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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76회. '조선시대 역관은 최고 갑부였다' (2000.07.08.)
76회 : 조선시대 역관은 최고 갑부였다
조선시대 역관은 최고 갑부였다
방송일: 20000708 조회수 : 2531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 7월 8일 역사스페셜 원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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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EFFECT... 글 읽는 장면.
# 투샷 아내,얘기하는 장면( 10 ). 조선시대 박지원이 지은 단편소설 < 허생전 > ,
EFFECT... 아내. 글은 읽어서 뭐 하시게요 ?
#허생 대답하는 장면. 허생은 집안일은 아랑곳없이 7년 동안 책만 읽고 있는 가난한 선비다.
EFFECT....도둑질이라도 나서시구려.
# 허생 뒷모습 허생은 아내의 잔소리에 못 이겨 집을 나선허생이 찾아간 곳은.
장안에서 가장 갑부로 소문난 변부자네.
EFFECT.... 만냥만 빌려주쇼 .
- 돈 (15).빠르게 멘트 만냥이라면 지금의 3억원 정도에 해당되는 돈 ,
처음 보는 허생에게 이 거금을 선뜻 빌려주는 변부자 ,
- 변부자 얼굴 TS . 그는 바로 당시 장안 제일의 갑부 , 역관 변승업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하는데...
-<동평위 견문록> CG 1.(15) < 공사 견문록 > 에는 변승업을 비롯하여 당시 갑부였다고 하는 역관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한다 .
역관 김근행 부. 조선시대 갑부였던 역관들 ,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왜역관.부. 벌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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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 조선시대 역관은 갑부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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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 기본 셋트 .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돈 만냥을 빌려준다 .
만냥이라면 지금 돈으로 3억원 정도에 해당하는 큰 돈인데요 ,
글쎄요, 아무리 맘이 있어도 그만한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겠죠 .
# 뒤에 책 < 허생전 > 뜨고 .
< 허생전 >은 연암 박지원이 지은 단편소설입니다 .
< 허생전 >의 주 내용은 변부자에게 돈을 빌린 허생이 매점매석을 해서 백만냥을 벌고, 그 돈으로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해 보인다는 내용인데요.
우리의 관심사는 바로 이 허생에게 돈을 빌려준 변부자입니다 .
소설속에 변부자는 이름도 없고 직업도 없이 변부자라고만 묘사돼 있는데요 ,
그가 정말 역관 변승업을 모델로 한 것일까요 ?
# 역관 ( 譯官 ) 뒤에 뜨고 .
역관, 바꿀역 자에 관리 관 , 그러니까 역관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외국어를 통역하는 통역사 정도를 말합니다 .
변승업은 일본어 역관이었다고 하는데요 , 그는 정말 그렇게 부자였던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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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변승업은 조선시대 최고 갑부였다 .
#변씨 집 앉아있고. 숙종때의 역관 변승업은 밀양 변씨로 알려져 있다 .
EFFECT...응자,성자의 아드님이 여러분이 계셨는데,
-족보 같이 보고(응성).
후손들이 보여준 족보에서 변승업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EFFECT... 변부자가 바로 이 변승업이다.
-승업 TS 밀양변씨 20세손인 변승업.
그는 정말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속의 변부자일까 ?
INT ( T 8 - 0506 ) .
허생전이 가상화가 아니고 실존인물,
우리 할아버지..... 얼굴관상만 믿고 만냥을 꿔 준 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다 .
# 앉아서 얘기하는 것( 19 ). 후손들에게도 대대로 변승업이 바로 <허생전>의 변부자라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
그렇다면, 처음 본 선비에게 돈 만냥을 선뜻 내주었던 변승업은 대체 얼마나 부자였을까 ?
INT 후손 : 1,2 ( T 8 - 0503 )
1.정주영의 재산.
2 .50만냥이라는 얘기... 장안의 재산을
좌지우지 하셨다 .
#< 공사견문록 >(42) 변승업에 대한 기록이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없다 .
다만, 숙종때 정재륜이 지은 < 공사견문록 >을 보면
-왜역 한 왜역관의 이야기가 나온다 .
-변승업편 CG 2.(50-) 이 역관은 자신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관에 옻칠을했다 .
당시 옻 관은 왕가에서 밖에 쓰지 못하던 것으로 조정에서 문제가 됐다 .
그러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조정대신에게 십만 금을 뿌렸다 .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숙종 22년 ,
숙종때 유명한 왜역관이라면 이는 변승업일 확률이 높다 .
