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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한국 도착 다음날, 1945년 9월 9일부터 38선 이남에서 본격적인 미군정 통치가 시작된다. 美군정 최고 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미국에 우호적인 한국정부를 세우기 위해 한국 정치인들과 다양하게 접촉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백범 김구, 미국에서의 화려한 경력이 돋보이는 엘리트 독립운동가 이승만,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도 좌파의 여운형,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고 좌우 합작운동에 힘쓴 김규식,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까지 이들 사이에서 펼쳐진 치열한 정치 드라마, 그 3년의 기록을 살펴본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거론됐던 남한의 주요 지도자 후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많은 분들이 거론되었는데 이중에 누가 선택이 되었을까요?
일동: 웃음
박상영/작가: 제가 작가인 걸 모르는 분들은 많아도,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이 된 걸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잖아요.
이시원/배우: 작가님이 아실 정도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아는 겁니다 (일동 웃음).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이건 시험에도 안나옵니다. 그 정도로 다 아는 거구, 사실은 그가 지도자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는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미군에서 누구를 지지 하는지에 따라서 그게 되게 중요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 사령관이 이승만을 보고 조선의 영웅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만큼 대통령 후보자로 이미 생각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김지윤/정치학 박사: 처음엔 그랬지요. 그리고 그런 말도 했죠. 김구 선생은 수프에 넣는 소금 정도 같은 존재다 라고도 했고~
이시원: 그런데 요리할 때는 소금이 진짜 중요하지 않아요. 간이 안맞으면 아예 맛이 없는데 그게 어떤 뜻인 거예요. 진짜 하찮은 거라는 거예요. 진짜 중요하다라는 거예요?
김지윤: 중요하기는 한데 스튜는 아닌 거죠. 당시 남한에서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보면 시대조류를 끌고가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이 환경을 바꾸고 미군정에 대한 지지를 보낼 수 있도록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인물로 누가 있을까 했는데, 이승만 박사가 가장 적임자다고 판단을 했죠. 그런데 왜 그렇게 판단을 했느냐 첫번째는 뭐니 뭐니 해도 미국에서 오랫동안 있었잖아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아무래도 친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었고 맥아더 장군이 그렇게 지지를 해주었어요. 반공부분에서 뜻이 맞았고, 조선인민공화국, 인공이라고 보통 얘기를 하는데, 3분의 2 정도가 좌익인사들이었어요. 그런데 거기서 또 이승만 한테 주석 자리를 맡아달라는 얘기를 하니까 좌익에서도 신망이 있나보다는 판단을 했고, 마지막으로는 양영대군의 후손이고, 조선왕조의 후계자이기 때문이었죠.
최원정: 양영대군은 세종대왕의 형?
일동: (웃으면서) 네~
박상영: 아니, 생각해 보면 혈연에다가 학연에다가 지연에다가 심지어는 사상까지도 미국에 잘 맞는 그런 최고의 적임자였겠네요.
박태균: 미군정측에서는 이승만에게 이런 생각이나 여러가지 활동면에서 분명히 큰 역활을 할 것이다 해서 거의 국빈급 대우를 해요. 들어왔을 때도 조선호텔 스위트룸 3개를 빌려 가지고 사용토록했고 2천만원 정도에서, 지금 돈으로는 환산이 안되는 엄청난 액수예요. 그것의 반을 이승만 대통령한테 딱 떼어서 줍니다.
박상영: 완전 몰빵에 가까운 돈이네요.
박태균: 다른 조직에는, 10만원, 20만원 정도만 주는데 이승만 대통령만 1천만원을 딱 떼어줘요.
이시원: 백배를 준 거네요.
최원정: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군요.
김지윤: 김구 선생은 국민당에서 받은 돈을 못갖고 들어왔어요 (김구의 정치자금-中장제스가 지원한 정치자금을 미군정의 협조 부족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못함). 돈이 없었어요.
최원정: 국민당은 중국에서 받은 돈을 못들여오고~ 너무 차별대우를 했군요.
박태균: 이게 반전이 있어요. 계속 이승만 박사를 미군정이 지지한거냐 그렇지가 않습니다. 굉장한 우여곡절이 발생합니다.
최원정: 이승만과 미군정은 한 몸인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반전이 있다고 그러니 그게 뭔지?
이시원: 미군정 마음이 갈대도 아니고 왜 변했데요?
다니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이를 보면 알 수 있는 것 같애요.
박태균: 거긴 아직도 좋아하는 것 같애요. 오래 가는 것 같애요~거기는~
김지윤: 미군정이 원하는대로 완벽하게 협조를 해준다든지 이렇지 않기 때문인데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 이후에 신탁통치를 하기로 결의를 했는데 (이승만이) 거기에 참석을 해주면 좋은데 김구 선생과 함께 반탁운동에 동참을 해요.
박태균: 그 당시 미군정이 할려고 했던 거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 뭔가 한국에서 조직을 소련과 협의해 만들어야 하는데 이승만 박사는 소련하고는 절대 안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지금 미국 국무성 뿐만 아니라 미군정이 추진하는 정책에는 방해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시원: 미국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의 확장을 경계하는 입장이었잖아요. 그렇다면 이승만의 그런 반공적인 입장을 취하는 게 미국으로서는 고맙지 않았을까요.
김지원: 그런데 그때 상황은 조금 달라요. 본격적으로 냉전이 확산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잘 아시겠지만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사실 소련하고 미국하고 같이 연합군에 속해 있었죠. 어떻게 보면 약간 정치적인 파트너다, 협의를 통해서 하나의 통일된 정부를 한반도에 세워놓고 나가자 그게 더 컸다고 봐요.
박태균: 그 싯점에서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 9단에 눈치 9단이에요. 지방을 돌기 시작합니다. 이게 굉장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을 해요. 왜 이승만 박사가 그렇게 했을까. 식민지 시기에 미국에 있으면서 미국 정치를 봤다. 우리 지금 여기에 처음에 말씀한 정치지도자 중에 누구도 근대정치를 경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 독립운동하느라고 정치고 뭐고 없었어요. 싸워야 되는 때였거든요. 싸우고 뭉치고 할 때지 그런데 미국에 있어보면 분명히 알아요. 근대정치는 선거를 통해서 하는데 유권자수를 가지고 한다. 지방에 있는 유권자가 얼마나 중요한 건가. 지방에 건준지부나 인민위원회가 깔려 있는 상태에서 이승만 박사가 돌면서 운동장의 기울기를 바꾸어 놓는 거에요.
김지윤: 정치공학의 달인이에요.
이시원: 정치인이라고 하면 그 당시에는 서울에서만 활동할 줄 알았는데 직접 내 앞에 와서 연설을 하고 그래서 더 영향력이 커지지 않았을까.
김지윤: (이시원을 보고) 정치인 만나본 적 있어요? 악수 한번 하면은 마음이 달라져요.
최원정: 악수하는게 달라요?
김지윤: 달라요. (내가) 욕하던 사람인데도 (악수하고 나면) 좋은 사람같애요.
박태균: 둘이 만나서 악수 딱 하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다른 사람 만났을 때 딱 나오는 얘기가 내가 그 사람 좀 아는데~ 악수 한번 하면은~
최원정: 이승만은 지금 그걸 한 거에요. 지방에 다니면서~
이시원: 현재 유세방법을 그 당시에 쓴 거예요.
