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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야고보의 우물 Jacob`s well 원문보기 글쓴이: 솔잎
[마가복음 6장: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배부른 돼지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자란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 때였으므로 예수님도 모세의 율법을 따라 안식일이라는 날에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으로 가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와 교훈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고향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원래 목수 직업을 갖고 있던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훈과 도를 가르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고 단지 신기해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대대로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믿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을 떠나 다른 동네를 두루 다니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 본래 모든 선지자, 즉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일수록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성경 말씀보다 예전에 자기가 알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닫게 만들고 “나보다 어린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듣나?” 하기도 하고, “쟤는 어려서 우리 가게에 와서 과자 사 먹고 코 흘리며 다니던 아인데 내가 어떻게 쟤한테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겠어?” 하면서 겉 사람을 먼저 보고 가르침을 받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고향 사람들만 이상한 것은 아니랍니다.
그렇게 사람을 먼저 보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들을 때에도 학력을 따지고, 대학은 어디를 나왔는지, 박사학위는 있는지, 책을 쓰고 유명하게 된 사람인지 하는 것들을 먼저 본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낮아지라고 하셨고 욕심을 버리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높아진 사람, 욕심을 부리고 유명해진 사람이 가르치는 말은 틀려도 듣고, 그 반대로 성경 말씀을 따라가서 낮아진 사람, 욕심을 비우고 사는 사람이 전하는 성경 말씀은 듣지 않는답니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있답니다.
어린이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참 이상한 일이네요?’ 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혹시 어린이 여러분도 나중에 그런 어리석은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둘씩 짝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도와 교훈을 배운 대로 가르치게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도 저와 같이 제게 배운 것을 전하러 다니셔야 합니다. 그런데 다니실 때에 지키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늘 여러분의 길을 인도할 잠언과 전도서 말씀을 의지하여 전하시되 세상일을 걱정하는 마음이나, 말씀을 전하고 나서 그 전한 대가로 칭찬을 받으려 하거나 혹은 ‘저 사람 대단하네.’ 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다니시면서 ‘오늘 돌아다닐 돈만 있고 내일 돌아다닐 교통비나 밥값은 없는데 어쩌지?’ 라는 염려(念: 생각할 염, 慮: 생각할 려)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사로운 성경 지식을 의지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과 논쟁을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다가 여러분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그 사람이 궁금해 하는 것을 다 해결해 줄 때까지 그 사람에게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궁금증을 다 해결해 줄 수 있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십시오.
또한, 전에 여러분과 친한 사람이었거나 여러분이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 사람이 말씀에 관해 관심이 없으면 애써서 성경 말씀을 전하려고 하지 말고, ‘저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경 말씀을 전하려고 했는데 당신께서 듣기 싫어하시니 저는 그만 가겠습니다.’ 라고 말해서 그 사람이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意: 뜻 의, 思: 생각할 사)를 밝힌 것이라는 증거를 그 사람의 마음과 하나님께 남겨 드리고 그에게서 떠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증거를 남긴 여러분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증거가 있어야 하나님이 그 증거를 바탕으로 나중에 재판을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하는 일꾼이므로 전하고 받아들이면 계속 전하고, 안 받아들이면 증거를 남기고 지나가는 것까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마치 우체부 아저씨와 같습니다.
편지를 전하고 나서 하나님의 편지를 배달받은 사람이 “저 대신 편지 좀 읽어주시겠습니까?” 라고 말하면 그 편지 내용을 다 알아들을 때까지 읽어주고 또 내용을 이해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편지를 전했는데 받자마자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 몰라. 나한테 온 편지 아니야. 배달이 잘못되었어.” 라고 말하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편지를 반송시키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지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을 모두 받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도와 교훈에 관하여 사람들에게 전하면서 잘못 알고 있던 성경지식을 바르게 가르쳐 주고, 성령의 가르침인 지혜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을 바로 향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병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 라는 이름이 온 나라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선지자(先: 먼저 선, 知: 알 지, 者: 사람 자)라고도 했습니다.
사도들이 전도를 마치고 예수님께로 모여와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예수님께 낱낱이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쉬시면서 또 전할 힘을 얻기 위하여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라고 말씀하시고는 배를 움직여 한적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 배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자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목자를 잃어버린 양들 같아 가슴이 아프구나!”