INT. 김양수 : 변승업이 죽을 때 재산이
50만냥 백만냥이상이 되지않았나,은 한냥에 쌀 한섬. 천억 이상이 됐다 .
#산소 걸어가고. (13)
EFECT ... 응자 관자 묘비가 저기 .
밀양 변씨의 선산이 있는 서울시 망우동 . 19대부터 22대까지 선조들의 묘소가 곳이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승업의 산소만은 전해져 오지 않고 있다 .
- 응관의 묘( 15) 변승업의 백부인 변응관의 비석 .
비석의 재질은 상당히 좋은 화강암 재료를 썼다 .
벼슬이 통정대부까지 올랐다고 하는 변응관 역시 역관이었다 .
INT. 정동일.... 주위에 있는 문관석이라든가 묘비, 대좌 묘제 잘 따르고 있다 .
당시의 그분의 위세 , 중인이면서 누렸던 혜택을 볼 수 있다 .
# 여기저기 석물들,(23 )
밀양 변씨의 선산은 2천여평에 달한다.
조선시대, 이곳 망우동이라면 동대문에서 가까운 곳.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에 중인으로서 사대문이 가까운 곳에 이만한 넓이의 선산을 갖추고
양반의 묘제를 따랐다는 것은 당시 이 집안의 위세를 짐작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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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
지금으로치면 변씨집안의 선산이 그렇게 특별나게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역관들은 중인의 신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변씨 집안의 산소가
저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다는 것이 예사롭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
그렇다면, 변승업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던 것일까요 ?
그것을 알려면 당시 역관의 지위라는 것이 어떠했는지 부터 알아야 합니다.
# 통신사 행렬도 뒤에 나타나고 .
이것은 조선통신사 행렬돕니다 .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회복하면서 통신사를 교환하게 됩니다 .
- 정사와 부사 튀어나오고 .
이 통신사 행렬에는 정부 대표격인 정사와 부사 ,
- 훈도, 소통사 튀어 나오고 .
그리고, 훈도와 소통사가 정부 사절로 파견이 됐습니다 .
훈도와 소통사 , 이들이 바로 역관입니다 .
당시 사대부들은 대부분 외국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역관들은 외교상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를
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
뿐만 아니라 이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행렬의 총감독역활도 맡았습니다.
(변승업도 바로 이 훈도로서 1682년 ,일본에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 통신사 빠지고 뒤에 삼국 지도 ( 중국과 일본 화살표 ).
일본뿐만 아니라 역관들은 중국에 갈 기회도 잦았습니다 .
중국과 사대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은 일년에 서너차례 사절을 중국으로 파견했기 때문인데요 ,
역관들은 바로 이렇게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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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 역관들이 갑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 청일간의 중개무역 덕분이었다 .
# 연행도폭, 넘기는 것.( 30 )
-책장 넘기고 자막뜨면.
중국 사신행에 관계된 것으로 국내 남아 있는 그림은 거의 없다 .
그런 면에서 올해 초 발견된 < 연행 도폭 >은 학계의 시선을 끌었다 .
이 그림은 1624년, 인조의 왕권을 승인 받기 위해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행렬을 묘사해 놓은 것으로 해마다
중국으로 사신행이 파견되는 경우는 잦았다.
INT. 이철성 : 동지행과 중국 달력 역행 . 동지행은 5개월, 역행은 4개월에 걸쳐...
여러 가지의 명목을 붙힌 사행 . 일년에 서너차례는 됐다 .
-행렬.( 15) 사행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
정부에서 파견한 공식인원은 정사와 부사등 30여명이었지만 여기에 마부, 짐꾼들을 합해 모두 2,3 백명에
이르는 대군단이었다 .
# 도로.
CG-중국가는 지도 3.(15) 서울을 출발한 사행은 의주,책문,심양을 거쳐 북경에 이르렀다.
서울을 출발해 돌아오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5,6개월. 총 2천리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
# 행렬도 (16) 사행에 참가하는 역관들은 13명 정도 ,
정부에서 파견하는 사신들이 해마다 바뀌는 반면 해를 이어가는 역관들은 이 사행의 실질적인 총책임을 맡았다.
INT . 이철승 : 사행의 모든 일들은 역관이 담당.
당상역관은 사실상 총책임자, 상통사는 당상역관을 공무역 담당, 사행에 필요한 물건, 화폐, 쌀 담당도 역관 .
# 도록 ( 18 ). 당시 정부에서는 사행의 경비로 사용하도록 쌀,포,종이등을 지급했다.
이것으로 무역을 해서 경비를 충당토록 했는데, 그 권한이 역관에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신단 개개인에게도 출장비를 지급하지 않는 대신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INT. 이철성 ... 무역권을 줘. 그게 역관이 나서는
배경.