박상영: 서울에서는 또 미국과 소련이 합작을 해가지고 (제1차 미소공위 1946.3~1946.5-서울에서 좌우합작 정부논의 中), 정부를 만들자는 논의가 있는 와중에 이승만 박사는 지방을 돌면서 자신의 세력을 자꾸 확장해 나가고 반공주의를 퍼뜨리니까(4.17 천안-대전-옥구-옥천-김천-대구-영천-경주-울산-동래-부산-진해-마산-함안-진주-하동-순천-보성-장흥-목포-광주-정읍-전주-이리-6.6 군산), 미군의 입장에서 아무래도 신경이 많이 쓰였겠어요.
박태균: 기본적으로 어쨌던 미국과 소련은 빨리 나가고 싶었던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 소련이 서로 대화를 하고 타협을 해야 되는데 이승만 박사는 그걸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거에요.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한 거에요.
최원정: 소련한테 함부로 안하는 기조였는데 이승만이 자꾸 반소반소하니까 불편했겠네요.
김지윤: 걸리는 거죠. 우리도 빨리 하고 나가야 되는데 여기서 자꾸 반소, 반공하니까 이게 뭐지 걸리적 거리는 장애물인데 이렇게 생각한 거죠.
최원정: 그러니까 이승만에 대한 미군정의 입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아!!~ 쫌!!~
김지원: 그런데 반공 얘기만 했으면 모르겠는데 미소공위가 결렬이 되고 난 다음에 (1946.5. 제1차미소공위 무기한 휴회), 한달 후 쯤에 그 유명한 정읍발언을 합니다 (1946.6.3. 이승만의 정읍발언). 무슨 얘기냐 이건 뭐 결렬돼서 잘 안될 것 같은데 그냥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해 버리자 그래서 난리가 났죠.
최원정: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자고 한 돌발적 발언에, 과연 미군정의 입장은 어땠을까요. 지금 스튜디오에 하지 중장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 하지 중장 나와 주세요.
---------다니엘이 거수경례하고 단상으로 이동-------하지 중장의 복장을 하고 마이크 앞에 서다—
최원정: 사령관님, 안녕하세요? 이승만의 행보가 미군정의 정책방향과 너무 다르게 흘러가고 있는데, 미군정 최고 사령관으로써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다니엘(하지役): (이시원/통역役) 리 박사가 과대망상으로 거의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리 박사가 정신과 의사와 은밀하게 면담을 가지도록 일을 진행시킨 바도 있습니다. 나는 리 박사가 군정에서 쓸모있는 역활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리 박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그를 파멸로 이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박상영: 파멸까지?
다니엘 (하지役): (통역) 역사저널 많이 사랑해 주시요.
-----------------------미군정의 입장피력과 한국어 통역 끝----------------
최원정: 정신과 진료 얘기, 이런 얘기를 진짜 하지 사령관이 정말 했어요?
김지윤: 네, 했어요. 누구한테 했느냐면 로버트 올리버 라고 이승만 박사의 오른 팔인, 나중에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다음에 계속해서 연설문을 영어로 고쳐주었던 사람으로 일했어요. 하지 사령관이 이 사람한테 얘기한 거예요. 정신과 치료 받아야 한다고, 너무 극단적이고 극우적으로 발언을 하고 반공을 외치고 다니니까 이렇게 하면 우리가 이승만과 함께 할 수가 없다. 그런 얘기를 했죠.
박상영: 근데 이승만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이렇게 까지 극력하게 주장한 데는 근거나 이유가 있었을 것 아녜요. 그 이유가 뭘까요?
박태균: 전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을 해서 만약에 조선 임시민주정부가 생기면 본인이 거기서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던 거죠. 소련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통일정부가 선다면 나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두번째는 아예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나라가 지금은 협조를 하지만 언젠가는 갈라설 것이다 저는 이 두가지의 생각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는 전자가 훨씬 더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제정세에 대한 이승만 박사의 생각도 무시는 할 수 없었던 것 같애요.
다니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보다 더 조선의 상황을 알았을 테고 그러니까 한반도 정세판단 능력이 조금 빨랐던 것 같기도 해요.
이시원: 또 그 당시에 남한사회에서 사회주의가 그 당시에 좀 강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남한 사회에서도 사회주의가 더 확산되기 전에 좀 내가 승기를 잡아보자 개인적인 성향도 많이 반영이 되었을 것 같애요.
김지윤: 정치공작적으로도 바라볼 수가 있어요. 이승만 박사가 약간 정치공학의 달인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게 하나의 큰 아젠다를 던진 거잖아요. 지금 미소공위 결렬됐데 사람들이 막 동요할 거 아네요. 통일정부, 이러면 안되는거 아냐 이러는데 딱 나서서 남한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된다. 딱 던져 놓으니까 다 반대하던 사람들이 안돼 안돼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할거구 또 지지자들은 그게 맞은 거라고 그럴 거구. 모든 것이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블랙홀 안으로 쫙 들어오는 거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승만 박사가 있죠. 이 걸로 인해서 가장 눈에 띄는 정치인이 된거죠. 이걸 어떻게 보면 아젠다 선점 효과 라고도 하고, 영어로 First Mover Advantages 라고 하는데 그런 식으로 따졌을 적에는 굉장히 좋은 정치적인 한 수였다 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최원정: 위험부담은 분명히 있었을 것 아녜요.
김지윤: 위험부담이 있죠. 안티도 생기지만 그만큼 지지자도 생기는 거고~
최원정: 승부사 기질이 있는 거네요.
이시원: 의견이 완전히 갈라져 버렸네요. 참 아이러니한 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게 이승만 박사가 한 아주 유명한 말이잖아요.
박상영: 개그 프로그램에서 성대모사로 했잖아요.
최원정: 해 보세요~
다니엘: 어떤 말투예요?
박태균: (이승만 특유의 어투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또 하나는 프레임을 돌리는 능력인 것 같애요. 처음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게 이승만 박사가 귀국한 직후 나온 얘기인데 이때 제일 중요한 아젠다는 일제 식민지 잔재 청산입니다. 친일파 척결이고~ 이것에 사람들이 집중을 하고 있는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프레임을 바꾸어 버리는 거예요. 아까 저희가 정읍 발언 얘기할 때도 그런 거죠.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누가 미소공위에 참여를 해가지고 새로 생기는 정부에 주역이 될까 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우리는 단독정부를 세워야 된다. 분단정부 세워야 된다. 프레임을 바꾸면서 본인이 거기서 뜨는 재주가 굉장히 뛰어난데 저는 특히 이런 캐치 프레이즈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라는 것은 굉장히 뛰어난 거 같애요.
이시원: 귀에 쏙쏙 박히고 기억하기도 쉽고~
김지윤: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공부한 영향이 크다고 봐요.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민주주의가 어떻게 흘러나왔는지 보고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중의 마음을 얻는 것이거든요. 그때 정치적인 수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배운 거지요. 우리 고대 로마공화정도 있고 그리스도 있고, 건너서 영국 미국도 기억 나는 게 많잖아요. 주사위는 던져졌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 루즈벨트도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없어요. 내용도 하나도 없는건데 멋 있잖아요.
다니엘: America Great Again 도 있고,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라틴어도 기억나요. alea iacta est 라틴어 진짜 3년 동안 배우면서 기억나는게 없는데 만화책에서 본 그말만 기억나요~.
최원정: 우리나라에도 그런 캐치프레이즈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기억 나는 거 있어요?
이시원: (노태우)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
김지윤: (권영길)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
최원정: 가장 최근에는, 사람이 먼저다! 저녁이 있는 삶, 그 캐치프레이즈가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김지윤: 그런데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도 잘 따지고 보면은 문맥상으로 봤을 때 나를 따르라 나를 중심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은 죽는다 라는 이런 뜻이에요.
