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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 입추 연산 : 좁은 문
mamuli0 2019. 8. 9. 13:56
장마 이후 연산에는 비가 오지 않아 울금과 토란 잎이 고사되어 방죽물을 끌아다 물을 주고 있다. 폭염으로 감나무와 동백 호랑가시 나무를 덮고 있다.
좁은 문
1980.1.12.정인세 원장
마태복음 7장 13절 14절 보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 14장에서 한절 읽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오.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지만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5절 그러자 도마가 주님 저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수 없습니다.
여기 길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곧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좁다 또는 험하다 그랬고 또 예수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그랬는데 그 문은 좁다. 이 문제를 사실 그저께 저녁부터인가 조금 생각을 해봤지요. 이 시간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그럽니다. 우리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길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늙어 죽는 날 까지 사람들은 삶에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반드시 두 가닥이 있습니다.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는 길, 생명의 길, 이런 길 선한 길이 있고 하나는 죽는 길, 망하는 길, 죄를 짓는 길 악한 길이 있습니다. 사람은 싫던 좋던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됩니다. 다시 말씀하면 일생을 선하게 살기로 하고 선한 길을 가던지 그렇지 않으면 악한 길을 가던지 그래서 선하게 의롭게 순리대로 믿음을 사는 사람은 생명으로 간다. 이렇게 여기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고 악하게 죄를 짓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싫어도 결과는 사망이요. 지옥이다. 그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교훈이 그렇고 예수님 외에 많은 선지가 성인들이 다 그렇게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대강은 그것을 압니다. 그런데 여기 읽은 말씀가운데 ‘길이라. 문이라.’ 그런 말씀 한 것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고 이렇게 우리가 전 시간에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곧 문이요. 예수님이 곧 길이다. 여기 그렇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나중 읽은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에 내가 곧 길이요. 이렇게 말씀했지요?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라. 그리고 또 그 아래 7절에 가보면 정말 잘 들어두시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입니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또 9절에는 나는 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안전한 것이고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했거든요. 또 이어서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그러면 이 생명의 길, 또 생명의 문은 예수님이라. 그렇게 되지 않아요?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 안에서 살고 주님 가신대로 그대로 그 길을 가면 그 길은 생명으로 통하는 길이다. 사는 길이다. 그렇게 가르치셨거든.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은 좁고 험하다. 이렇게 말씀 하신 것이지요. 진리의 길은 험하다는 뜻인데 또 참 생명을 찾아가고 참 생명을 살려고 하는 사람은 쉽게 말하면 어렵고 힘든 삶을 해야 한다. 그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반대로, 반대로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길 쉽게, 쉽게 사는 길. 그 길이 넓고 그리로 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결국은 다 죽는다. 망한다. 그렇게 말씀 하신 거 아닙니까? 이것은 조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는 참 반감도 생기고 또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씀 일 것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 꼭 예수만 믿어야 그렇게 생명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지옥가고 망한다니 너무하다. 독선이다. 독단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이예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다 그 말이 옳다고 끄덕이고 또 그 말이 옳다고 인정을 합니다. 또 그렇게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다 알고 인정 하면서도 참으로 알고 있는가? 참으로 그 생명의 길을 알고 있는가? 또 그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그걸 알고 있는가? 이것이 조금 문제입니다. 또 안다고 해도 아마 여기 앉은 분들은 다 예수 믿는 길은 좁은 길이다. 좁은 길이다. 그 말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또 그 정도는 알지. 그러나 참으로 아느냐? 참으로 알고 있느냐? 더군다나 그대로 사느냐? 정말 좁은 길로 가고 있느냐? 그건 문제예요. 아마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은 좁은 길을 간다고 내가 지금 가는 길은 좁은 길로 간다고 그렇게 말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 어느 정도, 그러나 정말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좁은 길이라는 거, 험한 길이라는 거, 그건 무엇인가?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아주 귀하거든요. 그걸 말씀 했어요.
여기를 보면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은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그리로 그 험한 길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랬어요. 여기 온 한국 기독교인 수에 대면 극히 적은 수가 모여 앉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앉아 있는 이 적은 수중에서도 참 험한 길을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자진해서 간다는 거니까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려고 하는 험한 길, 그 길을 찾아가는 사람은 이 중에서도 글쎄, 있는지 없는지 참 드물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걸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여기 문제가 있지요? 여기 문제가 있어요. 아 그거 왜 생명의 길인데 어째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적으냐? 그리고 반대로 어째서 뻔히 죽음의 길 인줄 알면서 세상 사람은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의 길 인줄 알면서 어째 그 넓은 길로만 가려고 쉽게, 쉽게 예수 믿으려고 하느냐? 아무렇게나 되나 게나 살아보려고 하느냐? 여기 문제가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문제를 생각해 보려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이 문제는요. 좁은 문 험한 길 생명의 길 그 길이 옳다. 하는 문제와 또 이 넓은 길 그건 무엇인가? 또 그건 망한다는 건 어째서 그러는가? 그러면서도 왜 그리로 가는 것인가? 그 문제는 기어이 해결해야해. 여기 앉아있는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고 또 한국 기독교인은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 자기가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 그리고 심지어는 이 민족 전체가 이걸 해결해야해. 그러면 이 민족이 살아요. 만일 이 민족이 이 문제를 도외시하고 참 여기 말씀을 크게 적용을 해서 넓은 길로만 잘살아보자고 한다면 민족이 몽땅 망하는 거야. 한꺼번에 그러니까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 지금 그 길이라는 것은 예수님 이라고 그랬어요. 또 좁은 문이라는 건 예수님 이라고 그랬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생각하는 게 시간 절약이 될 겁니다.
