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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해월 해월신사의 산중 피신생활- 삼암 표영삼
멩이 추천 0 조회 28 08.01.23 23: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해월신사의 산중 피신생활

표영삼__ 서울교구·선도사

소미원에 찾아가다

   윗대치에서 간신히 탈출한 해월신사과 이필제, 강수, 김성문(金聖文)등 네 사람은 일월산 북쪽 대치재를 넘어 봉화군 춘양(春陽)으로 갔다. 날이 밝자 사람의 눈을 피해 숲 속으로 들어가 해가 지기를 온종일 기다렸다. 어디로 가야할 지 막막했다. 가장 가까운 곳은 영월 중동면 소미원(小美院)이었다. 이곳에는 수운대신사의 부인 박씨 사모님과 자녀들이 살고 있었다. 일행은 영월 소미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틀을 굶으니 세상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걸어 이틀 만에 간신히 외룡(外龍) 마을 골짜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좁은 골짜기를 따라 10리를 더 들어가야 소미원이 나온다. 저녁 때가 되어서야 당도하였다. 해월신사 일행은 동구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강수 혼자서 찾아 들어갔다. 강수는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 “몇 날을 굶으니 뱃속에서는 고를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가(師家)가 영월 소미원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행장도 갖추지 못한 맨머리와 맨발이었으며 주머니와 보따리는 비어 있어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주인과 일행은 동구 밖에 있고 행여 하루의 노자라도 얻을까 하여 강수는 혼자서 찾아갔다.”고 하였다.
   소미원 마을 앞에는 실개울이 있었고, 이 개울을 건너기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사용하는 샘물이 있었다. 물동이를 인 젊은 여인이 샘물로 오고 있었다. 언뜻 보니 맏며느리인 세정의 처였다. 그는 강수를 알아보자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갔다. 며느리는 몹시 당황하였다. 영해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강수가 나타나자 동리사람들이 볼까 두려웠던 것이다. 강수는 애써 사모님과 형제분의 안부를 물었다. 박씨 사모님은 정선으로 피신갔다고 하며 형제분도 어디론가 피신갔다고 하였다. 하도 배가 고픈 나머지 강수는 밥 한 그릇을 얻자고 하였다. 양식이 이미 떨어졌다고 하며 이웃 장기서의 집에서 얻어온 것이라며 밥 한 그릇을 건네주었다. 해월신사 일행은 조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었다. 허기는 여전했다.

이필제 따라 가산으로

   다시 발길을 돌려 동구를 빠져나왔다. 이필제는 자기와 동모(同謀) 중인 정기현이 단양 가산(佳山)에 살고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하였다. 영월 중동면 와석리(臥石里) 깊은 골짜기를 거쳐 노루목을 넘고 베틀재의 준령을 넘어 영춘(永春)에 이르러 날이 밝자 산속으로 들어가 하루를 지냈다. 여기서 기곡면(佳谷面) 보발리(寶發里)와 천동(泉洞)을 지나 장림(長林)과 사인암에 이르렀다. 낮은 고개를 넘어 정기현의 집에 당도한 것은 이틀 후인 밤중이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는 저간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밤이 되어 동구를 빠져 나오니 앞이 희미하다. 지척을 가리기가 어려워서 지팡이로 더듬었다. 어디를 보아도 물과 물이오, 봉우리와 봉우리뿐이라 어찌 이리 물도 많고 봉우리도 많을까. 이필제가 말하기를 정기현(鄭基鉉)은 나와 친하며 일을 같이 도모한 사람이니 그 사람을 찾아가 기대어 종적을 감추자.”
   정몽주의 후예라는 정기현은 흠쾌히 일행을 맞아주었다. 날이 밝자 이필제는 김창화(金昌和)의 집으로 보내고 해월신사는 정석현(鄭碩鉉)의 집으로 모셨다. 나머지 강수와 김성문(全聖文의 오기)은 영춘에 있는 김용권(金用權)의 집으로 보냈다. 정기현은 조선왕조가 망하면 이 나라 주인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는 위인이었다.