박태균: 그러니까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하고는 옆에서 절대 같이 일하지 못할 사람이다. 이런 부분들이 미군정이 이승만 하고 갈라지는 중요한 요인인 거죠.
김지윤: 이승만 박사가 항상 자기 중심적인 것은 있기는 했어요.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 박사를 국무총리로 (1919.4.11) 추대를 했었고, 또 한성임시정부라고 있었어요. 그건 조금 있다가 사라졌지만 한성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추대를 했었어요 (1919.4.23). 그런데 외국에 공문보내고 편지보내고 할 때 자기는 항상 영어로 President라고 쓴 거예요. 자기가 대통령이라고~ 그러니까 임시정부측에서 네가 왜 대통령이냐 다시 고쳐서 쓰라고 했는데 아니 이미 다 보낸 걸 어떻게 고쳐, 결국은 안고쳐요. 그래서 나중에 이승만 박사가 한국으로 귀국을 할 때 도쿄에 들려서, 맥아더 장군을 만났는데 거기서도 본인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다 라고 소개했죠.
박태균: 안창호 선생이 화가 나서 편지를 보내요. “그 어느 정부에서도 당신은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은 정부의 집정관 총재 직함뿐입니다.” 그 내용은, 임시정부에 대통령 직제가 없다. 당신이 왜 대통령 이라고 부르고 다니냐~그런데 이승만은, 직책을 집정관 총재라 그러면 아무도 모른다는 거예요. 대통령이라고 써야지 알지 않겠느냐, 결국은 이승만이 이겼어요. 그래서 대통령을 계속 쓰고 다녔답니다.
최원정: 그래서 나중에 그런 일 저런 일 때문에 탄핵도 당하잖아요.
박상영: 아카데미 다관왕에 빛나는 기생충에 보면은 대학증명서 위조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데~--송광호(아버지役): 아들아, 아버지는 니가 자랑스럽다, 아들: 아버지, 저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교에 꼭 갈거든요, 아버지: 넌, 계획이 다 있구나, 아들: 서류만 좀 미리 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게 딱 지금 이승만 대통령이 했던 행동과 똑 같던 것 같거든요.
박태균: 계획이 있구나~ 자랑스럽다~
박상영: 그렇죠, 그 이승만 박사님에게 모든 계획이 있었던 거죠.
최원정: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대중의 지지도 필요하지만 당시 미군정의 지지가 정말 중요했는데~ 아까 보니까 이승만이 하지와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던데~ 어떻게 이 상태로 가능한 건가요?
박태균: 미군정 쪽에서는 이승만은 더 이상 안되겠다 소련하고 합의를 위해서는 소련이 받아드릴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거기서 생각을 했던 게 여운형과 김규식입니다. 김구 같은 경우는 굉장히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반공입장이 강했고 너무 반탁을 강하게 했습니다. 그럼 김규식과 여운형을 세워야 하는데 좌우합작 위원회를 추진하면서 이승만과 김구를 불러요. 두 분을 불러서 앞으로 김규식을 지원했으면 좋겠다 (1946.6.20)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실 이승만으로서는 내가 권력을 잡기 힘들겠구나 라고 정확하게 느끼는 싯점이 되는 거죠.
이시원: 정치9단 눈치9단 이승만이 또 그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나요?
박태균: 미군정을 내가 어떻게 해결할거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워싱턴 DC다.
최원정: 미국으로 건너가요?
박태균: 그렇죠. 이걸 해결해야 되는 거죠.
이시원: 미국행 좀 의아한데요. 오히려 국내를 다져야 할 타이밍에 미국으로 갔다는게 좀 의아하거든요.
박태균: 첫번째는 자기가 아는 인맥들이 미국에 있어요. 이게 첫번째 자기 자산이고, 두번째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힘은 워싱턴DC에서 나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럼 내가 여기서 돌파할려면 이 벽보다 더 높이 있는 델 가야 되겠다. 과거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인맥들을 동원을 해서 미군정과 정면으로 한번 붙어보겠다 라는 걸로 간 거죠.
박상영: 그럼 구체적으로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 어떤 활동을 했나요?
김지윤: 하지 사령관을 두고 공산주의에 되게 친화적인 사람이다 라고 일종의 모략을 한 거죠.
박상영: 反하지운동을 펼친 거네요.
김지윤: 그렇죠.
박상영: 사실은 미군정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안티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게 리스크가 큰 운동일 수 있지 않은가요?
김지윤: 리스크가 없었어요. 미정부, 미국무부에서는 귀담아 듣지를 않았어요. 이승만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거나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허세도 있다고 평가하고~ 듣지를 않았는데 어쨌든 하지 사령관은 굉장히 공산주의 친화적이고 나같이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애국자를 괴롭히고 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죠.
다니엘: 하지를 미군정에서 끌어낼려고 했었던게 성공했나요?
김지윤: 못하죠! (하~하~).
최원정: 그런데 참 이승만 박사는 특이한 게 옛날에 하와이 있었을 때도 박용만,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미군함을 폭파할려고 했다면서 모함해서 끌어냈잖아요 (박용만 모함사건(1918년)-이승만이 미당국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인 日군함을 폭파시키려 한다고 박용만을 모함한 사건). 이런 게 이분의 어떤 술수인가요?
박상영: 정치기술 속도가 정말 5G에 가까운~
김지윤: 하지 사령관 입장에서는 굉장히 모욕적인 거에요. 자기가 미국을 위해서 민주주의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인데 군인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면은~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나의 인생을 모두 모욕하는 그런 식으로 느꼈던 거죠.
이시원: 결국은 들어보면 그렇게 가서 그렇게 큰 성과는 없었던 것 같거든요.
김지윤: 그러나 국제환경이 바뀌는 일이 딱 하나 생겨요. 당시 그리스 내전이 있었어요. 서구세력이 지지하는 정부군이 있고, 그리고 소련이나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이 지지하는 반정부군이 있는데 내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는 지중해에 있잖아요. 동구권도 앞에 있고 여기가 먹혀 갔고 서유럽 지중해를 공산주의가 퍼고들면 어떻게 하나 생각이 드니까 그건 막아야겠다 그리고 나온게 그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이에요 (트루먼 독트린(1947.3)-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그리스-터키 등을 지원한 美트루먼 행정부의 정책). 사실 이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냉전시대가 시작된 거죠.
박상영: 너무 큰 운이 따라 준 거죠. 그분이 미국에 가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을 때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되고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어요.
이시원: 저는 이게 운이라고 보지는 않아요. 기회는 운이 오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되잖아요. 이승만 같은 경우는 미소관계가 틀어질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어요.
박태균: 저는 일종의 도박을 걸었던 게 아닌가 해요. 이게 아니면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승만도 마지막 걸어야 되는 부분들이다. 그런데 또 미국에 가서도 이게 그리 성공적이지도 못했어요. 거기서 이런 얘기를 하고 다녔지만 그래서 하지를 한번 소환을 했지만 하지가 물러난 것도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해서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포기하고 좌우 합작위원회를 철회했느냐 이것도 아니에요. 이제 마지막으로 쓴게 가짜 뉴스입니다. 그때가 마침 미국쪽에서 한국에도 대규모 원조를 하겠다 라고 하는 정책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 였거든요. 미국쪽에서 한국에 6억 달러원조를 할려고 하는데 이승만 박사가 미국가서 따낸 것이다 (동아일보, 1947.3.21).