우리가 세상의 예를 들어서도 얼마든지 들 수 있지만 우리가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려면 그 문이라고 하고 길이라고 하신 분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는데 훨씬 빠를 것 같아요. 예수님의 생애가 처음부터 고난의 길이었다는 건 우리가 잘 알고 있지요? 예수님은 나시기 전부터 그렇게 예고되어있고. 아까 이사야서 53장을 그래서 우리가 교독을 했는데 미리 예고되어 있고, 나실 때 그랬고, 일생이 그랬고, 죽는 시간까지 그러셨고, 그 거 알지요? 참 험했지요? 예수님의 가신 길은 분명히 험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랬어요. 열두 제자를 비롯해서 초대교인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랬고 오늘 전 세계 허다한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하늘의 별과같이 많아졌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 믿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 전부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수도자 들이나 성자들은 자진해서 그 험한 길을 살았고 또 자진하지 않아도 참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고난을 격기를 마련이 되지요. 그렇게 마련이 되었습니다. 그건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렇게 본 바요. 우리가 들은 바요. 또 우리가 눈으로 본바 입니다. 성경말씀에도 그 점을 강조한 것은 우리가 그 동안에 너무나 많이 읽었고 압니다. 가령 예수님이 그 말씀하신 복음 가운데 말씀에도 그런 말이 가끔 나오지요. 나를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져야한다. 자기를 이겨야 한다. 그런 말씀도 많이 했고, 또 로마서 같은데 보면 사도바울을 항상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 하는 아주 참 세상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말을 했고, 또 고린도서에 보면 특별히 많지요. 고린도후서 같은데 보면 몇 번이나 사도 바울이 자기가 고난 받던 이야기를 제일 강조한 데가 많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의 사역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했는가? 날마다 죽는다. 사형선고를 받는다. 같은 생활이다. 멸시받고 천대받고 그러나 자기는 그 길을 안 갈수가 없고 그 일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말을 했거든요. 사도 바울 자신이 그리고 그 뒤에 서신 가운데서라도 갈라디아서라든지 또 에베소서라든지 골로새서라든지 빌립보서라든지 계속 그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사도가 한 말은 자기 생애를 통해서 그 말을 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그렇게 인간적으로 말을 하면서 아주 심각하게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그걸 가르쳐줬거든요. 그리고 가정 갈라디아서 6장 끝에 가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래 생각을 해보시오. 그거 참 아주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우리가 믿는 사람이 그렇게 해 보려고 해도 어려운 일 아닙니까? 그렇게 험상 진 길이 어디가 있습니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일이라는, 그런 일이라는 게 참 상상도 못하는 험한 길 아닙니까? 그렇게 말해요. 그 뒤에 가서야 반드시 새 생명 새사람이 된다. 그렇게 이야기 꼭 하고 있거든요. 바울사도의 교훈은 전부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뒤에야 새 생명이 있고 뭐 있고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도 전부 그렇지 않습니까? 가령 요한복음 3장에 있는 거듭나는 사람을 말 하실 적에, 잘 들어두시오. 하늘나라는 어떤 자가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거듭난 자가 들어간다. 거듭나야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거듭나되 성신으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못 들어간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이렇게 탁 못을 박았어요. 어떻게 달리 이론을 할 수 없도록 그렇게 결정적인 말을 하셔요. 그렇게 되어있거든요. 그런데 인제 그렇게 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요새 제가 지금 책에서 몇 가지 소개했지요? ‘날개’라는 책에서 그런데 나오고 여러분이 보는 성인 성녀 된 사람의 책을 봐도 전부 그래요. 성인 성녀 된 사람은 모두 그렇게 험한 길을 가지 않은 사람이 없거든요.
