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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바른 믿음} 정이철 <우리 교수님은 정통 교회가 가르친 능동 순종을 영구진리로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다음은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김영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208쪽~210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들여쓰기 없이 ‘-’를 써서 옮긴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내가 굵은 글씨로 쓴다. 배경색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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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인간의 종국은 그들의 창조와는 구별된다는 사실이 7 일 동안의 주일 제정보다는 이런 시련의 명령에서 더 분명하게 됐다. ···(중략)··· 그는 낙원에 있었지만 아직 하늘에는 있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목적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긴 행로가 있었다. 행할 것과 금할 것을 통해 그는 영생을 얻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최초 인간이 창조됐던 무죄의 상태와 그가 마지막에 얻게 될 영광의 상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무엇인지는 추후 계시에서 우리에게 좀 더 분명히 밝혀지게 된다.
···(중략)···
첫 사람 아담은 땅으로부터 나서 땅에 속해 자연의 몸을 입고 산 영이 됐지만, 신자들은 부활 때에 신령한 몸을 입고 하늘에 속한 인간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 하늘에서 나신 주님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고전 15:45~49). 아담은 그가 잘못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타락해 죽을 수 있도록 창조됐지만, 원리 면에서 신자들은 이 땅에서도 그 모든 것을 넘어 올라간다.
···(중략)···
따라서 우리가 첫 사람을 볼 때 두 가지 독특성을 주의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성경에 근거해 아담이 직접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창조됐다고 주장해야 한다. 즉, 아담은 스스로 발달해야 할 천진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중략)···
다른 한편으로는 첫 인간은 기독교 교리와 설교에서 가끔 일어나듯이 지나치게 영화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무리 높이 올려놓으셨을지라도 아직은 가장 높지 않다. 그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였지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는 부패할 수 없고 죽을 수 없는 영생은 아직 소유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 그 존속에 어떤 조건의 성취에 달려 있었던 과도기적 불멸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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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④: 그리스도론} (서울: 쿰란출판사, 2018)’ 226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혼과 육체가 합치는 정도가 아니라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다음은 위에 링크한 Wolf이철 글에서 옮긴다.
우리는 칼빈의 말이라도 성경에서 벗어나면 가벼이 버려야 마땅합니다. 칼빈의 말들 가운데도 의구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들이 종종 있습니다. 다음의 칼빈 말을 보십시오.
“그가 무흠하게 머물렀더라면 첫 사람은 더 나은 생명으로 넘어갔을 것이다.”(고린도주석 23:77)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순정의 상태에 머물렀다면, 언젠가 더 고상하고 수준 높은 생명(영생)으로 도약하고 상승하였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칼빈의 그 말 앞뒤를 자세하게 봐야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오해하지 않고 바르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 한 문장으로만 보면, 칼빈이 바르트와 유사한 신학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을 부실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존재의 상승(완성)이 필요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마지막장은 16장이고 고린도후서 마지막장은 13장이건만, “(고린도주석 23:77)”??? 짜증나게 만드는 인용이다.
“단지 이 한 문장으로만 보면, 칼빈이 바르트와 유사한 신학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칼빈 선생님 다른 글도 제시한다. “날마다 맥도날드에 앉아서 {기독교 강요}를 읽으며 언월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연습을 했다.”는, 자칭 “맥도날드 신학자” Wolf이철,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Wolf이철 썩은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글이다. 내가 <톰 라이트와 Wolf이철>1)에서 인용했던 글로서 {기독교 강요 제2권} [6장] <1항>에서 옮기는 글이다.
우주의 체계가 우리에게 학교가 돼 거기서 경건을 배우고, 거기서부터 영생과 완전한 복락으로 옮아가는 것이 본래의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반역한 이후, 우리 눈이 어디를 바라보든 하나님의 저주를 접하게 되고 말았다.