#인삼.( 20) 그렇게 한사람에게 허용되어진 무역량이 1포에 10근씩 해서 팔포, 즉 인삼 80여근 이었다.
팔포는 은으로 치면 2천냥, 쌀은 2천석 정도를 살수 있는 돈으로서 당시로서는 매우 큰 액수였다.
사신단이 이렇게 많은 무역자급을 가지고 갔기 때문에 도착하는 곳곳에서 무역이 이루어졌다.
# 요계관방지도 ( 10 )
-책문 보이면 의주에서 120리 떨어져있는 책문.
당시 이곳에는 높은 나무를 촘촘히 박아 울타리를 세워 두었다.
조선의 사신들은 이곳에서 청나라의 입국수속과 통관 절차를 기다렸다
INT. 이철승..... 어느 역관이 왔느냐...
# 중국 시장 ( 17 )
- 바구니 멘 아주머니. 사신들이 통관절차를 끝내면 바로 책문에 장이 섰다.
(책문시장) 조선의 사신이 온다는 것이 알려지면 벌써 중국 각지의 상인들이 물건을 가지고 책문으로 몰려
들었던 것이다 .
- 모자.( 25 ) 18세기 조선의 수입품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대부들이 겨울에 쓰는 양털 모자였다.
이 모자는 당시 사대부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품목으로 수입량이 많았다.
- 열하일기.( 18 ) 그러나 이 모자를 수입하기 위해 드는 비용이 엄청나자 1780년 , 중국 사신단에 동행했던
박지원은 모자무역의 페해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 시장 ( 17 ) 그 외 우리나라에서 주로 가지고 간 교역품은 인삼이나 종이, 면포를 비롯해 특산물들이었다.
이것을 팔고 중국에서 비단류와 문방구류, 약재류, 가죽제품들을 구입해 왔다 .
# 왜관.(21) 중국에서 구입한 물건들은 일부 국내상인에게도 넘겨졌지만 대부분은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넘겨
졌다.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모든 항구를 페쇄했기 때문에 일본은 청나라와 직교역을 하지 못하고 조선의 왜관을
통해 중국문물을 구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픽 지도(16) 바로 이 과정에서 역관들은 중계무역을 통해 높은 이익을 올릴수 있었던 것이다 .
특히, 인삼과 비단등은 왜관을 통해 팔면 두세배의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
INT. 이철성 ( 4325 ) .
~~~ 이런 무역을 통해서 역관들은 상당한 재력가로 존재했다 .
# 왜관.( 13 ) 17세기 후반 , 청과 일본의 국교단절과 왜관을 통한 중계무역이라는 시대적 상황까지 더해 역관은
더욱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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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
역관들은 왜역관 , 한역관 이렇게 자기의 전문 분야가 정해져 있긴 했습니다만 꼭 그 나라만을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많은 역관들이 중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변승업도 그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 뒤에 변씨집안 족보 내려와 펼쳐지고 .
..... 한장 펼쳐져 있고. 넘기면 다시 한 장 나타나고.
역과에 동그라미, 혹은 눈에 띄는 표시.
제 뒤에 보이는 것은 밀양 변씨 집안의 족봅니다 .
그런데, 한 번 보시죠. 동그라미를 친 부분이 역관들입니다.
( 이 사람도 역관,저 사람도 역관...)
한 페이지에서 이렇게 많은 역과출신들이 눈에 띕니다.
장안 제일의 부자라고 했던 변승업의 경우 , 형제 9남 1녀중에 6명이 역관이 됐다고 합니다 .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대까지 역관은 이어집니다 .
그래서 밀양변씨 집안 전체에서는 광해군 5년이후 약 280여년간 무려 106명이 역과에 합격했다고 하는데요 ,
한 집안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역관이 배출됐던 것 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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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부와 명예, 역관들은 세습을 원했다 .
# 김씨 집안 족보 펼치는 것 (13). EFFECT... 우봉 김씨 족보올시다.
두 권으로 돼 있어요.
조선후기 많은 역관을 배출한 또 다른 집안인 우봉 김씨 .
-족보 ( 20 )
EFFECT.... 지자 남자, 이 분도 역관 ,
박씨 아버님도 역관....
자제 경문도 역과를 하셨고....
-족보(16 )
이 집안의 족보에서도 역관을 배출하는 시험인 역과에 합격한 이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
17세기이후 약 250 여년간 이 집안에서만 모두 아흔세명이 역과에 합격한 것으로 나타났다
.
