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의 신분제도는 귀족과 평민과 천민으로 나뉘어진다.
귀족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 계급이고,
평민은 나라와 귀족에게 토지를 받아서 농사를 지으며
병역, 납세 등의 의무를 졌다.
천민인 노비들은 전쟁의 포로나 죄를 지은 사람,
그리고 남의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속해 있었다.
고구려의 주요 연중행사로는 '동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추수감사의 제사로서 10월에 행하여 졌다.
▷삼국 중에서 두드러지게 용맹스러운 고구려인들은 무예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때문에 해마다 3월 3일에는 사냥으로 무예 솜씨를 겨루었다.
고구려인들의 생활은 검소하고 깨끗했다.
이들은 추운지방에 살기 때문에 온돌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고구려의 남자 어른들은 상투를 틀었다.
벼슬을 한 귀족들은 양쪽에 깃털을 꽂은 모자를 썼다.
여자들은 대개 주름치마를 입고 생활하였다.
백제에서는 처녀들이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다가, 시집을 가면 머리 위에 틀어 올렸다.
신라에서는 골품제도와 신분에 따라서 집의 크기, 옷차림, 심지어는 사용하는 그릇까지 달랐다.
8월 '가위'는 신라의 대표적인 명절이다.
오늘날 추석 명절인 '한가위'는 신라의 '가위'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에서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며, 이것을 중심으로 사회가 이루어졌다.
다음으로 어업이 성했고, 목축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경제 생활이 향상되었다.
고구려에서는 오곡(다섯 가지의 곡식)을 농사지었다.
그 중에서 조 농사의 수확이 많았고, 벼농사는 삼국 중에서 가장 낮았다.
이것은 지리적으로 북쪽의 추운 지방과 산악 지방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소·말·돼지 등의 축산업이 성했다.
백제에서는 논을 많이 만들어 벼농사를 많이 지었다.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라!"
백제의 구수왕 9년에는
나라 안의 여러 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두어 놓았다가, 필요한 때 농사를 도왔다.
신라에서도 또한 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때문에 저수지뿐만 아니라, 홍수에 대비하여 제방도 튼튼히 쌓았다.
"소를 이용하여 땅을 갈아라!"
신라의 지증왕 때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땅을 갈았다.
눌지왕 때부터는 소가 끄는 수레를 이용하였다.
바다와 접해 있는 신라는 어업도 발달하였다.
삼국에서는 수공업이 발달하여 경제 생활에 큰 역할을 하였다.
수공업 제품은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고구려는 목기(나무 제품), 나물 따위를 담는 초구, 토기와 금속기, 그리고 직물이 발달하였다.
백제는 옷감을 짜는 직조와 금속, 도기의 수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신라는 직조, 금속기 이외의 특히 사치품의 장식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고구려의 호구세는 민호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서 곡식으로 세금을 받았다.
고구려에서는 '인두세'라는 것이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식구 수에 따라 곡식으로 세금을 바치는 제도이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세금을 적게 받았다.
"매우 가난한 백성은 3년에 한 번씩 1필을 내라."
고구려 고국천왕 16년, 재상인 을파소는 '진대법'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봄에 곡식을 빌려 가고, 가을에 갚으시오."
이것이 진대법이다.
진대법은 그 뒤 가난한 백성들을 돕는 여러 가지 제도의 본보기가 되었다.
백제에서는 쌀과 명주와 베 등을 일반 농민들이 세금으로 내도록 하였다.
신라에서는 농산물 이외에도 노동으로 세금을 바치도록 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고리 대금업이 성행했다.
귀족들이 돈을 꾸어 주고 이자를 높이 쳐서 받았는데,
만일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가 되어야 하는 좋지 못한 점도 있었다.
삼국 시대에는 무역도 이루어 졌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 및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하류를 점령하면서
수나라, 당나라와 무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 무렵의 수출품은 마직물, 금은 세공품, 인삼 등이었고,
수입품은 견직물과 귀족들의 사치품, 서적, 무기 등이었다.
고구려는 초기에 북조의 전진과 무역을 하였고,
장수왕 이후에는 북조의 북위와 남조의 송나라, 그리고 북방 민족과도 무역을 하였다.
삼국의 문화는 그 지리적 특성과 고유한 민족성에 따라 각각 독특하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불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었다.
