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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계’에 관한 소고(小考)
이 홍사
책상위의 손목시계를 집어 그윽한 눈길로 들여다본다.
현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와 이마에 땀을 훔치고 손목에 채인 땀을 닦느라 벗어둔 시계다. 역시 열대지방은 열대지방답다.
초침이 똑딱거리며 가는 그 멈춤의 짬을 본다. 이 짬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자랐고 또 똑딱거림의 연속으로 청춘이 갔다고 생각하니 초침의 똑딱거림이 새삼스럽다.
시계는 두 종류가 있다.
두 종류라고 하니 벽시계와 손목시계, 아니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차이가 아니라 초침이 돌아가는 방식의 차이를 지적하고 싶은 게다.
똑딱거리면서 매초마다 초침이 멈추었다가 가는 시계와 멈춤 없이 초침이 일정속도로 그냥 돌아가는 시계다. 일 분간 한 바퀴, 돌아가는 속도는 같은데 멈춤 없이 초침이 그냥 돌아가는 시계를 보노라면 비정하게 느껴진다. 나는 매초마다 초침이 순간적으로 멈추었다가 가는 시계를 선호한다. 그냥 초침의 멈춤이 없이 돌아가는 시계를 보면 왠지 야속하게 여겨진다. 그 잠깐의 멈춤이 시간이 잠시 멈추는 것 같은 착각이 일며 덤으로 얻어지는 짬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소 비약적인 표현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시계의 초침 바늘에 보이지 않는 밧줄로 목을 매고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줄을 맨 초침이 돌아서 목을 조이면 생을 마감한다. 밧줄의 길이와 목을 조이는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유한성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이건 시계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이고 건강한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기 위해, 제대로 된 시간을 알기 위해서 이런 시계가 필요하다.
시계하나 가지려고 목매던 시절이 있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중학에 입학하고부터 시계를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다. 오리엔트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형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형의 경우에 대입하면 나도 시계를 가지려면 몇 년은 기다려야 하는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어디에서나 시계를 볼 수가 있으니 굳이 손목시계가 필요가 없다. 그냥 엑스세리로 차고 다니는 경우가 태반이다. 차를 타면 차에 달린 시계가 있고 매일 손에서 놓지 않는 휴대폰을 열면 정확한 시간을 일러주는 시계가 메인 화면에 나타난다.
이 시대에 굳이 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일삼아서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시계를 차고 나니느냐고?
대답의 팔 할이 차지 않으면 손목이 허전해서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손목시계는 엑스서리에 불과하다. 차지 않으면 허전하고 버릇처럼 자꾸 왼쪽 손목을 들어서 보게 된다. 그때 시계가 없으면 순간적으로 낭패감이 살짝 인다. 그리고 걸으면서 팔을 흔들면 시계가 없으면 균형이 맞지 않는 것만 같다. 시계의 무게감이 오롯이 몸에 배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계가 이미 몸의 일부가 되었다는 얘기다.
시계에 대해서 얘기를 하니 어린 시절 내 초등학교 동기. 그러니까 끌깽이,
끌깽이?
참 오랜만에 쓰는 말이다. 지렁이를 우리 고장에서는 사투리로 끌깽이라고 불렀다. 그 끌깽이 아버지 김하선 선생님이 떠오른다. 녀석의 행동이 지렁이처럼 흐느적거리며 굼뜨고, 늦다고 끌깽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김하선 선생의 아들이다. 녀석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고 녀석의 엄마는 면소재지에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 입구에서 문방구를 하셨는데 김하선 선생님은 우리가 초등학교 삼학년까지 우리 학교에서 근무하시다가 사학년 때 면소재지 끝에 있는 북촌초등학교로 전근을 가셨다. 하여 아침마다 우리가 신작로 비포장 자갈길로 걸어서 등교를 하면 그 선생님은 우리의 역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올라오신다. 아이들은 모두가 인사를 한다. 그리고 뒤에 꼭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안녕하십니까?
오냐!
지금 몇 시입니까?
여덟시 오 분이다.
판에 박힌, 정해진 말이었다. 당시 베이비붐 세대들은 신작로가 복잡할 정도로 삼삼오오 모여서 걸어서 등교를 했다. 초등학교 교가에 이천 건아라고 했으니 교실이 모자라 저학년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뉠 지경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하선 선생님은 아침마다 한 이백 번 정도 시간을 말씀하시고 학교에 닿았을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물으면 선생님은 시계를 보지도 않고서 몇 시라고 말씀하신다. 방금 몇 발짝 앞서가는 무리에 시간을 일러주었으니 시계를 볼 필요도 없다. 앞서가는 친구가 물어서 그 소리를 뒤에서 들었음에도 우리는 또 시간을 물었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시간을 뒤에 오는 무리가 들었을 것인데 또 시간을 묻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렸다.
