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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文義)
노봉서원(魯峯書院) 만력 갑인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송인수(宋麟壽)ㆍ정렴(鄭𥖝)
검담서원(黔潭書院) 숙종 갑술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 송준길(宋浚吉)
덕천사우(德川祠宇) 숙종 갑술년에 세웠다. : 유희령(柳希齡) 호는 몽암(夢庵)이며 호조참의를 지냈다. ㆍ유흥룡(柳興龍) 호는 숙옹(塾翁)이며 감찰을 증직하였다. ㆍ우신언(禹愼言) 호는 묵재(默齋)이며, 찰방을 지냈다. ㆍ정응창(鄭應昌)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 좌랑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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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만정및 검담서원묘정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금호선말길 15-18 (우)30077
지번 부강면 금호리 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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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집(圭菴集) 송인수(宋麟壽)생년1499년(연산군 5)몰년1547년(명종 2)자미수(眉叟)호규암(圭菴)본관은진(恩津)시호문충(文忠)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 吳名立ㆍ吳裕立 등이 文義에 서원을 세우고 향사하다.(현종 3년에 魯峯書院으로 사액)
圭菴先生文集卷之四 / 附錄 / 年譜
神宗皇帝萬曆三十八年庚戌 宣祖大王四十年。
建書院于文義
止善亭吳名立,月松亭吳裕立,菊隱吳時立,進士柳興霖諸公。創立斯院。以祀先生曁北囱鄭公。至顯廟壬寅。賜額魯峯。遣官致侑。肅廟甲戌。醊享尤菴宋文正公。尤菴五代孫煥箕撰廟庭碑。懷德之崇賢。全州之華山。濟州之橘林。或以先生桑梓之鄕。或以棠陰之化。或以桐鄕遺愛。次第建院。而與己卯乙巳諸賢。竝享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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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1499년(연산군 5)~1547년(명종 2)
圭菴先生文集卷之三 / 附錄 / 魯峯書院廟庭碑銘 幷序○後學宋煥箕撰
文義之縣北楮山。有圭菴宋先生衣履之藏。縣西獐山。有北牕鄭先生薖軸之墟。粤在萬曆庚戌。縣士止善亭吳公名立。與進士柳公興霖。慨然歎曰。凡我士林之尊慕兩先生者。盍設祠院於玆土。使學者日夕瞻望而興起焉乎。爰始經紀。閱五載而竣工。唯玆魯峯。有巖壑林泉之勝。而于以建祠醊侑。允愜群情矣。孝宗戊戌。請額蒙允。顯宗壬寅。宣額賜祭。廟貌院規。益復隆重。後三十三年肅宗甲戌。尤菴宋文正先生。追奉躋享。甚縟擧也。於不休哉。圭菴先生諱麟壽。天姿近道。誠心好學。出言制行。動合古訓。當己卯斬伐之餘。士氣銷鑠之時。獨以聖賢爲必可學。三代爲必可復。至其立朝事君。則期展所學。盡誠殫心。