“영생과 완전한 복락으로 옮아가는 것이 본래의 정상적인 과정”에서 “영생과 완전한 복락”은 로마서 8장 30절에 적힌 바울 사도 용어로는 “영화”다.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말로는 “마지막에 얻게 될 영광의 상태”다.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마지막장 [제24장 영생]에 적힌 구절로는 “영생, 즉 평화로운 축복과 영광의 삶”2)이다. 서철원 목사님 용어로는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단계”다. 물론, “최상의 단계” 반대말은 바빙크 목사님 구절로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무리 높이 올려놓으셨을지라도 아직은 가장 높지 않”은 단계다.
그러면 ㅡ헤르만 바빙크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추후 계시”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단계로서ㅡ 서철원 목사님이 말씀하신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단계”는 어떤 단계를 뜻하는가? 물론, 피조물인 우리 신자가 ‘영화로운 몸을 입는 부활’을 뜻한다. 다음은 ‘서철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서울: 한국 로고스연구원, 1990)’ 157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천상”에 칠한 배경색은 ‘헤르만 바빙크 목사님 용어 “하늘”과 동의어임’을 강조하려고 내가 칠한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심으로써 그분 몸은 지상에 살기에 적합한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영화로운 몸은 변화되지 못한 세계에 살기에 부적합해 그분께서는 십자가 사건 전에 살던 방식으로 사실 수 없었습니다. 그분 부활체는 천상에서 혹은 변화된 새 세계에서 살기에 합당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뒤 40 일 동안 지상에 계시며 자기 부활을 확증하신 뒤 승천하셔야 했습니다.
사실이 이렇다. 즉, ‘순정한(무죄한) 아담은 “우주의 체계가 ······ 학교가 돼 거기서 경건을 배우고, 거기서부터 영생과 완전한 복락으로 옮아가는 과정”에 서 있는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는 칼빈 선생님 가르침은 ‘아담은 “그 존속에 어떤 조건의 성취에 달려 있었던 과도기적 불멸성 받”은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는 바빙크 목사님 가르침과 같다. 또한 이 ‘칼빈 선생님과 바빙크 목사님 가르침’은 서철원 목사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철원 목사님께서는 {교의신학 ③: 인간론} 152쪽에서, 즉 이 책 [제3장: 언약의 체결] <언약의 상급>에서 “언약 백성이 받을 상급은 영원한 생명이다(창 2:9). 이 상급 곧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받는다. …… 하나님께서 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함께 두신 것(창 2:9)은 언약을 지켜 하나님 섬김을 잘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임을 표시한 것이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이 책 138쪽에서 “인간이 받을 영생은 하나님 섬김에 대한 보상이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함에도, ‘스승 서철원 신학을 {성경}과 동등한 신학’으로 삼는 Wolf이철은 링크한 글에서 “성경 어디에도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그대로 더 살았다면 생명의 도약과 상승을 맛보았을 것이라는 칼빈의 저 말(?)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아담은 하나님을 즐거이 섬기는 한, 처음의 창조된 상태로 영원한 생명을 영원히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언약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입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주장이 곧 {성경}인 Wolf이철은 이제 스승 서철원도 “가벼이 버려야” 한다. 스승 서철원도 버리고 ‘아담이 영생의 상태(최상의 상태)로 지음을 받았음’을 부정한 이단 서적 ‘서철원 {교의신학 전집}’도 전량 수거해 불태워야 한다.
글을 맺자. 다음은 링크한 Wolf이철 글에서 옮긴다.
