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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91
10월23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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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인생의 비정함 뒤에 숨어있는 따스함을 찾아나갑시다!>
파리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파리에서 오랫동안 생활해온 한 일본인 심리학자가 파리를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일시적으로보이는 증세를 관찰한 후,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파리에 도착하기 전,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꿈꾼답니다. 매혹적이고우아한 도시, 그림같은 도시 풍경, 품격있는 명품 도시!
그러나 막상 도착해 보면, 너무나 다른 상황 앞에 큰 충격을 받는답니다. 모든 구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지뢰같은 개똥들, 묘한 악취 등등에 실망한 일부 관광객들이 멀쩡했었는데, 갑작스레 현기증이나 구토증세를 앓는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네 인생 여정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인생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기 전, 인생의 제 1막 준비 시기에는 삶이 우아해 보이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과 설렘으로 인생이 가득 차있습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세상의 쓰디쓴 맛을 알아갈수록, 이윽고 사회 초년병 딱지를 '딱' 떼어놓는 순간, 우리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실망을 넘어, 충격을 받게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갖은 몸부림과 발버둥을 쳐야만 하는 세상의 비정함과 냉혹함 앞에 짐승처럼 울부짖기도 합니다. 어떻게 삶은 이다지도 우리를 철저하게 속이고, 이렇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갈수 있냐며 분노합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처럼, 인생이란 것, 절대로 녹록치않고,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늘 잔뜩 위축되고 움추러들어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인생의 비정함 뒤에 숨어 있는 따스함을 찾아야겠습니다. 슬픔 뒤에 살짝 숨어있는 작은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험난하고 가파른 오르막길 뒤에 펼쳐질, 잠깐 동안의 기막힌 능선길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야겠습니다.
인생에 대해 너무 기대도 하지 말되, 동시에 너무 실망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목숨걸지도 말아야겠지만 동시에 너무 적당적당히 소홀하게 살아서도 안되겠습니다. 어차피 제한된 시공간 안에 어쩔수 없이 근본적인 나약함과 부족함을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꽃의 성녀 소화 데레사의 도시 리지외를 순례하던 제게 주님께서는 이런 깨우침 하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참행복은 뭔가 대단한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랍니다. 매일의 일상 안 작은 것으로 부터 다가온답니다. 작은 깨우침, 작은 성장과 성취, 작은 위로와 성공, 그 안에 참 행복의 원천이 숨어 있습니다.
가슴이 확 트이는 8차선, 10차선 넓은 탄탄대로를 걷는 기쁨도 크겠지만 좁고 호젓한 오솔길을 걷는 기쁨은 더욱 크답니다. 남아있는 우리 인생 여정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엮어가는 소소한 일상 안에서의 작은 기쁨 작은, 행복을 찾고 추구하는데 더 투자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충실하면 할수록, 그에 비례해서 가장 가까운 이웃들, 가족들에 대한 충실성 역시 커져가야 마땅합니다. 가장 소중한 존재들을 무시하고 냉대하면서 멀리있는 사람들에게 충실하다는 것, 그것처럼 웃기고 어색한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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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방 안에도 하느님께서!>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장 39~40절)
신앙생활을 이벤트처럼 해나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주일만 신자’인 분들입니다.
어떤 분들은 분위기 좋은 성탄 때만 신자인 분들도 계십니다. 신앙생활은 하루 이틀 바짝 열심히 하고 나서 푹 쉬는 그런 이벤트가 절대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자세가 있는데 바로 지속성이며 일상성입니다. 신앙생활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때로 힘들어도, 때로 악천후라 할지라도 꾸준히 걸어가는 용감한 행위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큰 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듯 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저녁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져 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 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 그 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 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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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화요일)
<(3)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행!>
여행을 떠나면서 불현듯 떠오른 생각입니다! '그래 우리네 인생도 여행이로구나!'
인생이라는 여행길을 걷다보면,때로 조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때로 결코 길지 않은 여행, 마치도 벗꽃 만개한 어느 봄날, 아스라한 하루밤 꿈과도 같은 짧은 여행 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은총과 자비로 이 땅에 온 우리는, 다들 각자 나름의 여행길을 걷고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여행길이 아무리 길어보이고 고단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한 반복되지 않고 이 한번의 여행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 여행길의 종착점에는 그토록 우리가 그리워했던,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두 팔 크게 활짝 벌리고 미리 마중나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힘겹고, 때로 포기하고 싶어도, 두 발에 힘을 주고 기꺼이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왕 걷는 여행길 억지로, 갖은 인상 다 쓰며 걷지말고, 세상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순간순간 설레고 들뜬 마음으로 이 여행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강한 폭풍우를 만나거나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걸어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반드시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 마냥 우리를 험난한 비탈길로만 인도하지 않으신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걷다보면 황홀한 일출 광경도 만날 것입니다. 절경 사이로 펼쳐진 평탄한 능선길도 걷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정원같은 꽃길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욱 은혜로운 일 한 가지! 우리의 인생길은 결코 우리 혼자 걷지 않는다는 것! 때로 자주 잊어먹지만 우리의 여행길에는 인도자 성령께서,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들께서 우리와 함께 걷는다는 것은 우리가 굳게 믿어야 할 신앙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나혼자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외롭다고 울부짖지도 말아야겠습니다. 초목 우거진 멋진 수목원 산책하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걸어가야겠습니다.