힘이 넘치고 웅장하며 건실한 고구려 문화, 온건하고 우아하며
섬세한 백제 문화, 귀족적이고 화려한 신라 문화가 그 특징이다.
특히, 신라문화는 초기에는 소박하고
후기에는 현실적이며 온화하면서 화려하게 발달했다.
그것은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뚜렷이 변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삼국시대에는 금속문화와 더불어 전해진 한자가 널리 사용되었다.
▶원효대사와 요석 공주사이에서 태어난 설총은 '이두'를 정리하였다.
이두는 한자의 음을 따서 우리 말을 표현한 것이다.
삼국시대의 학문은 주로 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신라에는 '향가'가 있었는데,
이것을 이두로써 시가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화랑과 스님들이 향가를 지었다.
삼국 시대의 교육 제도도 각각 특색을 지녔다.
고구려에는 태학과 경당이 있었다.
태학은 372년에 고구려의 서울에 세워졌으며 주로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경당은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뒤에 지방에 세워졌다.
여기에서는 평민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태학은 국립 대학과 같은 교육 기관으로 유학, 천문, 지리, 병법 등을 가르쳤으며,
경당은 지방의 사립 학교로 유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백제에는 오경 박사, 역박사, 의박사 등이 있었다.
오경 박사는 유교의 내용을 가르치고,
역박사는 천문과 역법을 가르쳤으며,
의박사는 의술을 가르쳤다.
신라에서는 내물왕 대부터 한자를 사용하였고,
지증왕 때 대륙의 문물이 들어와서 진흥왕 때 학문이 크게 발달했다.
신문왕 때 설치한 국학은 신라 최고 교육기관 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국사 편찬도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영양왕 때 이문진이 유기를 간추려서 <신집> 5권을 펴냈고,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펴냈다.
신라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펴냈다.
삼국시대의 음악은 나라마다 각각 특색을 띠었다.
고구려의 왕산악은 중국의 악기 칠현금을 고쳐서 거문고를 만들었다.
왕산악은 음악가인 동시에 고구려의 국상이었다.
왕산악은 곡을 1백여 곡이나 지었니다.
"왕산악이 거문고를 연주할 때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대."
고구려에는 이러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로써 왕산악의 음악 솜씨가 어떠했던가를 알 수가 있었다.
거문고 외에도, 고구려의 악기로는 날라리와 오현금 등 17가지가 있었다.
<황조가>는 현재 전해 오는 고구려의 악곡이다.
신라의 음악가이며 거문고의 대가인 옥보고는 지리산에 들어가서 50년 동안이나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왕산악의 악곡을 받아들여 거문고의 새로운 가락 30여곡을 지었다.
또한, 신라에서는 옷을 백 번이나 기워 입었다는 백결 선생이 '방아 타령'을 지어 유명해졌다.
가야금의 시조인 우륵은 대가야에 살다가, 뒤에 신라로 건너가서 제자들에게 음악과 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인 계고는 가야금을, 법지는 노래를, 만덕은 춤을 배웠다.
우륵은 일생 동안 185곡을 지었다.
삼국시대에는 미술도 음악 못지 않게 발달했다.
그것은 불교적인 것이 많았다.
고구려의 고분은 무덤의 바깥인 봉분을 돌로 꾸민 석총과, 흙으로 꾸민 토총이 있다.
석총으로는 장군총을 들 수 있고, 토총으로는 각저총, 무용총, 4신총, 쌍용총 등을 들 수가 있다.
백제의 고분은 벽돌로 안을 쌓은 무령왕릉이 있다.
그 밖에도 부여 능산리, 공주 송산리의 것도 유명하다.
신라의 고분은 나무로 관을 짠 목곽분, 관을 두는 현실을 돌로 쌓은 석실분이 있다.
안에는 왕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넣기도 하였다.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에 있는 신라의 고분으로서,
금관과 함께 신라 고분에서 처음으로 색칠한 그림 '천마도'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천마총에는 말안장, 투구, 유리그릇, 장신구 등이 나왔다.
고구려의 4신도, 풍속도, 무용도, 수렵도와 백제의 4신도 등은
신라의 천마도와 함께 유명한 그림으로 손꼽힌다.
고구려의 담징은 일본 호류사의 벽화를 그렸고,
백제의 아좌태자는 일본의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신라의 솔거는 황룡사의 노송을 그렸다.