정석현 집에서 고용살이

   정석현의 집으로 간 해월신사는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단양 어딘지는 모르나 고용살이를 하며 매일같이 밭일에 매달렸다. 다행히 손씨 부인의 소재를 알아 모셔다 살림을 꾸렸다. 누더기 옷에다 햇살에 그을린 모습을 한 해월신사의 모습은 참으로 처참했다. ㅍ5월 어느 날이었다. 뜻밖에도 강수가 찾아왔다. 그는 밭으로 가서 해월신사를 보자 “관원이 뒤따르니 급히 피신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사태가 다급한 것을 알게 된 해월신사는 손씨 부인에게 피신간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버렸다. 두 사람은 영월 피골(稷洞) 정진일(鄭進一)의 집으로 갔다. 그후 단양 교졸들이 몰려와 손씨 부인을 잡았다. 해월신사의 행방을 대라며 행패를 부렸다. 『천도교서』에는 “신사 부인 손씨 … 하루는 다수 관예(官隸) 내(來)하여 … 여리(閭里)가 소연한지라 … 양인(良人)의 소재를 나 또한 부지하니 영(寧)히 오(吾) 옥(獄)에 자취(自就)하리라 하고 기이 본군에 입하여 피수(被囚)되다.”라고 하였다. 직동으로 피신한 해월신사는 이웃의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동리사람들로부터 부지런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강수는 아동들을 가르치는 훈도가 되었다. 직동 안쪽에 막동이란 외진 마을이 있다. 여기에 박용걸이란 이가 살았다. 학식도 갖추고 세상 물정도 두루 아는 분이었다. 그는 해월신사와 강수를 보통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 깊은 산중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데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6월 어느 날이었다. 뜻밖에도 피신 중인 영양 접주 황재민(黃在民)이 인근에 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세 사람은 서로 왕래하며 고달픈 처지를 달랬다. 두 달이 지난 8월 5일경이었다.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이필제가 문경 초곡에서 정기현과 같이 군창(軍倉, 무기고)을 습격하다 체포되었다고 한다. 기찰교졸들이 직동에도 나타나 일일이 검문하고 있었다.
   8월 2일에 잡힌 이필제와 정기현이 심문을 받으면 해월신사를 거론할 것이 분명했다. 며칠 전에는 관아에서 여기 사는 정석현의 일족인 정진일(鄭進一)의 가산을 몰수하고 정사일(鄭士一)의 처까지 잡아갔다. 박용걸의 집에서 동향을 살피던 해월신사 일행은 크게 놀랐다. 관의 손길이 신변에 다가왔음을 알자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미원 다시 찾아

   산중에서 며칠을 굶으며 지냈다. 참을 길이 없어 며칠 후 박씨 부인이 사는 소미원으로 찾아갔다. 황재민은 도중에 헤어지고 해월신사와 강수는 약초 캐는 사람으로 변장하고 들어갔다. 박씨 부인은 두 분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자 깜짝 놀랐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필제가 문경 초곡에서 변란을 일으키다 잡혔다고 했다. 강수가 “우리와는 관련이 없다. 다만 이필제가 심문을 받으면 우리들을 거명할까 두려워 이렇게 피신 중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수운대신사의 아들 형제는 얼굴빛을 바꾸었다. “우리 형제는 내일 양양으로 초행(醮行, 혼례)을 간다. 여자만 있는 집에서 어찌 머물려고 하는가.”라며 내치었다. 강수는 잘됐다며 “한 사람은 말고삐를 잡고 한 사람은 함을 지고 가면 누가 수상하게 여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청의 처가는 양구 남면에 있었다. 정선과 강릉을 거쳐 양양으로 가서 혼례 준비를 마치고 나서 양구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가는 길이 산길이라 얼마쯤 동행하다 떨어지면 능히 위험지역을 벗어날 수 있다며 동행하기를 원했으나 세청은 끝내 거절하였다.
   잠자리에 든지 얼마 되지 않아 조반상이 들어왔다. 강수는 “아직 첫닭도 울지 않았는데 조반상이 웬 일이냐.”고 물었다. 이웃에 사는 장기서가 두 분을 빨리 보내지 않으면 우리 집에 화가 미칠 것이라 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했다. 장기서는 서둘러 두 사람을 빨리 보내야 안심할 수 있다고 부추겼다.