내일은 또 어떤 길로 나를 안내하실까... 흥미진진한 얼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남아있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왕 걷는 길, 잘 꽃단장하고 걸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우중충하고 심란한 모습이 아니라 허리에는 띠를 매고 등불을 켜서 손에 들라고 하십니다.
단 한 번 뿐인 소중한 우리네 인생길 적당히 흥청망청 낭비하며 보내지말고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모습으로 엮어가라고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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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의 종의 역할은 양식을 분배하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은 한 가난한 가족이 부잣집에 위장취업 해서 벌어지는 내용을 그렸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이 모두 한 가정에 취직을 한 것입니다.
어느 날 주인집 가족이 며칠 동안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가난한 가족이 그 집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부자가 된 것처럼 먹고 마시고 흥청거렸습니다.
그런데 날씨가 나빠 놀러갔던 주인 가족이 갑자가 들이닥친 것입니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집 가족들은 자신들이 한 짓들을 감추느라 식은땀을 흘립니다.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다 들키면 큰일 나는 벌레들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보는 사람들의 심장이 쫄깃쫄깃 해 질 정도로 불안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탈출극을 벌여야했습니다. 이것이 주인의 집에 합당하지 못한 종들의 최후입니다.
남의 집에서 살려면 그 집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 집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집을 얻으려면 그만한 고생을 해야 하듯이 내가 만들지 않은 하느님의 집에 살려면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살 줄 알아야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그럴 능력이 있는지 시험하는 장입니다. 마치 기생충에 나오는 가족처럼 주인이 안 보이기만 하면 그 집을 자기 집처럼 여기며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부잣집에서 일하는 가난한 가족들은 각자의 임무가 있었습니다. 그것만 하고 있다면 주인이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그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말씀해주십니다.
제가 병자성사를 어느 부잣집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100평이 넘는 으리으리한 집이었습니다. 낮에 갔기 때문에 주인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알고 보니 다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방과 청소, 그리고 환자분을 돌보는 분도 계셨습니다. 한 환자분이 식물인간처럼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못하고 계셨는데 그 집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분은 비록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눈은 뜨고 있었고 의식은 있어 보였습니다.
만약 주인이 없다고 그 일하시는 분들이 그 환자분께 소홀히 하고 그것이 발각이 된다면
그분들은 당장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주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CCTV를 통해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환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그들을 돌보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카인은 “제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며 그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장 작은이들을 주인님의 가족으로 여겨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돌보냐면 주인의 재산으로 돌봅니다. 먹을 것을 주어도 주인의 것을 주는 것이고 옷을 입히고 약을 주어도 다 주인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것을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여겨 가난한 이들과 나누게 될 때 그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충실한 종입니다.
양식을 나눕시다.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삶을 통해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을 당신 나라의 모든 재산을 맡기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나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기생충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나는 매일매일 누구에게 하느님의 양식을 전해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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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9-48 :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매 순간을 충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어제의 말씀에 이어 오늘은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41절)고 물었다. 베드로는 이 비유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의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몫이다. 그런데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을 하게 된다면, 그런 종은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으로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 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 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들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이라고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 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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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준비를 당부하십니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언제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하여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모든 사람을 집사에 비유하신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이 집사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자기 집 종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줌으로써 주인에게 상을 받습니다. 자신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 주인을 맞을 준비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끝에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여기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내가 받은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고,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관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갑니다.
둘째로는, 하느님의 것을 관리하는 데는 슬기와 충실함이 요구됩니다. 내가 맡은 바를 잘 이해하고, 충실하고 현명하게 관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로는, 내가 받은 것이 많으면 그만큼 하느님께 많이 돌려드려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 힘으로 얻은 양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며, 주님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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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2-46)
이 말씀은, 불충실한 신앙인들에게 벌을 주겠다고 위협하는 말씀이 아니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도록 노력하라는 권고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벌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 자체가 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자체가 멸망입니다.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밖’에 있어야 하고, 바로 그 ‘밖’이 멸망입니다. 생명을 얻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빛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면 ‘어둠 속’에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중간 지역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생명도 아니고 멸망도 아닌,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는 ‘내가’ 선택합니다. 마음을 졸이면서 심판결과를 기다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기 자신이 잘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쪽을 선택했는지는 바로 ‘지금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3,17) 재림 때에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있는 재림에 관한 말씀들을 보면, 대체로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긴 하지만, 그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또는 구원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재림의 날은 심판받는 날이 아니라 구원받는 날이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집사’는 교회의 지도자들(성직자들)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집사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위임을 받은 집사일 뿐입니다. 그러니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공심판이든지 사심판이든지 간에 심판은 인생의 최종 결산서를 제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심판결과는 각자 자기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결산서는 각자 자기 자신이 작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과 재림의 날을 알려 주지 않으신 것은, ‘지금’ 회개하라는 뜻이고, 스스로, 진심으로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알면, 사람들은 마음대로 막 살다가 그날에 맞추어서 회개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 회개를 진정성 있는 회개로 볼 수는 없습니다.)
