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뮈스의 휴머니즘」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데 왜 어리석은 이름들이 우리를 갈라놓는가?”
「평화의 호소(Querela pacis)」 중에서
“막이 내릴 때까지 모두가 역할을 맡는 연극이 아니라면 인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우신예찬』 중에서
“전쟁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에게만 달콤하다(Dulce bellum inexpertis)”
- 에라스뮈스의 논문의 제목 -
에라스뮈스에게 있어서 휴머니즘이란 신중심주의를 탈피하는 것도, 기계 기술문명을 비판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환경을 파괴하는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은 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깊은 속에서 부정할 수 없이 요구되는 갈망들, 진실하고, 정직하며, 공정하고, 진리를 염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또한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참으로 인간적인 풍미가 넘치는 그러한 삶을 사상적으로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삶의 현실 속에서 ‘실제로’ ‘에누리 없이’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1512년 발표한 「평화의 호소(Querela pacis)」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기독교라는 이름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데 왜 이 어리석은 이름들이 우리를 갈라놓는가?”라고 한탄하는가 하면 “이 세계, 즉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 전체는 그 위에서 살고 숨 쉬는 모든 사람의 공동 국가이다”라고 하면서 사해동포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우신예찬』에서 “막이 내릴 때까지 모두가 역할을 맡는 연극이 아니라면 인생은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의 연극에서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혹은 엑스트라이든 연극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그 연극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 누구도 필요 없는 이가 없다. 인류의 역사를 신의 섭리에 기초한 거대한 휴먼드라마라고 한다면 여기서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이 맡고 있는 역할이 있으며, 모두는 존재 이유가 있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유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개인의 삶의 소중함을 말해주고 있다. 생각과 관습이 달라도, 피부색과 종교가 달라도 이러한 ‘다름’들은 다만 극복해야 할 장애물일 뿐이지 배척해야 할 ‘적’처럼 간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가톨릭 신앙인이라며 일체의 전쟁을 거부하는 평화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에라스뮈스는 자신의 논문 제목을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말을 빌려 “전쟁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에게만 달콤하다(Dulce bellum inexpertis)”라고 정하기까지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범-인류애와 평화주의를 지향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최소한 에라스뮈스의 시선에서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곧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기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며, 가톨릭이라는 보편성에 기초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에라스뮈스의 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tefan Zweig)는 이러한 에라스뮈스의 정신에 대해 다음과 말해주고 있다.
“에라스뮈스는 왕족, 종파주의자, 민족 이기주의의 헛된 허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 반대로 유럽인의 사명은 민족들을 묶고 일치시키는 것임을 항상 주장하였다. 민족에 대한 유럽인의 우위를, 조국에 대한 인류의 우위를 확인하였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의 개념을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즉, 순수한 종교 공동체로, 보편적 그리스도교로, 겸손하며 모든 이에게 도움을 주며, 인류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서의 그리스도교를 확립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