최원정: 이미 계획이 다 되어 있었던 건데~ 슬쩍 던진 거예요?
박태균: 근데 사실은 그 정도의 원조가 되지도 않았어요. 실제로는 그런 얘기가 있으니까 따냈기 때문에 여기에 오면 조선 임시정부가 수립이 되면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취임을 할 거다.
다니엘: 그건 사실 어떻게 보면 국민을 대상으로 대놓고 사기를 친 건데요.
김지윤: 그때 국민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1947.4.21.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열렬한 환호로 맞았고~
박태균: 국민 누가 좋아했나요?~ 다 좋아한 것은 아니죠.
일동: 이승만 박사를 사랑하는 사람, 지지자들이~
김지윤: 그런데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거죠. 그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그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고 표를 주게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런 점들이 이승만 박사하고 김구 선생의 차이점이다. 정치를 아는 사람과 투쟁만 한 사람의 차이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게 가짜 뉴스고 여기에 대중들이 속아서 현혹돼서 주지 말아야할 표를 줄 수도 있고 하는 건데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장점이자 맹점이거든요. 언론 플레이를 하고 여론을 만들고 사람들로 나를 사랑하게 만들고 저쪽을 반대하게 만들고 그거를 십분 활용한 사람이 이승만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박태균: 사실은요, 김구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어요. 문제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못받았을 뿐이에요. 이승만 박사가 지방에 내려가 있을 때도 그렇고 외국에 나가 있을 때도 김구 선생이 모든 걸 다 했어요. 그때는 (반탁, 반공) 이승만하고 김구의 관계가 굉장히 좋았습니다. 호형호제 하는 관계였고, 그때까지는 같이 붙어 다녔어요. 그런데 이게 47년말 이후에 가서 정부에 참여할 거냐 남북협상 할거냐 해서 갈라지게 되었지~저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애요 똑같이 해도, 누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누군 못받아요.
최원정: 그게 무슨 차이일까요, 교수님?
박태균: 똑같이 글을 써도 누군 베스트셀러가 되고~
다니엘: 불만이 많으신 가봐요.
박상영: 스타성 이란게 영혼에 있나봐요.
최원정: 다른 작가들은 박상영 작가 한테 그렇게 생각할거에요.
이시원: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승만 대통령이 굉장히 괘씸한 짓을 하긴 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미국과 소련이 벌어지는 마당에서 어쩔 수 없이 이승만 박사를 택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김지윤: 더 안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만약에 독립정부를 세워놓고 이승만이 그걸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된다면은 절대 미국 말을 안들을 거다 라고 판단을 한 거죠. 저 사람은 우리와 협조할 생각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다 라는 생각을 했고, 하지 사령관과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져서 어떻게 보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느낌이었어요. 아까 굿펠로우 말씀하셨잖아요. 이 사람이 OSS 국장이었나 그래요 (프레스턴 굿펠로(Preston M.Goodfellow)-CIA의 전신 OSS의 부국장 역임, 하지의 고문이자 이승만의 사설고문), 이 사람한테 보낸 편지에 보면은 그런 말이 있어요. The old S.O.X, SOB 알잖아요.
최원정: 그게 굉장히 심한 욕인데~
김지윤: 이승만에게 크게 분노한 하지 사령관~ 완전히 갈라진 거죠.
다니엘: 그럼 미군정이 이승만이 아니다면 남한에 생각했던 인사는 누구죠?
박태균: (준비한 주요 지도자 모형 4개, 김규식, 여운형, 김구, 이승만 등장), 처음에는 이승만 박사를 데리고 온 거죠. 그리고 이승만 박사를 옆에서 돕기 위해서 김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미소공위를 해보니까 소련과의 합의에 의해서 정부를 만든다. 그러면 거기에는 그래도 소련이 크게 반대하지 않을 지도자 둘을 세워야 된다. 그래서 김규식, 여운형 두 분을 후보자로 내세우게 된 거죠.
최원정: 김규식, 여운형 두분이 급부상 하셨습니다.
김지윤: 여운형 선생 같은 경우도 일단 좌우합작을 우리 끼리 주체적으로 한 다음에 임시 통일된 정부를 세우면 좋지 않겠느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미군정에서 물론 여운형 선생이 좌파쪽에 가깝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좋아하는 인물은 아닌데 어쨌든 김규식 선생님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그리고 이걸 여운형 선생이 지지하는 모양새를 갖추면 좌우 밸런스도 맞고 나쁘지 않겠다 라고 생각을 했죠.
박태균: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겁니다. 이제 두분을 내세워야 되는데 여운형 이라는 사람이 이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은 붉은 색이 있는 거죠. 좌익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여운형을 제거해야 되겠다. 그래서 미군정쪽에서 여운형의 친일경력을 밝히기 위해서 일본에다가 요원들을 파견을 해요. 前총독, 정무총감 이런 사람들을 다 인터뷰를 합니다. 다 조사를 하고 그 조사 끝에 가서 결론을 썼어요 (美군정의 결론-여운형은 친일 행위자가 아니라 애국자).한국에 애국자의 최정점에는 여운형이 있다. 우리가 여운형의 친일 경력을 조사하는 것 자체가 모독이다 란 결론적인 보고서를 내요. 그리고 나서 여운형을 제거하기 보다는 오히려 안으로 포섭을 시키고 여운형과 공산주의자들을 단절시킵니다. 박헌영을 중심으로한 조선공산당과 단절시키고 좌우합작으로 끌어와 정치적인 리더쉽이 약해 보이는 김규식을 미국은 가장 합리적이라고 보는데 김규식을 밑에서 바치는 역할을 하자 이렇게 정책이 바뀌는 거죠.
박상영: 이승만이 제외된 이유가 무엇인 거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한창이던 1947년 7월 19일,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합니다-----------좌우 합작의 구심점 여운형이 탄 차가 서울 혜화동 로터리를 지날 때쯤 갑자기 나타난 차량이 그의 차를 가로 막고는 그리고 괴한의 총탄에 심장과 복부를 피격 당한 여운형, 여운형의 죽음과 함께 통일 임시정부 구성을 향한 좌우합작도 표류하기 시작한다----------------
최원정: 이 분이 이렇게 암살당하셨어요. 좌우합작의 핵심인물이면서~~(여운형 모형을 들고) 마음이 아파서 다른 곳으로 모실까요. 좌우합작의 핵심인물이고 미군정의 가장 유력한 파트너로 생각했던 이 분이 암살을 당했어요. 미소공위가 한참 열리고 있는 그 시기죠.
김지윤: 암살위협을 많이 받으셨어요. 여운형 선생은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인물들로부터 열두번 정도 암살위협, 위험도 다양하게 야산에 끌고간다든지 집에 폭탄을 투척한다든지 그런데 정말 극적으로 다 살아났는데~ 그 마지막 열두번째에 암살을 당하셨죠. 범인은 당시 우익청년 한지근이라는 사람인데 그 당시에 암살당했던 분들이 다 그랬듯이 정말로 배후엔 누가 있는지 아직도 사실 모르지요 (1947.8.3. 여운형 영결식).
최원정: 어떻게 열두번 테러를 그걸 다 견디셔서 정말 대단하세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죽일려고 작정을 한 거예요.
박태균: 사실 제가 제일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가 여운형의 암살입니다. 여운형 이라는 사람은 그 당시 통일정부를 세우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그 정도의 역할을 할 사람이라면 죽을 자유도 없는 거예요. 방심하고 있다가 암살 당했거든요. 여운형이 죽고나서는 더 이상 통일 한국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없어진 거예요. 사실 통일정부를 세운다 그러면 미국과 소련 측에서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거든요.
