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4-228.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오늘날 성령에 대한 뜨거운 열망과 관심은 순복음 교회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복음 교회는 기독교의 다른 진리보다는 특히 성령의 부으심과 능력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 논쟁보다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성령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정통신학이라고 해서 교만한 모습으로 남을 정죄하는 것보다 신학을 조금 모른다 하더라도 실제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은 나중에 부족한 부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성령의 능력은 분리 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과 성령께서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성령께서 행하는 특별한 능력과 일반은총 사이에 균형을 잡지 못하는 모습도 많이 보게 됩니다. 예)어떤 분은 병에 걸려면 무조건 기도로 치유함을 받아야 한다며, 병원에 가거나 약을 먹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또 반대로 병에 걸리면, 무조건 병원으로 달려가서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지, 기도하는 것은 신비주의자나 광신자들이 하는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의술이 발달하여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얼마든지 기도함으로 병을 낫게 하실 수도 있지만, 병원이나 의사의 의술을 통해서 치료받게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께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 모든 가능성에 대하여 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병든 몸을 기도로 낫게 하실 수도 있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거나 약을 먹음으로 낫게 하실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성령께서 자기에게 직통으로 계시(啓示)하시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나 분명하게 성경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무시하고, 직통 계시(啓示)를 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하지 않고, 능력을 나타내실 수도 있고, 또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자신의 직관(直觀)을 성경보다 더 믿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쓰러지거나 방언이 튀어나오거나 이상한 환상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윤리적으로 변화가 없는 삶을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어떤 사람은 성령의 감동은 무시하면서 윤리적인 생활만 철저하면, 성령이 충만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 잃은 신앙입니다. Ⅰ.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뻔한 질문인 것 같지만 우리는 이 중요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예수님과 성령께서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과 성령은 뗄 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대답하기도 할 것이고, 같은 삼위일체의 한 하나님이시라고 대답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예수님과 성령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따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는 예수님과 성령이 서로 뗄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선 전통적인 교인들의 경우에 신앙이 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은 좋은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중심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 신앙은 마땅히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중심에 있어야 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고, 다음부터는 교회생활을 하고, 세상에서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면, 축복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위대한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서 날마다 성령을 의지하는 생활을 해야 하고, 날마다 성령의 부으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특히 오래된 신자들은‘성령의 내주하심’을 많이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한번 오시기만 하면, 절대로 우리를 떠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오심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성령을 붙잡아놓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중단하시지 않고, 부으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믿는 자들이 교만하고, 죄에 빠져 있는데도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래된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을 보면, 성령의 능력이 빠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오래전에 불이 붙었다가 싸늘하게 식은 부뚜막처럼 말입니다. 또한 은사를 강조하는 분들의 신앙은 지나치게 성령 중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성령의 부으심이나 은사, 기적에 대해서 주로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실제로 성령의 충만함과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나타나고, 교회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많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뜨거운 체험과 기적만을 간구할 뿐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에 깊은 뿌리가 없고, 성경에 무지(無知)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는 우리의 신앙을 아주 뿌리 깊게 만들고,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체험이나 은사만 원했기 때문에 신앙의 뿌리가 약(弱)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은 도저히 뗄 수 없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진리가 선포될 때, 성령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이 오신 목적이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주님 되심이 권세 있게 선포되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며, 그때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의 가장 강력한 능력이 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죄 씻음을 받은 성도들은 그것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내 마음속에 임하시고, 교회에 부어지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능력 있게 하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하고, 능력을 체험한 분들은 자꾸만 그 은혜에 더 빠져들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으로 돌아와서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또 그런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성령의 체험이나 기적만을 구하면, 한쪽으로 치우친 신앙이 될 것입니다. Ⅱ.거듭남과 성령 세례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은 영적으로 거듭나면서 시작됩니다. 여기서‘영적으로’ 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을 때, 우리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영적으로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치명적인 장애를 하나씩 가지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장애(障礙)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이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엡2:1-2절)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靈)이라” 요즘은 텔레비전 채널이 다양화되어서 안방에서 온갖 방송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 방송도 볼 수 있고, 홍콩 방송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 텔레비전에는 그런 기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방송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인식(認識)할 수 있는 기능이 죽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을‘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죽은 이 부분을 고쳐서 치료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主)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랫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사람에게 의식이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거듭났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認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살고, 자기 생각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Ⅲ.성령 세례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강한 체험이 나타납니다. 특히 사도행전에서는 이미 믿은 사람들에게도 성령께서 강하게 임재 하셨고, 새로 믿는 자들에게도 강한 성령의 임재하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이런 체험이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영국의 청교도들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죄인이라는 아주 강한 깨달음과 회개의 역사가 동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식으로 강한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을‘성령 세례’라고 불렀습니다. 최근에는 오순절 교회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거나, 하나님의 강한 은혜를 받을 때, 방언이 터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하며, 성령 세례는 곧 방언이 터지는 것이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때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방언을 받지 못한 교인들은 자기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방언을 받기 위해 여러 집회를 다니는 일도 있었습니다.