전부 그 길을 갔어요. 또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경험하지만 참 믿어보려고 하면 가족도 없어지고 친구도 없어지고 아주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는 게 전부 없어져 버리고 나 하나만 남아. 나 하나만, 그래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 특별히 예수를 통해서 들어가는 문은 어떻게 좁은지, 어떻게 좁은지 나 하나만 겨우 들어가게 생겼나봐. 겨우, 나 하나만이 겨우 그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데 나 하나 들어가는데도 요런 거 하나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손수건 하나도 들고 들어가지 못하게 다 버리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고 다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형제도 버리고 친척도 버리고 그런 거 가지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거예요. 어머니도 붙들고 형제도 붙들고 심지어 부자 집도 한 채 짊어지고 땅 조각도 줄줄이 들고 그런 사람도 천국에 들어가면 될 텐데, 깨끗하게 버리고 들어가라고 깨끗하게 다 버리고 아무것도 못가지고 들어가. 심지어 옷 한 벌도 허락을 안 해. 꾀 벗고 들어가. 그 뿐 아니야. 몸통어리도 버리라고. 그래, 몸통어리도 살도 버리라고, 자기를 버리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자기, 나라는 것이 나 라는 것이 조금만 남아있어도 나다. 나다. 조금만 남아있어도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참 좁지 않소? 적다 적다해도 그렇게 좁은 문이 어디가 있어? 세상에 그런데 또 보세요. 반대를 하나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가운데 제자들이 청년들이 재물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시니까 이런 말 했지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어려운 진저! 어렵다. 그 말이지요? 어려울 진저! 얼마나 어려우냐? 차라리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쉽겠다. 그거 무슨 말이여? 약대가 어떻게 바늘구멍으로 나간다? 차라리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갈 수 있다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갈 수 있겠다. 그 말인데, 참 예수님, 기가 찰 말씀 하시지요? 부자가 들으면 난리 날 소리지요?
그럼 그 말은 요새 교회에서들 속이고 있고, 속고 있어요. 부자는 절대 못 들어간다는 말이 되어요. 그렇지요? 여기 부자 계시오? 그러면 부자라는 건 뭐 억만장자만 인줄 알아요? 마음의 부자, 돈 붙들고 있는 사람, 무엇이든지, 그런 절대로 못 들어가.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진저! 차라리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거 보다 어렵다. 그럼 우리가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래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바늘구멍만하다. 그렇게 생각해 봅시다. 하늘나라 들어가는 문은 바늘구멍만 해. 그래서 거기를 들어가려면 다 버리고 실낱같은 거하나 겨우 들어가게 되어 있나봐.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그렇게 되어있다고, 그래 좁아도 이만저만 좁은 게 아니라고 그러려니, 그러려니 험하다 그 말이지요. 그 길을 갈라니까는 그런데 그 말은요, 이 세상에도 요새 그런 말 많이 나오지요? 요새 대학입학 시험들을 봅니다. 그러면 그 입학시험 보는 문, 합격의 문은 좁다. 그렇게 신문에 잘 나옵니다. 합격의 문, 대학교 들어가는 문도 좁다. 대학교 하나 들어가려도 좁은 문을 지나가야 되는 모양이야. 그러지요? 또 이 세상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많이들 합니다. 관리들은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은데, 성공의 문은 좁다. 또 그런 말이 신문에 잘 나옵디다. 성공의 문은 좁다. 왜 그런 고 하니 다 억만장자가 되고 싶지? 그러니 억만장자가 몇 되는 데, 우리 한국에서도 이렇게 열 손가락 꼽을 정도인데 그러니까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통과하는 사람은 적은거야. 세상에서도 그 말은 쓴다니까요. 좁다는 말은 뭐든지 조금 성공하려면 다 어려움은 겪어야 한다. 그것쯤은 알지요?
뭐 그런 예는 우리가 종일 앉아 들어도 많지요? 애초에 그렇게 된 모양이야.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도 그 어머니가 진통을 겪고 진통을 통과해야만 나오게 되어있어. 세상이 세상구경도 그래야 하거든요. 그게 많아요. 지금은 나무도 움츠려져 있고 모두 땅속에서 파묻혀 있던 것도 추운겨울 땅속에서 그 추운 겨울을 겪는 것만이 봄을 맞이하지, 겨울에 얼어 죽은 것들은 봄을 못보고 마는 건데 아무리 어려워도 저렇게 개구리같이 뱀같이 죽은듯하고 그 어려움을 다 치러야 봄의 환희를 맞이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봄볕을 쬘 수도 있고 이런 건 모든 이치가 그렇게 된 거지요. 모든 이치가 꼭 그렇게 되어있어 이건 우리가 명심해야 되어요. 나를 단속하고 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자는 거예요. 말들은 내일 지옥을 갈지언정 놀고 보자. 내일 배가 터져죽을지언정 오늘 먹고 보자. 그 생각들이 있으니까, 타락된 향락성들이 있으니까, 안일을 도모하는 습관성이 우리에게 있으니까, 그러니까 자꾸 이런 말씀으로 들은 것이지만 자꾸 듣고 아는 것이지만 자꾸 배우는 거 아닙니까? 망하지 않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그래서 이렇게 자꾸 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는요. 이런 싸움이 전개되는 것이지요? 그 세상에서도요. 이렇게 전쟁을 하지요. 요새 사람도 그렇고 옛날 사람은 더더욱 그렇고 이렇게 성을 쌉니다. 성을 쌓고 성문을 지키지요? 모두 성을 지키고 그런데 쳐들어가면요? 그것 참 정말 보통 어려운 게 아니지요? 사람이 많이 죽어야 그 성문을 통과하고 들어가요. 그런데 하늘나라 대문간도 그렇게 생긴 모양이야. 하늘나라 대문간에도 마귀들이 굉장히 반대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천로역정에 보면 하늘나라 대문간에 들어갈 적에 최후에 발악적으로 방해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면 성도가 이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늘나라 대문간을 들어가려면 제일 어려워. 마지막이 참 어려운 모양이야.
