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 난로 앞 토크쇼
엊그제 태기산(泰岐山) 자락에 내린 눈이 하루 새 따뜻한 바람에 스르르 계곡으로 녹아내리던 날(1월 11일) 김순남(金順南), 장광옥(張光玉) 권사가 새해를 맞이하여 황태명가에서 점심을 대접했다. 식후에는 차담(茶談) 시간을 가지고자 근처 가산 이효석 생가 공원에 있는 ‘꿈꾸는 달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 미끈 눈길이라서 조심조심 서로 손을 마주 잡고 걷는다. 행여 낙상이라도 하면 그 뒷수습이 너무 힘들기에 눈길 사고는 매사 조심하는 자세가 상책이다. 눈 덮인 겨울 나목(裸木)이 햇살에 빛을 반사하며 손님을 맞이하니 카페로 가는 산책길은 겨울왕국에 펼쳐진 낭만 길 같았다. 푸근한 날씨 덕에 옷을 갈아입은 흰 눈은 졸졸졸 노래하며 손님을 맞이한다. 한 겨울에 눈을 비(雨)로 만들고 동장군의 포로가 된 얼음은 해방의 날을 맞이하여 기쁜 함성을 지르며 물(水)이 되어 흐르니 때 이른 우수(雨水)의 계절을 만끽한다. 빙설(氷雪)이 녹아 청아하게 흐르는 작은 시냇물은 흥정천(興停川)에서 만날 친구가 그리운 듯 그 발걸음이 빠르다. 다시 평창강과 한강에서 더 많은 우정을 쌓고 서해로 이어질 그 냇물을 보면서 세월의 유속을 느끼며 인생을 배운다. 추워서 처박혀만 있던 방문을 박차고 나와 보니 늘 보던 내 고장 풍광명미(風光明媚)에서 펼쳐진 또 다른 세상에 감탄한다. 백발이 아름다운 초로의 시간을 살면서 참 멀리도 가버린 여고시절 낭만을 소환하고는 호호 깔깔 연실 웃음꽃이 지지 않는다. 작은 냇가를 가로지른 다리 중간에 서서 흐르는 물에 투영된 자신을 바라보니 유수처럼 지나온 삶의 궤적들이 떠오른다.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웃다가 한편 빼앗긴 청춘에 한숨짓는다.
카페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그윽한 커피 향이 손님을 맞이한다. 다양한 장르의 책이 꽂혀 있는 많은 책장들이 곳곳에 놓여있는 실내장식이 인상적이다. 봉평이 배출한 한국 문학의 거장 이효석 선생을 기리는 뜻 같다. 책장마다 독자들이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철학과 사상, 역사와 사회과학 분야의 책장은 그 흔적들이 보이지 않으니 범인(凡人)들이 쉬 접근할만한 영역이 아닌 탓이리라. 봉평을 메밀꽃의 고장으로 각인시켜 놓은 그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이 눈에 띈다. 그 외에도 시와 소설, 수필 등의 다양한 문학 책은 꿈 많던 소녀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중앙에는 참나무 장작을 때는 황토 난로가 실내를 아늑하게 해 주니 이곳을 찾는 나그네는 쉼을 얻는다. 잘 말라 있어서 함수율이 매우 낮은 장작은 연기가 적고 불이 잘 붙어 화력이 뛰어나다. 엑스(X) 자 모양으로 난로 안에 쌓인 장작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열을 발산한다. 이내 화구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늙은 소녀들의 얼굴은 새색시처럼 발그름해진다. 굳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을 뗀다. 추억이 많은 세월의 물살을 타고 떠내려가는 이들의 인생 조각배에는 쏟아낼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먼저 장광옥 권사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아픈 몸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셨다. 이 불이 자신의 병을 고칠 치료약으로 믿고 불을 가까이하고 몸을 따습게 함으로써 건강을 회복했다는 간증은 불 쬐고 있는 모두에게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참나무 땔감에서 원적외선이 많이 배출된다는 속설 때문에 몸의 건강에 효능이 있다고 하자 갑자기 이 난로는 건강 염려증 환자들에게 만병통치 의료기가 된다. 달포 전만 해도 유언장을 써야 할 정도로 너무 아팠던 김순남 권사, 유독 추위에 약한 그에게 이 난로는 건강 기운을 넣어주는 치료 열풍기였다. 더욱 난로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면서 그의 입에서는 참 좋다고 연발탄을 쏘아 댄다. 열기가 온몸을 감싸자 추위에 얼었던 몸이 녹으니 건강염려증은 봄날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장사라도 된 듯 양손을 불끈 쥔다. 나이 들어 몸 아픈 아내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과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는 조송암(曺松岩) 원로장로의 한 마디에 진한 여운이 남는다. 젊을 때에는 사대부 양반처럼 가부장적 이념으로 중무장했던 그였다. 사내가 살림을 맡는 것은 그의 사전에 없던 단어였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는 아내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이제 초로의 시간을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창조 질서를 깨닫고 있었다. 서로에게 돕는 자가 되라는 창조주의 명령을 좀 더 일찍 체득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아쉬워하며 뒤끝을 흐리는 그의 탄식은 화목난로 장작더미와 함께 타들어간다. 다시 그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힐링하는 아내는 모처럼 행복감에 젖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양들의 행복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함께 기뻐하는 목자는 기꺼이 점점 숯으로 꺼져가는 장작 위로 새로운 군불을 지펴주는 화부(火夫)가 된다. 잘 타라고 이리저리 뒤척거리는 화부의 손놀림에 불길은 꺼질 줄 모른다. 장작 타는 소리에 시간은 저만치 물러가고 저녁 해를 태기산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갑자기 귀가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찾아오자 이별의 아쉬움을 불 속에 던지고 나니 화목난로 앞 토크쇼(talk show)가 비로소 막이 내렸다. 카페 밖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눈길을 밟으며 못다 한 수다는 저 멀리서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되고 산을 넘어가는 석양과 함께 점점 사라진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머리에 스친다. 맛있는 밥을 먹고 따뜻한 난로 앞에서 차와 함께 나누던 이야기는 문학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토크였지만 그 속에는 천국의 맛깔스러운 기쁨이 스며있음에 적이 놀란다. 각자는 남은 천국의 흔적을 심령에 새기며 총총걸음으로 제 길을 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이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이효석 생가가 있는 달빛흐믓 생가 공원
꿈꾸는 카페
얼었던 눈이 녹고 흐르는 실개천
황토난로
참나무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탄다.
책장과 난로가 어울어진 카페 실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