다니엘: 실제로 여운형의 여론을 보면 되게 좋았데요. 해방 직후 설문조사에 보면 양심있는 지도자로 누구를 믿으세요 질문에 1위 여운형, 그래서 만약에 통일정부를 설립했으면 그때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박태균: 지금 여기 여운형씨가 암살당하고 나서 세 분이 있는데 아마 그 중에서 유일하게 받아드릴 수 있는 사람은 김규식이 아닐까. 미국과 소련이 받아 드릴 수 있다. 이분은 제가 보기에 학자예요. 독립운동 할 때도 미국에서 대학나오고 나서 상해나 북경에서 해외에 나오는 조선 청년들을 데리고 영어 가르치고 유학준비시키고 했던 사람이예요. 두 사람 (이승만, 김구) 안돼요. 그래서 또 마지 못해 생각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서재필이 있어요 (서재필(1864~1951)-在美 독립운동가, 독립신문창간, 독립협회설립), 이 분은 굉장히 고령인데 (당시 84세) 미국에서 모시고와서 이 분을 또 옹립해야 되는게 아닌가. 이 분을 또 잘 몰라요 거기에다 국내기반이 아무 것도 없고 그래서 이제 딜레마에 빠지게 된 거지요.
박상영: 그래서 말인데요. 미군정의 다음 파트너는 누구로 예상되나요?
박태균: 그래서 제가 준비를 해왔어요. 거의 지금까지 등장을 하지 않은 분인데요. 장덕수라고 하는 한국민주당의 전략가입니다. 최고의 전략가입니다 (장덕수 (1894~1947)-한국 민주당 정치부장 역임), 사실 일제 강점기에도요 좌파우파 활동을 다 하셨던 분이고요. 아주 굉장히 두뇌가 명석하고 약간 친일의 경력이 있었지만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했었기 때문에 인맥도 굉장히 넓게 퍼져 있는 분이고~
이시원: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김구 선생님이나 김규식씨에 비해서 장덕수씨는 지지도나 인지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을까요?
김지윤: 존재감이 일반대중들한테 별로 없으셨죠 오히려 장덕수 선생 알어? 그러면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시원: 전 이름은 들어봤는데 사진으로 처음 봤어요.
김지윤: 미군정에서도,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대통령으로 팍 추대해서 일하는 것보다 미군정에서 그 당시에 제헌헌법 비슷하게 골자를 짜놓은 걸 보면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고 되어 있어요. 의회에 힘을 몰아주자 사실상 미국정치도 의회가 가장 중요해요. 지금이야 대통령의 권한이 굉장히 커졌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만들 때에는 의회에 집중을 했고, 의회를 세워놓고 거기에 일종의 내각제 총리처럼 장덕수 총리를 세우고 의회에서 뽑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면 그건 이제 이승만으로 약간은 별 실권없는 대통령으로 만들자 라고~
다니엘: 거의 독일 처럼~
김지윤: (다니엘에게 질문) 독일 대통령 이름이 뭐예요?
다니엘: 우리는 슈타인 마이어
김지윤: 어! 알기는 아는구나!
이시원: 독일 사람인데 알죠.
다니엘: 심지어 본적도 있어요. 독일하고 똑 같은 제도인데 대통령은 상징적인 역활만 해요.
박상영: 종이 인형처럼 세워놓는거고 사실은 어찌 보자면 절대로 이승만을 지도자로 만들지 않겠다는 하지의 의지가 보이는데~
최원정: 너 대통령 해, 힘은 다 빼놓을 게~
박태균: 어쨌든 실권은 장덕수가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에 주겠다. 특히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대에는 한국민주당이 반탁운동에서 2차 미소공위 때 빠져 나와요. 1차 미소공위 때는 한민당이 두분인 반탁운동진영에 합류를 했었는데 2차 미소공위에서는 여기서 빠져나와서 미군정에 협조하는 쪽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우리에게 협조할 수 잇는 사람한테 실권을 주고 대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물러나게 할 수가 없다. 실권은 주지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인데,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미군정이 생각했던 하나의 시나리오입니다.
다니엘: 그래서 장덕수~(갑자기 땅~)
박상영: (땅~) 이게 무슨 소리야!?
----------------------1947년 12월 2일, 여기가 장덕수 박사님 댁이 맞죠? 장덕수: 어떻게 오셨는가? 경찰: (장덕수에게) 총을 서너발 발사~땅~땅~한국민주당 정치부장 장덕수가 자택에서 암살당한다. 유엔한국 임시위원단의 입국 한달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다니엘: 에이고~
최원정: 당시가 무시무시한 암살의 시대라고 하지만 또~ 이분도 제외해야 되네요.
이시원: 이렇게 미국이 파트너로 삼은 사람마다 암살이 되어 버려요~
박태균: 송진우 암살되었구요, 여운형도 그렇구요, 장덕수도 이렇게 됐구요, 사실은 미군정하고 가깝게 가서 그 삶이 지도자가 되는 걸 막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이 사건과 이전 사건과 굉장히 달랐던 게 경찰이 암살을 해요.
이시원: 배후가 누굴까?
최원정: 경찰이 암살을 해요? 장덕수는 경찰이 암살하고 김구는 군인이 암살하고~
박태균: 그런데 딱 잡고나서 며칠 지나자 마자 냄새가 나기 시작해요.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
최원정 & 박상영: 네? 김구 선생님이여?
박태균: 네, 그런 보도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건 제가 보기에는 굉장히 정치적 모략의 냄새가 나요. 특히 장덕수 암살건에 재판을 하는데 김구를 증인으로 나오게 합니다. 살인사건 재판정에 증인으로 나간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써 굉장히 큰 타격이거든요. 흥미로운 건 트루먼 대통령의 법정출두 요구서를 보내요.
최원정: 미국에서요?
박태균: 이게 말이 안되는게, 그 당시에 김구 주석은 아무런 공식직위가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미국의 대통령이 조그만 나라 촌부한테 법정에 나오세요 라고 편지를 쓴다구요. 이건 정치공작입니다. 이게 어떤 사연이 있느냐 하면 미소공위가 결렬되고나서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올라가고 유엔에서 한국에 들어와 한반도 전체에서 총선거를 하겠다. 그런데, 북쪽에서 그걸 거부를 하잖아요. 그런데 이제 남쪽에서만 선거를 하는데 김구는 나는 그거 못하겠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 미국측으로서는 굉장히 힘든 부분이 생기는 거죠. 유엔에 의한 선거를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해서 뭔가 부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한~~
김지윤: 사진도 있어요. 군정이니까 군사법정 재판을 받잖아요. 김구 선생이 앉아계시는 사진이 있어요. 저 사진을 보면 되게 속상해요. 물론 그 후로 무혐의로 풀려나긴했는데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았죠.
박태균: 그 사건을 조사했던 분을 만났습니다. 미군정 요원이었던 분인데 그 당시는 CIC 요원이었던 분이어요. 그 분이 이 조사를 했는데 조사를 하다보니까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데요. 자기가 여기만 넘어가면 누군지 딱 밝힐 수 있는데 미군정 상부에서 조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대요.
최원정: 美군정에서요?
박태균: 그래서 이분이 조사하다가 중지를 했고 이분이 저한테 꼭 알고 있어라. 이건 제가 보기에는 정치적 모략의 냄새가 나요.
