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靑蓮)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은 조선 중종 15년 경상도 함양에서 현감을 지낸 연안이씨 이국형과 나주 임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후백은 어린 나이에도 부모의 상(喪)을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상례대로 치러 집안의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어느날 집안 어른이 나이 어린 후백에게 그의 사람됨을 시험코자 단술을 권하자 어린 후백은 “비록 단술일지라도 ‘주'(酒) 자가 붙은 이상 상주(喪主)가 감히 술을 마실수는 없다”고 단호히 거절해 비범함을 보여주었다고 전한다. 15세에 향시(鄕試)에 장원(壯元)으로 입격해 한양에 올라와 여러 스승들을 찾아 학문을 배웠다. 16세에 전라도 가정형편으로 강진으로 이주했고, 21세때는 홍씨와 결혼했다. 강진에 거처하면서 석천(石川) 임억령(1496~1568),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 사암(思庵) 박순( 1523~1589), 고봉(高峯) 기대승(1527~1572) 등 당대의 유명한 호남 문인들과 두루 교유했다. 특히 장성 출신 하서 김인후를 매우 존경했다. 20대에 진사과에 장원하고 35세인 1555년(명종 10년) 식년시 을과로 급제하여 정7품 승정원 주서로 벼슬을 시작했다. 이후백은 시학(詩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고, 성리학(性理學)에도 조예가 매우 깊었다. 고봉 기대승, 미암 유희춘은 절친한 그의 글 친구였다. 이후백은 38세 때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1558년(명종 13)에는 호남암행어사로 발탁되었는데 그의 엄하고 강직한 성품이 호남고을에 소문이 나서 미리서 지레 겁을 먹고 스스로 사직(辭職)하고 떠난 탐관오리가 여러 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 사치와 재물을 멀리한 채 근검절약을 생활화했다. 대과에 급제해 고향에 성묘차 들렀을 때 어려서 함께 공부했던 옥계(玉溪) 노진(1518~1578)이 지례 현감으로 있었다. 그는 친구 노진을 만난 뒤 '지례 현감 옥계 노진에게 주다’라는 시(詩) 한 수를 지어 선물했다. “말 한 필에 따르는 아이 하나, 내 모습 초라하여/ 관리들 나를 보고 배 따는 일꾼이라 잘못 아네/ 누가 알았으랴 명광궁에 시부(詩簿) 바쳐/ 머리에 어사화 꽂고 오색 향기 드날릴 줄.” 이후백은 청빈(淸貧)이 몸에 늘 배어 있었기에 명종 임금에게도 거침없이 직언(直言)을 했다. “나라의 왕이 된 사람은 세금 걷는 액수가 적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민심을 잃을까 근심해야 합니다. 지방 수령들이 사사로이 헌납(獻納)는 것은 탐관오리들이 백성의 피를 긁어모아 일부를 임금에게 상납하는 것이니 그대로 받아 들이면 나라는 병들고 원망의 소리는 임금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나라는 물질적인 이득으로 이익을 삼지 않고 의(義)로써 이익을 삼아야 합니다.”라고 의연하게 상소 했다. 1575년(선조 8), 이후백은 변방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부임하자 마자 백성을 위해 세금과 부역을 대폭 감면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철저히 척결해 백성들의 고질적 고통을 덜어 주었다. 관찰사가 세금을 지나치게 감면하는 바람에 함경 감영의 창고가 텅텅 비게 되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2년 뒤, 1577년 10월, 이후백이 정2품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영전 해 한양으로 떠나자 함경도 백성들은 크게 아쉬워했다 한다. 선조실록에는 '이후백은 청렴 근신하고 밝게 살피어 시정(施政)에 조리가 있었고, 고을을 떠난 뒤에 백성이 그의 선정을 사모해 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고 적혀 있다.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에서 물러난지 8년 뒤 함경도 암행어사 허봉(許葑)이 함경도를 암행순찰 했을 때 길에서 만난 백성들마다 이후백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이이 율곡도 “이후백은 벼슬에서 직무를 다하고 몸 단속을 청간(淸簡)하게 하였으며, 지위가 육경(六卿) 까지 이르렀으나 빈한하고 소박하기가 유생(儒生)과 같았다. 또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그 결백함에 탄복하였다.”고 후백을 칭송 했다. 또한 이후백이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중인 1576년, 함경도 삼수 동구비보권관 여해(汝海) 이순신(李舜臣)이 여진족의 침범을 막는데 그 소임(所任)을 다하고 활쏘기 실력이 뛰어나 관찰사 이후백에게 칭찬을 자주 받았다. 비록 초급장교였으나 매사에 빈틈이 없고 무관으로서 기본이 갖춰진 이순신을 관찰사 이후백은 바로 알아 보았고 이순신도 이후백을 존경했으며 공직자(公職者)의 모델로 삼았던것 같다. 청렴강직한 관찰사 이후백의 성품이 초급장교 이순신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던것 같다. 1580년 7월, 이순신은 전라도 고흥 발포만호로 영전했는데, 당시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라고 명했다. 이순신은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키워 온 나무를 하루 아침에 벨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단호하게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의 청을 거절했다. 이는 이후백의 청렴과 강직함을 그대로 본 받은 보기드문 행동이었다. 이후백은 영호남과 서인, 남인 간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파벌을 없애고 국론을 통합하기 위해 애썼다. 을사사화 후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원칙을 제시하며 붕당(朋黨)이 당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위해 앞장 섰으며 이후백이 사망하자 뜻있는 관료들은 이후백이 좀더 살았더라면 조선의 사색당파(四色黨派)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크게 아쉬워 했다. 그는 영남출신이면서도 호남출신인,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大家) 면앙정 송순을 스승으로 극진히 모셨다. 