구원과 심판이 어떤 것인지를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에 참석한 모습은(루카 15,24), 구원을 받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인들의 신앙생활 목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심판하지 않았고, 아들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들이 겪은 고난과 굶주림은 아버지가 내린 벌이 아니라 작은아들 자신이 자초한 일이고, 그 일은 벌이라기보다는 그를 회개시킨 회초리였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그렇게 될 것을 알고서 집을 떠나는 아들을 말렸을 텐데, 작은아들은 그 말을 안 듣고 떠났다가 나중에 후회했습니다.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수님 말씀도 바로 그렇게 우리를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벌을 주겠다는 위협이 아니라...... 만일에 작은아들이 굶주림을 겪지 않고, 그런대로 먹고살만한 상태였다면, 회개했을까? 비유에서는 배가 고파서 정신을 차린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꼭 굶주림을 겪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고난을 겪기 전에 스스로 정신을 차리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은 고난 덕분에 제정신이 들었는데, 고난을 겪어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오히려 아버지를 더 원망하고 아버지에게서 더 멀어져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작은아들이 먼 고장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모습은(루카 15,13), 종교와 신앙 없이, 또 심판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마음 편하게,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세속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인생은 허무하게 끝납니다.
구원과 심판을 천국, 연옥, 지옥으로 바꿔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와 함께 잔치 음식을 먹는 상황은 천국이고, 제정신이 들어서 잘못을 뉘우치고 집을 향해서 걸어가는 상황은 연옥입니다. (연옥은 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보속하면서 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곳이고,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천국도 연옥도 아닌 상태는 모두 지옥입니다. 자기 스스로 아버지의 집을 외면하고 거부하든지, 배반자 유다처럼 용서받기를 포기하든지, 어떻든 아버지의 집에서 떨어져 있는 상태는 모두 지옥입니다. 먹고살기가 편하고, 인생이 즐겁고 재미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지옥입니다. <그런데 묵시록에 의하면, 사실 지옥은 임시 감옥일 뿐이고, 최후의 심판이 끝나고 나면 지옥도 소멸되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 소멸됩니다(묵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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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신학생 시절, 가정방문 호스피스를 할 때의 일입니다. 환자분은 나이도 들고 지병이 있어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분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그분을 방문하곤 했는데, 저는 그분의 집에 들어갈 때마다 종종 안경을 벗어야만 했습니다. 그분이 누운 채로 양 손을 뻗어 제 뺨 양쪽을 세게 때리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움의 감정으로 저를 때리신 것은 아니었고, 젊은 신학생이 당신을 보러 왔음이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행동으로 표현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김없이 제 뺨을 박수치듯 세게 어루만지신 그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학사님은 참 좋겠어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직 건강하고 젊은 나의 육신이 부러우신가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이어서 하신 말씀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학사님은 참 좋겠어요, 학사님으로써 저를 방문해주시는 것이 저에게 이렇게나 큰 기쁨이 되는데, 나중에 신부님이 되시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큰 기쁨이 되시겠어요”.
이 말씀은 저의 마음에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과연 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기쁨을 안겨주는 사제인지, 혹은 기쁨까지는 아니더라도 올곧게 살아가고는 있는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언젠가 제가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내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떠한 말들을 할까, 과연 이 세상에 내가 남기고 가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상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보면 과연 내가 지금 당장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면 그분은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제로써 정말 열심히 살아왔구나, 고맙다.’라고 하실지, ‘사제로써 너에게는 특별히 더 많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네 소명을 다하지 못했구나’라며 슬퍼하실지. 아직은 참으로 부끄럽고 하느님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이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준비하는 삶에 대한 비유 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어지는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주인이 종에게 책임을 맡기고 떠났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무를 맡겼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심판의 날, 곧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날에 하느님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명 주님으로부터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고 있으며, 특별히 불리움을 받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은혜와 축복이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안도감을 얻으며 어떻게 하면 더 올곧게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책임이 뒤따릅니다. 좋은 직장이 더 많은 능력을 요구하듯,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은총을 그만큼 사랑으로 되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대하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 그것을 우리 역시 하느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끝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을 직접 행동으로 드러내 보일 때입니다. 이것을 꾸준히 상기하지 않고 잠 들어버린다면 당연히 그 은총은 갈 곳이 없고 허공에 흩어지고 맙니다.