이시원: 그러면 김구 선생은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되고 정치적 입지도 깎이고, 북한으로 김규식 선생과 회담하러 가시고 그러다 보니까 미국의 선택은 결국 이승만 밖에 없었던 거네요~~
김지윤: 그렇죠, 사실 김구, 김규식, 이승만 셋이 모였을 때 그런 얘기를 했대요. 김구나 김규식은 단독선거는 반대다. 김규식 선생이 우리가 만일 이걸 진행하면 역사가 우리를 역적으로 적을 것이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가 그건 내가 책임진다. 그래서 완전히 갈라진 거죠.
최원정: 우여곡절 끝에 이제 남한 단독선거가 이루어지는데 사실 남한에서 치루어진 첫선거잖아요. 어떤 모습이었는지? (동영상) 보실까요?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뽑는 첫 선거가 38선 이남에서만 열렸다. 태극기가 곳곳에 게양됐다. 투표를 하기 위한 유권자들의 행렬이 새벽부터 이어졌다. 오랜 역사의 왕정과 일제 강점기를 지난 민주공화국가를 향해 내딛는 첫 도약의 순간이자 남북분단이 더욱 공고해지는 순간이었다.
최언정: 아~~ 저 영상이 저렇게 남아 있다니~ 비록 남한에서 였지만 내 손으로 지도자를 직접 뽑는 아주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에요.
박태균: 또 투표율이 굉장히 높았데요. 95.5%의 투표였는데 사실~
박상영: 가능한 일인지~?
박태균: 그래서 논란이 되는게 과연 이 투표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느냐 유엔쪽에 보고된 거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는 거고 일부에서는 강압적으로 투표장으로 끌고 나온 부분이 있다. 그게 좀 나뉘고 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선거, 비밀선거가 이루어졌다는 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을 해요. 21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선거가 이루어졌고 특히 여성까지도 참여를 했거든요.
김지윤: 지금 저기 포스터에서 부시다시피, 농민도 있고 중절모를 쓴 신사도 있고, 여성도 있고, 전부다 평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러간다 라는 표어를 보여준 거죠.
최원정: 기권은 국민의 수치~ 여러분, 총선(4.15) 다가옵니다,
박상영: 지금 봐도 세련되고 상징이 담겨 있는 그러한~
이시원: 여성한테도 투표권이 주어졌다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아까 VCR보니까 아이를 업고 투표를 하러 갔잖아요. 제가 알기로 프랑스에서 첫 여성참정권이 1944년에, 이탈리아는 1945년에, 그리고 스위스는 1971년에서야 주어졌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도 혁신적이었어요.
김지윤: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시작하는 국가가 오히려 그런 부분이 평등하게 주어줄 수 있어요. 세계에서 가장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준 국가는 뉴질랜드예요(1893년). 국가를 세우니까 다 준거에요. 오히려 사회가 만들어진 것 같은 경우는 영국, 미국, 프랑스는 기득권의 저항 때문에 그걸 확대하기가 힘들었죠. 우리도 나라를 세우면서 여성에게 평등하게 참정권을 주어야 된다 그리고 선거에 참여하는 국민들이 뭐라 그럴까 이건 신성한 날이다 라고 생각해서 그 전날 술을 안팔았어요.
일동: 오! 그 전날, 술을 안팔았다구요!
최원정: 우리가 녹화 전날 술을 안마시듯이 정말 깨끗한 정신으로 투표를 하겠다는 의지로~
이시원: 술에 취해 잘못 찍을 까봐~
최원정: 지금도 선거 전날과 당일에 술을 안파는 나라들이 꽤 있어요. 술판매금지국가, 필리핀, 멕시코, 태국 이런 나라들은~
박태균: 지금이야 저희가 이게 정의의 주인은 국민이다 시민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거고 우린 백성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이제 내가 내 손으로 지도자를 한번 뽑아 보자 이건 정말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시원: 그때 후보는 몇 명이나 나왔고, 또 어떻게 당선이 됐어요?
박태균: 주목되는 건 뭐냐면 1948년 선거도 그렇고 50년 선거까지 두번의 총선거에서는 무소속의 비율이 굉장히 높아요. 첫번째 선거가 42% 조금 넘는 정도의 좌석을 무소속이 차지를 했구요. 두번째 가서는 그보다 더 높아집니다. 정당 보다도 무슨 협회, 청년회 이런 식의 단체들이 참여를 해요. 정당 시스템 이라는 것은 아직까지는 쫓아가지 못한 상태였죠.
이시원: 그 당시의 이승만 박사도 국회의원으로 당선이 되었을 텐데~ 어디 지역구로~
김지윤: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랬죠, 경쟁자가 없었어요.
최원정: 무투표로 진행이 되었겠네요~
김지윤: 이승만인데~
박태균: 원래는 있었는데~ 최능진이 기억나세요? (최능진 (1899~1951)-독립운동가, 해방직후 경찰로 복무하며 친일경찰고발), 친일경찰고발이라고~ 등록을 못했어요, 누가 못하게 막았어요~
박상영: 누가요?
박태균: 누군가가 막았어요. 그래서 아예 못나왔죠, 우리는 그런 케이스가 많아요. (최능진 출마좌절-극우단체의 방해를 뚫고 후보등록을 했으나 결국 후보등록취소를 당함), 원래 등록을 할려면 구민 몇 명의 지지등록을 받아가야 되는데 가지고 가다가 가방을 탈취 당해서 등록을 못했어요.
이시원: 어머~ 그런 황당한 사건이~
최원정: 그래서 이승만이 단독출마를 해요. 지금 저기 이승만 후보의 포스터가 있는데요.---동대문구 갑선거구 국회의원 입후보 이승만 박사 애국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상영: 성스러운 한표를 국부 이승만 박사에게 들입시다 아직은 국회의원 후보상태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저 문구만 보자면 거의 왕처럼 자기를~
최원정: 스스로가 자기를 국부라고 표현을 하셨군요?
다니엘: 자기가 본인을 가리킬 때 짐이라는 단어도 썼잖아요. 왕이 자기를 말할 때 쓰는 건데~ 본인은 이미 대통령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였네요.
최원정: 이렇게 해서 뽑힌 의회를 우리가 제헌의회라고 하잖아요. 제헌의회라는 건 헌법을 만들었다는데~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날은?
박상영: 7월 17일 제헌절~
일동: 맞아요~초등학생도 아는 제헌절~
최원정: 나라의 설계도라고 하는 우리나라의 제헌헌법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나요?
박태균: 우리나라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이걸 생각하는게 기본이고 사실 우리 헌법의 기본틀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헌헌법은 조금 달라요. 제헌헌법은 공공성에 대한 것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인데 이 자본주의가 공공적으로 어떻게 공동체에 잘 작동할 수 있는가 특히 국가나 사회가 굉장히 중요하게 이걸 좌우할 수 있는 그런 산업에 대해서는 그걸 국가가 소유할 수도 있구요. 공공이 소유할 수도 있다 라는 내용이 그 안에 들어가 있어요. (제헌헌법 제87조-중요한 운수, 통신(중략)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이익균점권 이라는게 있습니다. 이게 회사에서 이익이 생기면 그 이익을 가지고 사측뿐만이 아니라 노측도 이걸 서로 나누어 가진다 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죠.
이시원: 現노동3권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이렇게 크게 3권으로 불리는데 그 당시에는 하나가 더 추가된 거네요.
박태균: 그 당시에는 4권이라고 해서 지금의 자본주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는거 같애요. 공공성의 원리가 지금의 헌법보다 제헌헌법에는 굉장히 강하게 녹아 있었던 거죠.