아이들은 시간이 궁금하지도 않다. 그래도 아이들은 줄기차게 묻는다.
안녕하십니까? 지금 몇 시입니까? 인사에 대답을 들을 틈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게 그 선생님에 대한 특별한 인사인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 선생님도 어지간하시다. 아이들이 그렇게 묻는데도 귀찮지도 않으신지 꼬박 꼬박 시간을 일러주시며 늦었으니 빨리 가라는 둥의 말씀을 하시었다. 그 생활을 북촌초등학교에서 다시 우리학교로 전근오실 삼 년 동안 그렇게 하셨다. 다시 우리 학교로 전근오시고 나는 곧 중학생이 되었다. 끌깽이도 같이 중학생이 되었다. 끌깽이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코를 흘리며 침을 물고 다녀 여전히 끌깽이로 불리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은 손목시계가 있었는데 나는 중학생이 되어도 시계가 없었다. 오리엔트나 시티즌 시계가 유행이었는데 당시에 시계는 엄청 귀했고 고가품이었다. 전당포에 잡힐 정도였으니 엄청 귀한 물건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늘린 게 시계다. 아무 편의점을 가더라도 패션시계를 단돈 만 원이면 마음대로 고를 수가 있다.
나는 중학생이 되어 시계를 산 것이 아니라 시계를 하나 만들었다. 그건 남자용 손목시계가 아니라 여자용 손목시계였다. 어머니가 차던 시계가 고장이 나서 장롱서랍에 넣어두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께 동의를 구하고 그 고장 난 시계를 얻었다. 어머니는 이미 다른 시계가 있었으므로 쉽게 얻을 수가 있었다.
-고장 난 시계를 뭐하려고?
-고쳐서 가지고 다니려고.
-여자시계인데?
-괜찮아요.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시간만 보면 돼요.
지금은 당연히 없어졌지만 당시에 면소재지에는 시계포가 둘이나 있었다. 그 시계포에 가져가니 기술자가 분해하더니 축이 부러져서 대구로 보내야 된다고 했다. 영악하게 안 고치겠다고 하며 받아서 바로 옆의 다른 시계포에 가져갔다. 다른 시계포에서도 분해를 하더니 똑 같은 말을 했다. 시계포 진열장 안에는 야광으로 보이는 손목시계가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 거의가 오만 원이 넘는 시계들이다. 그런 시계를 사달라고 부모님을 조르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똑 같은 대답을 들었으니 방법이 없었다. 대구까지 보내면 수리하는 데 기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다. 근 보름은 걸리겠다고 했다. 수리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지금도 그 수리비를 기억한다.
이천칠백 원.
수리를 맡겼다. 그리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에 중학생이 이천칠백 원을 모으려면 여간 힘 드는 게 아니었다. 학용품 사는데 아끼고 그것으로 될 것 같지가 않아서 들에 나가서 보리이삭을 주웠다. 토요일오후 일요일은 오전부터 저물도록 이틀을 주웠는데 거의 한 말이 넘을 것 같았다. 그 보리이삭 주운 것을 어머니에게 팔아달라고 했다.
-팔아서 뭐하게?
어머니에게 시계고치는 값이 이천칠백 원이라고 솔직히 얘기했다. 어머니께선 안타까우셨던지, 기특하게 보이셨든지 당신께서 그 보리를 이천칠백 원에 사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틀 후 이천칠백 원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보리 값은 천원 미만이었을 게다.
그 돈을 받아서 필통에 보관하다가 어느 날 하굣길에 시계포에 선금으로 먼저 주었다. 그리고 시계를 기다렸다. 보름이면 다 고쳐서 온다는 시계는 거의 한 달이 되어서 도착했다. 방과 후에 매일 시계포에 들러서 시계가 왔나 물어보는 게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기다림에 지친 건 나뿐이 아니라 시계포 기술자도 내 물음에 대답하기에 지쳤지 싶다.
그 시계가 내 손에 들어오던 날은 잊지 못한다. 고쳐진 시계를 받으며 ‘내 시계’라고 이름 지었다. 시계바늘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토록 신기했다. 그것도 남의 시계가 아닌 내 시계가 그렇게 움직인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며 백 번도 더 꺼내보았지 싶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식구에게 자랑을 했다.
보리이삭 주워서 시계를 이렇게 살렸다고.
저녁을 자시던 아버지는 멈칫하시고 시계를 보시더니 그대로 말없이 밥을 자셨고 어머니는 밥상머리에서 시계를 받아서 유심히 보시더니 남학생이 차기에는 너무 작다고 하시며, 남들이 흉본다며 어머니 시계와 바꾸자고 하셨다. 당시의 어머니 시계는 지금으로 보면 남녀공용, 요즘의 패션시계처럼 조금 컸다.
-그 시계는 비싼 거잖아? 잊어버리면 어떡하라고?