# 규장각 들어가고 .
# 팔세보 ( 7 ).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는 < 역과 팔세보 >.
명문 역관가문들의 족보를 역과의 시조부터 8세까지 정리해 놓은 책이다.
-천령 현씨.(20 ) 조선후기 유명한 왜역관 집안인 천령 현씨 .
이 집안의 가계에서도 대를 이어 모두 99명의 역관이 배출됐다 .
역시 역관이 대대로 세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해주 오씨.( 9 ) 해주 오씨가문에서도 22명의 역관이 배출됐다 .
그렇다면, 한 집안에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역관을 배출 할 수 있었을까 ?
INT. 오일륙....6,7세부터 과외수업...
세창 우리 아버지는 8살부터 과외.
-과외 (14 ) 역관 집안에서는 자손들을 역관으로 만들기 위해 예닐곱 살부터 가정교사를 모셔놓고 외국어
과외수업을 시켰다는 것이다 .
# 사역원 고지도.( 15 )
그러나, 역관이 되려는 이들이 모두 바라는 것은 역관들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국립 외국어 학교 사역원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 육조거리.(14) 태조 2년인 1393년 세워진 사역원은 지금의 광화문 앞 육조거리 ,
당시 즐비했던 육조관청중 공조의 뒤편에 있었다 .
-팬 사역원 ( 14 ) 수시로 사신단이 출발을 했던 만큼 사역원은 정부 관청 가까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 사역원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완천기>( 19 ) 사역원에 들어가려면 우선 역관의 추천을 받아 심사를 거쳐야 했다 .
<완천기>는 바로 이 사역원에 추천을 받은 이들의 명단을 기록한 책이다 .
-학생이름,거주이름 CG(11) 책 속에는 입학을 희망한 신청인의 이름과 함께 거주 , 즉 학생을 추천한 역관의
이름도 같이 적혀있다..
# 재연-완천장면. 이렇게 일단 거주의 추천을 받은 이들에 한해 입교 심사가 이루어 졌다.
심사는 먼저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한지를 나눠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effect.. 오늘은 심요 3월1일...
심사는 <완천기>에 적혀있는 완천단자.
즉 부모와 외가의 관직사항, 결혼을 했을 경우에는 처가의 관직사항까지 그리고 추천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고 이루어진다.
-매듭 지을때. 부적격자라고 판단한 경우에는 한지에 매듭을 지어 넣고, 찬성인 경우에는 그대로 넣었다.
-얼굴 TS. 심사를 하는 이들은 전, 현직 역관들 .
-바구니 쏟고. 모두 15명이 심사를 했는데 13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비로소 사역원에 입교 할 수 있었다 .
effect. 합격...
# <완천기> 의 결 CG (19). < 완천기 > 밑에는 심사 결과를 적고 있다.
완천 단자의 밑에 적혀있는 결이 바로 매듭의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다.
3개 이상의 매듭이 나와 3결이 되면
-팬. 세 번까지는 재응시할수 있지만
세 번이상 탈락되면, 입학자격이 발탈된다.
# 완천기, 천거인 성(36...? ) INT. 김현목 .
천거 받기도 어렵고 천거가 됐다고 하더라도 심사위원이 누구냐에 따라 누가 추천을 했느냐에 따라 합격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지 않았나 , 생각 .
# 완천기, 천거인 성.( 36.... ? ) 실제 완천기를 보면 전주이씨,남양홍씨,밀양변씨,천령현씨,우봉김씨등 .
이들이 천거인으로써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수있다.
< CG 보다가.... >
그리고, 19세기 12회에 걸친 심사에서 천거된 사람들을 분석해보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타난다.
천거된 945명중에 90 % 정도가 합격을 한 것이다 .
결국 ,천거만 되면 합격할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는 얘기다.
#심사과정.
INT. 김현목 ....
생도를 보면 98%가 합격이 되고 어떤 거주는 40%가 합격. 주로 명문집안의 거주 같은 경우 인맥이 있어
유리한 입장에서 생도 추천 .
#역과방목( 15 ) 사역원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곧바로 역과에서의 합격으로 이어졌다 .
실제 역과 합격자들의 명단을 분석해보면 , 역관 명문가문 합격자의 수가 전체 34.5 % 에 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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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
역관들은 천거제라는 제도를 통해서 자신들의 계층, 중인그룹들이 역관이 되는 방법을 좀 더 쉽게 만들어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
그러나, 사역원에 들어갔다고 해서 바로 역관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국어를 익히는 힘든 길이 남아 있었는데요 , 엣날 사람들은 외국어를 어떻게 배웠을까요 ?