2)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취득했다는 능동 순종 교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가 율법을 지켜서 얻으신 영생의 자격에 동참한다는 청교도들 은혜언약의 사상으로 연결됩니다. 맞는 말 같으나 심각한 거짓 사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은 이유는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구원, 우리의 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리스도가 아담 대신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취득했다는 능동 순종 교리”??? 신학이 짧은 Wolf이철이 칼빈(개혁) 신학 ‘그리스도 능동 순종’ 교리를 두고 “심각한 거짓 사상”이라고 주장한 까닭은 ‘영생 자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취득(획득)하셨다.’는 것 때문이다. 즉, 신학이 짧을 뿐만 아니라 사고 능력이 모자라 ‘그리스도 본질(신성神性)의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를 주장하는 Wolf이철은 획득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심각한 거짓 사상”이라며 예장 합동을 욕 먹이는 꼴뚜기로서 이단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영생 자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춰 인간으로 성육해 무죄한 아담과 같은 위치, 마지막 아담으로서 율법을 하나도 어김없이 철저하게 지키는 율법준수(능동) 순종의 삶을 사심으로써 “지키면, 살리라.”는 율법의 축복, 영생을 획득하셨다.’는 게 개혁 신학 ‘그리스도 율법준수(능동) 순종’ 교리다. 그리고 ‘영생 자체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춰 인간으로 성육해 “어기면, 죽으리라.”는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써 의義(영생)를 획득하셨고, 그 의義를 전가하신다.’는 게 서철원 후기신학 교리다. 바꿔 말하면, ‘영생과 관련 있는 것이 율법의 축복’이고 영생과 관련 없이 ‘죽음과 관련 있는 것이 율법의 저주’임에도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담당해 획득하신 영생의 자격에 동참한다.’는 무지몽매한 교리가 새관점 신학과 똑같이 개혁 신학 ‘그리스도 율법준수(능동) 순종’ 교리를 부정한 서철원 후기신학 ‘피 흘림 순종’ 교리다. ㅠㅠ. 다음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④: 그리스도론} 268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내가 굵은 글씨로 쓴다.
그의 죽음과 피 흘림으로 죄과를 제거하고 의를 세우므로(롬 5:18~19) 그리스도는 영생을 획득하셨다(롬 6:23).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있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은 이유는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구원, 우리의 의이기 때문입니다.”는 Wolf이철 주장은 ‘그리스도 본질(신성)의 의義가 우리가 전가 받는 의義다.’는 뜻이다. Wolf이철이 이처럼 고린도전도 1장 30절을 증거본문으로 삼아 이단 지방교회 이단 사상 ‘인간 신화神化’ 교리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 칼빈 {고린도전서 & 갈라디아 주석}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 편역 (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90)’ 79쪽~81쪽에 실린 <고린도전서 1장 30절 주석>을 옮긴다. 들여쓰기 없이 ‘-’를 써서 옮긴다. 굵은 글씨는 강조하려고 내가 굵은 글씨로 쓴다. 밑줄까지 치는 굵은 글씨 문장은 그러께 초에 ‘칼빈 선생님 구원론을 받들어 이단 구원파 교리를 비평하신 예장 고신 박영돈 교수님’을 이단시했던 서철원 학파 사람들3), 이단 구원파 식 구원론을 가졌던 서철원 학파들이 생각나 밑줄까지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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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둘째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에 의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께 열납되고 그리스도 죽음으로 우리 죄가 사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믿음의 칭의는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값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하시는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셋째, 바울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거룩함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우리 곧 본성이 불의한 우리가 그분 성령으로 거룩하게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만일 우리가 동시에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믿음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은혜의 선물은 분리할 수 없는 끈으로 결합돼 있어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분리한다면, 그 사람은 어느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조각조각 찢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거룩하다는 칭호를 얻으려 한다면, 이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곧 만일 동시에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거룩하신 분으로 붙들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사람은 그분 성령을 통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순결한 생활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값없이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는 설교 속에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결점을 발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선행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은,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로 중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분명히 논박해 주고 있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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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55) : 톰 라이트와 Wolf이철>
http://cafe.daum.net/reformedcafe/jMaU/105
2)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김영규 역’ 530쪽.
3) {바른 믿음} [박영돈 교수에 관해 고신과 개혁교단들에게 올리는 공동호소문]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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