Ⅳ.거듭남과 성령 세례의 구분 사람들은 거듭나는 것과 성령 세례가 같은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성령 세례가 곧 방언인지, 성령 세례는 처음 믿을 때, 한번만 나타나는 것인지? 질문합니다. 우선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되어 지는 것이지만, 성령 세례와는 다른 것입니다.
거듭남은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기운데 성령께서 영혼의 죽은 부분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그야말로 성령이 강하게 우리 안에 부어져서 충만 해지는 체험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부어지는 체험은 하나님의 기쁨이 넘치는 것이며,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는 너무나도 귀한 축복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누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환멸스러운 것들이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이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령 세례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번 안아 주시는 것이라고 비유합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가다가 너무 아들이 좋아서 번쩍 들어 품에 안아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부어질 때, 내속에 있는 죄악에 대한 비상한 깨달음을 가지고, 통회하면서 회개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즉 성령 세례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재하심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체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며, 내가 정말 하나님의 귀한 아들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성령 세례는 너무나도 귀한 축복이며, 우리가 참으로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가 단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령의 부으심은 얼마든지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여러 차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온 교회에 성령의 부으시는 축복이 임하는 것은 큰 부흥의 체험입니다. 성령이 이렇게 강하게 임재하실 때, 그리스도인들은 흥분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약간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대로 된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반쯤 미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성령을 부으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모든 고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축복이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령 세례를 반드시 방언으로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면 방언은 영적으로 흥분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흥분되면, 엑스터시 상태에 빠집니다. 그런 흥분 상태가 심한 사람은 쓰러지기도 하고, 몸을 심하게 떨기도 합니다. 망언은 그런 영적인 흥분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좋다, 나쁘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런 영적인 흥분 상태를‘예언 한다.’라고 말하는 곳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사무엘 선지자를 만났을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일어날 여러 가지 징조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사울이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났을 때, 예언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삼상10:10). 이것이 일종의 엑스터시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상(現想)보다 중요한 것이 본질(本質)입니다. 왜냐면 엑스터시 상태는 성령의 감동이 아닌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Ⅴ.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충만한 현상은 당연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지니까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미처 깨닫지 못한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성령 세례는 그 효과가 지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름 한철 소나기가 억수같이 부어지고 난 뒤, 다시 햇빛이 비치면, 아스팔트에는 비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 세례는 이 소나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 충만은 같지만, 감당할 수 있는 용량(用量)은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아주 작은 간장 그릇에 물이 가득 차는 것도‘충만’이지만, 아주 큰 대형 물통에 물이 가득 차는 것도‘충만’인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믿을 때에는 믿음의 그릇이 작기 때문에 쉽게 성령 충만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찬송가 한 절을 부르기만 해도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같이 흘러서 도저히 찬송을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륜(年輪)이 쌓이고, 신앙이 자람에 따라서 과거와 같이 찬송가 한 절로는 더 이상 은혜가 충만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그때에는 더 많은 말씀을 들어야 하고, 더 많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충만해지는 용량(用量)은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한순간에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키우고 큰 그릇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령의 큰 체험을 했다는 분들이 도덕적으로 변함없고, 성격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한 것을 보고,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의 체험이 믿음으로 자라지 않고, 자꾸만 소나기같이 부어지는 성령과 체험만을 사모해서 그런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성령의 부으시는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간구(干求)를 통해 우리는 늘 뜨겁고 감동이 넘치며, 살아있는 성령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믿음을 꾸준히 자라게 하는 이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세상에서 능력 있는 올바른 믿음생활을 하려면, 믿음이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야 합니다. 한 번씩 부어지는 소나기 같은 은혜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믿음을 성령의 열매로 표현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우리의 신앙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반드시 부족한 부분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면, 우리의 성품 가운데 이런 귀한 성령의 열매들이 맺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성품의 변화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오래 믿어도 성품의 변화나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은 믿음에 있어서 파선(破船)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고 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교만이나 혈기와 같은 과거의 습성들은 자꾸만 죽이고, 성령께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성령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더 지배하셔서 능력 있는 믿음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깨끗한 삶을 살고, 유혹과 죄를 이기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윤리적인 생활만을 강조하다 보면, 바리새인처럼 위선적이고, 비판적인 신앙생활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세례와 성령의 충만이 균형을 이룰 때, 능력 있으면서도 뜨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Ⅵ.