# 사역원 건물 들어가면 복도 .
자, 이곳이 조금전에 봤던 사역원입니다 . 한학청, 몽학청, 청학청, 왜학청 . 이 4가지 언어가 조선시대의 4대
외국어, 4학이었습니다.
- 우어청.
그런데, < 우어청 >이라...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요 ?
( MC 혼자 안 들여다보고...)
아, 모두들 외국어로만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데요 ,
이곳에 들어가면 하루종일, 조선말은 쓰지 못하게 돼 있었습니다 .
그 나라 말로만 대화를 주고 받도록 한 순수 회화교실입니다 .
- 그 중 한 방 들어가고 한학청 .
이곳은 한학청 ,
지금으로 말하면 제 1 외국어가 당시에는 바로 중국어였습니다 .
역관들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숫자를 뽑았던 것이 바로 중국어 역관이었죠.
- 옆에 서적들 .
여기에는 책들이 꽂혀있는데요 , 아마 교재들인 것 같습니다.
- < 노걸대 > 한 권 뽑고 .
이 책은 < 노걸대 > 라고 씌여 있는데요 ,
제목이 특이하네요. 이런 책을 가지고 과연 조선시대에는 중국어 회화를 어떻게 배웠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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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사역원에서는 어떻게 공부를 했을까 ?
# < 노걸대 >표지( 8 ) < 노걸대 >는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중국어 회화책 이다 .
("걸대"는 몽고인들이 중국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 "노"는 경칭접두어로 중국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 내용 ( 18 ) 세 명의 고려상인이 말과 인삼, 모시를 팔기 위해 중국으로 다녀오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일들을 적고 있다 .
그런데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대화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
INT. 송기종 .....
중국말 잘 하냐... 글방에서 배웠다.
보통 사람이 전형적인 노중에서 대화하는 것.
-대화 CG 처리.( 15) 상하 두 권 가운데
노걸대 상권은 완전한 회화체로 구성돼 있다 .
근대이전에 이렇게 완전한 구어체로 만들어진 회화책은 다른 나라에서도 어디서 오십니까? 발견된 적이 없다 .
고려에서 옵니다.
# 단어 줌인.( 8) 뿐만 아니라 < 노걸대 >는 말을 사고 파는 법 ,
여행을 떠난 상인들이 북경에 도착해 여관에 드는 방법, 음식을 청하는 법을 비롯해
-인삼가격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을 파는 방법등 실생활에 필요한 실용 회화들과 교역에 직접 관련된 대화들이
특히 많다.
( 17....은자. ?? )
-상거래 대화 CG 처리( 10 )
뿐만 아니라 문장의 구성도 상당히 체계적이다 .
INT. 송기종.....단어의 반복...
이것만 외워도 자동적으로 회화가 이루어져. 앞에 있는 문장,뒤에 있는 문장이 자꾸 중첩이 되면서....
#책 TS. 한 페이지 안에서 같은 단어를 반복해 씀으로서 계속해서 읽다보면 자연히 단어를 외우게 돼 있는
것이다 .
INT. 송기종 .
제 추측에 이것만 외우면 자동적으로 회화가 이루어진다 .
# 고려대 박물관(30) 이렇게 실용성이 높은 교재였기 때문에 < 노걸대 >는 당시 사역원 4개 언어로 모두 번역이
됐다 .
현재 고려대 박물관에는 그중 청나라 언어인 만주어와 몽고어 노걸대의 목판본이 남아 있다 .
-몽어노걸대 책. 그런데, 이 목판본에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INT. 정 광 .
여러차례 개편...오려붙여서 넣었다.
# 수업. EFFECT...
-책 이렇게 언어가 바뀔 때마다
매번 수정 ,보완을 거친 < 몽골어노걸대 > 는 지금도 교재로서 손색이 없다 .
INT. 교수.
현실을 반영해서 수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과서로 배운다 .
# 첩해신어.(16) 일본어 교재로 대표적인 것은< 첩해신어 > .
첩해신어는 일본어역관들이 왜관에서 일본사람들을 접대하거나 통신사를 수행할 때 쓰는 대화들을 역시
회화체로 적은 것이다.
INT . 정 광.... 살아있는 회화 남겨...
# 그외 교재들- 팔세아 (20) 그 외도 사역원의 교재는 다양했다 .
초급과 중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초급 회화 교재로 많이 사용한 것은 <소아론>이나 <팔세아>등 해당국의
어린이들이 배우는 훈육교과서들이었다.
# 수업 재연...( 23 ) EFFECT...
사역원의 수업방법은 엄격 했다 .
