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급속도로 성장을 이룩한 서양의 종교와 과학지식을 선봉으로 동아시아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뒤이어 들이닥칠 식민화의 흉흉한 파도를 동아시아의 대부분지역에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주변(periphery)이었던 조선에서 근대지향에 바탕을 둔 선각자지식인의 자각이 걷잡을 수 없는 역사의 물결로 성장해가고 있었으며 그것은 동아시아 불변의 가치관이었던 “중화중심주의”와 전통유교문화에 대한 회의와 비판적 성찰 등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학연구가 전공인 필자로서는 18세기 동아시아 근대지향성의 태동을 우주관, 역사관, 국가관 등 전반에 거쳐 고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고에서 필자는 한국 내지는 동아시아가 낳은 가장 탁월한 문학가의 일인이었던 박지원의 대표적인 문학작품에 대한 분석을 그와 그 시대의 근대지향성을 분석하는 경로로 삼았다.
연암은 실학파의 다른 문인들에 비하여 남겨놓은 소설작품이 많다. 또한 소설에서 보여준 연암의 개혁사상과 비판정신은 기행문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비해 훨씬 직접적이고 날카롭다. 그 이유는 아마 소설의 서사성(敍事性)에서 찾을 수가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사건에 대한 서술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사건 혹은 인물을 통하여 보다 직접적이고 자유롭게 자기의 사상과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
중세문화에 대한 연암의 비판적 성찰은 가히 전면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암집(燕岩集)』의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주로 수록되어 있는 소설작품들에는 사회, 문화전반에 거쳐 비판적인 성찰과 대안성적인 주장들을 펼치고 있다. 동시에 필자는 기존의 연암연구에서 연암의 철학과 사상을 고찰하는데 「열하일기」가 많이 주목되었고 소설은 상대적으로 중시를 받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본고에서는 그의 소설을 주요한 텍스트로 하여 그의 사상사적 가치에 접근하려고 시도하였다. 왜냐하면 필자는 박지원이 실학과 북학사상의 문학형상화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상징적 형상 ― 「호질(虎叱)」에서 「광인일기(狂人日記)」까지
연암의 소설 「호질」은 호랑이라는 의인적 형상의 입을 빌어 유교문화의 허위성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작품은 이른바 “열녀(烈女)”와 “군자(君子)”의 간통이라는 아이러니컬한 스토리를 설정하고 있다. 열녀라고 소문난 동리자라는 여인은 사실 뭇 남성과의 관계로 각성(各姓)받이 자식을 두고 있으며 “정인군자(正人君子)”이며 선비인 북곽선생과 간통하다 자식들에게 들킨다. 북곽선생은 가까스로 도망하여 나오다 시궁창에 빠지는 등 온갖 추태를 벌리고 그 모습으로 호랑이에게 질타(叱咤)를 받는다.
“선비는 구리도다!(儒乎臭矣)”
호랑이는 구린내 나는 북곽선생에 대하여 이 한마디로 선비 즉 유교문화권의 엘리트계층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이어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북곽선생을 보고 “선비(儒)는 아첨(諛)과 통한다.(儒者, 諛也)”고 조롱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강조하고 민본(民本)․민의(民意)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마땅할 조선의 양반계층은 18세기에 와서 당쟁을 일삼는 무위도식(無爲徒食)적인 존재로 전락되어가고 있었다. 집권층과는 항상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연암으로서는 양반계층의 도덕적 해이성과 타락에 직접적인 비판을 보낼 수 있는 객관적인 위치에 서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연암은 호랑이의 입을 빌어 당대사회를 “식인(食人)”의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따지면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하지만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데 미치지는 못한다. 지난해 관중(關中)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은 수가 수만은 되고 몇 해 전 산동(山東)에 큰물이 졌을 때도 백성들끼리 잡아먹은 수가 수만이다. 사람들끼리 잡아먹은 수가 이렇게 많지만 또 어찌 춘추지세(春秋之世)만큼이나 하겠는가?
