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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2장13~25절
제목 : 참 성전이신 예수님
어제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예수님의 성역은 순종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이를 “복종의 원리”라고 합니다.
복종하게 되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변화의 원리”입니다.
맛과 색깔과 용도와 위치와 값이 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을 통해 정결예를 새롭게 세우셨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성전을 새롭게 세우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핵심은 건물이 중심인 성전시대에서 예수님이 성전되는 새시대로의 전환을 시작한 것입니다.
즉 성전의 모든 능력과 기능이 건물에서 예수님께로 완전히 옴겨졌음을 확인하는 사건이 오늘 본문 성전 청결사건입니다.
본문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의 종말을 예고하는 예언자적 행동입니다.
예식(규례)에 이어 예식 장소(성전)도 예수님으로 대치될 것임을 보여줍니다.
1. 성전 척결을 시도하시는 예수님(13~17절).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13절).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이 귀절부터 22절까지에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을 보여줍니다.
성전 청결 사건은 두 번 있었는데,
여기 그 첫 번 것이 기록되었고, 두 번째 것은 성역 말기에 된 일입니다.
이 사건이 가르치는 교훈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이 사람들로 말미암아 속화 되었을 때에 그것을 방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슐라텔(Schlatter)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곧바로 그 시대의 제사장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신16:1~17절).
*3대 절기는 신16:16절 “[16]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유월절은 ‘넘어간다’는 의미입니다(출 12:27).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초태생은 모두 죽이셨으나,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음을 면하게 하신 것을
기억하며,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축제가 유월절입니다(출12:21~30).
그것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한 규례였습니다(출12:12-20, 13:2, 12).
그런데, 이 명절은 아빕월(3,4월 사이에 있었음) 14일에 지키고,
거기 이어서,
개인은 1주간 누룩 없는 떡 먹는 절기를 지킨 것이었습니다(출12:15).
*출12:15 “너희는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유대인들이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각처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온 것입니다(신16:1-8).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14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멀리 이방에서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오는 순례자(巡禮者)들에게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편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편리를 위하여 고요히 예배드릴 장소에 혼잡을 가져오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편리를 도모하는 것이 당연하나,
영적 손해를 보면서까지 그것을 취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돈을 바꾸는 것은, 이방에 살던 유대인들이 가지고 온 로마 돈을 성전에 바치기 위하여 유대의 세겔과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출30:13).
*출30: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그들이 그 때에 성전에서 이런 매매 행동을 통하여 부당한 수입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는 잘못이었습니다(사56:7;렘 7:11).
*사56:7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렘7: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모세를 통해 완성된 성막이가 솔로몬 성전 모두가 존해 했던 이유는 예수님을 가라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메시야를 통해 이루실 모습이 어떤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 그것이 이전 성전이 존재했던 이유셨던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오늘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것 처럼 46년 동안 지었어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건물의 웅장한 규모가 아닙니다.
오직 이땅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고 기대하게 하는 것이 성전 존재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성전 본질은 잊은채 성전의 외적규모에 마음을 빼앗겼고 또 제사장들도 제사와 그 의식이 가르키는 하나님의 메시야는 생각하지 않고 평안한 제사와 풍성한 제사를 위한 편의 제공과 그로 인한 돈 버리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3)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15절).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이때에 예수님의 의분(義憤)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의분인 만큼, 질서 있게 움직였습니다.
예를 들면, 그가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셨을 뿐이고 그것을 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돈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 돈을 뿌리셨다면, 돈 임자가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4)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십니다(16절).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 귀절에도 예수님의 의분이 질서(秩序)있게 나타난 것이 드러납니다.
(1) 비들기를 여기서 가져가라.
그는, 그저 말씀으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하셨을 뿐이고, 그것을 날려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남의 소유물을 이렇게 존중히 여기셨습니다.
(2)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상업을 정죄하는 의미가 아니고, 성별된 기관을 세속(世俗)과 혼동시키지 않아야 할 것을 가리키신 것입니다.
공관 복음에서 취급된 둘째 번 성전 청결 기사(마 21:12-13; 막 11:15-17; 눅 19:45-46)에 있어서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정직하지 않은 것을 꾸짖은 말씀입니다.
물론 이 말씀에는 성전 안에서 그런 영업을 할 수 없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17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 말씀은 시 69:9의 인용한 것입니다.