이시원: 그 당시에 노동자의 경영참여까지 가능하게 했다는 건데~ 그 당시에 의회구성이 약간 우파 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받아들였다는게 또 무리 없이 수용했다는게 의아하고도 놀랍거든요.
다니엘: 그게 어떤 기업을 사회적 소유로 할 수도 있고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라든지 이런건 굉장히 사회주의 냄새가 나지 않아요?
박태균: 제가 학생들한테 이 시대에 대해서 강의를 할 때, 한국민주당 가장 우파죠. 민주당의 강령을 학생들에게 보여줘요. 이게 어느 당의 강령이라고 생각하느냐면 99%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합니다. 사실은 우익 정당, 정치인들도 가지고 있었던 생각 자체가 그 당시에는 지금 보다는 좀 사회주의 체제가 강했다. 공공성의 부분이 강했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지윤: 제가 법학자들분 한테 물어봐요 우리나라의 헌법이라든지 이런 거를 물어보면은 한국 헌법이 굉장히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많았었다. 그렇게 얘기들을 항상 하세요. 시대적인 조류가 들어 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거죠. 그 시대에서 가장 원했던 것이 무엇인가 그동안 억울하게 탄압당했던 우리 국민들이 이제는 민주국가의 국권을 가지게 된 거고 계급사회 신분사회를 철폐 하고 정말 국민들이 주권을 가지는 그런 민주국가를 만들자 모두가 평등하다 이게 굉장히 방점이 찍혔던 것 같애요. 그래서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조금 많이 녹아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박상영: 그런데 두분의 얘기를 듣다 보니까 안타까운게 결국은 이런 사상적인 측면이나 시대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비슷한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던 거잖아요.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아니었다면 통일정부도 수립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박태균: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지만 일치하는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를 했거든요. 문제는 일치의 측면을 본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해야 정권을 잡는가 라는 걸 중심에 놓고 보면 사실 합치는 건 불가능해집니다.
김지윤: 한반도는 냉전의 축소판이 되었다. 굉장히 아쉬운 상황이긴 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인들이 협력하였으면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사실 오스트리아도 분단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이렇게 4분활이 되어 있었죠. 결국에는 통일을 이루어냈습니다. 정치인들끼리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고 미국하고 소련을 설득해서 우리는 중립국으로 남겠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겠다 하면서, 그런걸 보면은 정치인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역시 운도 중요해요. 왜냐면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첫번째로 한국에서 전쟁이 나는 걸 보고 우리도 잘못하면 저렇게 되겠다. 그리고 두번째는 1955년도에 통일을 이루는데 54년도에 스탈린이 죽어요. 시기적으로도 저쪽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았고 우리는 기회가 왔는데 놓쳤습니다.
최원정: 오늘 정부 수립과 헌법의 탄생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보셨는데 春來不似春 (봄은 왔는데 봄의 형국은 아닙니다). 다음에 또 어떤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는지 기대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순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59회 미군정과 이승만에서 정리).
① 조선조 말기와 일제 식민지 시대, 한국 근현대사를 이끌어온 지도자들이 있었다. 해방 후 우리의 첫째 목표는 건국이고, 둘째는 토지개혁이었다. 구시대를 타파하고 새로운 법과 제도를 받아들여 나라의 기틀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었다. 미군정 3년동안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독립을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시기였다. 이때, 남북 지도자들이 통일한국을 위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② 당시,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에 조만식, 김일성, 박헌영이, 미군정하의 남한에 여운형, 김규식, 김구, 이승만, 장덕수, 송진우 등이 있었다, 양쪽 지도자의 이념은 달랐지만 일치하는 점은 분명히 있었는데 그걸 중심으로 대화하고 협력하지 못하고 둘로 갈라져 개인의 정치적 이익만 추구하다 결국은 남한과 북한으로 분열이 되고 말았다. 같은 시기 유럽의 오스트리아는 미국과 소련과 영국과 프랑스를 설득해서 먼저 통일을 이루었다.
③ 북한에서 소련군 소령출신 김성주는 1945.10에 북한지도자로 나타나서 건국도 하기 전에 북한만 토지개혁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하였다. 이는 남한과의 대화를 어렵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지주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6.25 한국전쟁 전에 월남하여 반공주의자가 되는 동기가 되었다.
④ 1945.9.9.부터 38선 이남, 남한에서 본격적인 미군정이 시작, 美군정 최고 사령관은 존 하지 중장, 그는 미국에 우호적인 한국정부를 세우기 위해 한국 정치인들과 다양하게 접촉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백범 김구, 미국에서의 화려한 경력이 돋보이는 엘리트 독립운동가 이승만, 해방 직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도 좌파의 여운형,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고 좌우 합작운동에 힘쓴 김규식,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까지 3년간 치열한 정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승만이 귀국할 때 미군정에서는 거의 국빈급 대우에 미군정에 협조할 것으로 큰 기대를 했다. 2천만원 정도에서, 지금 돈으로 환산이 안되는 엄청난 액수, 그것의 반을 이승만한테 딱 떼어서 준다. 다른 조직에는, 10만원, 20만원 정도만 주었다,
⑤ 그런데, 미군정은 모스크바 3상회의(1945.12.) 이후에 신탁통치를 하기로 했는데 이승만이 김구 와 함께 반탁운동에 동참, 미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를 만들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 소련과 협의해서 한국에서 뭔가 조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승만은 소련하고는 절대 접촉을 하지않겠다고 하므로 미국 국무성 뿐만 아니라 미군정이 추진하는 정책에 방해물이 되어버렸다,
⑥ 그 싯점에 이승만은 지방을 돌기 시작한다, 이건 역사적 사건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있으면서 미국정치를 보았다. 일제 식민지시대 누구도 근대정치를 경험한 사람은 없었다. 독립운동하랴, 싸우고 뭉치고 할 때였다, 그런데, 근대정치는 선거를 통해서 유권자수를 가지고 한다. 지방 유권자가 얼마나 중요한가. 지방에 건준지부나 인민위원회가 깔려 있지 않은가, 이승만은 지방을 돌면서 운동장의 기울기를 바꾸어 놓았다. 이승만을 정치공학의 달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⑦ 기본적으로 미국과 소련은 서로 대화하고 타협해서 남북합작정부를 세우고 빨리 나가고 싶은데 이승만이 그걸 방해하고 있었다. 이승만이 자꾸 반소반소하니까 미군정은 불편했다. 미국과 소련이 합작을 해 제1차 미소공위(1946.3~1946.5)가 서울에서 좌우합작 정부를 논의 중인데 이승만이 지방을 돌면서 자신의 세력을 자꾸 확장해 나가고 반공주의를 퍼뜨리니까 미군의 입장에서 신경이 많이 쓰였다. 반공 얘기만 했으면 모르겠는데 1946.5.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이 되고, 한달 후에 이승만은 정읍에서 (1946.6.3),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발표를 한다, 미군정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⑧ 근데 이승만이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주장한 데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을 해서 만약에 조선임시민주정부가 생기면 본인이 거기서 주도권을 잡을 수 없다는 것과 소련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통일정부가 선다면 나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두번째는 지금은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협조를 하지만 언젠가는 갈라설 것이다 물론 전자가 훨씬 더 강했다. 국제정세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을 무시할 수 없었다.