그래서 아마 보통 때도 그렇게 살라고 하신 말씀이지만 에베소 6장에 그런 것이 나옵니다. 아주 중무장을 해야 돼. 보통으로 결심하고 보통으로 준비를 해가지고는 거기 못 들어가니까, 그래서 여기 보면 이런 말이 있지 않아요? 내가 끝으로 여러분들에게 권고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 분에게서 강한 힘을 받아가지고 굳세게 되십시오.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게 대항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가 대항해서 싸워야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의 악신들과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 그들을 대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에 호신경을 붙이고 모두 이렇게 소망의 투구를 쓰고 모두 이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음의 신을 신고 그러고 이제 또 마지막으로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성신에 칼을 가지고 아 이렇게 무장을 하랍니다.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야. 그 문에 한번 들어가기가 이렇게 어려운 모양이야. 그러고 기어이 마귀를 쳐서 극복시켜야 그래야 거기를 들어가. 그런데 우리가 이야기를 해도 아참 하늘나라 가기도 어렵고 그 길 가기도 어렵고 그 문 들어가기가 어렵구나. 하는걸 아마 다시 생각이 돌아왔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어렵게 하셨을까? 이게 하나 문제지요. 왜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시는 아들들을 딸들을 그렇게 고생을 시키도록 하셨고 왜 짓궂게 그 문을 쪼그마하게 만드셨을까? 그렇지요? 차라리 지옥으로 가는 문을 조그마하게 해서 거리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아요? 하늘나라 들어가는 길을 요새 고속도로 모양으로 그냥 번지르르 하게 만들어 놓으면 하늘나라 들어가기가 쑥쑥 들어갈 텐데 사랑 많으신 하나님이 왜 그렇게 안하셨을까?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보셨어? 그랬으면 좋지 않겠어? (끊김)
아주 참 거기는 뭐 언제든지 봄날 같고 죽이는 일도 없고 에덴동산에서야. 처음에야 무슨 짐승들끼리도 서로 잡아먹지 않고 사람도 짐승 안 잡아먹고 아주 좋도록 하시지 않으셨어? 처음에는 뭐 그렇게 괴로운 것도 없고 그렇게 살도록 하셨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마귀의 말을 듣기 시작한데서부터 변통이 나지 않았어요? 그래가지고 쫓겨나지 않았어요? 그래 쫓겨난 뒤에는 벌써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그런 일부터 시작이 되지 않아요? 그래가지고 계속 인간사회는 비참과 저주로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 도저히 인간성을 회복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인간은 타락했다.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창세기 6장 같은데 보면 하나님이 참 모두 탄식을 하시게 되고 사람이 보니까 모두 육이되 가지고 형편없이 되어버리지요? 그러니까 사람을 오래 살려놔두면 안될 테니까 사람의 수명을 모두 짧게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이 그때부터는 자꾸 어떻게 보면 사람을 구박하는 거 같고 그렇게 되지 않았어.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 할 때에 그들에게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다. 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고 여호와가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영적으로 살도록 만들어 놓으셨는데,
아 이놈의 사람들이 고기 덩어리가 되어가지고 육체만을 위해 살려고 하니까 이게 문제가 되었거든요. 그러자 사람들이 육체가 된지라. 그러니까, 그의 날을 120년으로 기한 하니라.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그냥 타락된 상태가 거기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또 그 다음에 가보면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죄악의 관영과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창세기 6장에 가서 그 말이 나와요. 어느 틈에, 어느 틈에 이렇게 됐어.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악하고 맨 나쁜 계획만 해. 맨 나쁜 계획들만 해. 좋은 계획은 하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심지어 사람을 지은걸 탄식을 하실 정도로 당최 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그렇게 되도록 아 그러니까 인제 하나님이 그 다음에 가보니까 이건 못 쓰겠다.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려야겠다. 깨끗하게 다 못쓰게 되었으니 싹 쓸어버려야겠다. 그러고 일어난 게 노아의 홍수라고, 그렇지요? 노아의 홍수, 그래서 싹 쓸어버렸지요. 그래도 믿는다고 하는 노아의 가족 하나 남겨놓고는 싹 쓸어버렸어. 그리고 거기서 함과 셈과 야벳이 낳았지요? 그런데 그 삼형제가 다투기 시작을 하지 않았어? 그래서 셈의 자손에서 어떻게 예수 하나 남겨놓자. 그 계획하나 남겨놓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수천 년 동안 기다리시면서 또 싸워오지 않았습니까? 그래가지고 마지막으로 계획하신 것이 이 예수를 통과해서만 구원하자. 그렇게 계획하신거야.