-손목에 차고 다니는 걸 왜 잊어버리니? 걱정마라. 미안하구나.
뭐가 미안하신지 의아했지만 주머니 속의 시계가 아니라 차고 다닐 수 있는 ‘내 시계’가 생긴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된 채로 밥을 먹었다.
다음날 시계포를 또 찾아가야 했다. 어머니에게 받은 시계의 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시계포 기술자는 내게 어떻게 생긴 시계냐고 자세히 묻고는 시계 줄을 공짜로 줄여주었다. 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시계가 아니라 팔목에 차는 시계로 만든 셈이다. 가끔 아이들이 그거 여자시계 아니냐고 하면 나는 말했다.
-21세기가 코앞에 닥쳤어. 요새는 이런 게 유행이란다. 이놈들아!
당시에 반 아이들 중에서 시계를 차고 다니는 아이들이 채 다섯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등교할 때면 초등학교로 거꾸로 올라오는 아이들이 나만 보면 물었다.
-형! 지금 몇 시예요?
-여덟 시 반이다. 빨리 가거라.
왼쪽 팔목을 건성으로 힐끗 보고는 김하선 선생님처럼 그렇게 여유롭게 외치고는 신작로를 따라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내려갔다. 당시의 그 초등학생들은 중학생 중에서 누가 시계를 차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만큼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계가 어떻게 없어졌는지 기억에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는 법이다. 그 소멸의 원칙을 따라 그 시계도 소멸되었지 싶은데 내 기억에는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 그 시계를 찼던 것 같은데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기억에 없다. 시간이 흐르니 시계가 덜 귀해졌다. 그만큼 보편화되었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다른 물가는 올라도 시계의 가격은 오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다음 기억에 남는 시계는 아버지의 손목에 있는 시계다.
군 시절 얘기다.
예비사단의 훈련소에서 주특기 없는 보병의 후반기 교육까지 받고 배치가 된 곳은 부산이었다. 해안경계병으로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전쟁이 나면 총알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는 말단 소총수다. 특별한 주특기가 없는 나는 관구사령부 보충대에서 일주일 대기하고 사단으로 넘어와 대기하고 연대로 넘어와 또 대기하고 우리 소대에 해안경계병으로 배속되기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아무도 눈독들이고 데려가지 않았기에 금쪽같은 보직이 나를 기다리는 줄 그때는 모르고 초조한 대기생활을 했던 것이었다.
해안경계병!
군기 빠지기 딱 좋은 곳이었다.
어느 주특기를 가지고 입대하더라도 그만큼 편한 자리를 찾기 힘들 것이다. 거기다가 단기사병이 있다. 소대의 궂은일은 단기사병인 방위병이 다하기에 소대에 배속되고부터는 빗자루 한번 쥐지 않았고 심지어 내 군화까지 내가 닦는 일이 없었다. 다 방위병의 일이었다. 그저 밥 먹고 야간으로 들어오는 방위병 하나를 데리고 경계근무를 서면 그뿐이었다. 거기다가 오전 시간은 취침이다. 소대에 배속되고부터 군사우편은 보내지 않는다. 가족적인 분위기인 소대의 선임들이 어느 방위병을 내 전속 보조로 지정을 해주었다. 그 방위병 집 주소로 편지를 받는 것이다. 방위병은 집에서 출퇴근을 하니 편지는 바로 다음날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보안검열을 거치지 않는 편지는 군사우편보다 빨리 오가고 부대의 위치며 부대에서 일어나는 온갖 말을 다 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내 동태를 낱낱이 파악하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예고도 없이 불쑥 초소로 면회를 오셨다. 부산의 친척 결혼식에 오셨다가 열차 시간이 남아 들리셨다는데 소대도 거치지 않고 내가 근무하는 해안초소로 곧 바로 찾아오신 것이다. 초소입구에 위병을 서던 방위병이 초소 안으로 모시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 나는 트레이닝 복장에 슬리퍼를 끌고 군용 팬티를 빨아서 널고 있었고 아버지는 양복에 카키색 중절모를 쓰고 계셨다. 아버지는 뵌 순간 나도 모르게 거수경례를 올렸다.
-군기가 바짝 들었구먼, 좋아!
아버지는 두어 시간 남짓 초소를 둘러보고 근무형태를 파악하고 취사병이 타다주는 커피를 마시고 가셨는데 나는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달라고 했다.
훈련소에 들어가면서 시계를 차고 갔었는데 각개전투 훈련을 받다가 시계의 줄이 끊어졌는지 어디서 흘렸는지 훈련을 받고 담배를 피우는 휴식시간에 손목이 허전해서 보니 시계가 없었다. 당시에는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다가 담배피우는 짬이 주어지던 시절이었다. 조교들이 ‘담배 일발 장진’이라고 외치면 ‘일발 장진’이라고 복창을 하고 모두들 담배를 꺼내 물었다. 또 조교가 ‘발사’ 라고 선창을 하면 ‘발사’라고 외치고 담뱃불을 붙이던 시절이었다. 훈련소에서는 시계가 없어도 무덤덤했는데 해안경계병으로 배속되어 근무시간에 시계가 없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 근무시간이 얼마나 더 남았는지 파악할 길이 없었다. 시계가 절실했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시계를 하나 사올걸 그랬다.