*시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다윗이 그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핍박 받은 사실을 가리킨 말씀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날카로운 행사를 보고 그가 유대인들 앞에 핍박 받으시게 될 것을 예측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비유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 죽으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전은 신성한 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목적으로 세운 건축물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두실 장소’로서 특별한 곳을 선택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신12:11).
*신12:1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그리고 오직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신 12:13-14).
*신12:13~14 “[13]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14]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
바로 그곳이 구약에서의 성전(聖殿)입니다.
2. 참 성전이신 예수님(18~22절).
1) 유대인들이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하는 물음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8,19절).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불신앙하는 태도로 이렇게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그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나타내신 권위를 알아볼 줄 모르고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킬 기이한 일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요구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여기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예언을 주신 것 뿐입니다.
곧,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을 오해한 그들이 후일에 이 말씀을 책잡아 예수님을 송사한 일도 있습니다(마 26:61).
*마26: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그들은 여기서도 저의 무식을 폭로하였습니다(20절).
이런 수수께끼 예언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깨닫는 때에 믿음이 굳세어지는 법입니다.
2)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고 물었습니다(20절).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요셉프스사기(史記)에 의하면, 헤롯의 성전건축은 주전 20년에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말한 이때는 주후 27년경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예언(19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영적(靈的)으로 어두운자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다가 저렇게 오해합니다.
3) 예수님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21절).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그의 육체를 비유하신 이유는,
구약 성전이 신약 교회와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약에는 교회(敎會)가 예수님의 몸으로 비유(比喩)되었습니다.
이 귀절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이 말씀하신 것을 믿었습니다(22절)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여기 이른바 "성경"이란 말은, 구약에 있는 부활 예언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면, 시16:10 과 같은 것입니다.
*시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음에 있어서 점진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인간의 많은 경험과 체험을 경유하기 전에는 깨닫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3. 사람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23~25절).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1)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습니다(23절).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표적(標的)은 구약에서는 겉으로 나타난 흔적을 말하는 뜻으로 주로 쓰였습니다(출 12:13; 신 28:46).
*출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신28: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징과 훈계가 되리라”
신약에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로 쓰였습니다(막 16;20; 요 3:2; 20:30; 행 4:30).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표적(標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트’(’oth)는 표징(창 17:11; 출 10:1),
이적(출 4:9), 징조(창 1;14; 왕하 19:29), 기호(민 2:2; 신 6:8),
예표(사 20:3), 감계(겔 14:8)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적(異蹟)을 제일로 알고 믿는 믿음은 변동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보다 하나님 자신 때문에 생긴 믿음은 전진성(前進性)과 지속성(持續性)을 가집니다.
2)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24,25절).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5]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물은 건너 가 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 보아야 안다"는 말도 있습니다.
또 혹은, "사람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도 다 모른다"(人死不知其心)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밝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가지셨습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안다고 하는 것을 끝까지 시험해 보아야 됩니다(요일 4:1).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만일 그들이 무엇을 알아 마친 다는 일에 조작스럽고 번잡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드려다 보시고,
그것의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심판자의 정당한 지식입니다.
그 이유는,"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 17:9).
*렘17:9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예수님은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거짓과 탐욕의 장이 되어버린 부패한 성전의 종말을 고하십니다(13~16절).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은혜의 자리(이방인의 뜰)마저”유린하고, 성전을 자기 이익과 만족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들을 향한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오늘 주께서 우리 공동체를 둘러보시고는 어떻게 평가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처소로 흡족해 하실까요?
2) 죽음을 무릅쓴 행동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은 이제 고치고 정화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라지고 대체해야 할 대상이 되었음을 보이십니다(17~22절).
새 시대에는 정화된 옛 성전이 아니라 저혀 다른 “새 성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참 성전이십니다.
예수께서 죽고 부활하여 성전이 되셨듯이, 성도들도 십자가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거룩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건물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의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교회의 규모와 겉모양은 변변치 않더라도 주님을 아는 참 지식과 주님과의 생생한 교제로 충만한 공동체가 됩시다.
3)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으십니다(23~25절).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적만 있고, 한두 번 경험한 신비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18절, 3:1~3).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보다 자신의 체험이나 신념을 지나치게 믿는 것은 아닙니까?
내 신앙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판단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돌발적 행동에 유대인들은 자격을 묻고 권위를 따집니다(18절).
그 권위에 걸맞은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부정하려는 마음만 있을 뿐,
진실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갖고 있는 것을 고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전부를 버리더라도 꼭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일입니다.
사회적 지위가 없으면 진실도 외면당하는 세상에서 학위나 직위보다 말과 행동의 진실함에 주목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