인제 예수라는 거, 그래서 인제 그 예수님을 통과하기가 아주 대단히 이번에는 어렵게 입학시험이 천국 들어가는 입학시험이 대단이 어렵게 해서, 왜 그렇게 아주 좁고 어렵게 만들었는가 하니 예수라는 그 관문을 통해서 이렇게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찌꺼기가 하나도 없도록 하늘나라에 가서 거리끼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깨끗하게 완전히 새 사람을 만들어버려. 새것을 만들어 버리려고 그런 방법을 하나님이 선택하신거야. 참 우리 이거 어폐 있는 말인지 몰라도 우리가 알아듣게 말하면 그렇게 택하신 거야. 그런데 그걸 예수님이 이제 오셨거든요. 예수님이 땅위에 오셨는데 오신 길부터가 당초 세상사람 들이 꿈도 꾸지 못할 길 아니요. 동정녀가 낳았다니 동정녀가 자식을 낳았다니 그런 법은 없었거든 한번밖에 그 후에도 없었고 한번밖에 없던 일 아니요? 동정녀에게서 사람이 나왔다는 거, 그런 길을 택하셨는데 그래가지고 예수님의 사실 걸 보면 당최 땅위에 그렇게 산 사람이 없고 죄 없이 그렇게 죽은 사람은 없거든요. 예수님뿐이지 얼마나 어려운 길을 택하셨어. 그런데 그게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합시다.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다 하는데 아 우리들도 그렇게 하라니 문제 아니야. 우리는 살덩어리를 가지고 음란 가운데 나아가지고 죄에 절어 버리고 이놈의 몸통어리를 가지고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고 예수님이 하시는 거야. 네 십자가를 지고 나와 같이 죽자. 사도바울도 예수와 같이 죽어야한다. 예수와 같이 죽어야 한다. 예수 안에다 우리를 몰아넣는 거예요. 자꾸 그렇게 몰아넣어. 어째서 그렇게 길이 험하고 왜 그렇게 문이 좁으냐?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길밖에 없이 되어있어요. 그 길 밖에 없이 되어있어. 그러니까 그 예수님이 가신 좁은 길, 험한 길, 예수님이 통과하신 그 사망의 관문 죽음, 그런데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전부 그 죽음의 문으로 사망의 문으로 가서 어디로 떨어졌냐하면 지옥으로 떨어졌어요. 그런데 거기는 한번 떨어지면 나오지 못하는데 영원한 멸망 영원한 죽음으로 사람들이 다 떨어지게 그렇게 되어있어. 이건 조금 뭐한 이야기 같지만, 그 사실이 증거 하지 않소? 역사가 증거하고 있고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그걸 가르쳐주고 있고 조금 깨달은 사람들은 다 옳다고 증거하고 있다. 망하는 문 죽는 문 이라고 그렇게 되어있거든요. 죽음이라는 걸 통해서 그런데 이 예수님의 죽음을 달리 해야겠거든요. 이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건 우리가 많이들은 것 이지요.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 예수님이 사람들 우리와 똑같은 죽음을 하신 건 우리와 똑같은 죽음을 하시기 위해서 똑같은 죽음을 하신 것인데 특별히 또 우리와 똑같은 죽음 일뿐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할 수도 없는 무죄한 몸으로서 그렇게 큰 죽음을 함으로서 크신 그 죽음을 하셨거든요. 만일 예수님이 거기서 죽어버렸더라면 예수님이 거기서 죽어버리셨다면 끝장이 났더라면 우리 사람은 소망이 없었지요. 영원한 지옥이고 영원한 죽음이고 전 인류는 하나도 구원 얻을 길이 없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완전히 죽어버리실 수 없는 분 아닙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죽어버리실 수 없는 것은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있으니까,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야.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그러니까 사실 수밖에 없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하신 겁니다. 부활을 하신거지요. 그러니까 우리도 인제 그렇게 부활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이 문제거든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그렇게 되서 어떻게 해서 죽었다 합시다.