기숙사생활을 하며 하루종일 공부를 하고 , 매월 2일과 26에는 험을 쳤다 . 3개월에 한번씩은 기말고사격인
원시를 쳤다 .
INT. 정 광 ....
중국어는 배송, 배강....몽고어는 사자.
원시는, 돌아서서 외우는 것. 읽고 풀이하는 것, 사자는 암송해서 기록하는 것.
# 과거.( 20 )
그러나, 사역원에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모두 역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역관을 뽑는 시험인 잡과를 거쳐야 했다 .
잡과는 문과시험과 마찬가지로 3년에 한번 실시됐다 .
# 고려대 .
EFFECT..... 7군데 출제 ,
만주어 시험 답안지는 삼역총회에서 3군데..
고려대 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1844년의 청어 시권 .즉,만주어 시험답안지다.
이 답안지는 당시 역과시험이 어떻게 치루어 졌는지를 보여준다.
EFFECT...
중국어외의 청어나 일본어등은 주로 이렇게 외워서 쓰는 방법으로 시험을 쳤다.
# 투 샷. EFFECT.... 이것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 6) 영조때 한 역관의 일본어 시험 답안지를 보자.
-호봉( 6 ) 먼저, 답안지의 오른쪽 위에는 수험자의 가계를 모두 적도록 했다 .
-복시( 8 ) 역과시험은 초시와 복시로 나누어져 두 번 모두를 통과해야 합격이었다 .
-첩해신어( 10 ) 일본어 시험 역시 외워 쓰는 형식인데, 모두 <첩해신어>에서 6부분을 정해 외워쓰도록 했다.
-통,약,조 ( 10 ) 채점은 답이 우수한 정도에 따라 통은 2점, 약은 1점, 조는 0.5점으로 계산했다.
.
지금으로치면 각각 A,B,C학점인 셈이다. 이 점수를 합해 합격여부를 결정했다.
-합 십분. 현경재의 경우 총 10 점으로 합격을 했다 .
현경재는 3등에 열명을 뽑는데 그중 일곱번째로 합격을 했다.
-삼지칠. 답안지에는 몇등으로 합격을 했는지까지 표기가 됐다 .
# 백패. EFFECT....역과합격자에게 주는 백패입니다.
문무대과에 합격하면 붉은 종이에 주기 때문에 홍패라고 하는데,잡과 합격하면 백패....
-백패(25)
역과 합격자는 총 열아홉명을 뽑았는데 1등은 세명 2등은 여섯명 3등은 열명을 뽑았다.
그렇게 해서 1등에게는 종 7품을 , 2등에게는 종 8품을 , 3등에게는 종 9품을 수여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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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사역원은 조선 5백년동안 존속을 합니다 .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이렇게 체계적으로 , 오랜 기간동안 외국어 교육기관이 존속하는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제도는 당연히 유능한 역관의 양성을 이끌어냈고 역관들은 국제무역에 깊숙이 관여함으로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우수한 인력인 역관들은 비단 무역에서뿐 아니라 실제 외교사에서도 단순한 통역이상의 실질적인
외교관의 역할을 했습니다 .
# 책상위 <통문관지> 들고 .
조선시대 외교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이 <통문관지>를 보면 , 유명한 역관들의 활약상에 대해 따로 소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
- 역관들 이름 문패처럼 나오는 것 MC 보다가 .
그중 장현과 홍순언 부각 .
1.장현. 그중에 장현은 우리가 잘 아는 장희빈의 5촌 당숙입니다 .
장희빈을 배출한 인동 장씨가문도 명문 역관가문 가운데 하납니다.
장희빈의 아버지도 바로 역관이었죠 .
1617년,역과에 수석합격을 하면서 역관이 된 장현은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갈 때 수행을
하게되죠. 그후 6년간을 함께 심양에 머물다 돌아온 덕분에 청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을 합니다.
때문에 그후 40여년간 30여차례나 북경을 다니면서 청과 관련된 크고 작은 일에 역관으로서 다 관여를 한
인물입니다.
2.홍순언. 홍순언은 선조 때의 역관입니다 .
당시 중국의 <대명회전>에는 조선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의 이름이 잘못 올라 있어서 국가에서 몇 번
이나 사신을 보냈으나 바로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역관 홍순언이 이것을 바로 잡았습니다. 이후 홍순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에 요청해 구원병을
이끌고 오는데 결정적인 역할도 합니다 .