아버지는 고가의 손목시계를 풀어주며 말씀하셨다.
-첫 휴가 나가면 돌려드리고 하나 사죠.
그날 나는 책임 선임에게 잠깐 나갔다가 오겠다고 하고 근무지를 벗어나 아버지를 버스 타는 곳까지 바래다 드렸다. 나는 아버지의 시계를 빼앗아 차고 기차시간이 몇 시인지 아버지께 물었고 아버지는 지금이 몇 시냐고 나에게 물으며 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아버지를 보내고 생각하니 그날 시계가 더 절실한 건 아버지였다. 버스를 타고 부산역에서 시간에 맞추어 열차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가시려면 시계가 필요했을 것인데 그냥 풀어주신 것이다.
그 시계를 받은 기억만 있지 돌려드린 기억은 없다. 첫 휴가를 나와서 저렴한 시계를 사고 아버지의 시계를 돌려드렸는지 아니면 아버지께서 다른 시계를 사셨는지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그게 벌써 삼십 년이 넘었지만 시계를 풀어주시던 아버지의 얼굴과 누런 시계의 모양만은 눈에 선하다.
아니다.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그 시계를 돌려드렸다.
돌려드린 게 분명하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웅변이 대세를 이루며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웅변을 했던 나는 관구사령부 주최 멸공 웅변대회에 나갔다. 생각하니 내 주특기는 말단 소총수를 넘어서서 웅변에 유능한 연사였다. 웅변대회에 일등하면 포상휴가가 주어진다는 말이 이등병인 나를 유혹했다. 포상휴가! 달콤한 유혹이었다. 중대장에게 내가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느닷없는 요구에 나를 힐끗 쳐다보던 중대장의 눈빛이 기억난다. 중대장에게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웅변대회에 나가서 수상한 경력을 일일이 열거하고 중대 대표가 되었다.
경계근무를 서면서 웅변원고를 구상하고 매일 밤 경계근무를 서면서 퇴고와 탈고를 해서 어두운 밤바다를 향해 만장하신 여러 바다님! 을 속으로 외치며 억양연습을 수도 없이 했다. 연대 예선과 사단 예선은 장난에 불과했다. 나를 상대할 연사가 없어 가뿐히 통과하고 관구사령부 본선에 나갔다. 본선에 나가보니 허망할 정도였다. 연사의 실력들이 사단 예선보다 못했다. 연사인 내가 파악한 바로는 그랬다. 처음 보는 별 셋, 관구사령관, 중장이 무게를 잡고 앉은 연단에서 이등병이 갈고 닦은 웅변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그날 웅변은, 웅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본보기를 보여준 셈이다. 심사위원들은 관구 참모들로 모두가 중령, 소령이었다. 그만큼 많은 별과 무궁화를 입대하고 처음 보는 날이었다.
웅변이란 것을 오래 하다보면 내가 오늘 몇 등이라는 걸 연단에 서서 알 수가 있다. 그건 감으로 잡는다. 청중들이 눈에 쏙 들어오며 내가 외치는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는지, 청중들이 전율하는지 지루해하는지 감이 온다. 청중들이 눈에 쏙쏙 들어오고 전율을 느낀다고 파악되면 더 신이 나고 음성이 또렷해지며 연사로서 여유가 생긴다. 그날 웅변을 하면서 내가 일등이라는 예감할 수가 있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일등이었다. 그 결과를 안고 소대로 돌아오자 그날 경계근무는 열외가 되었고 사단의 정보참모로부터 직통비상전화가 걸려왔다. 당시에 정보참모는 중령이었는데 축하 전언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 관구사령부 하기식에 시상식이 있으니 복장을 깔끔하게 해서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시상식 일주일 전부터 선임들이 이발을 시켜주고 그야말로 손이 베일 정도로 군복의 날을 세우는 다림질을 직접 시작했고 군화는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정도로 광을 냈다. 매일 입어보고 시상식 연습을 했다. 그 다음 주에 별 셋, 관구사령관의 두툼한 손에 악수를 할 수가 있었다. 관구에서 시상식을 마치자 관구 사령부 마크가 새겨진 실크양장본으로 된 상장과 부상을 나를 데려갔던 사단 전령이 가지고 가버렸다. 이게 무슨 일이가 싶었는데 그 다음 주에 사단 하기식에서 또 시상식을 했다. 이번에 별 둘, 사단장과 악수를 했다. 그런데 상장과 부상을 또 연대 전령이 가지고 가버렸다. 웅변은 한 번 일등을 했는데 시상식은 관구, 사단, 연대, 세 번이나 했다. 시상식이 있는 날마다 나는 근무 열외가 되는 특혜가 주어졌다. 부상이 뭔지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몰랐다. 거의 한 달에 걸쳐 시상식이 끝나고 내 손에 들어온 상장과 부상을 선임들과 볼 수가 있었다.