곧 배를 정박시키고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한 제자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 이곳은 들판이라 아무것도 없고 이제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마을로 가게 하여 무엇을 사 먹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먹을 것을 주십시오.”
“저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여러분에게 떡이 몇 개나 있습니까?”
“떡이 다섯 개가 있고 또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백 명씩이나 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지시한 대로 떼를 지어 앉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향해 기도(祈: 빌 기, 禱: 빌 도)를 하셨습니다.
“이 양식(糧: 식량 양, 食: 먹을 식)으로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을 양식이 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하신 후에 떡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구니의 떡과 물고기를 꺼내서 주면 또 있고, 꺼내면 또 있고, 그렇게 그치지 않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나누어 준 떡과 물고기를 모두 배불리 먹고 나서 그들이 남긴 것을 거두어들였더니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그날 거기에서 떡을 먹은 사람은 남자의 수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 이 기록은 ‘기적’ 을 행하셨다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홍해가 모세의 지팡이로 치니 갈라졌던 기록이나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 그것을 식량으로 삼았던 기록 등도 역시 기적을 행했다는 것 때문에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조금의 양으로 많은 사람이 떡을 먹은 기록은 구약에서 ‘엘리사’ 라는 선지자도 행했던 것이므로 기적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기록들은 당시에는 ‘사실’ 이었지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기록은 ‘세상에 구원의 길을 내셨다’ 는 의미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다’ 는 것에서 만나는 ‘주기도문의 일용한 양식과 같은 것으로 음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읽고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 는 의미이며, 메추라기는 ‘먹고 입을 것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게 하셨다.’, 즉 앞서 읽은 ‘내일 쓸 교통비나 먹을거리를 걱정하지 않게 하신다.’ 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적은 양으로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것은 ‘적은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말씀을 가르쳐 주셔서 그들이 다 만족하게 되었다’ 는 것을 오늘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 떡 다섯 개란 ‘모세오경’ 을 뜻하며 두 마리 물고기란 ‘지혜가 가르치시는 말씀 두 권, 즉 잠언과 전도서’ 를 뜻합니다. 그리고 떡과 남은 물고기를 담은 ‘바구니’ 는 ‘하나님의 약속’ 을 뜻합니다.
다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라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교회 세움을 받을 제자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만큼 나왔다는 뜻이며, 남자가 오천 명이라는 것은 ‘씨 뿌릴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죄인임을 깨달았다’ 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이 이해가 안 가지요? 어린이 여러분에게는 조금 어려운 설명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더 길게 설명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어린이 여러분이 다음의 뜻을 알 수 있다면 한 번 헤아려보고, 왜 선생님이 이렇게 설명을 한 것인지를 따져 보시기 바랍니다.
더하기를 할 수 있는 능력만 되면 각 수의 의미를 더해서 한 문장을 만들면 위와 같은 설명이 나온답니다.
<성경의 메시지 전달 수단인 숫자와 기초적인 용어의 의미>
다음에 간단하게 제시한 수의 의미만 알고 있으면 성경 전체에 나오는 모든 수의 의미를 예외 없이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부분에 사용된 수 중에 이 의미를 적용하여 풀리지 않는 수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이든, 다니엘서든, 에스겔서든, 어디에든지 이것을 적용하면 모두 풀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오병이어의 이적을 오천 명을 먹이신 때와 사천 명을 먹이신 두 가지 기록을 자세히 보고 아래 숫자의 의미를 적용해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서두에 이러한 의미들을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앞으로 이어지는 설명에 이 의미들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 숫자의 의미
일: 하나님과 개인
이: 교회 - 에끌레시아
삼: 은혜
사: 그리스도의 범위
오: 죽음에 대한 자각
육: 부정함
칠: 피조 된 범위 안에서의 완전함
팔: 구원(벗어남)
구: 교회 세움를 받은 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나 성령이 함께하고 있는 상태
십: 계획
십일: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하나, 즉 하나님의 어떤 계획에 의하여 택해지는 개인.
십이: 하나님의 성전(교회포함)을 세우기 위하여 피택됨.