(計虎之食人, 不若人之相食之多也. 去年關中大旱, 民之相食者數万, 往世山東大水, 民之相食者數万, 雖然其相食者之多, 又何如春秋之世也.)
여기서 이른바 “춘추지세(春秋之世)”는 바로 왕도정치의 목표이고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두고 “食人”의 사회라고 못박았으니 당대유교문화에 대한 연암의 비판은 오늘에 다시 보아도 신랄하기 그지없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100여 년 뒤의 중국근대작가 노신의 작품에서 유교문화의 “식인성(食人性)”에 대한 비판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노신은 단편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 이름도 성도 없는 “미치광이(狂人)”의 입을 빌어 중국의 수천 년 역사는 “사람을 잡아먹는(食人)” 역사라고 비판하고 있다. 작품에서 “미치광이”는 역설적인 인물로 주위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미치광이”는 당대사회의 병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진 선각자적인 인물로 자신의 형에게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생각을 삼가라고 권고한다. 하지만 이른바 정상인인 형은 “미치광이”의 이러한 권고를 들으려 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다. 결국 형과 더불어 형과 한 계열에 속해있는 인간들은 모두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광인은 무시로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줄곧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걸 난 알고 있지만, 그리 확실하지 않다. 나는 역사를 들추어 조사해 보았다. 이 역사에는 연대가 없고 어느 페이지에나 ‘인의도덕’같은 글자들이 꾸불꾸불 적혀 있다. 나는 어차피 잠이 오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밤중까지 열심히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겨우 글자를 찾아냈다. 책에는 온통 ‘식인(食人)’이란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魯迅, 「狂人日記」)
당대의 봉건사회를 “식인사회(食人社會)”라고 규정하는 이유를 작자 노신은 유가사상의 지배 하에 있는 봉건권력과 형벌이 바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작품에는 또 역아(易牙)의 아들이 잡혀먹힌 이야기, 청(淸)말의 혁명가 서석림(徐錫林)이 잡혀 먹힌 이야기 등을 열거하면서 중국은 “4천년이나 사람을 먹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중국의 미래를 위해서 이른바 “인의도덕(仁義道德)”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하라(救救孩子)!”라고 호소한다.
중국근대 반(反)봉건문화운동의 기수(旗手)였던 노신은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하다 중국인들의 정신의 병을 치유하는 것이 육체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더욱 시급하다는 판단으로 인문학을 선택했던 인물로 20세기 초 중국의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에서 공자(孔子)와 유교문화의 비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작가로 후일 일부로부터 그 비판이 극단적이었다는 질의를 받기도 했다. 이런 노신 역시 중국 봉건전통문화의 병폐는 “인의도덕(仁義道德)”의 깃발 아래 행해진 잔혹한 반(反)인간성이라고 인식하여 그것을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즉 “식인성(食人性)”으로 규정하였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바 연암의 소설 《호질》과 노신의 소설 《광인일기》는 동일한 주제의식을 표현하고 있는바 그것은 바로 유교문화, 특히는 유교도덕의 허위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 및 비판이다. 문학작품에서의 주제는 “모티프의 하나의 특수한 표현으로서 모티프의 개인화 혹은 일반으로부터 개별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결과이다. …… 주제는 작중의 인물과 관련된다. 