부상은 손목시계였다.
시계 뒷면에 2관구 사령관 중장 아무개라고 새겨진 손목시계인데 그 고동색 실크로 만들어진 케이스가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그 상을 받고 아쉽게도 포상휴가는 나오지 못했다. 이유는 이등병, 입대한지 육 개월 미만이라는 사유 때문이었다. 나는 ‘내 시계’가 생겼으므로 실크 양장본으로 된 상장과 그 시계 케이스에 아버지께 빼앗아 차고 다니던 시계를 넣어 넣었다. 포상휴가를 못가는 이유를 한통의 편지로 써서 상장 사이에 끼우고 포장을 해서 내 전속 방위병에게 집으로 소포로 보내라고 일렀다.
아무튼, 아버지의 시계를 그런 방법으로 아버지께 돌려드렸고 나는 연대 웅변대표가 되어 제대할 때까지 웅변대회만 있으면 연단에 섰다. 나를 대적할 연사는 없었다. 전역할 때까지 그랬다. 하지만 포상휴가는 단 한번 나왔다. 포상휴가가 위수지역 교대 사이에 있는 정기휴가와 이상하게도 겹쳐졌기 때문이다.
전역할 때까지 시계를 두 개나 받았다. 사령관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관구사령관 중장 아무개라고 새겨진 손목시계였다. 나중에 받은 시계는 먼저 전역하는 어느 선임에게 선물로 줘버리고 그 이등병시절 부상으로 받은 ‘내 시계’를 내가 전역하고도 한참이나 차고 다녔다.
결혼식 예물에 시계를 받지 못했다. 아니, 받지 않은 것이다.
결혼 예물 명단에서 내가 빼라고 했다.
전역하고 등록만 해놓은 지방 따라지대학을 포기하고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중동의 건설현장으로 나가기 위해 포클레인 기술을 배웠다. 조수로 들어가서 삼 년을 배우고 나니 중동이란 곳은 고생만하지 큰돈 만지기에는 이미 시들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한마디로 ‘한물갔다’는 얘기다. 국내에 눌러앉아 기사노릇을 하며 돈을 모으는 방법 밖에 없었다.
결혼 예물 명단에서 시계를 빼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에 드물게 포클레인 기사였던 나는 이미 결혼 예물로 오는 시계의 가격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명품 오메가 시계를 차고 있었다. 당시의 가격으로 따지면 두 달 월급과 맞먹는 고가였다.
그 시계의 출처도 짚고 넘어가자.
포클레인을 끌고 청송의 어느 과수원 개간 작업에 들어갔다. 과수원에 붙은 야산 사서 계단식으로 과수원을 확장하는 일인데, 야산 하나를 완전히 과수원으로 만드는 당시 시골사람으로서는 야심찬 공사였다. 시골 공사로는 꽤 오래 걸려 거의 보름을 했었다. 당시에는 포클레인이 귀해서 시골에서 포클레인이 쓸 일이 있으면 마을에 중장비 쓸 사람을 모아서 공동으로 한 번 불러 사나흘 하는 게 보통인데 그 과수원은 단독으로 불렀다. 공교롭게도 과수원 주인이 청송 읍내에서 귀금속센터를 크게 하고 있었다. 그 가게에 딸린 골방에서 숙식이 제공되고 아침이면 사장인 과수원 주인이 당시에 고급승용차인 로열 살롱으로 현장까지 모셔다주고 점심을 가지고 오곤 했다. 거기에서 그 시계를 구했다.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다.
정해진 시간 이외에 내 아이디어로 야간작업을 해준 대가로 취한 것이다.