이렇게 역관들은 우리 역사에서 실질적인 외교관으로서 많은 활약을 하게 되는데요 ,
그중에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 책 <통문관지>를 지은 역관 김지남, 김경문 부잡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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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 뛰어난 외교관으로서 활약했던 역관 김지남 부자.
# 우봉 김씨 선산 FS( 7 ) 김지남, 김경문 부자를 배출한 우봉 김씨 가문의 선산이 있는 경기도 고양시,
-석물들과 비석.( 10 )
즐비한 석물들과 큰 비석을 갖춘 산소들이 양반집안 못지 않은 위세를 보여준다.
-조부의 비석으로 TR ( 3 ) 그중에 눈길을 끄는 하나의 비석.
-비석 TD( 9 ) 대리석으로 고급스럽게 만들어진 것은 김지남의 조부 김 대충의 비석이다 .
당시 이 지역에서 대리석비석을 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뒷면.(9)
비석의 뒷면에는 대군이나 정 2품이상의 양반들만이 할수 있는 두전까지 둘렀다.
EFFECT... 한성부의 판윤,
서울시장격을 증직받는 것으로 돼 있죠.
-비석 fs.(4 ) 사후 벼슬을 증직받는 것은 후손이 공이 클 때 가능한 것이다.
INT. 정동일 (010403).... 대리석,
아무 집안이나 한 것이 아니다 .
재력이나 사회적인 면에서 인정 .
-김지남의 묘로 줌인.( 10 ) 우봉 김씨 집안은 중인신분으로서 당대 어떻게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
-김지남 비석 ( 10 ) 그것은 바로 이 예사롭지 않은 비석의 주인공, 역관 김지남 덕분이었다 .
- 비석 뒷면 ( 15 ) Effect...
현종 12년, 18세의 나이로 역과에 급제한 김지남은 <통문관지> 편찬을 비롯해서 역관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다 .
-압록강 CG ( 13 )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공은 그의 아들 김경문과 함께 백두산 정계비 건립에 관여한 것이다 .
-백두산 ( 25 ) 당시 청과 우리나라는 백두산 마루에서 흐르는 두줄기의 강으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이곳 백두산을 청태조가 발원한 곳이라 하여 성산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구름 1712년,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목극등을 보내 백두산에서 두 나라의 경계를 확정하려 하였다 .
-사진 이때 우리 조정에서는 접반사 박권을 대표로 파견해 협상을 거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운다 .
- 박권은 대표로 가면서 친히 김지남과 김경문 부자를 역관으로 대동할 것을 요청해 두 사람이 함께 파견된다.
이때 김지남의 나이는 63세, 그의 아들 김경문이 직접 목극등을 만나 많은 대화를 한 끝에 백두산정계비를 건립
하게 된다.
정계비에는 역관 김경문의 이름이 선명하다.
INT. 김양수.
#<신전자초방> ( 25 ) 이외에도 김지남의 아들 역관 김경문은 여러차례 중국을 다니면서 화약만드는 법을 새롭게
배워온다.
김경문은 이 방법을 얻기 위해 죽을고비를 몇번 넘겼다고 적고 있는데 신전자초방은 당시 국내에 전하던 화약
제조법에 비해 성능이 뛰어난 것이어서 군의감에서 책으로 펴찬해 낸것이다
# 김지남의 비석 ( 20 ) 당시 묘제는 경국대전에서 신분에 따라 엄격히 규제 하고 있었다 .
그런데도 우봉김씨 가문이 양반 못지 않은 묘제의 선산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역관으로서의 김지남과
김경문의 공이 그만큼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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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
# 세계지도 .
조선시대 중국사행이나 일본 통신사들이 한번 외국을 다녀오는데 걸린 시간은 6개월에서 길게는 12개월 정도
였습니다 .
교통편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얘기고 , 보통 사람들이 쉽게 오갈 수 없었다는 얘깁니다 .
이런 상황에서 역관들이야말로 변화하는 세계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때문에, 우리나라 역사의 많은 신문물들이 바로 이 역관들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
- 지구의, 망원경 , 시계, 과학서적들 신문물 하나씩 쉭 나오고.
- 고구마, 고추, 감자 .
이렇게 조선후기 서구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선구자 역활을 했던 역관들은 조선사회가 안고있는 모순을 먼저
깨치게 됩니다 .
조선후기에 접어들면 역관들은 자신들이 처한 중인이란 신분의 모순을 깨치고 철폐하려는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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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구한말의 역관들은 사회변혁 세력으로 등장한다 .
# 한영우교수 연구실. (13) 서울대 한영우 교수가 가지고 있는 한 권의 복사본 책 .
-< 상원과방 > 복사본. 미국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상원과방 >을 복사해 온 이 자료는 국내에는
없는 것이다 .