⑨ 이승만은 미군정이나 소련 보다 조선의 상황과 한반도 정세판단 능력이 조금 빨랐다. 그 당시에 남한사회에서 사회주의가 강했으므로 남한 사회에 사회주의가 더 확산되기 전에 이승만은 승기를 잡아보자는 개인적인 성향이 있었고 그래서 이승만을 정치공학의 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은 항상 자기 중심적이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1919.4.11) 추대를 했었다, 한성임시정부에서는, 조금 있다 사라졌지만 집정관 총재로 추대를 했었다(1919.4.23). 그런데 이승만은 외국에 공문이나 편지를 보낼 때 자기를 항상 영어로 President라고 썼다. 대통령이라고~임시정부측에서 네가 왜 대통령이냐 고쳐서 쓰라고 했는데 안고치고, 이런 일 저런 일로 탄핵을 당했다. 나중에 이승만이 한국으로 귀국을 할 때 도쿄에 들려서, 맥아더 장군을 만나서도 본인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다 라고 소개했다.
⑩ 미군정에서는 이승만은 안되겠다 소련하고 합의를 위해서는 소련이 받아드릴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생각했던 게 여운형과 김규식이다. 김구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있지만 너무 반공입장이고 너무 반탁을 했다. 그럼 김규식과 여운형을 세워야 하는데 좌우합작 위원회를 추진하면서 이승만과 김구 두 분을 불러서 앞으로 김규식을 지원했으면 좋겠다 (1946.6.20) 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승만으로서는 내가 권력을 잡기는 힘들겠구나 라고 판단하게 된다. 이승만은 그 위기를 어떻게 돌파했냐면 미군정을 움직이는 데는 워싱턴 DC다. 미국으로 건너가서 하지는 공산주의에 친화적이다 라는 모략을 한다.
⑪ 미정부에서는 귀담아 듣지를 않았다. 이승만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거나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허세도 있다고 평가하고~ 듣지를 않았는데 어쨌든 하지를 미군정에서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국제환경이 바뀌는 일이 하나 생긴다. 당시 그리스 내전이다. 서구세력이 지지하는 정부군과 소련이나 공산주의 세력이 지지하는 반정부군간에 내전이 벌어진다. 그리스가 공산주의가 되는 걸 막아야겠다고 나온 게 트루먼 독트린이다 (트루먼 독트린(1947.3)-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그리스-터키 등을 지원한 美트루먼 행정부의 정책). 이 트루먼 독트린이 나오면서부터 냉전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 가서 이런 일들을 벌이고 있을 때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되어서 이승만은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⑫ 미군정이 처음에는 이승만을 데리고 와서 김구가 옆에서 돕는 걸로 했다, 그런데 미소공위를 해보니까 소련과의 합의에 의해서 정부를 만든다면 거기에는 소련이 크게 반대하지 않을 지도자를 세워야 된다. 그게 김규식, 여운형 이었다, 두분이 급부상 하였다. 미국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보는데 여운형을 김규식 밑에서 바치는 역할로 하자는 정책으로 바뀐다. 그런데,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한창이던 1947.7.19, 여운형이 암살당하였다. 다음으로 등장을 한 분이 한국민주당의 전략가고 정치부장인 장덕수(1894~1947)이다. 장덕수는 일제 강점기에 좌파우파 활동을 다 하셨던 분이고, 두뇌가 명석하고 약간 친일의 경력이 있었지만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을 했었기 때문에 인맥도 넓게 퍼져 있는 지도자였다.
⑬ 미군정에서 그 당시에 제헌헌법 비슷하게 골자를 짜놓은 걸 보면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 의회에 힘을 몰아주자 사실상 미국정치도 의회가 가장 중요하다. 지금이야 대통령의 권한이 굉장히 커졌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만들 때에는 의회에 집중을 했고, 의회를 세워놓고 거기에 일종의 내각제 총리처럼 장덕수를 총리로 세우고 의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아서 이승만을 실권없는 대통령으로 만들자 라고~
⑭ 어쨌든 실권은 장덕수가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에 주겠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대에는 한국민주당이 1차 미소공위 때는 한민당의 두분이 반탁에 합류 했었는데, 2차 미소공위에서는 장덕수가 미군정에 협조하는 쪽으로 갔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우리에게 협조할 수 있는 사람한테 실권을 주고 대중들한테 인기가 있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물러나게 할 수가 없으니까 실권은 주지않는 방향으로 생각을 했던 거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공위가 결렬되면서 미군정이 생각했던 장덕수 시나리오인데, 그런데 1947.12.2, 장덕수마저 경찰에 의해 암살당한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 한달 전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⑮ 미국이 파트너로 삼은 사람마다 암살 당했다,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한민당 수석총무, 1945.12.30암살), 미군정하고 가깝게 가면 누군가가 지도자가 되는 걸 막는 사람이 있었다. 장덕수는 경찰이, 김구는 군인이 암살하고,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었다고? 정치적 모략의 냄새가 나다. 장덕수 암살사건 재판에 김구가 증인으로 트루먼 대통령의 법정출두 요구서를 보낸다. 그 당시에 김구 주석은 아무런 공식직위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건 정치공작이었다. 이 사연은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올라가고 유엔에서는 한반도 전체에서 총선거를 하겠다. 그런데, 북쪽에서 그걸 거부를 하였다. 그러면 이제 남한에서만 유엔 감시하에 선거를 하겠다는데 김구는 그걸 반대한다. 미국으로서는 굉장히 힘든 부분이었다. 유엔에 의한 남한만의 선거를 반대하는 정치인에 부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과 반공을 같이 주장해 관계가 굉장히 좋았다. 그런데 47년말 이후에 정부에 참여할 거냐 남북협상 할거냐 라는 문제로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⑮-1 김구는 장덕수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입지도 깎이고, 북한으로 김규식 선생과 회담하러 가고 그러다 보니까 미국의 선택은 결국 이승만 밖에 없었다~~사실 김구, 김규식, 이승만 셋이 모였을 때 김구나 김규식은 단독선거는 반대다. 김규식 선생이 우리가 만일 이걸 진행하면 역사가 우리를 역적으로 본다. 그런데 이승만이 그건 내가 책임진다. 그래서 남북한이 완전히 갈라졌다고, 고로, 우여곡절 끝에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이루어졌다.
⑮-2 1948.5.10,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뽑는 첫 선거가 38선 이남에서만 열렸다. 21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오랜 역사의 왕정과 일제 강점기를 지난 민주공화국가를 향해 내딛는 첫 도약의 순간이자 남북분단이 더욱 공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비록 남한에서 선거였지만 내 손으로 지도자를 직접 뽑는 아주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투표율이 95.5%이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선거, 비밀선거가 이루어졌다. 유권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선거가 이루어졌고 특히 여성까지도 참여를 했다.
⑮-3 미군정 시에 결국은 사상적인 측면이나 시대정신적인 측면에서나 남한이나 북한이나 비슷한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아니었다면 통일정부도 수립할 수 있었다. 좌와 우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일치하는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를 했다. 문제는 일치하는 측면을 보지않고 내가 어떻게 해야 정권을 잡는가 라는 걸 중심에 놓고 보았다.
⑮-4 한반도는 냉전의 축소판이었다. 상황이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인들이 협력하였으면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오스트리아도 우리처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이렇게 4분활이 되었다. 정치인들끼리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고 미국하고 소련을 설득해서 우리는 중립국으로 남겠다. 이념에 치우치지 않겠다 설득해서, 결국에는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런걸 보면은 정치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운도 따랐다. 왜냐면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첫번째로 한국에서 전쟁이 나는 걸 보고 우리도 잘못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그리고 두번째는 1955년도에 통일을 이루는데 54년도에 스탈린이 죽는다. 시기적으로 저쪽은 기회가 왔을 때 잡았고 우리는 기회가 왔는데 그걸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