솔거가 그린 늙은 소나무 그림에는 학들이 날아들다가 벽에 부딪쳤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목탑과 석탑이 있었으나, 목탑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목탑으로는 신라의 황룡사 9층탑, 석탑으로는 미륵사지 석탑을 들 수 있다.
신라의 분황사탑은 모전 석탑이다.
삼국시대의 유명한 조각품은 거의 불상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금동여래입상, 백제의 마애삼존석불, 신라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등은 좋은 불상이다.
삼국시대의 공예품으로는 금관,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등을 들 수가 있다.
종교는 처음에는 고대 원시적인 토속 신앙에서 비롯되었다가,
불교가 전래되어 발전했으며, 도교도 들어와 민간에 퍼졌다.
특히, 불교가 발전하면서부터 삼국은 종교가 제대로 섰다.
고구려에 최초로 세워진 절은 초문사와 이불란사이다.
양원왕 때의 유명한 스님인 혜랑은
신라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신라 때 가장 높은 승려 직인 국통이 되었다.
백제의 유명한 스님인 겸익은 인도에 유학을 하였으며, 그 뒤 불경을 번역해 내었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불교가 발전하고 있을 때 이차돈이 순교하였다.
"불교를 받아들이면 아니되옵니다. 이차돈을 처형하소서!"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이차돈이 왕에게 말했다.
"소신이 죽으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차돈을 처형하는 날, 맑은 하늘이 갑자기 흐려지며 천둥 번개가 일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가 솟아나고 꽃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처럼 이차돈이 순교함으로써 신라는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이차돈의 성은 박씨이고, 왕손이었다.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돌아와 계율종을 전했다.
643년, 고구려 보장왕 2년에 대막리지인 연개소문의 권유로
당나라 도사인 숙달 등 8명이 노자의 '도덕경'을 들여옴으로써 삼국에 처음으로 도교가 들어왔다.
고구려에서는 도사를 위해 특별히 도관을 지었다.
연개소문은 불교를 억누르고 도교를 일으켰다.
'고구려에서는 불교 신앙을 일으키기가 어렵구나!'
고구려 보장왕 9년,
이름 높은 스님인 보덕 화상은 백제로 몰래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도교의 영향은 그 뒤에 백제와 신라에도 미쳤다.
백제의 산수문적의 벽돌 무늬에 도교 사상이 표시되어 있고,
신라에서 화랑이 이름난 산과 내를 찾아다닌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손꼽힌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김대성이 지었다.
☞ 김대성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신라의 재상인 김문량의 집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모양근의 대성을 잘 부탁한다!"
김문량은 이 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서 모량리로 보내었다.
그 사람이 모량리로 가보니, 방금 대성이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모량리 마을에 경조라는 가난한 여인이 외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이 아이의 머리가 크고 이마가 성처럼 평평하다 하여 이름을 '대성'이라 지었다.
하루는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 하였다.
"저희 집에는 부처님께 바칠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말하자 대성이가 나섰다.
"그 동안 품삯으로 받은 밭 서너 이랑이 있잖아요. 그것을 드리세요."
그래서 두 모자는 그것을 흥륜사 육륜회를 열기 위한 시주로 바쳤다.
그리고 난 뒤에 대성이가 죽은 것이다.
김문량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에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을 했다.
이 아기가 태어나자 김문량은 이름을 '대성'이라고 지었다.
즉, 15살에 죽은 대성이가 김문량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환생이라고 한다.
김대성은 무럭무럭 자라서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김대성은 사냥을 하러 가서 곰 한 마리를 잡았다.
김대성은 그 날 밤에 토암산 밑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에 죽은 곰이 꿈에 나타났다.
"아무 죄도 없는 나를 잡아 죽였으니, 원수를 갚겠다."
김대성은 곰에게 용서를 빌었다.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세워 주면 용서하겠다."
"꼭 절을 지어 주겠소."
김대성이 약속하자 곰이 사라졌다.
그 뒤부터 김대성은 사냥을 하지 않았고,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라는 절을 지어 주었다.
김대성은 벼슬길에 나가서 마침내는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고,
52살에 물러나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짓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불국사는 현생(현재 사는)의 부모님을 위해 짓는 것이고,
석굴암은 전생(모량리에 살았을 때)의 부모님을 위해 짓기로 한 것이다.