-책 내용 ( 11 ) 이 책에는 소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분 상승운동인 통청운동에 대한 것이다 .
INT .
조선후기에 가서 제도가 무너지면서 기술관원이 문과합격을 해도 청현직을 주지 않는다 .
법 규정대로 청현직에 나갈수 있는 것을 보장해 달라는 운동이 통청운동 .
-상소장면 ( 13 )
기술관인 중인들에게도 차별없이 문과합격자와 같은 벼슬길을 열어달라는 내용의 통청운동 .
중인들은 이런 내용을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상소문을 만든다 .
-명단( 20) 이 운동에는 통례원을 비롯한 열한개 중인관청에서 천육백일흔명의 중인이 참여하고 ,
230냥의 자금을 모았다.
-역관 TS. 그런데, 그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이들이 역관들이었다.
INT. 한영우 ( 0404).....
중인들중에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 , 특히 역관들의 지위가 상승 . 경제적 지위 향상 .
자각의식, 신분상승운동 집단적으로 기여 .
-추고.( 7 ) 비록 이 통청운동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중인들의 축적된 문화적, 경제적 역량은 개화파에게까지
이어진다.
# 오경석 집 (3). effect.... 찍어줘서.
# 오경석 사진 (12 )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알려진 오경석 . 그도 역관이다.
1846년, 역과에 합격한 오경석은,
-북경( ) 23세 되던 해 역관으로 북경에 가 1년간 머문다.
당시 중국은 아편전쟁에 패배하고 밀려드는 열강의 위협속에서 한창 통상을 열 무렵 ,
이때의 경험이 오경석으로 하여금 개화사상을 갖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유리창 실내.(23) 그후 13차례나 중국을 왕래하며 오경석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고 서점가인 북경의 유리창 .
대를 이은 역관집안으로 부유했던 오경석은 이곳에서 많은 과학서적을 구입해온다.
쉽게 구할 수 없는 < 양수기 제조법 >과 같은 책은 필사해 오기까지 했다 .
#중앙도서관 (21) 국립 중앙도서관에 있는 위창 문고 ,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이 아버지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기증한 것으로 오경석이 직접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해 온 책들도 함께 있다 .
#박물신편...(16) 서양과학의 해설서인 < 박물신편 >, 세계각국의 지리와 역사, 병기기술를 해설한 책인
<해국도지> , 세계각국의 지리서인 < 영환지략>등이 유리창에서 구입해 온 책들이다 .
# 배( 6 )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오경석은
-양요일기( )16 그동안 쌓은 인맥을 바탕으로 북경에서 서양의 침략경험을 가진 정책가들을 만나 정보를 수집
하고 대책을 고민한다.
그 기록이 바로 양요일기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는 대원군이 프랑스함대를 물리치는데 실질적인 주요정보가 된다 .
# 신미양요 (18 ).
그러나,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양요때와 달리 오경석은 대원군에게 적극적으로 개항할 것을 건의한다 .
INT. 신용하 ... 그의 주체적인 개화사상 .
우리가 준비를 해서 서양문물을 자주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는 생각 ,...
# 대원군( 3 ) 하지만, 쇄국정책을 추진하는 대원군에게 그의 주장은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
# 과학서적 (22) 오경석의 자주적 외교사상의 핵심은 조선이 부강한 근대국가가 되지 않으면 서양세력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주적 대개혁을 하려면 서양의 과학기술과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INT . 서양의 선진문물과 신서를 가져와서 유대치에게 읽게 해서 개화사상을 선도. 서광범, 박영효, 개화 세력이
되어서 나라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제안.
# 편지 + 사진 ( 40 )
오경석이 중국의 뛰어난 문우들과 주고 받은 편지가 수십 장 남아 있다 .
오경석은 23세때인 제1차 북경행때 많은 청나라의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들과 평생 교류를 하며 시대의 문제점을 함께 토로하고 생각을 교환했다 .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신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것,
오경석이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역관으로서의 경험이 밑거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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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7 . 클로징 .
언어는 새로운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도굽니다 .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는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고 있는데요 ,
조선시대 , 외국어를 습득한 역관들은 그 외국어를 바탕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에 머물지 않고 넓은 세계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
특히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국제무역에 참가하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됩니다 .
그러나, 역관들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역관들은 조선이 처한 위치를 누구보다 잘 간파할 수 있었고
조선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
결국 역관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들여오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
이러한 활동을 통해 역관들은 급격하는 조선후기, 조선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눈을 떠가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됐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