야산은 가시넝쿨과 잡목이 무성했다. 개간을 해나가며 그 뿌리와 넝쿨을 뒤로 던져 모았는데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과수원 주인은 그 처리를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모아두었다가 마르면 불을 질러 태우면 어떻겠냐고 어느 날 싸온 점심을 먹으며 마주앉은 내게 물었다. 그건 산악지방에서 위험한 일이다. 가외시간에 그 산더미 같은 넝쿨을 축대 부근에 파고 나누어서 골고루 묻으면 소나기가 와도 흙이 쓸려가지 않고 배수가 잘된다는 안을 내가 내놓았다. 점심을 먹다가 그 말을 듣고 옆에 앉은 내 무릎을 쳤다. 그걸 왜 이제 얘기 하느냐는 말이다. 과수원 주인은 그 처리 문제를 놓고 꽤나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주는 대가로 귀금속센터의 시계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갖기로 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과수원 주인도 점심을 먹으며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일을 마치고 야간작업으로 하루에 두 시간씩 일주일을 하니 그 뿌리와 넝쿨을 흙으로 된 축대 보강 대용물로 모두 묻을 수가 있었다. 마지막 묻은 날 저녁에 귀금속센터로 돌아와서 진열장에 진열된 시계 중에서 눈독을 들이던, 시계바탕이 하얀 오메가를 꺼내 들었다. 오메가는 그 진열장에 하나밖에 없었다. 점포를 보는 시계기술자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사장인, 과수원 주인은 그 시계만은 안 된다고 했다. 진열장에는 오리엔트. 시티즌, 라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 시계가 아니면 그날 점심 먹으며 한 합의는 없던 걸로 하자고 했다. 시계는 이미 내 손목에 차고 있었다. ‘내 시계’가 되었다.
-이건 ‘내 시계’에요. 내 시계!
‘내 시계’라고 이름을 붙이자 얼굴이 벌게진 주인은 한숨을 두어 번 쉬더니 방법이 없었던지 가지라고 했다. 대신 마무리 일은 깔끔하게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날 저녁 귀금속센터 옆 포장마차에서 과수원 주인이 사주는, 장어구이에 소주를 한잔하며 시계 가격을 슬쩍 물었더니 당시의 내 두 달 월급과 맞먹는 고가였다. 그 가격을 알고 나도 놀랐다. 이런 고가의 시계가 이런 시골 읍 소재지에서 팔리느냐고 물었더니 손님들이 다른 시계가 비싸다고 하면 더 비싼 시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 들여놓은 거라고 했다.
그 시계가 손목에 있는 이상 결혼 예물로 오는 시계가 필요 없었다.
오메가라고 평생 차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품은 달랐다. 싫증나지 않고 상당히 오래 차서 내 기억에 그 시계의 모양과 형태가 선명하다. 내가 포클레인 차주가 되어서도 차고 다녔다. 그 시계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기억에 없는데 큰 애가 중학교 다닐 적에 나는 수술을 했다. 중장비 기사의 직업병인데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게 치질수술이었다. 지금은 장비가 좋아져서 에어컨이 빵빵하고 나오고 달라졌지만, 치질은 오래 묵은 중장비 기사의 직업병이다. 객지 생활을 할 적에 제대로 씻지 못하고 선풍기 하나 틀어놓고 하루 종일 유압의 열기가 나는 조종석에 앉아 있었던 까닭으로 치질이 없는 기사는 진정한 기사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할 정도다. 중장비 기사들 사이에는 치질이 그 만큼 성행했다.
수술을 했는데 의료보험이 적용되어서 수술비는 몇 십만 원에 거쳤지만 뭉칫돈이 내 계좌로 들어온 것이다.
-이게 웬 돈이야?
알아보니 언젠가 우체국에 다니는 친구가 좋은 상품이라며 건강보험을 하나 넣으라고 추천해서 넣은 적이 있다. 매달 한 달 담뱃값정도가 내 계좌에서 자동으로 출금되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아내가 수술증명서를 체신보험 보상과에 끊어 넣은 것이다. 그 보험은 특이하면서 우량종이었다. 수술이라면 무조건 삼백만 원씩 나오는 것이다. 암수술이든 치질수술이든 똑같은 액수가 나온단다. 몇 번을 타먹어도 만기가 되면 넣은 액수가 고스란히 나온다고 했다. 이 공돈으로 무얼 할까? 궁리하니 아내는 금시계를 하나 하라고 했다. 금시계? 아내는 내가 수술하면 보상금을 받아서 그걸 하겠다고 생각해 두었던 것처럼 서슴없이 말했다. 오메가가 없어지고 나는 아는 후배에게 중고로 얻은 시계 바탕에 국회의원 아무개라고 쓰인 싸구려 시계를 차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는 시계에 대한 애착도 없었다.
금시계에 대해서 아내가 설명을 했다. 18K로 시계 줄을 만든 것인데, 시계는 적당한 것으로 하고 줄은 금으로 된 것을 말하며 그걸 찰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니아가 시계를 골라서 차나? 의아했다. 아내는 시계가 고장 나도 줄 값이 있으니 그 값을 항상 지니며 공으로 차고 다닌다고 했다. 아내는 시내에서 아는 언니가 하는 금방에서 보아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데 마다할 구실을 찾기 힘들다. 그렇게 하라고 하고 잊고 있었는데 사흘 후에 아내는 금시계를 가져왔다. 말이 금시계지 시계는 금이 아니었다. 겔럭시 금테가 둘린 시계에 금줄인데 줄에 보석이 박힌 것이다. 시계의 가격보다 18K로 만들어진 줄 가격이 대여섯 배나 비싼 물건이었다. 그걸 한 이 년 정도 차고 다니니 오메가와는 달리 싫증이 났다. 아무리 차도 ‘내 시계’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줄이 너무나 뻑뻑해서 불편한 점도 있었다. 헌데 시계 배터리가 다 되어서인지 가지 않는 것이다. 잘 됐다 싶었다. 그걸 안방 문갑에 던져두고 차지 않으니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왜 시계를 차지 않느냐고, 배터리가 다 되었고 금으로 된 줄이 너무 뻑뻑해서 싫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아내가 그걸 들고 있던 핸드백에 넣었다. 그걸로 금시계가 끝인 줄 알았다.