오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의 삶이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수행하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봉헌하시길 바랍니다. 만약 오늘의 말씀이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 하느님을 만나게 될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과연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아이야, 너는 그리스도인으로써 나를 도와 최선을 다해 살아왔구나, 힘들었지?”라고 말씀하실지, “너는 내가 그토록 속삭이고 알려주었는데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였구나” 말씀하시며 슬퍼하실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주인은, 이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며, 당신의 목소리가 잘 전달될지 노심초사 걱정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는, 우리가 세상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간다면 당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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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
어제, 우리는 종말에 관한 비유 중에서,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있음”에 대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로,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의 앞부분이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이라면, 오늘 <복음>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곧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일을 맡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청지기”에 비유하십니다.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재산과 종들을 관리하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지기”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충실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제자들에게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돌보는 일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종들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충실함이 주인을 섬기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청지기에게는 바로 이러한 맡겨진 이들을 충실하게 돌보는 일이 사명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충실함’에는 ‘슬기로움’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그 ‘슬기로움’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는 데”(루카 12,42)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구약의 <교훈서>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는 믿는 이들과 함께 모태에서 시작하였다.”(집회 1,14)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곧 지혜요, 악을 싫어하는 것이 곧 슬기다.”(욥 28,28)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곧 주님의 마음을 귀 기울여 듣는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의 뜻에 따라 정해진 양식을 내어줄 수 있게”(루카 12,42) 될 것입니다.
곧 청지기로서 주님의 양식을 잘 관리할 것입니다. 주님의 “정해진 양식”인 말씀의 “양식을 내어 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곧 주인의 뜻에 충실하여 실천하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청지기에게는 주인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행하는 충실함이 요청됩니다. 그렇습니다.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며,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일반 청중들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맡긴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으로부터 맡겨진 사명을 받은 청지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충실하기는 한데 주인의 뜻을 모르고 일 자체에 충실하거나 혹은 제 자신에게 충실하거나, 또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충실하지 못하거나 혹은 자기 방식에 충실하기가 일수 입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앞서, 주님께서 관계 맺어준 형제들에게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일, 그것이 주님께 대한 충실함과 슬기로움일 것입니다. 사실,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자신에게 맡겨진 형제들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거나 소홀이 대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경종이 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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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영균 시몬 신부님]최영균 신부
<신앙에도 감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꼭 숙제검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늘 문제가 됐던 것은 일기장이었습니다. 일기를 꼬박꼬박 잘 써야 하는데 며칠씩을 밀려 쓰다가 아버지께 호되게 종아리를 맞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학이 될 무렵에는 종아리 맞기 싫어서 늘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몰아서 일기를 쓰려고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자업자득이라고 평상시에 놀다가 호되게 혼이 나고 나서야 후회를 하면서도 그런 일들은 한동안 되풀이 되었습니다.
마치 ‘개미와 베짱이’에 나오는 베짱이의 모습이 제 꼴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행운은 늘 준비된 자의 것이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달콤한 영적 위안을 주는 수프가 아닙니다. 신앙은 도전적인 것이고 늘 깨어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밀렸다가 할 수 있는 숙제가 아닙니다. 신앙에도 감각이 있습니다. 운동선수는 경기에서 우승을 하기 위해 자기와 싸우면서 고된 연습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한 번 미루고 두 번 미룬 후 경기에 임한다면 결코 우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운동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졌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져다주는 열매를 먹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실과 성공은 늘 준비된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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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루카 12,39-48 (깨어 있어라,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언제이든 그 어디에든
나에게 오시는 분이 있기에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설렘으로 웃음 지으며
내게 오시는 분을 기다릴 수 있다면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게 오시는 분의 기쁨이 되고자
내게 오시는 분과 같아진다면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당신 닮은 나로 말미암아
내게 오신 분이 기뻐한다면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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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만남 준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깊으신 한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언젠가부터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 말기였습니다. 두 달 남았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울부짖고 절망하고 원망하였지만, 곧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두 달 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먼저 재산을 정리했습니다. 그 동안 “하느님 앞에 봉헌해야지” 하면서 한 번도 제대로 봉헌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일부를 잘라 하느님 앞에 드렸습니다. 또한, 평소에 알고 있던 시골 공소에 계시는 선교사님에게 봉헌 금을 보내 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마지막 유서를 썼습니다. 미웠던 사람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고,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서 화해하고,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어라.”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두 달이 지났습니다. 죽을 시간이 다가왔는데 오히려 몸에 힘이 났습니다. 병원에 찾아가서 다시 검진을 해 보았습니다.
며칠 후에 의사 선생님이 죄송하다면서 뻔뻔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간암이라고 한 것은 오진인 것 같습니다.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오진했는지, 아니면 그사이에 병이 나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진했어도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매가 물었습니다.
“오진으로 돈을 많이 써 버렸으니 후회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 지난 두 달처럼 행복하고, 기쁘고, 보람 있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을 기다리는 3박자 있음을 묵상합니다.
첫째,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 회개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은총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로, 하느님의 은총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다린다는 것은 그냥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행복이라는 은혜도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저 두레박이나 고운님들이 준비가 되어있든지 혹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든지 간에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기에 저희의 죽음을 포함한 모든 기다림은 곧 희망이겠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모든 소중한 것들은 일정한 때가 오면 다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잠시 나에게 맡겨졌을 뿐, 나에게 속한 것은 아니라는 마음입니다.”
결국,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남는 것은 “사랑의 잔고”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런 모습으로 준비하며 살다가 언젠가 주님을 만나도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기다렸습니다. 정말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더불어 간호하는 이들, 그리고 고운님들과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 가을 속에, 매 순간 고운님들의 영혼과 육신이 지내는 너무 행복한 하루를 주님께 올리면서 고운님들이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행운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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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93)
♧♧ 시편 56편 13절….