우리들이 참 정말 모든 것에서 죽었다. 그래서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이 죽었다. 하면 그걸 예수님이 책임지고 살리신다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거예요.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을 하신 것이지요. 누구든지 내 안에 있는 자는 나와함께 살리라. 영원히 살리라. 요한복음에 아주 강조했거든요.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먹어라. 그런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믿는 자는 살아도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또 죽어도 다시 살리라. 그걸 믿기만 해. 그거야. 예수 안에서 우리가 완전히 죽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그 믿음이라는 걸로 연결을 지으셨어. 고거하나 조건은, 그거하나 조건으로 세우셨어. 아무것도 조건을 세우지 않으셨지요. 그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것을 제일 똑똑히 말씀한 게 언제였습니까? 예수님이 그 나사로 집에 가실 적에 나사로가 죽은 뒤에 가실 적에 마르다하고 마리아가 나와서 자꾸 울고 그럴 적에 예수님이 여러 가지고 달래시니까 이미 죽었다. 죽었습니다. 죽었으니까 인제 소망이 없습니다. 그 말을 자꾸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에게, 선생님이 진작 오셨더라면 그럼 안 죽었을 걸. 예수님은 자꾸 뭐라고 하는 고 하니, 아니다. 믿기만 해라. 믿기만 해라. 나를 믿는 자는 죽었더라도 살아난다. 믿기만 해라. 그게 가능한 거예요? 가능한 거예요? 아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도저히 사람 생각으로는 그런 사람이 살아나는걸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했고 믿을 수도 없는 거거든. 그런데 자꾸 믿으라는 거예요. 지금 나만 믿어라. 나만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니까, 나만 믿어라. 이게 우리에게 지금 들어온 겁니다. 그 우리가 왜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는 제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 아실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좁은 문을 통해야만 사느냐? 그게 지금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 가서 꼭 그 조건을 세우셨어. 믿음 이라는 조건을 통해서 그렇게, 죽어도 살고 그러니까 그 믿는 다는 거 믿는 다는 것이 그렇게 사실은 사람으로는 어려워. 우리가 믿는다는 걸요 너무 쉽게들 생각하는데, 너무 쉽게들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믿는다는 거는 어려워요. 얼마나 어려워요? 사람으로는 못 믿는 거예요. 아무리 똑똑하고 지식이 있어도 못 믿어요. 그것도 우리가 지식이 있어도 못 믿어요. 하나님의 은총이고 성령님이 같이하시지 않으면 도저히 그 믿음 이라는 것이 무언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요구하신 게 있지요? 자기를 이겨야하고, 죽여야 하고, 그걸 우리에게 꼭 하라는 거예요. 자 믿는 다는 건 하나님의 힘으로만 되는 것이고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한 편으로는 우리더러 자꾸 하라고 하신 게 있어요. 버려라. 죽어야한다. 이겨야한다. 싸워야한다. 피 흘리기까지 해야 한다. 그걸 우리에게 요구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야. 그게 험하다는 거지요. 험하다는 그 작업을 해야 하니까 죽는 일을 하려면 얼마나 어려우냐? 피 흘리기까지 그래서 어려워. 그러면 그 믿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우리가 알 수 있어요. 믿는다는 거 그러면 보시오. 그게 어렵다고 그만둘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이 어렵다고 뭐 그 어려운길 갈 거, 그럴 거 뭐 있느냐? 그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시간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 길 기어이 가지 않습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그러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멸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려워도 그 길을 가는 거 아닙니까? 좁은 길로 그런데 거기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지요. 힘이 되는 말씀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요한복음 3장에 거듭나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을 했어요. 그 우리 힘으로 거듭나는 건 참으로 불가능하다. 느낄 텐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약속하셨거든요. 성령이 도와주셔. 그 싸움을 우리가 죽지 않을 몸을 죽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애를 쓰고 그런 사람에게는 성신이 오신다. 그 꼭 그런 사람에게 오게 되어있어요. 성경 보면 꼭 그렇게 되어있어요. 아까 읽은 좁은 문이라는 걸 이렇게 말씀하시기 전에 그 위에 가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있지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시지, 그 말 아닙니까? 가만히 서서 이거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아시오? 이렇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야기 하지요.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이야기가 있지요? 천일야화, 그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도적떼 들이 아주 엄청나게 금은보화를 많이 말에다가 몇 십 개씩 도적질을 해다가 감춰두는데, 큰 산이 하나있는데 거기 가서 큰 돌문이 하나 있어요. 