백: 인생의 범위에서 완전함
천: 그리스도의 범위에서 완전함
만: 하나님의 범위에서 완전함
숫자에 들어있는 메시지에 관한 것 중의 하나를 예로 들겠습니다.
성경에는 153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물고기를 가득 잡은 그물은 찢어집니다. 나중에 부활 뒤에 그물로 잡은 물고기의 수는 153마리인데 그때는 그물이 안 찢어집니다.
그물은 역시 논리를 말하고, 찢어진 것은 구멍 난 논리를 말하며, 십자가 이후 안 찢어진 그물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 로 완전해진 논리를 나타냅니다.
일·백은 씨를 뿌려 얻는 수이며, 오·십은 죽음을 인지한 자에게 계획하신 것을 따른다는 의미(자신의 영이 죽었으므로 영이 살아야 함을 아는 자)의 수이고, 삼은 선택의 수입니다. 다시 말해 ‘일·백·오·십·삼’ 이라는 수는 ‘죽을 자 중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전해 듣고 영이 살아난 자’ 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언급된 수는 이같이 산술적 개념이 아닌 상징적 개념으로 사용되어 있습니다. 본래 산술적 개념은 비진리에 해당합니다. 진리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옳은 것을 말하므로 산술적 개념은 진리일 수 없습니다. 산술은 인생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와 이해의 소통을 위하여 한시적으로만 소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때의 의미
년: 하나님의 범위에서의 섭리적 때
월: 그리스도의 범위에서의 섭리적 때
일: 사람의 범위에서의 섭리적 때
시: 어떤 개인이 처하게 되는 '지금' 의 의미를 가진 때
반 때: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닌 중간 과정의 때
# 방향의 의미
동: 말씀이 오는 방향
서: 말씀이 사라지는 방향
남: 지혜의 말씀을 뜻하는 방향
북: 멸절을 의미하는 방향
# 광물의 의미
황금: 성경에서 황금은 열매, 즉 하나님의 일을 한 결과를 뜻합니다.
은: 은이란 성경적으로 ‘문자’ 를 뜻합니다. 하지만 아무 문자나 다 은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에덴으로 복귀(復: 돌아올 복 歸: 돌아갈 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문자를 은이라고 합니다.
[시편 12장]
6 여호와의 말씀은 純(생실, 순수할 순)潔(깨끗할 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番(차례 번) 鍛(쇠 불릴 단)鍊(달굼, 불릴 련)한 銀(은 은) 같도다
동: 동이란 성경에서는 주로 놋이나 주석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일꾼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선지자(先: 먼저 선 知: 알 지 者: 사람 자)나 사사들이 놋으로 표현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철: 욥기에 “철은 흙에서 녹여 얻는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흙이란 죽을 사람 혹은 죽은 사람을 뜻합니다. 성경에는 뱀이 흙을 먹고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뱀이 흙을 먹는다는 말에서 흙이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바로 철입니다. 그래서 밭을 가는 연장도 철로 만듭니다. 밭이란 사람의 마음 밭을 말합니다.
[전도서 10장]
10 무딘 鐵(쇠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智(슬기 지)慧(슬기로울 혜)는 成(이룰 성)功(공로 공)하기에 有(있을 유)益(더할 익)하니라
또 시편에는 “하나님이 죽일 기계를 예비했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죽일 기계란 철, 즉 ‘사람의 논리’ 를 죽이는 ‘하나님의 논리’ 를 뜻합니다. 논리란 톱니가 맞아야만 돌아가는 기계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죽이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논리가 하필이면 ‘죽일 기계’ 로 묘사된 이유는 그 논리를 듣는 사람은 그 논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모두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법을 마음으로 받은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므로 스스로 자기를 죽이게 되고, 받지 못하는 사람은 영이 살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므로 그것도 역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네 가지 광물의 상황은 성경적으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성화(聖: 성스러울 성 化: 될 화)’ 되어가야 하는 변화의 단계이기도 하며, 어떤 한 세대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 변화의 순서기도 합니다.
