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嵒七賢 근암칠현
홍언충(洪彦忠, 1473~1508)
이덕형(李德馨, 1561~1613)
김홍민(金弘敏, 1540~1594)
홍여하(洪汝河) (1621~1678)
李榘 1613 1654 全州 大方 活齋, 山陽
활재(活齋) 이구(李榘)1613년(광해군 5)~1654년(효종 5) 대방(大方) 산양처사(山陽處士) 전주(全州)
이만부(李萬敷) (1664~1732)
권상일(權相一) (1679~1759)
홍언충(洪彥忠) 1473년(성종 4)~1508년(중종 3)
중종 3 1508 무진 正德 3 36 3월 7일, 卒하다. ○ 茂林縣 道淵里에 묻히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 尙州의 近巖書院에 祭享되다.
홍언충(洪彦忠) 조선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홍귀달(洪貴達)의 셋째 아들로, 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지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간언 상소를 올려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남. 문장과 글씨에 뛰어남.
1473~1508 한국/조선전기 , 경상도/의흥 , 인명/관인/문신
근암서원 경북 문경시 산북면 소재의 서원이다. 1665년(현종6)에 홍언충(洪彦忠)을 입향했고, 4년 뒤에 이덕형(李德馨)을 추향(追享)했다. 이후 1702년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를 추향했다. 《商山誌》 목재집(木齋集)
근암서원(近嵒書院)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에 소재한 서원이며, 1669년(현종10)에 설립되어 홍언충(洪彦忠, 1473~1508)ㆍ이덕형(李德馨, 1561~1613)ㆍ김홍민(金弘敏, 1540~1594) 등을 배향하였다. 목재집(木齋集)
근암서원(近嵒書院)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있다. 1665년(현종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홍언충(洪彦忠)과 이덕형(李德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1693년(숙종19)에 김홍민(金弘敏)과 홍여하(洪汝河)를 추가 배향하였으며, 1786년(정조10)에 이구(李榘), 이만부(李萬敷), 권상일(權相一)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5)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9월에 유림에 의해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입재집(立齋集)
金弘敏 1540 1594 尙州 任父, 任甫 沙潭
李德馨 1561 1613 廣州 明甫 漢陰, 雙松, 抱雍 文翼 漢原府院君
李榘 1613 1654 全州 大方 活齋, 山陽
洪汝河 1620 1674 缶溪 百源, 應圖 木齋, 山澤齋, 大朴山人
李萬敷 1664 1732 延安 仲舒, 寬夫 息山
權相一 1679 1759 安東 台仲 淸臺, 拙修齋 僖靖
3 山陽處士活齋先生李公行狀 行狀 鄭宗魯 立齋集 a254_232c 종합DB
5 行狀[鄭宗魯] 行狀* 鄭宗魯 活齋集 b032_545a 종합DB
6 墓碣銘[南漢朝] 墓碣* 南漢朝 活齋集
34 活齋李處士墓誌銘 墓誌 柳命天 退堂集 b040_506d 종합DB
35 活齋先生李公墓碣銘 幷序 墓碣 南漢朝 損齋集 b099_689a 종합DB
洪彥國 1475 1540 缶溪 國佐
洪彥國 1475 1540 成均生員洪公墓誌銘 幷序 墓誌 申楫 河陰集
1 홍경삼(洪景參)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부계(缶溪).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손자이자 참봉(參奉) 홍언국(洪彦國)의 아들로, 음보(蔭補)로 벼슬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냄.
한국/조선전기 , 경상도/의흥 , 인명/관인/무신
2 홍언국(洪彦國)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본관은 부계(缶溪).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의 넷째 아들로, 참봉(參奉)을 지냄.