"하느님, 제가 당신께 드린 서원들이 있으니 감사의 제사로 당신께 채워 드리오리다."
‘감사의 제사’는 친교제(구약 시대에 하느님에게 동물을 희생으로 바침으로써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친교를 이루려고 행하던 제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나 구원, 축복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다윗이 하느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가운데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노라고 서원한 것은 다윗이 입으로만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고 자신의 가진 것을 친교 제물로 바쳐서까지 감사할 줄 아는 헌신적인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어도 귀한 것으로 갚을 줄 알거늘 하물며,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묵상해봅니다.
♧♧ 시편 56편 14절….
"당신께서 제 목숨을 건지시어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니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도록 하심입니다."
* 당신께서 제 목숨을 건지시어...
이 구절은...‘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시편 49편 16절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에서 나를 기어이 빼내시리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건지시어...’라는 말은, 어떤 일의 미래적 성취가 확실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록 지금은 필리스티아인들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이미 자신을 구원해 주신 것이나 다름없음을 믿는 다윗의 선취적 신앙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 제 발이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으니...
어두움을 다니는 자는 그 앞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므로 넘어질 수 있으나 밝은 대낮을 다니는 이는 넘어지지 않는 법입니다.(요한복음 11장 9절. 참조)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우리 인생의 앞길을 밝히 비쳐 주시는 빛이시니 하느님과 동행하는 이는 죽음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결코 없게 되는 것입니다.
* 하느님 앞에서, 생명의 빛 속에서 걸어가도록 하심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빛’은 세상의 햇빛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생사화복을 다스리시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 또는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의 빛’은 ‘죽음의 어두움’과 대조되는 것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요한 1서 1장 5-7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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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전국에 다음과 같은 방을 붙였습니다.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만으로 벼슬을 내리겠다. 시험시간은 *월 *일 새벽 5시이다.’ 너무 이른 시간에 치르는 시험이라서 5시보다 늦게 궁궐 앞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관리들은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은 성문을 두드리고 관리에게 항의도 했지만, 반응이 없자 그냥 화를 내며 돌아갔습니다.
다행히도 정오가 되자 궁궐 문이 열리고 시험이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1 더하기 1은 얼마입니까?’, ‘바닷물의 맛은 짤까요? 달까요?’ 식으로 너무나 유치한 문제가 담긴 시험지였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학식을 갖춘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문제라고 하면서 시험장을 떠났습니다. 이제 자리에 남은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임금이 나와서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합격이다. 이른 시간에 정확히 오는 성실함을 갖췄고,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있었으며, 황당한 문제에도 최선을 다해 답을 적었다. 이렇게 시간을 잘 지키고, 인내심이 있으며, 원만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인재다.”
만약 사람들이 왕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어떻게든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을 테고, 기다리는 것에 대해 화가 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또 당황스러운 문제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겠지요. 그러나 자기 생각만을 내세웠기 때문에 벼슬을 얻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종에게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런데 주인의 의도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늦게 온다고 생각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지요.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의도는 우리 모두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언제 올지 모른다면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면서 자기 편한 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의 의도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오실 때에 가장 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사랑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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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진정한 의미}
어느 여름날, 아버지와 아들이 들판에 서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최선’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잔꾀를 부리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 그럼 오늘 너의 최선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구나. 저기 보이는 저 논 한가운데 있는 돌무더기가 보일 게다. 그 돌들을 모두 논 밖으로 꺼내도록 하여라. 단,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이니 ‘최선’을 다해보아라.”
“네 아버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둘의 대화가 끝이 나고 아들은 약속한 대로 돌들을 옮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 돌의 양이 많아 옮겨도 옮겨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고 또한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젖 먹던 힘을 내어서 돌을 옮겨 보았지만 논 밖으로 돌을 모두 옮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는 저물었습니다. 온종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가 묻습니다.
“아들아, 최선을 다했느냐?”
“네, 아버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니다. 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네가 수고하고 진짜 열심히 했다는 것은 나도 안다. 하지만 너는 오늘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옆에서 온종일 지켜보고 있던 나한테는 왜 도와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느냐? 네가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했다고 싶을 때,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주위를 한 번 더 돌아보면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도록 하여라.”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최선이었을까요? 그 자리에 주님을 초대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최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냥 열심히만 한 것이겠지요. 주님과 함께하면서 최선의 삶을 살아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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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주어진 일이 있으면 미리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려운 시절, 형제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중학교엘 다녔습니다. 당시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게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버스는 정류장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정차하기도 했습니다. 달리고 달려서 버스에 타지만 내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체격도 적었고, 키도 작았습니다. 학교 앞에서 내리지 못하고 종점까지 간적도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학교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1시간 조금 넘게 걸렸습니다. 가방이 조금 무거웠지만 교통비도 절약되었고, 걸으니 마음도 편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가니 과제물이 많았습니다. 신학, 철학, 라틴어, 성서신학의 과제물이 있었습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모두 자신의 과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다. 과제물은 미루면 쌓이고,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외출 시간에 나가지도 못하고, 운동 시간에 놀지도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과제물은 내 주는 날 바로 작성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습관이 되니 요령도 생기고, 시간을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유능하지 못했던 제가 신학교의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건 미리 하는 습관의 도움이 컸습니다.