법흥왕 때 세운 불국사는 김대성이 왕에게 아뢰어
경덕왕 때 다시 세운 것으로서, 석굴암과 함께 지은 것이다.
불국사는 원래 2천 간이 넘는 큰절이었다.
나무로 지은 불국사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없어졌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다시 지어 보존되다가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다.
불국사 앞쪽에 있는 청운교와 백운교의 돌층계,
그 옆에 있는 연화교와 칠보교도 뛰어난 예술품이다.
대웅전 앞뜰에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마주 서 있는데,
이것 또한 신라 예술의 걸작품이다.
이 두 탑은 아주 대조적이다.
즉, 석가탑이 우아하고 소박하여 남성적이라면, 다보탑은 화려하고 섬세하여 여성적이다.
더욱이, 석굴암은 중국의 윈깡 석굴, 일본의 호류사 사원과 더불어 동양 3대 예술로 손꼽혀지고 있다.
☞ 석가탑에 얽힌 전설 또한 매우 아름답다.
백제의 서울 사비성에 '아사달'이라는 유명한 석공이 살았다.
그는 '아사녀'라는 처녀와 결혼했는데, 얼마 안 되어 신라로 떠나게 되었다.
"아사녀, 석탑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오."
"서방님께서 훌륭한 석탑을 만들고 돌아오시기를 부처님께 빌겠어요."
두 사람은 애달프게 헤어졌다.
서라벌에 도착한 아사달은 부처님께 간절히 빌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탑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사달은 온갖 정성을 기울여 석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한편,
고향을 떠난 지 3년이 되어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사녀는 서라벌을 향해 길을 떠났다.
이 무렵,
아사달은 석가탑을 거의 다 완성해 가고 있었다.
아사녀는 서라벌에 도착하여 스님에게 남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였지만, 스님은 거절하였다.
"탑이 완성될 때까지는 만날 수 없습니다."
아사녀는 하는 수 없어서 영지라는 연못가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탑이 완성되면 그 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꼭 비친다고 하였다.
아사녀는 날마다 영지라는 연못가에 서성거리며 물 속만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신라의 한 처녀가 연못에 노닐다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석탑이 완성되면, 아사달님과 함께 사비성으로 가겠어."
아사녀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이 아찔했다.
'서방님이 3년 동안에 신라의 여자를 사귀었구나!'
그 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사녀는 남편의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슬피 울다가 연못 속에 몸을 던졌다.
드디어 석가탑이 완성되었다.
아사달은 꿈에도 그리던 아내를 만나러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사달이 묵고 있던 주막집 할머니가 아사녀의 슬픈 소식을 전해 주었다.
"에그, 신라 처녀들이 장난 삼아 놀린 말을 듣고 영지에 빠져 죽었으니……."
아사달은 연못으로 달려갔다.
"아사녀! 아사녀……."
아사달은 연못 속으로 들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서방님……."
그때 아사녀가 나타났다.
"아사녀!"
아사달은 꽉 껴안았으나, 그것은 물위에 솟아오른 바위였다.
"아사녀……."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겼다.
아내의 얼굴은 차차 부처님 모습으로 변해 갔다.
마침내, 아사달은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의 뒤를 따라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 뒤,
불국사 대웅전 앞뜰에 다보탑과 마주보며 서 있던 석가탑은 연못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전설을 떠올리며,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불렀다.
무영탑이란,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이다.
신라의 석탑 중에서
구례에 있는 화엄사의 4사자 3층석탑, 감포에 있는 감흥사 3층 석탑 또한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신라의 불상 중에서
석굴암 중앙에 있는 본존 불상, 벽에 새긴 보살 입상, 11면관음상, 나한상 등도 훌륭한 미술품이다.
경주 안압지 가에 있는 임해전과 포석정은
신라 귀족들의 사치스러웠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물이 흐르게 하여 거기에 술잔을 띄워 가며 마셨다.
신라의 종으로는 상원사 범종, 성덕 대왕 신종이 있다.
신종은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며, 여기에도 슬픈 전설이 어려 있다.
혜공왕은 경덕왕의 뒤를 이어서 8살의 나이로 임금이 되었다.
때문에 어머니인 태후 만월부인이 대신 나라 일을 보았다.