헌데, 일주일 쯤 지나니 아내가 전혀 다른 시계를 내놓았다. 한눈에 얼른 보아도 고가는 표시가 난다. 내 눈이 휘둥그레졌던가. 이게 웬 거냐고 물었다.
-금시계가 이래서 좋은 거예요.
말을 하며 아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우쭐거렸다. 시계도 바뀌었고 줄도 바뀌었다. 시계는 금테가 둘린 겔럭시 사각형 하얀 바탕이고 줄은 로렉스 금딱지 스타일이었다. 비싼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아는 사이라 헌 시계를 주고 수공비로 웃돈 조금 들었다고 했다.
그걸 다시 ‘내 시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 시계 줄은 손목에 착 감기며 착용감이 좋아 싫증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손목에 없으면 허전하다. 꽤 오래 찼다. 오래차고 다녀도 늘 그 값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니 부담이 없고 오히려 즐겁다. 그 시계를 차고 다니며 해외사업을 한다고 중고 중장비를 사서 몽골로 보내며 칠 년이나 고비사막을 들락거렸고 미얀마에 일을 벌인 지금까지 차고 다닌다. 아니다. 줄은 그대로인데 시계는 바뀌었다. 중간에 테러를 당했다. 지금은 제 길을 갔지만 당시에 데리고 있는 강 부장은 이른바 당구장 테러라고 명명하는 사건이다.
작년여름, 비 오는 날 무료해서 들린 당구장에서 싸움을 말리다가 성질 더러운 놈이 휘두르는 큐대에 내 손목이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시계에 정통으로 맞았다. 시계가 방패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손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시계는 거꾸로 휘면서 박살이 났고 손목은 조금 부었다.
화해하는 술자리에서 부은 손목을 보여주고 부서져서 너덜거리는 시계를 성질 더러운 놈에게 보여주었더니 제 손목의 시계를 풀어주며 세상에서 제일 귀한 시계라고 했다. 받아서 보니 가죽 줄로 된 시계인데 시계바탕에 봉황 두 마리가 그려진 시계였다. 이거 어디서 났어? 청와대에서 받은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질 더러운 놈이 청와대에 직접 들어갔을 리는 없고 뒤로 흘러나온 시계임이 분명했다. 시계뒷면에는 누리스타라고 새겨진 것이었다.
술자리에서 그 시계를 차고 부서진 시계는 주머니에 넣어 돌아오면서 한인 슈퍼에 들러 물파스와 부기에 좋다는 연고를 사서 숙소에 들어와서 물파스를 바르고 화끈거리는 손으로 인터넷을 켜고 누리스타를 찾아보았다.
누리스타를 검색하니 현직 여성 대통령의 사진이 맨 먼저 떴다. 오래 보고 싶은 사진이 아니었고 어디서 따온 이름인지 알 필요도, 더 검색해볼 필요도 없었다. 청와대에서 나온 물건이니 아주 싸구려는 아니니 아쉬운 대로 차고 다니면 되는데, 시계 줄이 문제였다.
차고 다니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십상인데, 줄이 더 비싼 것인데, 중얼거리며 시계 줄을 꺼내 책상에 얹어놓고 그 시계를 풀어서 맞추어 보았다. 얼레! 어지간히 비슷하게 맞을 거 같았다. 돋보기를 끼고 더 자세히 맞추어 보았다. 잘하면 끼울 수가 있을 거 같았다. 줄을 잊어버리지 않고 한국에 들어가서 부서진 것과 같은 시계를 구입하려고 생각했던데 꼭 그럴 필요도 없을 거 같았다.
시계와 줄을 들고 슬리퍼를 끌고 숙소가 있는 아파트 상가로 내려갔다. 상가 한쪽 귀퉁이 유리부스 안에 통나무로 허술한 작업대를 만들어놓고 안경과 지퍼, 시계를 수리하는 곳을 보서 알고 있던 터였다. 기술자는 수염을 기른 인도계 노인인데 가져갔더니 다 분해하여 고성능 돋보기를 한쪽 눈알에 끼우고 맞추어보더니 서랍에서 금강석 조각을 꺼내 문지르며 금줄의 귀퉁이를 살살 갈아내며 다듬었다. 두껍고 투박한 손으로 또 맞추어보고 또 정교하게 갈아내는 걸 보며 이 시계는 ‘ 내 시계’가 아니다. 분명 ‘내 시계’가 아니다. 언젠가는 금딱지 로렉스를 ‘내 시계’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문득하면서 하나의 로렉스 시계를 떠올렸다.