산속에서 14일 간

   해월신사와 강수도 해가 뜨자 행장을 꾸려 박씨 부인에게 인사를 고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음력 9월초의 깊은 산중은 온통 황엽이 깔려 있었다. 얼마쯤 가다가 헤어졌던 황재민을 만났다. 황재민도 산으로 들어와 바위 밑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르내리며 골짜기를 넘기도 하고 암벽에 오르기도 하며 산 속으로 들어갔다. … 어떤 바위 아래 이르자 헤어졌던 영양 접주 황재민이 불을 피우며 혼자 앉아 있었다.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았다. 다시 산속을 헤매었다. 한 곳에 이르자 물도 있고 넓은 암반도 있었다. 낙엽을 쓸고 자리를 만들고 나무 가지로 초막을 쳤다. 낮에는 땔감과 열매나 풀뿌리 등을 채집하고 밤이면 불을 피우고 잠을 잤다.” 일행은 물이 있고 넓은 암반이 있는 곳에 초막을 치고 낙엽을 깔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새벽이 되자 기온은 더욱 떨어져 온몸이 조여들었다. 불을 피웠으나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늦가을인 9월에 엷은 옷을 입은 일행은 추위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식량이었다. 몇 줌의 소금과 몇 숟가락의 장뿐이었다. 곤드래 풀잎과 나무뿌리 그리고 물 이외에 별다른 먹거리가 없었다. 『해월선생문집』과 『천도교서』에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사 강수와 황재민 2인으로 더불어 산중 제처를 역탐하다 … 일대암하에 수혈(굴)이 유함을 견하시었다. … 신사 강수로 더불어 태백산 암혈에 재하사 14일을 불식(不食)하시고 목엽을 작(嚼)하여서 연명하시더니 대호 유하여 내호하되 주야 불리하거늘…”
   강시원이 기록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분명 “낙엽을 쓸어 자리를 만들고 나무 가지로 초막을 쳤다.”고 하였다. 범굴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저자가 해월신사의 인품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 넣은 일화 같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면 후세의 도인들은 잘못 알게 될 것이다. 10여 일이 지나자 한 움큼의 소금도, 몇 숟가락의 장도 떨어졌다. 13일째 되던 날 황재민은 영남으로 떠나가 버렸다. 해월신사와 강수는 하루를 더 견디다가 14일 만에 밤을 타서 막동 박용걸의 집으로 내려갔다. 9월 15일 삼경이었다. 박용걸은 두 분을 따뜻이 방안으로 모셨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용걸 노형이 우리를 보고 엷은 옷을 입고 그 사이 얼마나 추위에 고생했는가 하자 여차여차했다고 설명하였다. 노형은 이 추운 겨울에 어디로 가서 누구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 집에서 겨울을 지내자고 하였다. 해월은 고마우나 만일 여기서 겨울을 나게되면 나를 아는 사람이 동리에 많으니 난처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용걸은 안방을 치우고 있으면 누가 알겠는가 하였다. 해월은 또 우리는 친척도 아닌데 안방에 있기가 미안하니 노형과 결의형제를 하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노형은 좋아하며 결의를 하였다. 날이 밝자 안방에 들어가 겨울을 나게 되었다.”
   박용걸은 어떤 분인가. 『해월선생문집』에는 소년이라고 표현했다. 반대로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는 나이가 많은 노형이라고 하였다. 『해월선생문집』에는 해월이 박용걸을 만난 것은 산중이라고 하였다. “이 때 바람은 차고 소슬한데 배고픔은 더욱 심해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즈음에 한 소년이 망태기를 지고 와서 … 조밥 한 덩이를 꺼내어 주므로, 두 사람은 그것으로 주림을 면했으니”라고 하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와 대조해보면 매우 잘못되었다. 강수는 당시 박용걸과 같이 생활한 분이다. 그리고 해월신사는 박용걸을 노형이라 불렀다. 바로 박용걸과 결의하였다. 해월신사는 9월 초에 산으로 올라가기 전에 이미 박용걸의 집에서 동정을 살폈다.

박용걸의 집에서 재기

   해월신사와 강수는 박용걸의 집 안방에서 49일 간의 기도를 올렸다. 11월 20일경에 반가운 손님 한 분이 찾아왔다. 순흥에 사는 박용걸의 형이었다. 그는 해월신사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일부러 찾아왔다. 두 형제는 입도식을 올렸다. 해월과 강수는 대도가 살아나는 예감을 받았다. 두 형제는 해월신사와 강수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옷 한 벌씩을 지어 바쳤다. 이후 박용걸 형제의 후원은 동학재건에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박용걸의 죽마고우였던 지달준(池達俊)의 뒷받침도 큰 힘이 되었다. 필자는 1980년 3월에 직동을 탐방한 일이 있는데 그때 초등학교 직동분교 교사 한 분이 “이 산중에서 부군수격인 인물이 나왔다.”고 하였다. 필자는 지달준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박용걸과 지달준은 죽마고우였다. 박용걸이 거의 드러내 놓고 해월신사와 의형제를 맺고 동학에 입도한 것은 지달준이 뒤를 봐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중순경에 문경 변란도 일단락되면서 세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뜻밖에도 정선 남면과 동면 도인 유인상(劉寅常) 등 10여명이 꽃꺾기재[花折嶺]를 넘어 찾아왔다. 해월신사는 오랜만에 여러 도인들과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해월신사는 법설을 다시 폈으며 동학 재건의 꿈을 다시 세웠다.
(신인간 포덕 145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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