이 무렵,
태후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도둑이 들끓고 흉년이 들어서 세상이 뒤숭숭하였다.
"신성한 종을 만들어 치면 악귀들이 물러갈 것이옵니다."
신하들이 아뢰었다.
효성왕은 선왕인 선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구리 20만여 근을 들여 종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나,
다음 왕인 경덕왕 때에도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혜공왕 때까지 이른 것이다.
"종을 만드는 재료가 부족하니, 백성들에게 시주토록하라!"
왕이 명령하였다.
어명을 받들은 스님들은 집집마다 시주를 받으러 다녔다.
한 스님이 다 쓰러져 가는 어느 집을 방문했을 때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이 말했다.
"저의 집에는 아무 것도 시주할 것이 없사옵니다. 이 아기라도 괜찮으시다면 데리고 가세요."
스님은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백성들의 정성어린 시주로 종이 만들어졌다.
한데, 종을 쳐보아도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종을 만드는 감독인 하전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하전이 죽자, 미추홀이 감독이 되었다.
하루는 봉덕사의 주지스님이 꿈을 꾸었다.
"종을 만들 때, 아기를 넣어 만들어야 소리가 잘 나느니라."
웬 노인이 나타나 주지 스님께 말했다.
꿈을 깬 주지스님은 퍼뜩 전에 시주하러 갔을 때 가난한 여인이 생각났다.
주지스님은 그 가난한 여인을 찾아갔다.
"전에 아기밖에 바칠 것이 없다고 하셨지요? 아기라도 바치시겠습니까?"
"부처님과의 약속이니, 드리겠습니다."
가난한 여인은 아기를 시주하였다.
주지 스님은 그 아기를 안고 종을 만드는 곳으로 갔다.
"어찌 어린아기를 종 만드는 쇳물에 넣는단 말이오?"
어린 혜공왕이 반대하였다.
"어서 종을 만들어 울려야, 백성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또 천재지변을 막을 수 있사옵니다."
신하들이 주장하고, 태후가 타이르자 혜공왕은 허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장인 미추홀은 어명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서 아기를 쇳물에 넣었다.
▶그리고 나서 하도 슬피 울어서 미추홀은 눈이 멀었다.
마침내 종이 만들어 졌다.
"에밀레……, 에밀레……."
종소리는 멀리까지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백성들은 그 종소리를 마치 아기가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는 소리로 들었다.
"에밀레……, 에밀레……."
그것은' 에미 때문에'로 들렸다.
☞ 에미(어머니) 때문에 죽었다고 하소연하는 소리로 들렸다.
"아기의 넋이 어머니를 불러요."
"에그, 가엾은 것……."
성덕 대왕 신종은, 그래서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귀족사회에서는 한문학이 발달하였으나, 민간에서는 향가가 발달하였다.
월명사의 <도솔가>와 <제망매가>, 충담사의 <안민가>와 <찬기파랑가>,
득오곡의 <모죽지랑가> 등이 향가 작품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전해 오는 향가는
<삼국 유사>에 14수와, <균여전>에 11수만이 있을 뿐이다.
향가는 스님과 화랑들이 많이 지었다.
때문에 그 내용도 나라의 평안을 빌거나 부처님의 은덕을 찬양하는 것들이었다.
진성 여왕 때 대구 화상은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지었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신라의 과학 기술 중, 두드러진 것은 인쇄술이다.
경덕왕 때 다라니경이 만들어졌다.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인 다라니경이 발견됨으로써 목판 인쇄술의 발달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천문학자 김암은
혜공왕 때 당나라에 유학하여 음양 병법을 배워서 병학과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신라 말기의 스님 도선은 지리 도참설이라는 지리학을 들여와서,
인문 지리와 도참 신앙을 엮어 <도선 비가>라는 책을 지었다.
이처럼 신라 말기 시대의 높은 예술의 발달은 나라가 안정되고 경제 생활이 풍족한 까닭이다.
여기에 불교의 융성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삼국 시대 때의 일본은 백제에 자주 사신을 보내었다.
"학식과 덕망이 높으신 박사님들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옵니다."
근초고왕 때부터 일본의 사신들은 뻔질나게 찾아왔다.
이 무렵,
백제의 근초고왕은 오늘날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강력한 고대 왕국을 이룰 수 있었다.
