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이질 소리가 높아간다. 맥박이 빨라진다. 눈물이 나려한다. 누구의 기획인가? 담양 ‘화목한 다듬이 소리단’이다. 밭을 매던 모습 그대로 나왔다. 우리 가락 노래, 운산으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소통을 넘어 대통으로 가자한다. 4월 18일 오후 3시, 남악 도청 김대중강당이다. 도올이 왔다. 그의 소리가 시작된다.
청중을 향해 큰절을 한다. 전라도의 혼과 그의 뿌리를 다시 알게 된 고마움을 담았단다. 사흘 동안 화순, 장흥, 강진, 해남 곳곳을 돌며 고인돌의 신비, 석대들의 동학항쟁, 대흥사에서 하룻밤 그리고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바다를 봤다 한다. 1948년 여순항쟁 해에 태어난 천안 사람인데도... 이제는 해남이 고향이라 한다. 그 연유는 선대로 올라간다.
대대로 충북 제천 상천리 광산김씨 자자일촌에서 살았다. 하지만 무과 급제로 종 5품 벼슬을 하던 고조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생활고를 겪던 증조부가 한양으로 가서 유기공장에 다니며 궁중에 납품 일을 하던 연줄로 창덕궁 수문장이 되었고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위기에 처한 명성황후를 누이동생이라며 등에 업고 전농동으로 피신시킨 인연이 관직의 길로 이어진다. 흥양 감목관(목장 일 관장, 종 6품 외관직)을 거쳐 무과 급제 후 해남현감, 영암군수, 종 2품 전라도병마절도사 그리고 대한제국 관리까지 지낸다. 역사는 황후를 구한 사람이 홍계훈( ~1895. 8.20. 을미사변)이라하고 있지만 도올의 증조부인 해은 김성택(중연)이 먼저다. 난이 정리되고 궁중 행 가마를 이끈 사람이 홍계훈이었다. 구례광양사람 황현이 바람을 타고 온 말들을 매천야록에 모았고 고종실록에서도 최근에 발견되고 있지만, 도올은 부친에게 어릴 적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해은은 황후가 오라버니라 부를 정도로 총애했다. 해은 또한 ‘이 땅의 끝으로 가라. 중앙으로는 오지 마라.’는 황후의 당부를 잘 지키며 선대 묘를 해남으로 이장한다. 도올의 선산이 해남에 있는 이유다.
해은은 해남 5년 동안 봉록을 다 내놓고 1만 냥을 풀어 구제 사업을 펼친다. 영암군수 시절엔 세금을 안 걷어 조병직1833~1901)의 탄핵을 받지만 고종의 보호를 받는다. 해은의 선정은 향토 백성에겐 축복이었고 ‘우리 대문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푸대접마라.’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그의 장례 때는 걸인들의 만장 행렬이 300을 넘을 정도였다. 보은의 길이었다. 조부(김영학)는 문무관 급제 후 동복군수를 하다 을사늑약(1905년)이 나자 해남으로 낙향한다. 호남은행 설립자의 한 사람이 되면서, 목포 북교동 168번지로 새 삶터를 옮긴다. 아버지(김치수)는 신식교육은 첫째면 된다는 조부의 뜻을 따르지 않고, 궤짝에서 3백 원을 훔쳐 서울로 튄다. 휘문고보, 세브란스 의전과 경도제국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풍산 홍씨(이화여전 졸업. 광주 홍안과가 막내 동생)를 만나 6남매를 두었으니, 도올이 막내다.
도올은 송지, 대흥사 등에서 선대의 송덕비를 찾아 일으키면서, 대한제국 순종이 위신탄성(威信殫誠) 하며 내린 ‘훈일등팔궤장’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진짜 전라도 사람으로서 전라도를 위해 살겠다고 하면서 ‘함평천지 늙은 몸이... 제주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여산에 칼을 갈아 남평루에 꽂았으니... 즐겨하랴.’ 호남가를 ‘호남이 으뜸이라.’로 마무리 한다.
한 시간여가 지나, 전라도 정신의 세계사적 조명을 시작한다.
1948년 1019 여순항쟁은 동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한 거다. 국군 14연대의 반란이 아닌, 김지회 중위 등 40여 명이 제주토벌 출동거부 병사위원회를 조직한 것이다. 전라도 인민들이 ‘전복, 귤, 말’을 공출 당했던 척박한 땅 제주 인민을 위해 동참한다. 마치 1894년 동학농민과 1980년 518 광주민중과 같다. 그리고 1910년 326 순국 안중근을 1955년부터 장흥 해동사에서 추모하고 있다. 전라도와 아무 연고도 없는 황해도 사람을 바닷가 향촌에서... 그 이유는 뭔가? 전국에 이런 곳이 없다. 또한 넓은 들판이 만든 풍요는 굿거리장단, 시나위, 판소리와 이를 음표로 압축하여 가야금 산조를 태동시켰고 위대한 발효음식과 김치를 낳게 했다. 우린 너무 몰랐다는 사실이다. 민족, 대의,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전라도 사람들의 특징이다. 31독립선언서에서 우리가 독립국이요, 자주민임을 만방에 선포한 것이며 예수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라 한 캐리그마(kerygma)와 같다.
그렇다고 개성공단, 금강산 문제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우리가 독립국인가, 자주민인가? 우리의 운명을 아직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도 그랬다. 제일교포의 80%가 제주도 사람이었다. 해방이 되자 6만이 귀환한다. 그들은 지식인들이었고 여운형의 인민위원회를 가장 잘 뒷받침했다. 1946년 미 군정은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제주를 도(道)로 승격시킨다. 경찰과 군을 더 투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평화, 공존, 풍요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진압 명령을 거부한 여수주둔 국군과 인민들의 항쟁은 1만5천의 희생을 남겼지만, 지금껏 확실히 밝혀진 게 없다. 다만 당시 헌법에도 없는 계엄령을 김백일 장군(1917~1951)이 발효시켰고 국가보안법, 학도호국단, 연좌제, 보도연맹 가입자 학살 삼십만 등으로 이어지며 전라도 인물을 다 죽였다는 사실만 명백할 뿐이다. 이제는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고난은 반드시 부활을 만든다. 여순 1019 특별법이 답이다. 그 염원을 도올은 혀로 입안을 다듬으며 ‘부용산’노래로 마무리한다.
도올은 다시 한 번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큰 의리를 함께 하는 외우(畏友), 나이를 떠나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망년지교(忘年之交), 늘 변함없는 포의지교(布衣之交)를 다 갖추었다. 용기 있고 정의를 실천하면서, 두려움은 극복이 아닌 참는 거라며 불의를 보고도 지나치는 비겁함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다. 생존을 위한 존엄은 지켜야 하지만, 이기기 위한 변절은 아니라며, 생각 없이 눈치만 살피며 살자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도 손가락이 다 문드러지도록 손 글씨를 쓰면서 자료를 정리하고 찾아보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다. 거침없는 말을 하면서도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권력은 욕심이라며, 내 잔을 구별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부채의식이 없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지식인이다. 깨어나라는 그의 말이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