주제는 인물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호질」에서의 호랑이나 「광인일기」에서의 “미치광이”는 모두 일반적인 인물이 아니라 상징화되고 추상화된 인물형상으로 모두 당대의 선각적(先覺的) 지식인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설정된 인물이다. 작가는 이로써 일상적인 사건이 아닌 환상적인 허구의 세계를 통하여 작품의 주제의식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와 북곽선생의 만남도 그렇고 “미치광이”와 형을 비롯한 주위 인간들의 만남도 역시 환각의 세계이다. 환각의 세계에서 작가는 이성과 도덕이 지배하는 모든 금지구역들을 초월하고 있으며 독자들에게 무한한 암시를 던져주고 있다. 여기에서 범과 광인은 참된 인간으로, 북곽선생과 형을 비롯한 주위 인간들은 비인간으로 상징되어 있어 봉건사회의 식인적(食人的) 본질을 파악하게끔 한다. 따라서 두 형상은 모두 당대의 보편적인 인식에 선행한 선각자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동물인 호랑이의 상징적 형상으로부터 인간인 미치광이의 상징적 형상으로의 변화는 시대적인 변화 및 작가의식의 승화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범의 형상이 한국인의 원형적 이미지가 부여된 18세기 각성된 지식인의 형상으로서 위선적인 사대부에게 비난을 던지고 이성적인 호소를 하고 있다면 광인의 형상은 20세기초엽의 중국 근대 지식인의 형상으로서 봉건유교문화의 압제에도 두려움을 모르는 정신의 소유자로서 “광기(狂氣)”를 성격의 기본특징으로 하고 있다. 연암의 경우에 있어 동물의 형상 속에 지식인 선각자의 의식을 부여하게 된 것은 아직 봉건적인 문화와의 직접적인 대결을 가질 수 없었던 시대적인 한계성과 연결되며 노신의 경우 그래도 인간으로서 “미치광이”의 형상 속에 지식인의 선각자의 의식을 부여하게 된 것은 근대의식의 성장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봉건적인 문화와의 대결이 가능했던 시대적인 현실과 연결된다. 이와 함께 각성된 지식인을 한낱 보잘것없는 동물로, 그리고 미친 사람으로 간주한 것은 시대 낙오적인 파렴치한 봉건사대부들이 만들어 낸 “언어유산”에 불과하다. 유교문화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위한 호랑이로부터 광인에로의 형상전환은 시대가 작가에게 던져준 예술적인 암시이다. 또한 그것의 한국으로부터 중국에로의 형상전이는 유가사상문화권에 있은 두 민족 간의 잠재적인 문화적 대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3. 인간성의 소외 ―「광문전(廣文傳)」으로부터 「아Q정전(阿Q正傳)」까지
연암의 소설 「광문전(廣文傳)」과 노신의 소설 「아Q정전」은 모두 당대의 최하층사회인간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하여 시대적 환경에 의하여 형성된 인간성의 소외를 그려내고 있다.
소설 「광문전」에서의 광문은 자기의 이름을 모를 뿐만 아니라 부모처자도 없는 홀몸으로 “달문(達文)”이라는 별명만 가졌고 생김새도 볼품없는 한마디로 보잘것없는 소인물이다. 그는 한때 거지였으나 후에는 한약방에서 심부름꾼으로 생계를 유지하였고 또한 거지들 가운데서 “패두(牌頭)”로 되어 나가서 구걸하지 않아도 먹을 밥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광문은 한편으로 동정심이 많은 인간이라 어린 거지들에 대해서는 남달리 살갑게 대하기도 한다. 광문은 또한 어떤 일에서나 이기려고 하며 나서기를 좋아해 남의 웃음거리를 사기도 한다. 한마디로 광문은 자존심과 자비심이 혼재하고 있는 인물이라 때론 명기(名妓)들과 즐기려는 욕망도 있고 남들이 그더러 결혼하고 집을 마련하라고 하면 자기의 거지생활에 만족하면서 거절한다. 결국 광문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광문의 성격은 이중성을 띠고 있는데 진정한 자아 즉 선량하고 후덕한 일면이 있는가 하면 왜곡된 자아 즉 이기적이고 허위적인 일면이 있으며 자존심이 있는가 하면 자비심도 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광문의 인격구조에서 왜곡된 자아가 우세를 점하여 인간성의 소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광문의 형상은 봉건사회 하층에서 사는 인간들의 인격파탄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바 작가는 광문의 형상을 통하여 인간성을 괴멸시키는 중세사회의 본질을 심각하게 해부, 반성하고 있으며 인격평등과 독립을 호소하고 있다.
