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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濟州)
귤림서원(橘林書院) 만력 무인년에 세웠고 숙종 임술년에 사액하였다. :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薀)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 별사(別祠) ㆍ이약동(李約東)ㆍ이회(李禬) 호는 만오(晩悟), 제주 목사를 지냈다.
귤림서원(橘林書院)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곁에 있다. 1578년(선조11)에 조인후 판관이 1519년(중종14)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사묘(祀廟)를 세운 데서 비롯된 서원이다. 조선 시대 초기 및 중기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했던 오현(五賢), 곧 김정(金淨)ㆍ송인수(宋麟壽)ㆍ정온(鄭蘊)ㆍ김상헌(金尙憲)ㆍ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교 교육 기관이었다. 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폐원되었다. 운양집(雲養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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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芝湖) 이선(李選)생년1631년(인조 9)몰년1692년(숙종 18)자택지(擇之)호 소백산인(小白山人)본관전주(全州)시호정간(正簡)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44 7월, 濟州巡撫使에 차임되었으나 顯宗의 승하로 殯殿都監 낭청이 되어 山陵의 일을 맡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45 1월, 산릉의 일로 가자받았으나 스승인 宋時烈이 禮訟으로 인해 삭탈관직되어 圍籬安置되자 門人으로 같은 죄를 받기를 청하며 사양하다. ○ 2월, 형조 참의에 제수되다. ○ 3월, 濟州巡撫使로 나가다. ○ 7월, 濟州에서 돌아와 島中의 폐단 4가지를 진달하다. ○ 10월, 永興 府使가 되었으나 大臣의 계사로 三陟 府使로 옮겨 제수되다.
권7은 祭文(11)과 墓誌(5)이다. 〈祭告三先生書院文〉은 濟州에 유배되었거나 使命을 띠고 왔던 先儒 중 金淨, 金尙憲, 鄭蘊을 제주서원에 배향한 글인데 1675년 제주 순무사 때에 지은 것이다.
芝湖集卷之七 / 祭文 / 祭告三先生書院文 乙卯五月○代濟州儒生作
惟沖菴金文簡公。遭時不淑。見搆奸讒。賦鵩玆邦。終殞厥躬。而乃後。淸陰桐溪兩先生。或奉綸來宣。或抗言編管。惟此海外孤絶之地。卽賢哲前後經過之所。春山草香。曉洞雲濕。年代雖遠。風韻猶存。夫以三先生之正學大節。凡在東土者。孰不景仰。而在玆邦。則抑又大焉。此所以通議於京外之搢紳士林。初旣專享我文簡公。而繼之以兩先生者也。惟是乃者。移廟奉安之時。爲牧使者以其先祖平靖公李約東。亦嘗視篆玆邦。遽以己意。私造位版。置之上頭。此雖形勢之所在。不免任其所爲。亦無非遐僻之人。全無見識。不能有所爭執之致也。及其公議不泯。人言漸起。則慙恧之心。到此益甚。顧以事面重大。亦不敢率意變改矣。今因王人公牒。移出平靖公位版。屢年冒濫之擧。至此而始得革去。尊奉先正之道。至此而始得歸正。允副物情。擧切欣幸。式陳明禋。虔告事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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芝湖集卷之七 / 祭文 / 祭告平靖李公 約東 文 濟州御史時
伏以公當國家隆盛之際。膺絶域製錦之命。則其才與德。宜必有大過人者。以地誌所載觀之。有曰知大體。至今稱之云爾。則吾民之受惠於當時者。寧有旣乎。追享俎豆。亦未爲不可。而第惟沖菴先生專祀玆土。已至百年。淸陰桐溪兩先生之繼入一廟。亦循士論。惟此三賢之正學直道。高忠大節。震耀東國。爲世所宗。則雖以先輩長德。有不敢以一朝。遽然坐於其上者。況此惟公奉安之擧。出於子孫佩符之時。物情尤以是爲未安。玆以移奉他所。恭陳菲薄。敢告事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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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桐溪) 정온(鄭蘊)1569년(선조 2)~1641년(인조 19) 휘원(輝遠) 고고자(鼓鼓子) 초계(草溪) 문간(文簡)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46 2월, 〈甲寅封事〉를 올려 永昌大君을 죽게 한 江華府使 鄭沆을 斬하고 永昌의 位號를 追復하여 禮葬할 것을 청하고, 廢母論을 발의한 丁好寬, 尹訒, 鄭造를 극변에 안치시킬 것을 청하다. ○ 8월, 濟州 大靜縣에 위리안치되다. ○ 〈圍籬記〉, 〈白雪歌〉 등을 짓다. 이후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학문과 저작에 몰두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55 3월, 인조가 즉위하자 헌납 지제교로 부르다. ○ 4월, 배소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가다.