한국/조선전기 , 경상도/의흥 , 인명/문사/유학
신즙(申楫) 1580년(선조 13)~1639년(인조 17)
河陰先生文集卷之八 / 墓誌 / 成均生員洪公墓誌銘 幷序 *洪彥國
洪缶溪大姓。有諱鸞顯於麗。至公曾祖爲咸人。諱得禹贈參判。祖諱孝孫贈判書。考諱貴達。以文章德業鳴。事我光宣。位至貳公。卒以直諫忤燕山遇害。妣商山金氏。洛城君先致之後。司正淑正女也。成化乙未公生。諱彥國字國佐。早能文。弱冠。與二兄彥昇,四兄彥忠。同升上庠。因成大家。爲一時所推許。睡軒之赴野城也。擧朝文士出餞江上。酒半。公以送行辭一章。先諸人以贐之。座間皆閣筆。爲人俊邁不羣。視卿相必藐之。又不喜俯仰。與世常落落。弘治甲子。門禍作。贊成公旣竄。公及伯仲俱連坐。分配海島。公謫定襄。尋遷歧城。正德丙寅。中廟反正。公兄弟皆得釋。自是放浪詩酒以自老。嘉靖庚子以疾終。葬栗谷兌向原。公之配鄭氏墓右。鄭東萊望族。府使蘭茂女。性和淑有婦德。一男四女。男景參司果。女長郡守趙宗敦。次柳興宗,李鵬摶,崔大觀。司果二子。長德祿司正。卽聘君。次德禧司勇。聘君有子鎬文科司憲監察。生二男幼。司勇繼彥陽后。生三男禮約,守約,好約。各有一男汝量,河量,洧量。趙之後不可悉。其顯者驪牧守準,參判濈。於公曾玄。柳無后。李只女孫。崔之後正言挺豪是已。嗚呼。善人其食報乎。銘曰。
公卿子才且器。實王佐胡不辰。志未伸而反禍。及玄曾家再興。澤不斬百斯年。香火傳永無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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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의 저본은 1582年刊 초간본
이 초간본은 壬亂을 거치면서 刊本이 거의 유실되었고, 1720년(숙종 46)에 이르러 從後孫 洪相民ㆍ洪相勖 형제가 문집을 중간하였다.《중간본》 이 본은 缶溪洪氏世系를 권수에 싣고 권말에 附錄을 실었는데, 附錄에는 奉安時祭文ㆍ建嵒書院享祝文ㆍ墓碣 등과 諸賢들의 愛慕하는 글을 모았으며 여기에 權斗經의 序와 洪相民의 跋을 붙여 4권 2책으로 간행하였다.
*전기자료 부록 중간본 등 문집영인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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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홍언충과 목재 홍여하의 생애와 사상
저자: 홍원식,권진호,최은주,우인수,추제협,김현영,박인호 문경시 : 근암서원운영위원회 2016
이 책은 근암서원연구총서 시리즈 중 2집으로 발간한 도서이며, 2016년 9월23일부터 10월25일까지 근암서원 인문학아카데미 강의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진 자료집이다.
발행기관 경상북도 문경시
주관부서 행정복지국 총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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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韶漫錄 / 尹國馨
尹國馨 1543 1611 尹先覺 坡平 粹夫 達川, 恩省
○ 김임보(金任甫)의 이름은 홍민(弘敏)이다. 경자년(1540, 중종 35)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상주(尙州)로 후계(后溪 김범(金範)의 호)의 아들이다. 사람됨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기상이 화락하고 마음씨가 평탄했다.
경오과(庚午科 선조 3, 1570년의 과거)에 올라 예문관에 벼슬하기 시작하여 삼사(三司)에 드나들다가 전한(典翰)을 사퇴하고 힘써 청주 목사가 되기를 구하여 노부모를 봉양했다.
일찍이 중모(中牟)의 백화산(白華山) 아래에 정사(精舍)를 짓고 사담(沙潭)이라고 호를 지었다. 집이 본래부터 가난하였으나 편안히 지냈다. 난리가 일어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가서 그대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가 갑오년에 옥천(沃川) 도중에서 병사하였다.
올봄에 내가 아침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김홍미(金弘微)는 학식이 많은 선비였는데, 지금 어디에 있으며, 그 형 홍민(弘敏)은 벌써 죽었느냐?”
하니, 학사 정경세(鄭經世)가 대답하기를,
“홍민은 작년에 죽었다 하옵고, 홍미는 기축년(1589, 선조 22)에 죄를 얻었다가 난리 뒤에 경상 좌도사(慶尙左都事)가 되었는데, 지금은 어머니 상을 당하여 안동(安東)에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그러면 언제 상복을 벗느냐?”
하였다. 이처럼 임보 형제에 대해서 유념하시는 것이 실로 보통보다 지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영화롭게 여겼다.
홍미의 자는 창원(昌遠)인데, 복을 벗자 교리(校理)로 등용되었다가 지금은 이조 정랑으로 있다. 내가 창원을 보고 이 일을 말하니, 창원은 슬픈 감회를 금치 못하였다.
金任甫名弘敏。生庚子。尙州人也。后溪之子也。爲人溫恭愷悌。處心平易。登庚午科。發軔翰苑。出入三司。辭典翰。力求淸牧。養老親。嘗於中牟之白華山下。築精舍。自號沙潭。家素貧淸。處之晏如。亂生。奉母入俗離山中。仍擧義聚兵。甲午病死於沃川道中。今春余入侍朝筵。上曰。金弘微博學之士。今何在。其兄弘敏已死乎。鄭學士經世對曰。弘敏則前年云亡。而弘微得罪於己丑。亂後爲慶尙左都事。今持母服。流寓安東地。上且問其何時服闋。其留意於任甫兄弟。實出尋常。人以爲榮。弘微字昌遠。服闋。以校理召還。今爲吏曹正郞。余見昌遠道此事。不勝悲感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