근초고왕은 바다 건너 중국과 일본과도 해상무역을 하였다.
일본 사신들은 이 즈음 예물을 가지고 와서
백제의 발달된 문화와 기술, 여러가지 서적이나 물품 등을 얻어갔다.
근초고왕은 미개한 일본을 깨우쳐 주기로 하였다.
"아직기라는 학자를 보내겠느니,
왜국(일본) 왕자는 그를 스승으로 받들고 유학을 배워서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라."
일본은 근초고왕 때부터 우리 나라의 높은 문화를 받아들여 배웠다.
백제의 성왕 또한, 일본에 불교와 우리 문화를 전해 주었다.
일본은 백제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문화의 뿌리를 내렸다.
▶백제의 왕인박사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져가서 일본 왕자는 물론 많은 대신들을 가르쳤다.
아직기와 왕인 박사 외에도 일본에서는
백제왕의 손자인 진손과 무령왕 때의 단양, 고안무 등도 모셔 가서 가르침을 받아 유교를 발전시켰다.
일본 태자가 말했다.
"백제에서 모셔 온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받고 비로소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졌습니다."
일본 왕은 태자의 학문이 높아지자 기뻐서 많은 유학생들을 백제에 보냈다.
이 무렵,
일본의 궁전이나 귀족의 큰집은
띠를 이은 초가인 모옥에 검은나무가 기둥인 흑목주를 사용할 정도로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백제의 기술이 전해지면서부터
붉게 칠한 기둥이나 서까래의 여러 가지 빛깔을 사용하여 화려해졌다.
특히, 은회색으로 빛나는 기와로 단장된 사원은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호류사 금당의 약사여래 좌상은 백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관세음보살도 백제에서 전래되었다.
백제의 화공과, 기와를 굽는 기술자인 와공도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 미술과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바느질, 베 짜는 기술, 대장장이 기술,
심지어는 간장과 술 담그는 방법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일본에 가르쳐 주었다.
일본인들은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 말안장 등을 만드는 안공, 비단을 짜는 금공 등도 백제에서 모셔 갔다.
백제에서는 의약도 일본에 전해 주었다.
백제의 의사였던 덕래가 일본에 건너가서 지금의 오사카인 난파에 살았으므로,
일본에서는 '난파 약사'라는 이름까지 생겼다.
이와 같이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많은 우리 나라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
유교와 불교를 비롯하여, 미술, 공예, 음악, 의약, 천문, 지리들의 책과 학자, 기술자는 물론
많은 기구 등을 전해 주어 일본의 정신 문화와 더불어 물질 문명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북쪽에 자리잡고 있어서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맺지는 못했지만, 가끔 배가 왕래하였다.
고구려의 대승 혜자는 백제의 대승 혜총과 함께 일본의 호죠태자의 스승이 되어 주었다.
담징은 610년에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갔다.
담징은 그 곳의 일본 승려들과 함께 지내며 불법을 강론했고,
채화와 공예는 물론 종이와 붓과 먹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담징이 그린 호류사의 금당 벽화는 동양 최고의 3대 미술품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하지만, 지금은 아깝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고구려 사신들은 쇠로 화살촉과 방패 등의 무기를 일본에 전해 주었다.
"고구려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그래? 먼 곳에서 오신 분들이니 잘 모셔라."
일본인들은 특히 고구려에서 온 사신들은 예의를 다하여 맞았다고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고구려에서 받은 무기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일본인들은 고구려에서 가져온 화살로 궁술 대회를 열었다.
신라는 일본과 가깝게 자리잡고 있었지만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왜구들이 신라를 자주 괴롭혔기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3세기말에 배 만드는 기술자를 일본에 보내었다.
또한 저수지를 만드는 기술도 일본에 전하였다.
"아무쪼록 '한인의 연못'을 잘 보살펴라."
일본에서는 신라가 가르쳐 주어 만든 저수지를 '한인의 연못'이라고 불렀다.
신라에서도 많은 기술자가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에는 '고구려악', 배제악', 신라악'이라고 하여
삼국의 음악을 받아들여서 그들의 고대음악을 발전시켰다.
또한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들어가 무리를 지어 살았는데,
'고구려군', '백제군', '신라군'의 집단 거주지를 이루었다.
그 한국인들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일본문화의 뿌리는 찬란한 우리 문화에서 영향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