노신의 소설 「아Q정전」에서의 아Q는 이름과 본적뿐만 아니라, 살아온 행적마저도 분명치 않으며 집이 없어 미장(未莊)의 사당(祠堂)에 살고 있는 날품팔이꾼이다. 볼품없이 생긴데다가 머리에 특별하게 생긴 흉터로 늘 사람들의 조롱대상이 된다. 그의 주변사람들은 그를 거의 일할 줄 아는 기계정도로 생각하지 사람으로 대하거나 기억하지 않는다. 아Q의 성격에서 가장 핵심으로 되고 있는 것이 “정신승리법(精神勝利法)” 즉 사실상 실패했어도 주관적인 정신에서 승리로 인정하는 아Q 특유의 사유방식이다.
예를 들면 거의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아Q는 늘 남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뺨을 얻어맞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아Q는 “손자한테 맞은 것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자기 뺨을 때리면서 상대방을 때린 것으로 치부하면서 심리평형을 찾는다. 하지만 아Q는 완전한 바보 혹은 정신병자는 아닌바 그에게도 여성이나 사랑에 대한 본능이 존재하여 식모인 오어멈(吳媽)에게 사랑을 구걸하다 호되게 얻어맞는다. 동시에 아Q에게는 약자를 업신여기는 습성이 있어 자신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하는 힘없고 왜소한 쇼D(小D)와 대판 싸움을 벌려 구경꾼들에게 만족을 주기도 한다. 아Q의 성격에서 주목할 부분은 그에게도 현실에 대한 불만과 혁명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혁명당(革命黨)”이 마을에 나타나자 아Q는 혁명이 무엇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열심히 흉내를 내고 따라다녔고 결국 그것이 죄가 되어 “혁명당”이 물러간 후 사형수가 된다. 글자를 모르는 아Q는 자신의 사형판결서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으로 날인을 대체하게 되는데 그 동그라미가 제대로 그려지지 못한 것이 그의 마지막 유감이 되었을 뿐 결코 자기가 왜서 사형을 당했는지를 모른다.
이처럼 아Q의 형상은 역시 본능에 대한 추구와 억제, 자존과 자비 등이 혼재된 이중성격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격에서 후자의 자아의식의 결핍, 개성의식의 결핍으로 표현된 소외된 성격이 주도적인 것이다. 특히 “정신승리법”은 그의 성격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바 인격의 파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아Q의 형상을 통하여 하층사회 인간들을 성격파멸에로 몰아넣는 당대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함과 동시에 그들의 “불행에 대해 슬퍼하고” “무력함에 대하여 분개했다.” 이러한 점은 작가의 인도주의사상과 개성주의정신의 체현인 것이다.
광문의 형상과 아Q의 형상은 비록 생몰 년대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지만 일련의 유사성을 보여주는바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아의식과 개성의식의 결핍으로 특징지어지는 소외된 성격은 대동소이한 것이다. 인간의 소외와 인격파멸을 두고 엥겔스는 “자산계급의 조폭(粗暴)하고 야만적이며 인간성을 훼멸(毁滅)시키는 대우의 영향으로 하여 사람들은 점점 물처럼 자아의지가 결핍한 물건으로 변해가고 있다. 아울러 기필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게 되는바,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그들은 모두 자기 행동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서 엥겔스는 주로 사람이 환경의 억압을 받아 어떻게 소외되며 기형적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광문과 아Q는 모두 그 시대의 통치계층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억압으로 최하층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외된 인간들이다. 이들의 성격형성을 통하여 작가는 감성과 이성, 생존과 환경, 인간성과 사회성, 현상과 본질이 분열된 당대의 사회적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광문전」은 연암이 재미있는 일사(逸事)를 기록한 글이 아니라 광문이라는 인물의 운명을 통하여 해당시대의 구조적 모순이 인간에게 준 정신적 폐해를 짚어내기 위하여 그려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Q란 인물은 노신이 반(半)봉건 - 반(半)식민지시대 전통과 현실의 이중적 압박으로 형성된 중국인들의 무력함, 굴종, 부저항 등 정신적 병폐를 집중적으로 담아보려고 허구해낸 인물이다. 이는 상기 두 형상이 갖는 풍부하고 심각한 철학적, 심리적 내용이며 이들은 비단 중세봉건제도 아래에서 소외된 인간의 병적 심리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하층사회인간들의 고통스러운 운명의 상징이다. 종합하여 말하면 철학적 시각에서 이야기할 때 이들은 성격소외의 전형이며 심리학적 시각에서 이야기 할 때 이들은 초기 정신병환자의 초상이며 정치적 시각에서 이야기 할 때 이들은 전제적인 사회제도의 희생물이다.