교구 성소국에 있을 때입니다. 교황님께서 한국 방문을 결정하셨고, 주교회의 차원에서 교황방한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영성, 신심 분과’를 맡겨 주셨습니다. 기획, 재정, 행사, 전례, 의전, 대외 협력, 자원봉사를 담당하는 분과가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제게 업무를 맡겨 주신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제가 맡겨진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한다는 걸 아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문 작성, 자료집 제작과 번역의 일을 가장 먼저 마쳤습니다. 교황청 정의 평화 위원회 주교님을 모시고 강연을 다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능력보다는 저의 성격을 보시고 일을 맡겨 주셨고, 저는 큰 무리 없이 마칠 수 있었습니다.
미리 하는 습관은 분명 장점이 있습니다. 실수를 하더라도 다시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미리 하기는 하지만 깊이가 적었습니다. 일에 매몰되면서 중요한 건 하지만, 소중한 걸 놓칠 때가 많았습니다. 성격이 다른 주변의 사람을 힘들게 한 적도 있습니다. 회식이나 모임의 자리에서 즐기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급한 성격에 먼저 나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자리는 미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긴장의 끈도 풀러놓고, 허심탄회하게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준비하고 있는 종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어진 일을 미리 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어 준비하는 종이 아닙니다. 만원 버스를 타기 싫어서 걸어 다니는 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준비하는 종이 아닙니다. 맡겨진 과제물을 미리 하고, 맡겨진 일을 가장 먼저 하는 것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준비하는 종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바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도시 빈민 사목을 10년 이상 하는 동창 신부가 있습니다. 작은 집을 얻어 밥을 해 먹으면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사는 친구입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과는 밤을 새워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입니다. 추운 겨울 광장에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친구입니다. 뜨거운 여름 복직을 호소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친구입니다.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건, 사랑은 낮은 곳에서 시작한다는 시인의 말처럼 언제나 공존의 그늘을 찾아가는 친구입니다. 시간이 흘러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은 친구입니다. 가슴은 아직도 뜨거운 친구입니다. 저처럼 미리 준비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여유가 있는 친구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는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이 올 때가지 깨어 기다리는 종은 따로 있었습니다.
일의 성과와 능률을 보는 게 아닙니다. 일의 가치와 의미를 보는 겁니다.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멈추고 기다릴 줄 아는 겁니다.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가치와 의미가 있다면 늦더라도 함께 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 기다리는 종입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으십시오. 생각하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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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훌륭한 삶>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평범한 일상을 잘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지 깨닫습니다. 비상한 삶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훌륭하게, 참으로 평범히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전해 준 고등학교 조카 이야기를 듣고 웃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부모가 바라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정말 피곤하고 힘들어요.”
고등학교 조카의 ‘끝이 없다’라는 이야길 듣고 참 많은 사람들이 끝없는 어려움중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면담하다보면 정말 대다수 분들이 끝없는 어려움이요 갈수록 힘든 삶임을 알게 됩니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자기를 지켜내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분투奮鬪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영적전쟁입니다. 마침 힘든 삶중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낙천적으로 힘껏 살아가는 형제의 문자 메시지도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엄청나게 이기적인 사람들과 엄청나게 이기적인 한국에서 예수님 밖에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답은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일을 하며 깨어 힘껏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은 모든 제자들에게 내리는 권고였다면 오늘은 관리자로서 형제들을 책임진 이들에게 내리는 권고입니다. 그렇지만 넓게 보면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역시 깨어 제 삶의 자리에서 제 직분에 충실할 것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늘 깨어 준비하며 제자리에서 충실하고 슬기롭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이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비단 관리자로서의 집사만이 아니라 누구나 나름대로 ‘삶의 집사’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가리키는 바 주님입니다. 제멋대로 무책임한 소임 수행이 아니라 늘 주님과의 만남을 염두에 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서의 수행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집사직은 특권이 아니라 ‘시험test’이자 ‘신뢰trust’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답게 살기위해서는 부단히 깨어 주님 앞에서 시험받는 느낌으로 충실해야 할 것이고, 주님께 신뢰받을 수 있도록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와 비교할 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있습니다. 포기할 것은 빨리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은 빨리 받아들이며 깨어 주어진 일을 충실하고 슬기롭게 수행할 때 바로 행복입니다.