큰 바위 돌 문, 그런데 거기 와서 그 도적의 대장이 딱 서서 뭐라고 중얼중얼하면 돌문이 저절로 슬그머니 열려요. 그러면 들어가요. 들어가서 거기다가 딱 싸놓고 다시 나와서 뭐라고 중얼중얼 하면 문이 싹 닫혀요. 아 그러니 이걸 누가 알 수 있어? 그런데 어떤 청년하나가 그걸 엿보았거든. 아 저 문을 어떻게 열까? 그래가지고 그걸 배웠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로 뭐라고 번역 되어 있는지 몰라. ‘천자화’ 읽어 본사람 있소? 일본 말로는 ‘고마요 아케요’ 그러는데 고마가 뭔가? 꾀인가? 뭔가? 이렇게 그 말을 들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그 청년이 하니까 신통하게 이 돌문이 열리거든. 그 슬그머니 열렸어. 그래 몽땅 가지고 가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그러고 가만히 서서 중얼중얼하면 하늘나라 문이 활짝 열리면 아 이것 참 좋지 않소? 다들 소근 소근 하면 들어가지요. 그런 걸 바라는 마음들이 있어. 고생은 하지 않고 하늘나라는 가려고하는 그 마음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하늘나라도 가려고 하거든. 그런데 그게 안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는 되지 않아. 아주 거기에 대해서는 요? 예수님이 잔인하시다고 할 정도로 몰인정 하시다고 할 정도로 요만큼도 용납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거기 보면 엄격해요. 생각을 해보시오. 엄격해요. 자 여러분들 병원에 가본 분들은 알거예요. 병원에서 수술 할 적에 얼마나 소독을 철저히 하는지 알아요? 뭐 수술 도구는 물론이고 그리고 의사에서 간호원 까지 모두 소독하고 수없이 씻고 또 몸에서 뭐 묻을까봐 여기다가 가운들을 입고 입을 가리고 머리에 뭐를 쓰고 귀신같이 하고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거 왜 그런지 아시오? 지금 사람 배를 가르면 그 배에 가서 그 살을 껍데기를 쪼개고 살을 쪼개고 몇 겁씩 베껴내고 쪼개내거든. 그 속에 내장이 있어. 거기는 아주 눈에 보이지 않지요. 쪼끄만 균이 하나만 들어가도 봉해버리면 그 속에서 썩어져버려. 그래 균이 못 들어가게 해. 균이 하나만 들어가도 수술이 실패를 하거든. 하늘나라도 그런 것이거든요. 하늘나라도 우리의 죄가 묻어 들어가면 하늘나라가 썩어져 버릴 것 아니오? 이게 참 뭣한 이야기지만 하늘나라에는 절대로 이 세상의 악한 것 나쁜 것 더러운 것 거짓된 것 그게 들어가서는 안 되겠으니까 요렇게 심하게 하시는 거예요. 문을 쪼그맣게 해놓고 그러고는 거기서 검사를 철저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소독하고 살균할 것 다 없애버리시고 그리고 집어넣으시는 거예요. 그게 잘못이야? 하늘나라 잘되라고 그러시는 건데, 여러분을 위하고 나를 위하는 건데, 그렇지 아 또 우리가 이거 쉽게 이야기를 또 하나 해봅시다. 만일 하늘나라에 가서 모두 이렇게 늙고 병들고 그런 것이 남아있어가지고 요새 그런 이야기 들을 많이 하는데, 허리가 이렇게 바짝 구부러진 노인이 얼굴이 쭈글쭈글 해서 아주 그냥 참 보기 싫게 된 노인이 그대로 하늘나라에 가서 그대로 살라면 살겠소? 이렇게 꼬부라진 허리로 하늘나라에 가서 밤 낯 이러고 다니려면, 하늘나라도 싫소. 이 허리나 펴주시오. 그럴 것 아니에요? 무엇 때문에 그러냐? 그런 성품은 그런 것은 그렇게 보기 싫고 진저리가 나고 괴롭고 하니 그러니까 다 벗어버리고 들어오라고 그러는데 뭣이 잘못이요? 하늘나라를 그러고 들어가는데 그리고 천사와 같이 자유롭게 빛나게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을 입고 들어오라고, 그러시는데 그게 그 길 아니오? 예수님이 죽고 무덤에 들어가 죽고 부활하셔서 마음대로 갈릴리로 가시고 바다에도 들어가시고 그런 몸 입고 오라고 우리들도 그러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 죽여 버리고 오라는데 그게 죽음이고 부활이야. 그렇게 하고 그런데 그거 그 준비를 시키시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거 믿음이라는 것은 그 준비를 시키시는 거예요. 그 믿음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꼭 그렇게 하셔. 예수 믿는다는 거는 이런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죽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런 성품 싹 죽여 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게 우리 힘으로만 하려면 어렵지만, 성령이 도우신다. 그걸 약속 하셨어요. 성령이 도우신다. 어떤 자에게? 두드리는 자에게,
너희들이 그냥 서서 중얼거리지만 말고 문들 두드려라. 손이 깨지도록 피가 나도록 문을 열어주시오. 열어주시오. 열어주시오. 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그럼 두드린다고 열리는 게 아니에요. 참 그 말이 잘되어 있어. 두드리라. 그러면 열어주실 것이다. 열어주는 건 하나님이 하셔. 성령님이 하셔. 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여러 번 듣고 다 알고 일반적인 진리를 제가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뿐이에요. 더 좀 이해하기 쉽게. 위해서, 그래서 이렇게 두드리는 자 이게 중요해. 또 구하는 자 또 찾는 자 진리를 찾아보려고 애쓰는 자 그러니까 자꾸 우리가 성경이라도 보자. 성경이라도 읽자. 그러는 거 아닙니까? 또 이렇게 기도회라도 열심히 참석해라. 열심히 예배보고 애를 써라. 구하는 태도요. 문을 두드리는 태도요. 기다리는 태도요. 진리를 찾는 태도거든요. 그게 믿는 사람들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구하지도 않고 두드리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그 무슨 예수 믿는 사람이요?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그런 자에게는 성령님이 함께 해주신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찾는다고 구한다고 두드린다고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도우심으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나오는 그 작용이 일어나요. 