따라서 이들의 형상에는 비단 그들이 속한 계급의 고유한 성격이 표현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부동한 시대, 부동한 계급, 계층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소외의 특징이 담겨져 있다. 하여 이들 인물형상은 시대적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고 있다.
광문과 아Q의 형상이 갖는 풍부한 상징적 의미는 부동한 인간들의 성격을 부동한 측면에서 조명해 준다는데 그 미학적 의의가 있다. 여기에서 설명되어야 할 점은 노신의 경우는 아Q의 형상을 통하여 시대적인 현실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주제의식을 “국민성해부(國民性解剖)”에까지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동시에 광문의 형상은 비록 예술적으로 풍만하지는 못하지만 아Q형상의 추형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중(韓中) 민족은 역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유사성적인 성격인자(因子)가 형성되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문학창작의 영역에 있어서 사회최하층인간들의 소외와 분열에 대한 문학적 체현을 통하여 인류 내지 부동한 민족의 가장 보편적인 성격특징을 제시할 수 있음을 재차 확인해 볼 수가 있다.
4. 제물(祭物)로서의 여성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서 「축복(祝福)」까지
소설 《열녀함양박씨전》은 “열불경이부(烈不更二夫)”라는 봉건예교의 혼인관(婚姻觀)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인간개성의 해방을 강렬하게 추구함과 아울러 인간의 정욕을 긍정한 작품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인 박씨부인은 중세기의 허다한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에 의하여 정해진 혼인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약혼자가 결핵병을 앓고 있어 오래 살수가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시집을 올 수밖에 없었다. 매파와 그의 조부모가 이것을 안 후 그더러 거절해 버리라고 권고하지만 거절하며 도리어 “저번에 지어 놓은 옷이 뉘 몸에 맞추어 지은 것이며 뉘 옷이라고 말하던 것 입니까?”라고 말하면서 멀지 않아 과부로 되리라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달갑게 시집간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죽어 버리고 박씨부인은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후 자기도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작가는 “나이 어린 과부로서 오래 세상에 머물러서 두고두고 친척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공연히 이웃 간의 뒷공론을 받게 되는 것보다 얼른 이 몸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쓰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박씨부인의 절개를 찬양한 것 같지만 실은 반어적 수법으로 그가 정절관념의 순장(殉葬)품에 지나지 않음을 애통해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봉건예교가 인간성을 유린하는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 폭로하였다.
소설 《축복(祝福)》에서는 주인공 상림아주머니(祥林嫂)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루면서 중세기의 윤리와 도덕의 속박 하에서 여성이 어떻게 제도와 예교의 희생물이 되어 가는가를 쓰고 있다.