인조 19 1641 신사 崇禎 14 73 2월, 〈病中吟〉을 짓다. ○ 6월 21일, 동생 집에서 졸하다. ○ 8월, 상이 禮官을 보내어 致祭하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 1월, 居昌 主谷里에 장사 지내다. ○ 3월, 龍門書院과 灆溪書院에 배향하다.
현종 3 1662 임인 康熙 1 - 居昌 道山書院에 賜額하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 灆溪書院 文獻公廟에 배향하다.
숙종 26 1700 경진 康熙 39 - 南漢山城 顯節祠에 배향하다.
正祖 연간의 일과 1816년(순조16) 南漢山城 顯節祠에 致祭한 기사까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간행 당시에 일부 관련기록을 보충한 듯하다.
동계집(桐溪集) 해제
73세(1641년) 때 6월에 졸하였다. 인조가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했다. 다음 해 1월 거창(居昌) 주곡리(主谷里)에 안장하였다. 3월에 용문서원(龍門書院)과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별사(別祠)에 배향되었다.
1652년(효종3) 나라에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에 추증하였고, 1657년(효종8)에 문간(文簡)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1694년(숙종20) 조정에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으로 증직(贈職)하였다. 1700년(숙종26)에 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에 배향되었다. 이 밖에도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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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귤림서원(橘林書院) 조선시대 제주(濟州)에 건립한 서원. 선조(宣祖) 때 제주 판관 조인준(趙仁俊)이 김정(金淨)을 추모하여 충암묘(冲菴廟)를 건립하고, 숙종(肅宗) 때 귤림서원(橘林書院)으로 사액됨. 김정ㆍ정온(鄭蘊)ㆍ송시열(宋時烈) 등을 배향함.
1578 한국/조선전기 , 전라도/제주 , 유적/건물/서원,향교
2 오현단(五賢壇) 조선 고종(高宗) 때 전라도 제주(濟州)에 쌓은 제단(祭壇). 1871년(고종 8) 귤림서원(橘林書院)이 훼철된 후, 서원에 배향되었던 김정(金淨)ㆍ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 등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만듦. 현재는 제주시에 속함.
1892 한국/근대 , 전라도/제주 , 유적/시설/기타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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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생년1641년(인조 19)몰년1707년(숙종 33)자덕휴(德休)호해촌도인(海村道人)본관의성(義城)
인조 19 1641 신사 崇禎 14 1 8월 20일, 奉化에서 태어나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39 부수찬, 장령이 되다. ○ 6월, 宋時烈 등 서인을 논핵하다가 濟州 旌義 縣監으로 좌천되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42 1월, 귀가하다.