면앙정 송순(1493~1583)은 50여 년 관료 생활 중 권신(權臣)들이 나라를 어지럽히자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전라도 담양으로 내려가 정자 면앙정 (勉仰亭)을 짓고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탐구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보냈다. 송순이 87세 되던해에 송순의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방연(回榜宴)이 면앙정에서 열렸다. 전라 관찰사를 비롯해 호남의 문인 100여 명이 모인 큰 잔치였는데 송순이 정자에서 내려올 때 제자인 정철, 임제, 고경명, 이후백이 손으로 가마를 만들어 스승 송순 대감을 메고 언덕길을 내려왔다. 스승을 예(禮)로 모신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이후백은 1577년(선조10) 정2품 이조판서가 되어서도 권력자의 인사 청탁이나 위세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율곡은 “이후백 같은 공정한 마음은 비할 사람이 없다”며 이후백의 청렴결백을 높이 평가했다. 그렇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가장 공정하게 인사를 한 이조판서로 이후백을 꼽는다. 이후백은 50세에 도승지가 된 후 선조의 어명을 받아 유희춘이 지은 국조유선록의 서문을 작성해 사화로 죽임을 당한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이 이룩한 도학의 계통을 확립시켰다. 1575년(선조8년), 명종비 인순왕후 국상 때에는 을사사화 공신 지위를 박탈하는 선조의 교서를 훌륭히 작성해 을사사화때 무고하게 피해입은 자들을 모두 복권케 하는 정치적 역할도 해냈다. 항상 옳은일을 자처한 소신을 가진 정치가였고. 모든 당쟁의 시작은 인사(人事)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인사권을 공정하게 행사해야 함을 한결같이 강조했고 시행 원칙을 고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백이 1578년 사망한 후, 조선정치사에서 고질적인 병폐였던 조정의 당파싸움은 걷잡을수 없이 심각해졌고 조선 조정은 외세의 침략을 미리 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야 했다. 당시 이후백을 따랐던 관리들이나 백성들은 “청련 이후백이 살아 계셨다면 당쟁이 이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의 말이 곳곳에서 흘러 나왔다 한다. 이후백은 문장(文章)이 뛰어났고 한시(漢詩)의 대가였다. 정조대왕 문집 홍재전서에도 이후백을 문장으로 이름난 관료로 거론했고 우암 송시열도 “명백하고 통쾌한 문장으로 의지와 기개에 큰 감동을 주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후백은 가사문학 대가인 면앙정 송순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퇴계 이황(李滉)과도 학문을 논했고 기대승, 고경명, 임제, 정철 등과도 글벗으로 친하게 지냈다 이후백은 사후 12년 뒤, 1590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해결한 공로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추봉(追封)되었다. 종계변무는 명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이자 친원파인 이인임의 아들이다’라고 200년 동안 잘못 기록됐던 것을 바로잡은 것을 말한다. 이후백은 청백리에 녹선(祿選)되었는데, 당대의 관료들은 이를 최고의 영예로 여겼다. 청렴, 강직한 관리를 선발하여 표창하던 제도가 청백리 녹선이였다. 조선의 청백리는 226명이요. 전기156명, 후기에는 66명이 배출 되었다. 청렴이란 자기재물을 아끼는게 아닌, 공물(公物)을 아끼는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청렴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대체로 선비정신을 지키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며, 몸가짐을 조심하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던것을 높이 평가했다. 청백리(淸百吏)들이 불문율(不問律)로 삼았던 원칙이 있는데 바로 '사불삼거(四不三拒)'다. 사불삼거는 4가지를 해서는 안 되고, 3가지는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렴을 덕목으로 삼았던 관료들은‘사불삼거’를 불문율로 삼았다. 즉, 고위 공직자가 공직에 있을 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와 꼭 거절해야 할 세 가지를 압축한 말이다. 사불삼거는 다음과 같다. 사불(四不)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로 부업(副業)을 하지 않을 것, 땅을 사지 않을 것, 집을 늘리지 않을 것, 부임지의 명산물(名産物)을 먹지 않을 것이며 삼거(三拒)는 거절 해야 할 세 가지로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 거절, 청(請)을 들어준 것에 대한 답례 거절, 자신의 경조사의 부조(扶助) 거절을 들고 있다. 예나 제나 청백리 정신의 사불삼거의 정신은 공직자들이 지켜야할 금과 옥조의 정신적 유산이다. 1988년, 인사청문회 제도가 만들어 진 후, 고위공직자의 인사청문회가 국회에서 계속 열리고 있다.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처음은 온 국민들이 큰 기대속에 관심을 갖고 지켜 보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관심이 점점 멀어진채 일부 국민들은 고위범죄자 청문회를 보는 듯하다고 꼬집기도 한다. 우리 국민들은 도무지 상상도 못할 개인정보들을 어떻게 알았는지 근거자료를 제시하며 날카롭게 공격하는 측과 기기묘묘한 논리로 변명하며 비호하는 모습들은 세상이 바뀌어도 똑같이 재연되고 있다. 공직자에게 과도한 윤리나 그 가족들까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러나 고위공직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국회청문회에서 보여준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논문표절, 병역기피, 주가조작, 부정청탁, 금품수수, 세금탈세 등 특혜에 온갖 비리의 작태들의 그 사실들을 지하에 계신 청련 이후백이 아셨다면 벌떡 일어나 호통을 치며 곤장을 쳤을것이다.
[약력] 월봉 김오준 금정면 출생. 현대문예 회원. 영암학회 회원. 광주시인협회 회원. 광주문인협회 이사. 한국지역문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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