성령의 은사와 은사 집회 우리는 보통 텔레비전 배우들을 탤런트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몇 배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재능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일처리도 잘 하고, 모든 것을 훨씬 재미있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중한 은사를 주셔서 교회를 유익하게 하시고,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더욱 활력 있게 하십니다. 처음 개척 교회를 할 때, 교회에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때 음대(音大)에서 음악을 전공한 분이 교회에 출석하면, 피아노 반주를 하거나,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예배가 힘이 있고, 은혜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은사가 필요합니다. 원래 은사라는 말은‘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중에서 은사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은사가 없다’고 말할 때에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은사들 중에는 성령에 의해 특별하게 주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개인의 노력에 의해 개발될 수 있는 것도 있고, 또 심지어는 일반적인 것으로 바꾸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초대 교회 때, 예언의 은사는 성령께서 몇몇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사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오늘날 설교에 가까운 말씀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병을 낫게 하는 은사들도 교회 안에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성령께서 직접 주시는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제 설교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보다 신학교에서 신학 훈련을 받고, 설교자가 되는 것으로 더 보편화되어 있고, 병을 고치는 은사도 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으로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또 통역의 은사도 방언의 통역보다 외국어를 배운 사람들이 하는 외국어 통역이 대부분입니다. 찬양의 은사도 음대나 선천적으로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섬기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로 병을 고친다거나, 과거와 같은 예언의 은사가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사들은 반드시 중생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 다 거듭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 중에서 여러 가지 은사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잘못하면, 남은 구원하지만, 자기 자신은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은사나 직분을 믿어서는 안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번은 외국에서 텔레비전으로 기독교 채널을 보는데, 아주 유명한 목사의 집회를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은사 운동가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즉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귀 먹은 사람을 치료했는데, 그가 앉은뱅이의 손을 잡고 무대를 걸어 다니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 귀먹은 사람에게 귀에 대고 여러 가지 말하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분의 집회는 거의 대부분이 찬송과 기도와 병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만 명의 사람들이 눈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잡고 찬송을 부르는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어떤 집회는 오로지 성경 강해를 중심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장시간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거나, 손을 얹어서 병을 고치는 시간이 없습니다. 예배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서 드리고, 주로 설교를 중심으로 집회하는 것입니다. 이런 서로 다른 집회의 성격에 혼동을 겪는 분들이 많습니다. 즉 과연 어느 것이 성령이 역사하는 집회일까? 그것은‘둘 다’라고 대담해야 합니다. 왜냐면 성령님께서는 찬송과 기도 중심의 은사 집회에도 함께 하시고, 또 말씀 중심의 전통적인 집회에도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이 치료되고, 기도를 많이 하는 집회가 진짜 성령 집회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런 집회는 엉터리이며, 말씀 중심의 집회만이 진짜 성령이 함께 하시는 집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예수님의 전도 사역도 처음에는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나가게 하는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말씀 중심으로 설교 사역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처음 하나님을 잘 모를 때에는 마음이 완악하여서 말씀을 전해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땅이 너무 단단해서 아무리 씨를 뿌려도 씨가 흙 속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은사 집회가 필요하며, 이것은 마른 땅을 기경(起耕)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기도해서 병이 낫고, 귀신이 소리를 지르면서 떠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라며 충격을 받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집니다. 그렇게 해서 말씀 중심의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영혼을 추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을 수 있느냐? 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성령을 임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이 성령을 임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안수했을 때, 성령이 임하시기는 했지만, 그것도 사도들이 성령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이 임하시도록 기도로 간구할 수는 있습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가 성령의 강한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11:13).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는 은혜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회개할 때, 큰 성령의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성령에 대하여 인색한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단지 우리의 죄(罪)와 여러 가지 걸림돌들이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막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들을 회개하면, 언제든지 성령의 축복이 흘러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눅11:13절)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찬송가 441장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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