소설에서의 상림아주머니는 최하층에서 사는 여성으로서 남편이 죽자 자기를 구박하는 시어머니를 피해 시집에서 도망쳐 노진(魯鎭)의 넷째 나리 집에 와 날품팔이를 한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상림아주머니는 과부이기는 해도 아주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성품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여 넷째 나리네 집에서는 그를 과부라고 꺼리기는 했지만 일을 잘하니 그런대로 만족했다. 그러다 시어미에게 잡히어 한 남자에게 팔려가게 되는데 그 남편도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어린 아이마저 승냥이에게 물리어 죽는다. 다시 노진의 넷째 나리 집에 나타났을 때 상림아주머니는 이미 원래의 영리하고 적극적인 성품은 과거의 뼈아픈 체험에 녹슬고 마모되어 멍청한 노파 즉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넷째 나리네 집에서도 그제날 일을 잘했던 기억으로 마지못해 두 번이나 상부(喪夫)한 상림아주머니를 받아들였지만 그를 잡일 정도에나 썼지 제사상을 차리는 등 일에는 부정 탄다고 절대 그를 참여시키지 않았다. 상림아주머니는 상부(喪夫)를 한 자기의 “죄”를 씻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돈을 들여 절간에 문턱을 기부하지만 그렇다 해서 주위사람들이 그에 대한 시각이 변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헌 노리개처럼, 그나마 먼지와 쓰레기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있을 때에는 이 세상을 즐겁게 사는 사람들로부터 그 존재의 이유를 의심받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 있어 상림아주머니의 뼈아픈 기억을 반복적으로 들으며 재미있어하고 놀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헌 노리개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아 “보기 싫을 때면” “낡은 물건”으로 되어 존재의 의미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마는 것이다. 상림아주머니는 자신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태도를 감지하고 나서는 더 이상 주변을 상대하지 않고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영혼이 있을까” 라는 의문만 가지고 여생을 살다 “축복(祝福)”의 폭죽소리 속에서 숨지고 만다. 작가는 상림아주머니의 죽음을 두고 “이 세상에서는 살아서 값어치 없는 자가 죽어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되는 것만으로도, 남을 위해서거나 자기를 위해서나 좋을 수가 있다.”라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다.
「열녀함양박씨」과 「축복」은 모두 중세기윤리도덕이 사회약소집단인 여성들에 대한 압제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박씨부인과 상림아주머니는 형상의 특징에 있어서 비록 일정한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열불경이부(烈不更二夫)”를 생명의 전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박씨부인과 상림아주머니는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눈길 속에서 죽어가지만 그 배후에는 노신이 지적한 바와 같은 “이름도 없고 의식도 없는 살인단(无主名, 无意識的殺人団)”이 있어 그들의 제단의 희생물로 되고 만 것이다. 이 살인단(殺人團)이란 바로 전통적인 예교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지 못할뿐더러 남의 처지에는 전혀 동정과 연민을 느끼지도 못하는 그 시대의 보편적인 인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연암의 소설은 박씨부인에 대한 동정과 더불어 중세윤리도덕의 폐해에 대하여 비난은 하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부권(父權)에 대한 직접적인 반성과 비판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100 여 년 뒤의 노신은 정권(政權), 족권(族權), 신권(神權), 부권(父權) 등에 의하여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보다 심각하게 해부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직접적이고 날카로운 도전을 보여주고 있어 동아시아 유교윤리의 성찰의 시대적인 흐름과 연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휴머니즘에 대한 근대적인 성찰은 어차피 여성의 운명에 대한 관조에 초점을 두게 되며 그것은 인간의 새로운 윤리지향과 직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5. 결론 ― 중화중심주의의 쇠퇴와 주변지식인의 자각
본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연암과 노신의 비교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론이 바로 수동적인 변혁을 앞두고 있다는 동일한 담론환경(context)에 처해 있었지만 주변지식인인 연암이 중심지식인인 노신에 비해 자각과 성찰이 선행(先行)했다는 것이다.