권5~6은 南遷錄 上ㆍ下로, 정의 현감으로 좌천되어 가는 과정에서부터 부임 후의 일들을 일기체로 담았으며, 당시의 당쟁 상황을 비롯하여 문헌과 답사를 통해 제주의 면면을 기록하였다. 권5는 1679년 3월 12일부터 12월 23일까지, 권6은 1680년 1월 6일부터 1682년 1월 16일 임기를 마치고 부친이 머물고 있는 乾井에 도착하기까지의 기록으로 제주 향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八吾軒先生文集卷之五 / 南遷錄上
己未三月十二日政。復拜副修撰。
二十五日留濟州。謁冲庵先生廟。廟在聖殿之南。墻外卽先生謫居遺址也。門外老槐古松。婆娑掩映。其下寒泉㶁㶁。在城中頗有幽賞。判官趙仁後所建也。其後配享宋圭庵金淸陰鄭桐溪。牧使李𡐔又以李約東配之。而李選爲御史時黜之云。仍與判官往見嘉樂泉。泉在州東南城內。湧出於巖穴中。上所謂寒泉是也。水勢甚壯。深可半丈餘。下流爲山底川。出水北閣。入海爲健入浦。俗傳高厚等自新羅還。族屬會迎于此云。判書井在泉之東北。脉出石間。淸冷味甘。冲庵所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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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준(趙仁俊)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제주 판관(濟州判官)으로 있을 때 제주에서 사사된 김정(金淨)을 추모하기 위해 충암묘(冲菴廟)를 건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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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4월 13일 壬申 5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석강하며 6진과 제주의 수령을 문관으로 차송하도록 하다
상이 문정전에서 석강하였다. 특진관 이정험(李廷馦)이 아뢰기를,
"폐조의 10여 년 동안에 백성들이 마치 도탄 속에 빠져 있는 듯하였는데, 매우 다행스럽게도 성명께서 수화(水火) 중에서 구원해 주셨으므로 모두들 기뻐하고 고무되면서 그동안 죽지 않았던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마땅히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힘써야 하는데, 혜택을 베푸는 방법으로는 수령을 적임자로 보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지방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백성의 원망은 더욱 많으므로 선왕조에서 육진(六鎭)의 수령을 문관으로 교차(交差)했던 것은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서, 목민(牧民)하는 일 외에 인근 고을을 제압시키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지금은 무인을 차송하고 있습니다만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무인의 장기가 아닐 뿐더러, 적을 방어하는 일로 말하더라도 어찌 꼭 문관이 무인보다 못하다 하겠습니까.
그리고 제주(濟州)는 멀리 떨어진 섬으로 왕화가 미치기 어려운 곳이므로, 선왕조에서 김응남(金應南)을 목사로 삼고 조인준(趙仁俊)을 판관으로 삼았던 일은 지금까지도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문관을 판관으로 차송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강계부(江界府)는 속보(屬堡)가 13개나 있는 요지이니, 여기의 판관 역시 문관으로 차송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어찌 문관 무관의 차별이 있겠느냐마는 문관으로 교차하여 제압케 하는 것도 무방하겠다."
하였다.
○上夕講于文政殿。 特進官李廷馦曰: "廢朝十餘年來, 民生若在塗炭, 何幸聖明, 拯出於水火之中, 莫不歡欣鼓舞。 自幸須臾無死, 今宜務施實惠, 而施惠之道, 以守令得人爲先。 地方遠則民怨益多, 先王朝六鎭守令, 以文官交差者, 其意有在。 牧民之外, 亦可彈壓隣邑, 今則以武人差送, 治民非武人所長, 而雖以禦敵言之, 文官豈必不如武人乎? 濟州邈在絶島, 王化難及, 先王朝, 以金應南爲牧使, 以趙仁俊爲判官, 至今稱之。 今以文官, 差送判官爲當。 江界一府屬堡十三, 亦宜以文官差送也。" 上曰: "治民則豈有文武! 以文官交差, 彈壓無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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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기사(癸未記事) 계미년(서기 1583년)
8월 5일.