그러니 순간순간이 시험이자 신뢰가 입증되는 시간이니 깨어 훌륭히 주어진 소임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끝이없다 탄식할 것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깨어 기쁘게 충실히 사는 것입니다. 바오로의 권고도 참 적절합니다.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자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여러 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깨어 충실하고 슬기롭게 수행하는 이들이야 말로 주님의 의로움의 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죄의 종에서 벗어나 주님의 의로운 종이 되어 충실하고 슬기롭게 제 책임을, 집사직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제자리에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의로움의 종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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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어렵게 집안을 꾸려가던 가난한 가장이 아이들 걱정을 했습니다.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새 운동화를 사달라고 난리인데 새 운동화를 장만할 돈이 부족하니…. 그래도 사주기는 사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저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아직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몸이 아파서… 만약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가장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떨어진 운동화를 보았습니다. 고민 덩어리였던 그 신발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가 12,48)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했으니 그에 걸 맞는 책임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독차지 했으니만큼 더 많은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잘못을 범하게 되면 그 벌은 더욱 엄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매를 맞아도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가12,47)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의 자비를 더 많이 입었으니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삶이 따라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는 성사집행과 복음선포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고 수도자는 봉헌의 삶을 더 열정적으로 살며 평신도는 그에 맡겨진 직분과 소명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그런 직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매 맞을 것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늘 깨어 준비 하면 오히려 그 책임을 통해 모든 재산을 관리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루가12,44)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근심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한 고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충실하면 우리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고 기대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제대로 사는 만큼 주님을 만나는 기쁨이 클 것입니다.
사실, 세상 모든 것이 주님 것이니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주께서 마련해 놓으신 것을 이 세상사는 동안 잠시 관리하다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12,40)
많이 받았으니 많은 것을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혹 많이 받고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매 맞을 일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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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의 말씀들은 은총 아래 사는 이의 자세를 권고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40)
예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은 때"(루카 12,40)에 닥쳐올 주님의 날을 위해 준비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십니다. 본문 안에는 조금씩 표현만 다를 뿐,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루카 12,46)이란 말씀처럼, 사람의 아들이 오는 날이 얼마나 긴박하고 급작스럽게 들이닥칠지 반복해 묘사하고 있지요.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루카 12,41)
그런데 베드로의 관심은 그 "때"나 내용에 대한 의문보다 말씀의 대상에 더 쏠려 있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우리"만을 위한 지침인지, 아니면 누구나 다,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지 가르침인지 궁금해 합니다. 우월감의 발로일지 책임의 과중함 때문일지 현재로선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의문의 답이 선명하게 떠오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루카 12,42)
예수님은 집사를 비유로 드십니다. 집사는 주인과 종들 사이를 연결하지요. 주인의 뜻을 종들에게 전달하고, 종들이 주어진 일을 하도록 통솔하면서 그들의 생활도 돌보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은 주인이 어느날 갑자기 돌아왔다는 설정 아래, 종들을 잘 돌보면서 주인의 집안을 손색없이 꾸려가는 집사와, 맡겨진 종들을 학대하며 자기 욕구와 탐욕을 채우는 집사의 예를 드십니다. 전자에게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길 것"(루카 12,44)이라 하지요. 그의 충실함과 슬기가 그만큼 주인을 흡족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후자는 "매를 많이 맞을 것"(루카 12,47)이라 하십니다. 그의 게으름과 무절제한 욕망이 주인에게 실망을 주고 말았으니까요.
언뜻 듣기에 집사는 일반 군중과 예수님 사이를 잇는 제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마치 중간 관리자를 위한 말씀처럼 듣는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숙고해 보면, 우리 중 누군들 집사의 역할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온 세상은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는 유기체고요. 한 사람이 생명을 받아 세상에 나와서 살아가는 동안, 어느 누구도 돌봄과 연대의 책임에서 배제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육신의 활동으로 맡겨진 가족과 이웃을 돌본다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이라도 그 마음에 고통 받는 온 세상 모든 영혼들을 품고 돌볼 수 있으니까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에게 맡겨질 주인의 모든 재산은 꼭 물리적인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은총 이야기를 계속 전개합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로마 6,14)
은총 아래 있는 이는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로마 6,16)입니다. 은총의 날개 아래 품어지는 순간 그는 죄를 떠났습니다. 은총 아래 머무르면서 율법의 그늘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켜 은총의 길로 이끄셨기 때문입니다.
집사는 주인에 대해서는 물론 종들에 대해서도 율법의 의무가 아닌,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존재입니다. 율법에만 묶여 최소한의 임무나 수행한다면 그저 대가를 바라고 노동력을 파는 날품팔이꾼과 다를 바 없겠지요. "충실하고 슬기롭다"는 주인의 칭찬은 그 이상의 투신과 헌신을 치하하는 보상입니다.
우리 집사들에게 삶에서 사랑할 기회는 얼마든지 다가옵니다. 내게 맡겨진 가족과 이웃, 지인들을 포함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나의 기도와 소박한 자비에 목을 축이고 숨을 연명하는 하느님의 아들딸들, 한 번도 마주친 기억조차 없는 연옥 영혼들까지 우리 돌봄의 울타리는 무한대로 열려 있습니다.