인류의 문명과 사회의 발전은 세계각지에서 동시에 진척되었으며 그 과정에 부동한 민족은 많은 경우 유사한 역사과정을 밟았다. 따라서 부동한 국가 혹은 민족의 문학에서 유사하거나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하겠다. 중국당대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전종서(錢鐘書)선생은 이와 관련하여 “동해, 서해는 심리가 동일하고 남학, 북학은 도술이 달라지지 않았다.(東海西海, 心理攸同; 南學北學, 道術未裂)”이라는 말로 부동한 국가와 민족의 학문에 존재하는 유사성 현상 내지 유사성 연구의 절박성을 지적한 바 있다. 연암과 노신의 소설에서 유사성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종당에 있어서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와 욕망, 본능과 심리지향이 상동(相同)함으로 하여 유사한 자연환경, 사회환경 속에서 나타난 유사한 문학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공동한 동방문화라는 담론환경 속에서의 지속성 있는 문화담론 및 중세말기, 근대초기의 사회배경과 함께 시대의 전면에서 사회혁신과 인간의 각성을 사색했던 선각자적인 작가적 자세 등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실학의 형성배경에 있어 중국을 거쳐 수용한 서학(西學) 즉 서양과학지식이 큰 역할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서학을 먼저 입수한 나라는 중국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중국의 서학은 이미 근 한 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학은 18세기까지는 아직 중국문인들의 의식변화에 명확하게 반영이 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중국의 학문사에서 18세기를 대표하는 가장 큰 사건은 중국고전문화의 집대성인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이었다. 하지만 연암을 비롯한 조선의 실학파문인들에게 있어 중국을 통해 얻은 서학은 우주관(宇宙觀 ), 역사관(歷史觀 ), 민족관(民族觀) 전반에 거친 사상체계의 진화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고 결국 “중화중심주의”에 대한 해체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동일한 외래문명에 대한 이와 같은 대응방식의 차이는 바로 변화에 대한 “중심(core)”문화와 “주변(periphery)”문화의 부동한 태도와 자세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문화권에 있어서 중심의 형성은 상대적인 문화적 강세의 상당기간의 지속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중심부가 일단 형성되면 중심부문화는 주변부문화에 비하여 비교우위가 아니라 절대우위를 점하게 된다. 중국의 경우 주변국가와 민족에 대한 한자(漢字)문화, 유교(儒敎)문화의 절대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거의 전반 중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문화중심부로 군림해 있었고 18세기까지는 이러한 지위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화이지변(華夷之辨)”도 그렇고 “천조예치(天朝禮治)”도 그렇고 모두 이러한 문화적 우위에서 비롯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문인의 경우 전통적인 중심부의식은 문화적 우월감의 강력한 관성(慣性)으로 작용하였고 그러한 우월감은 결국 안일감(安逸感)과 변화에 대한 타성(惰性)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중국의 문인들은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서양문화의 충격이 “튼튼한 배와 강력한 대포(堅船利砲)”의 물리력으로 다가오기 시작할 때에야 자기의 전통문화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반면 주변부는 자기의 문화적 약세지위를 인정하기에 수용과 습득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고 보다 많은 유연성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중세기 조선의 “사대주의(事大主義)”나 “소중화(小中華)”의식처럼 중심에 대한 맹목적인 동일시로 치우칠 경우가 있지만 연암을 비롯한 실학파문인들처럼 본토문화에 대한 반성이 일단 시작되면 이질적인 문화에 대하여 보다 빨리 보다 쉽게 주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출 수가 있었다.