28일. 정이품(正二品) 이상을 부르라고 명하여 선정전(宣政殿)에서 만나 보시고, 하교하기를, “요사이 조정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 두 사람 때문이니 이들을 멀리 귀양보내고자 하는데 어떠하냐?”하니, 좌우가 모두 아뢰기를, “당초에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된 것은 비록 이 두 사람에게서 시작되었사오나, 지금은 모두 외지(外地)로 나가 있어서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고 있사오니 죄줄 필요가 없나이다.”하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박근원(朴謹元)ㆍ송응개ㆍ허봉(許篈) 세 사람은 나도 간사함을 아나니 멀리 귀양보내는 것이 어떠하냐?”하니, 좌우가 아뢰기를, “이런 사람들은 비록 지나친 말이 있다 하더라도 성명(聖明)의 세상에 말 때문에 죄를 줄 수는 없나이다.”하고, 힘써 변명하여 구원했으나, 정철(鄭澈)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 사람들은 그 죄를 분명히 보여서 시비(是非)를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하다. 이에 송응개를 회령(會寧)으로, 박근원을 강계(江界)로, 허봉을 종성(鐘城)으로 귀양보내다. 임금은 또 종성은 바야흐로 병화(兵禍)를 입고 있다 하여 갑산(甲山)으로 옮겨 보내다. 이기(李墍)를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박승임(朴承任)을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김응남(金應南)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삼았으니, 모두 특명으로 제수한 것이다. 정유길(鄭惟吉)을 우상(右相)으로, 정철(鄭澈)을 예조 판서로, 심대(沈岱)를 황해 도사(黃海都事)로, 이우직(李友直)을 대사헌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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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2권, 선조 11년 2월 15일 丙申 2번째기사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제주 목사가 판관 조인후가 병으로 체직한 일을 아뢰다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판관 조인후(趙仁後)를 병으로 체직할 일에 대해 서장(書狀)을 올렸는데, 전교하였다.
"병을 핑계하여 지레 돌아왔으니 지극히 그르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라."
○濟州牧使書狀: ‘判官趙仁後病遞事。’
傳曰: "稱病徑還, 至爲非矣。 罷職不敍, 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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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후(趙仁後)
[문과] 선조(宣祖) 즉위년(156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29/33)
[생원]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5위(5/100)
1540년(중종 35)∼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유보(裕甫)이다.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증조부는 조인생(趙麟生)이고, 조부는 조회조(趙懷祖)이다. 부친 조경운(趙慶雲)과 모친 김응무(金應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부는 전주유씨 유호(柳灝)이다. 형은 공조참판 조인득(趙仁得)이고, 외삼촌은 우의정 김귀영(金貴榮)이다.
1567년(명종 2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다음 제주판관을 지내면서 선정을 행하여 그동안 형성되었던 폐단을 바로잡아 칭송을 들었으나 병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이후 1583년(선조 16)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1587년(선조 20) 선유어사(宣諭御史)로 오랫동안 호남지방에 머물면서 왜구와 싸워 죽은 자를 위해 제를 지내고,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후 대사간(大司諫)‧도승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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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준(趙仁俊)->조인후(趙仁後) 서너곳고칠것
*선조실록 12권, 선조 11년 2월 15일 丙申 2번째기사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제주 목사가 판관 조인후가 병으로 체직한 일을 아뢰다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판관 조인후(趙仁後)를 병으로 체직할 일에 대해 서장(書狀)을 올렸는데, 전교하였다.
"병을 핑계하여 지레 돌아왔으니 지극히 그르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라."
○濟州牧使書狀: ‘判官趙仁後病遞事。’
傳曰: "稱病徑還, 至爲非矣。 罷職不敍, 可也。"
조인후(趙仁後)
[문과] 선조(宣祖) 즉위년(156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29/33)
[생원]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1등(一等) 5위(5/100)
1540년(중종 35)∼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유보(裕甫)이다.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증조부는 조인생(趙麟生)이고, 조부는 조회조(趙懷祖)이다. 부친 조경운(趙慶雲)과 모친 김응무(金應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부는 전주유씨 유호(柳灝)이다. 형은 공조참판 조인득(趙仁得)이고, 외삼촌은 우의정 김귀영(金貴榮)이다.
1567년(명종 2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다음 제주판관을 지내면서 선정을 행하여 그동안 형성되었던 폐단을 바로잡아 칭송을 들었으나 병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이후 1583년(선조 16)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교리를 지냈다. 1587년(선조 20) 선유어사(宣諭御史)로 오랫동안 호남지방에 머물면서 왜구와 싸워 죽은 자를 위해 제를 지내고,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후 대사간(大司諫)‧도승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