사랑하라고 부여받은 절호의 기회 앞에서, 그가 누구이며, 꼭 내 도움이 필요한지, 나 아니면 안 되는지, 내 감정이 헤프고 공연한지, 내 잔고는 얼마인지 냉철히 분석하고 따지고 계산하는 사이 우리는 은총의 날개 아래에서 다시 율법의 그늘로 빨려들어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마음이 시키는 길, 연민의 사랑이 부르는 길을 따라갑니다. 죄 짓지 않으려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매달리는 율법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이끄시는 주님의 소리, 은총의 흐름을 듣고 따라가기 때문이지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
자,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습니다. 이 비유의 대상은 제자들만이냐 모든 사람이냐를 떠나서, 주님께서 많이 주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많이"의 기준이 궁금하지요. 그 답은 오늘 이 말씀을 만난 모든 이들의 마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누가 굳이 콕 집어 일러주지 않아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답이 솟구칠 겁니다. 그 답을 따라가십시오. 자유롭게, 사랑의 이끄심을 따라, 은총이 허락하는 대로...
주인에게건 종들에게건 절대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깨어 준비하고 있다면"(복음 환호송)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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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당신의 은총을 베푸실 대상이 있도록 아담을 지어내셨다.
태초에 하느님이 사람을 필요로 해서 아담을 지어내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은총을 베푸실 대상이 있도록 그를 지어내신 것입니다.
실상 성서에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아담을 지으시기 전뿐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피조물이 존재하기전에도 말씀께서는아버지 안에 계셔 아버지께 영광을 바치셨고 또 아버지께로부터 영광을 받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세상이 있기 전에 아버지 곁에서 내가 누리던 그 영광을 아버지와 같이 누리게 하여주십시오.
-성 이레네오 주교 <이단자를 거슬러>에서
♣"태초에 사람을 필요로 해서 아담을 지어내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베푸실 대상이 있도록 사람을 지어 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입지 못한 자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이는 없어도 아무 지장이 없는 우유성偶有性일뿐인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필연유必然有가 아닙니다. 사람은 우유적偶有的 존재일 뿐입니다. 필연유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있어야할 존재이고 우유적 존재란 그것이 없어도 지장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느냐 않느냐에 따라 사람은 존재의 목적을 사느냐 살지 않느냐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거저 베풀어 주신 은총의 대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입을 때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다알려주었기 때문에 너희를 벗이라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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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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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2-43)
<교회의 교사들과 사도들에게 주신 가르침>
그러자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드시며, 이 명령이 교사의 직책을 받아 교회에서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각별히 더 새겨들어야 할 것임을 밝히셨지요.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이것이 이 구절의 단순하고 명백한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뜻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것이 사도의 직무, 곧 교사의 직무로 불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유용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구원자께서는 이해력 깊고 믿음이 착실한 사람들을 뽑아 거룩한 교의를 가르쳐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당신 영광을 알아보게 된 신자들 위에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고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는 생각 없이 아무 때나가 아니라 적절한 때에 그렇게 할 것입니다. 다시 각 사람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히 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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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할 줄 알면서>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더 많이 청구하신다."
수녀원에서 대축일에는 전례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그 뜻을 더 깊이하기 위해
축제를 마련합니다.
초창기부터 설립자 신부님이 성극으로
재현하도록 직접 지도를 하셨었기에
선배수녀님들부터 극을 잘하십니다.
마당극, 마당놀이, 뮤지컬 대본을
동기수녀가 쓰면 저는 노래를 붙이고
반주 잘하는 동기와 함께 연습을 했죠.
짬짬이 휴식 시간을 이용해 하다 보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데 ~ 또 누군가
마당극에는 사물놀이가 들어가야 좋다고...
수녀원 오기전 직장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장구를 배우다 북, 꾕과리까지 해서
무대에 선 적이 있었는데~ 수녀원에서는
쓸데없다고 여겼던 것이 결국 내놓게 되고
후배들을 가르치는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어느날, 휴우~ 힘들다. ㅠ ㅠ
차라리 할 줄 모른다고~ 못한다고 할껄!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Yes'를 선택했죠.
작은것 하나라도 공동체를 위해 내놓을때
달란트가 썩지 않고 빛을 발합니다.
'할 줄 알면서 거부하다 가진 달란트마져
쓸모없게 되니 선익을 위해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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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 48)
맑은 햇살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붉은 단풍을
만납니다.
불충실과
충실 사이에
우리의 소임이
있습니다.
소임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기도가 필요한
믿음의 시간입니다.
맡겨주신
모든 소임 뒤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에
충실하시길
바라십니다.
일상의
충실함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봉헌입니다.
봉헌이란
이 소임을
맡기신 주님께
우리 또한 의탁하는
것입니다.
의탁은 희생과
봉사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맡기신 주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소임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성장하는 은총이길
기도드립니다.
단풍도 단풍의
소임에 충실하며
불타오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충실과 불충실
사이에
우리에게 맡기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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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 48)
모든 소임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소임에 충실한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현실에서 출발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을 나누는 것이 기도이며 우리의 현실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주님께서 맡기신 소중한 것들을 잘 돌보는 것입니다. 돌본다는 것은 생활의 무게인 십자가까지 끌어안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울 수 없고 희생하지 않고서는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받고 사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참된 열매가 맺어지길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까지 우리 삶에 충실하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 주시고 맡기신 소중한 관계를 잘 돌보는 충실한 믿음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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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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