그러면 인제 새 사람 새 사람 그것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 새것만이 우리가 또 다른 비유로 하나 생각할 수 있어요. 여기 지금 씨를 땅에다 심습니다. 그런데 옛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서 과일 씨든지 이렇게 채소 씨든지 땅속에 들어가서 그 전 살을 다 썩어지지요? 가령 쉽게 밤을 한 톨을 땅에다 심었다고 합시다. 그럼 밤에는 그 한 톨 그 전부가 씨가 아닙니다. 그 밤 껍데기 밤이 처음에는 가시가 있지요? 그럼 쪼개고 나면 깡깡 한 껍데기가 있지요? 깡깡 한 껍데기를 또 벗기면 비늘이 있지 않습니까? 속 그 다음에 보면 하얀 살이 나오지요? 그것이 정말 밤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거 아니에요. 그거 아니고 그 밤눈이라는 게 있지요? 싹이 트는 건 눈이 조그마한 게 보통 때는 잘 안 보이지요? 이제 그걸 땅에 심으면 사실은 다른 건 다 밥이 되고 썩어지는 거예요. 썩어져 버리고는 그 싹이 눈을 트는 거거든요. 싹이 눈을 터. 그러면 그 싹 하나만 남겨놓고 다른 건 전부 희생당해. 필요가 없는 거야. 전분은 싹을 위해 있는 거야. 우리 생각에는 요 살 먹으라고 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같지만 사실을 그 모든 건 싹을 보호하기 위해서 있는 거요. 생명의 싹, 밤 속에 있는 생명의 싹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주 단단하게 그렇게 준비를 해 놓으신 것인데 그게 땅속에서 들어가서 만일 밤이 썩지 않고 뻗대고 있으면 싹이 살아날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싫던 좋던 그 싹 이외의 것은 전부 희생을 해야 돼. 희생을 당해야 돼. 그게 없어져야 돼. 그래야 싹이 나서 다시 결실을 해서 백배도 되고 천배도 되고 그렇게 밤이 많이 생길 수 있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생명이 원리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우리 사람들의 생명이 더군다나 하나님이 맨 먼저 우리 생명을 만들 적에 처음에는 영원성을 지닌 생명이었어. 지옥에를 가든지 하늘나라를 가든지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지 않소? 하나님이 만들어진 생명은 영원히 가는 거예요. 이 영원히 가는 생명에 가서 너무 지저분한 것이 많이 묻었어.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갈수가 없어. 그래 이놈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 때를 떨어버리고 모두 때를 씻어버리고 먼지를 털어버리고 그래가지고 데리고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그걸 안하겠다고 그러면 되겠소? 우리에게 하나님 편으로 볼 때는 하나님 편으로 볼 때는 우리에게 묻은 그 더러운 때 죄악의 때 세상의 때 그걸 다 깨끗하게 씻어서 데리고 가시는 것 아니오? 그럼 우리가 뻔한 일이지. 하나님으로서는 마땅히 그렇게 하셔. 그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어? 또 그걸 그게 지금 제 이야기 입니까? 성경에 그런 비유가 얼마나 많아요? 탕자의 비유도 그거지요? 탕자가 만일 다른 이야기는 다 잘라버리고 돌아왔을 적에 그때 제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을 때에 어땠어요? 돼지 똥냄새가 나고 이가 우글우글했고 뭐 그냥 수염은 길고 그걸 그대로 갖다가 잔치 하겠소? 아버지가 그러지 않았지요? 아무리 기다리던 자식 사랑하는 자식 그렇게 그리웠던 자식이지만 그걸 그대로 갔다 앉혀버리는 거 아니거든요. 우선 벗겨버렸지요? 모두, 그리고 목간에 가서 닦아줬지요? 씻어 버렸지요? 그래가지고 새 옷 입혔지요? 그래가지고 잔치를 했지요? 그거 아니겠어요? 누구든지 여러분은 안 그러겠어요? 또 바꿔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지금 이대로 하나님이 너 하늘나라로 오너라. 그러면 어째 들어가시겠어요? 염치가 없어서도, 여러분은 몰라도 나는 못 들어가겠소. 하나님이 너 지금 올라오너라. 그러면 아이고, 이거 참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목욕이라도 하고 가든지 옷을 좀 갈아입어야 그럴 거 아닙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봐도 이 정도는 이해할 텐데. 아 그걸 싫다는 거야. 좁은 길이니 험한 길이니 그렇게만 생각해. 이거 보시오. 여러분들이 요새야 대통령이야 임금이야 쉽게 알지만 옛날 같으면 높은 양반이 귀한 양반이 사람을 만나자고 하면 그냥 일하던 옷으로 가지 않을 거예요. 우선 벗어버리고 세수라도 하고 이렇게 닦고 그리고 손님 만나면 그러고 갈 거 아니요? 하나님 앞에 간다면 우리들 쓸데없는 건 다 떨어버리고 내버리고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고 들어가야 할 거 아니요? 그게 거듭난다는 건데 뭣이 잘못이요?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그렇게 말씀해요.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어렵지 않겠어요? 생각을 해보시오.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냥 피 흘리기까지 해야 되고 참 어려워. 그걸 말하는 거 아닙니까? 하늘나라 가는 길은 험하고, 그걸 말하는 거 아닙니까? 또 하늘나라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것은 좁다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야 되요. 세상 적으로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 편에서 보기에 이쪽에서 보기에 좁지, 이쪽에서 보기에는 좁아요. 그런데 그것도요. 그 하늘나라 가는 길은 좁다. 생각할 정도라면 그건 벌써 영혼의 눈이 삐어진 사람이에요. 얼마나 좁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 같이 좁다. 그렇게 보여 졌다면 그건 진리가 그 만큼 보여 진 사람의 영이야. 하늘나라 문이 좁다고 보여 진 사람의 말씀이 신통하지 않소? 보통 사람은요? 육에 빠져 살고 죄가 꽉차있고 그냥 정욕에 싸여있고 물욕에 싸여있고 그렇게 싸여있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