그건 몽골에 있을 적에 거래처인 레미콘회사의 여든이 다 된 회장이 차고 다니던 오래된 구형 로렉스였다. 하도 오래되어 보이고 좋아보여서 몇 년이나 찼냐고 물어보았다. 근 사십 년이 넘었는데 시계포에 고치러 한 번 가지 않았고 당시의 논 서 마지기 값을 주고 샀다는 말을 들었다. 사십 년이란 세월에 놀랐지 가격은 무덤덤하게 들었다. 그 말을 듣기 전에 이미 인천공항에서 탑승시간을 기다리다가 로렉스 매장에서 아이쇼핑을 하며 값을 확인했다. 비싼 것은 어지간한 포클레인 한 대 값과 맞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렉스가 세계적인 명품이 된 사연도 그 회장에게 들었다.
19세기 초, 영국의 어느 배가 바다에 침몰되었는데 근 백 년이 지난 후에 로렉스 시계가 배가 침몰된 바다 밑에서 발견된 것이다. 시계는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고 역시 똑딱거리며 정확하게 시간이 맞았다고 했다. 로렉스는 태엽을 감거나 배터리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흔들리면 자동으로 태엽이 감아지는 구조인데 물결에 흔들려 근 백 년 간 시계가 바다 밑에서 째깍거리며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명세를 탔다고 하며 시계를 벗어 바지 허벅지에 닦던 그 회장의 누런 로렉스가 눈에 어른거린 것이다.
그날 인도계 노인이 정성들여 시계 줄을 수리하는 걸 보면서 언젠가는 금딱지 로렉스를 ‘내 시계’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어린날 보리이삭을 줍는 심정으로 로렉스를 ‘내 시계’로 만들겠다고.
고성능 돋보기를 한쪽 눈에 끼었다가 뺐다가하며 시계 테가 닿는 모서리를 금강석으로 정교하게 갈아내고 또 맞추어 보고, 너덧 번 그렇게 하더니 어느 순간 누리스타 시계에 금줄을 끼워 넣었다. 감쪽같았다. 아내에게 보여줘도 모르고 넘어갈 정도로 딱 맞았고 완벽했다. 인도계 노인은 시계를 건네며 됐냐고 물었고 진짜 금이 맞느냐고, 오리지널 골드? 라며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수리비는 놀랍게도 단돈 천 원이었다. 이발요금이 칠백 원이니 마냥 싼 것도 아니다. 수리비를 받으며 당신 시계가 맞느냐고 물었다. 나는 ‘내 시계’가 될 로렉스가 떠올라 잠시 생각하다가 이건 아니라고 하며 고개를 흔들고는 안경닦이로 정성스레 닦아주는 시계를 받아서 나왔다. 그게 작년여름이었다.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켜두었더니 땀이 어지간히 말라간다.
팔뚝에 마른 소금기가 어른거린다. 오늘 이 나라는 낮 기온이 사십 도가 넘었다. 시계를 찼던 손목은 유독 땀이 많이 찼던지 불어서 허옇다. 손목의 냄새를 슬쩍 맡아본다. 시큼한 땀 냄새다. 이젠 들어가 씻으면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초침에 주고 있는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이 똑딱거림으로 청춘이 갔고 이 똑딱거림의 연속으로 황혼을 맞을 것이고 역시 이 초침이 파장을 일으키는 물결에 밀려 결국은 숟가락을 놓게 될 것이다. 너무나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초침이 매정하게 여겨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확히 움직이는 초침 속에는 질서와 혼란이 공존하는 모양이다. 너무 정확해서 혼란스럽다. 이 똑딱거림의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전쟁을 치루고 있을 것이다. 인간 내면과의 전쟁, 욕망과의 전쟁? 가만히 생각하니 ‘내 시계’로 만들겠다는 로렉스에 대한 나의 다짐도 부질없는 욕망이다.
그런 물질적인 욕망과의 전쟁이 아니라면 인간 존재가 유한하다는 사실과 일회성이라는 원칙을 거부하는, 어리석고 무모한 심리전을 누군가 치루고 있을 것이다. 이 똑딱거림의 물결에 몸과 마음을 싣지 못하고 초침을 묶어두고 싶어 하는 부질없는 작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벗어버리자, 무모한 욕망을.
초침의 움직임, 정해진 간격의 이동. 너무나 정직해서 혼란스럽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정말이지 혼란스럽다. 이젠 씻어야 되는데........ 혼란스러운 머리를 흔들며 ‘내 시계’를 더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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