# 계절의 의미
겨울: 씨를 뿌려도 싹이 트지 못하는 상태
봄 : 비가 내려 하나님의 말씀의 싹이 마음에 트게 되는 때
여름: 훈련을 받으면서 강하게 되는 기간
가을: 열심히 전도를 하면서 말씀을 따라 산 결과를 얻는 기간
# 방언의 바른 이해
성경에 언급된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용어에 대하여 성경은 그것을 ‘방언’ 이라고 말합니다. 이 방언의 이해에서 분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문맥이 하나님의 의(옳다하심)를 기준으로 하여 옳은 ‘선’ 을 말하는 것이냐 혹은 옳지 않다고 하는 ‘악’ 을 말하는 것이냐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 악은 인생들이 생각하는 윤리적 관점에서의 선, 악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범위 안에서 인생들의 법이나 윤리나 도덕적 관점에서의 선과 악은 모두 악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옥이라는 곳에 갇힌 인생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여 악을 씻고 선을 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주어진 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장에는 선한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어떤 문장에서는 악한 뜻으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소금’ 이라면 그 소금은 선한 의미에서는 어떤 것을 ‘가치 있게 하는 것’ 이라는 의미가 되지만 악한 의미에서는 ‘가치를 상실하게 하는 것’ 을 뜻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이다’ 이며, 후자의 경우는 ‘소금기둥’ 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서둘러 제자들을 건너편 벳새다(어부의 집)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무리를 보내시고 기도를 하시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날이 저물고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신 때에 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시니 역풍이 불어 제자들이 바다에서 힘겹게 노를 저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경(새벽 1시-3시) 쯤에 바다 위를 걸어서 배 있는 곳까지 오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유령이다!”
“여러분, 접니다. 안심하세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불던 바람이 멈추었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벌써 어제 저녁에 떡을 떼신 기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 위에서 벳세다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본래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곳’ 이라는 뜻입니다. 모두 사람을 낚는 어부이므로 어부의 집이면 그 어부들이 쉬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건너편’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가르치시던 곳은 세상이고, 그 건너편은 어부의 집이므로 건너편이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건너가서 게네사렛(왕의 정원, 앞마당) 땅에 배를 대었습니다.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보고 온 동네에 소문을 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병든 자들을 길가에 침상째 내어 놓고 예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렸고, 예수님이 지나가시면 옷 가에라도 손대기를 바라고 있다가 손을 대는 사람은 모두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 그렇지만 앞에서도 보셨듯이 아무나 손을 댄다고 나은 것이 아니라 병이 나을 것이라는 그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향 땅에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므로 권능(權: 권세 권, 能: 능할 능)을 행하시지 못했다고 하는 글을 앞에서 읽으셨으니 알고 계실 것입니다.
❉ ‘침상째 내어 놓고’ 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의 본뜻은 ‘자기가 세상에서 살며 마음에 병이 들게 했던 모든 잘못된 생각을 다 집어던지고’ 입니다. 어린이가 사는 집이나 학교, 친구들과 노는 놀이터, 학원 등 생활하는 모든 환경과 그 환경에서 가지고 있게 된 모든 생각들이 침상인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운 상태이니 ‘밤’ 이고, 밤에 거하는 곳은 잠을 자는 자리, 즉 ‘침대’ 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그 침상에서 가지고 있던 생각을 옆에 두고, 해뜨기 직전의 ‘새벽 별’ 이신 예수님의 ‘말씀’ 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 왕의 정원이란 ‘왕의 앞마당’ 이고, ‘성전의 앞마당’ 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셨을 때 알아보고 소문을 냈고, 또 모두 예수님 만나기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 물론 자기가 하나님을 바로 향하고 있지 못하다, 즉 성경의 핵심(核: 씨 핵, 心: 마음 심)인 하나님의 교훈과 도에 관하여 알지 못하므로 구원의 길을 잃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병이 낫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환자이지만 병 고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훈과 도’ 인 잠언과 전도서의 가르침도 모르면서 ‘나는 이미 구원받았어. 나는 죽으면 천국 갈 수 있어. 나는 이미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부자이고, 또 높은 사람이 되었어.’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전부 사단의 종이 되어서 사단에게 절하고 받은 것으로 배불러 하고 있는 중병에 걸린 사람들인데 정작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배부른 돼지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구원받지 못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온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