연암의 경우 본토문화에 대한 성찰에 외래문화인 서학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여 “지구는 둥글고 돌고 있다”는 우주론을 기초로 중화의 절대중심지위에 대한 회의 내지 부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고 중화중심주의의 근간으로 되고 있는 유교문화의 병폐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진행할 수 있었으며 전통과 현실에 대한 부정은 결과적으로 미래에 대한 지향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호질」이나 「양반전」에서 보여준 비판의식과 상업권장, 무역구국(貿易救國) 등의 근대지향적인 의식을 보인「허생전」등 작품이 바로 이러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노신 역시 본토문화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진행하였고 “가져오기주의(拿來主義)”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중국 “신문화운동”의 선봉이었다. 그는 서양근대문명의 수용과 본토문화에 대한 반성과정에서 현실변혁의 의지를 뚜렷이 하였다. 문화면에서 그는 “문화문제로부터 중국의 흥망성쇠의 기운(机運)을 고려하였으며 아울러 문화문제로부터 착수하여 救國興邦에 투신했다.” 이러한 사상적 출발점은 그로 하여금 유가문화의 병폐에 대하여 절실한 체험을 할 수 있게 하였으며 국민성을 비롯한 문화의식의 제반 분야에 대한 심각한 해부에 전력하게 하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와서야 노신과 같은 인물들이 배출하기 시작한 원인은 바로 중심부지식인으로서 중화중심주의 의식이 중국 지식인의 근대지향성의 발흥을 억제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초엽의 중국에 있어서 노신과 같은 투철한 근대계몽작가가 나타날 수 있게 된 것은 그 외적인 측면에 있어서 외력 - 물리적인 힘의 요소가 훨씬 더 많은 - 에 의한 중화중심주의의 와해가 이루어지고 내적인 측면에 있어서 작가 자신의 외래문화에 대한 광범위한 수용과 본토문화에 대한 투철한 반성이 병행됨으로써 그제야 가능했던 것이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20세기 초의 주도적 담론(Discourse)은 이미 일제의 식민(植民)담론으로 대체되었고 민족집단 내부로부터의 자체적인 근대성 인식 및 반성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에드워드 ․ 싸이드(Edward ․ side)의 말을 빌면 식민지한국은 이미 “자체를 언술(言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예를 들면 이광수(李光洙)는 분명 근대초기 민족계몽의 선두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지배적 담론의 영향 속에서 일본문화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할 수 밖에 없었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담론의 전면적인 동일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식민지적 특징을 회피하고 사회발전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인식을 지니지 못한 채 노신과 같은 문화지성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밖에 여타의 작가들은 외래문화에 대한 열정을 보이였지만 전통문화 및 민족문화의 가치성과의 합리한 관련을 찾지 못함으로 하여 역시 민족의 근대적자각과 반성에 유리한 역할을 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점은 20세기 초의 한국문학에는 중국의 노신과 같이 전통문화에 대한 전방위적인 반성을 표현한 소설작품을 창출할 수 없었던 주되는 원인의 하나로 되고 있다.
“하나의 특정된 텍스트는 언제나 상상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어느 하나의 진정한 모순을 해결하려 하며 하나의 텍스트는 일종의 행위인 동시에 상징성적인 것이다.” 연암과 노신의 소설도 예외가 아닌바 상상적/상징적 텍스트로서 사회모순해결을 위한 “행위”였다. 아울러 여기에는 동일한 담론환경(context) 속에서의 담론(Discourse)의 지속성 즉 주변지식인의 근대지향정신사의 연속성이 잘 투영되어 있다.
연암소설에서의 주제의식과 인물형상은 노신소설의 추형들이며 노신소설에서 그러한 주세의식과 형상들은 연암소설에 비하여 승화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비교문학이론가 카와리엘은 “위대한 소설에서 모델(Model)은 위대한 작품보다 먼저 나타날 필요가 없으며 반대로 위대한 작품은 그의 선행자를 창조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연암과 노신의 소설에 대한 비교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연암소설의 문화정신의 선구적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고 노신소설 문화정신의 집대성적인 업적을 가일층 확인하게 된다. 두 작가 모두 시대가 부여한 작가적인 사명을 다 하였다고 평가할 수가 있다. 아울러 두 작가의 소설작품 사이의 주제, 형상의 유사성과 연속성은 동방비교문학사 내지는 한중비교문학사 서술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