明廟乙巳。削官退處于淸州之先墓下。一室圖書。對越神明。及丁未壁書之變出而後命至。則沐浴具冠帶。顏色不亂。從容就命。貽書門人曰。皇天后土。可表此心。遺訓胤子曰。勿以我爲戒。怠於爲善也。宣廟卽阼。特命伸冤復官。顯廟朝。贈吏曹判書。諡曰文忠。北窓先生諱𥖝。生而靈異。博通三敎。全以聖學。爲立心之本。不由工夫。自到高明。以至方技衆藝。各臻奧妙。嘗曰。聖學以人倫爲重。不論其要妙處。仙佛則以修心見性爲本。下學處全闕。此三敎所以異也。凡其玄通之識。沈冥之迹。非局儒曲學所能闚。而事有難言。號泣以隨。則實出於忠孝之篤矣。解縣紱而養疾于掛蘿里。抑亦逸民之中淸中權者歟。尤菴先生諱時烈。道學之正。事業之盛。實有繼往開來。而膺孝廟魚水之契。秉春秋之義。任世道之責。蔚然爲百代之師宗矣。嘗於本院。久居山長師席。講誘掖。啓迪多士。德化甚盛。不幸黃巴禍作。後學靡所倣仰。逮至更化之初。特蒙復爵賜諡。朝家之崇報。至矣。而亦旣從祀聖廡。至正宗朝。曠世恩典。益無餘蘊。一世以宋子稱焉。嗚呼。三先生之遺風餘韻不沫。百世之下。孰不興慕。斯院之存。儘得以寓高山景行之懷。而永有所瞻依也。同春宋文正公追享。亦曾在丁卯。而乙亥。以其有院享疊設之禁。移奉于黔潭。兩院相距。莽蒼而近。諸章甫。克伸其共尊之誠。猗歟盛矣。竊惟三先生門庭造詣。雖有異焉者。要皆以仁義爲性。而忠孝爲行。聖賢爲法。辭闢爲功。則不害爲殊轍而同歸也。凡入斯院者。可不惕然有以想像模範乎哉。院宇之創。今數百歲。始立牲繫之石。遂書之如此。董成斯役者。止善吳公之來孫鉉燮也。銘曰。
猗我三賢。義闡精微。學雖殊轍。道則同歸。聖朝儒賢。明時逸民。遺風百載。啓佑後人。人所興慕。苾芬以祀。唯玆魯峯。巖泉淸邃。有煌院榜。墻瓦莫苔。凡我衿紳。永言瞻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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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몽단알(旃蒙單閼) 중양절에> 1905년
奉議大夫藝文舘副提學公諱祖同墓碣銘
主辱臣死義之正也上下千古孰不知此義而行之者幾人世級降矣聖學晦矣功利之說權詐之術肆行于世人心之膠固陷溺曰甚一日淫於富貴怵於禍福則一縷爲重而大義反輕宜乎南康長樂之徒摩肩而疊跡矣若無一二忠良殺身成仁扶植倫紀日星乎昏衢砥柱乎頽波頂天足地者復豈知有君臣也哉皇明
洪武二十一年戊辰高麗王禑廢位副提學
安公諱祖同大呼曰吾立朝十三年未能補袞職出奸兇使國事至此義當死遂死之
公順興人文成公晦軒先生諱裕之玄孫贊成事順平君文順公諱于器之曾孫進賢舘大提學順興君文淑公諱牧之孫考諱元崇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順城君誇文惠妣辰韓國大夫人原州元氏僉議評理諱善之之女公以忠穆王乙酉生形貌美晳性度直截文藝夙就好讀古忠臣烈士傳益齋李公齊賢甚器重之丙辰對殿筞不尙藻華引堯舜三代適於治軆者王嘉之擢高第直除門下注書曰乃祖先正文成公首倡正學使東人宗孔氏爾克世其家爲國需用實乃祖攸同仍賜其名舊諱與表德佚不傳歷翰林遷司憲持平拜代言風稜峻潔奏彈不避權責<貴>
鄭圃隱李牧隱李陶隱
李贊成諸賢皆敬愛之聲聞播諸中朝士大夫之口焉因國家多故以榮爲憂退休大麓之鄉王思其剛直授藝文應敎累遷至副提學眷注愈隆未幾崇仁門禍起公亡而麗遂亡矣 大抵儒門旨訣在直之一字仲尼之生也 直孟氏之以直養考亭之敬以直內是己文成先生篤信孔朱用是詒穀于後而公能服佩先訓直字上着力平生言行光明磊落無一毫回互隱曲卒乃守正不撓永有辭於萬世誠無愧爲文成之孫也 配瑞原廉氏大提學國寶女凡擧四男金剛郡事仁剛司直義剛奉禮從剛司正郡事男敬止錄事敬慮護軍敬義司藝敬曾直長敬從別監司直男友孝司果友悌友忠奉禮男孝忠司正男孝敏直長曾玄以下煩不記公之葬在文義西一面獐山子坐原者 今五百有餘載墓無樹後孫禹錫致洙謁 余銘辭不獲撮其行錄系以辭曰
文成肖孫 迺長經幄
一心秉直 善述家學
衆方脂韋 獨也嶽嶽
熊魚旣判 所樹者卓
汶水滔滔 獐山嶙峋
噫彼貳心 視此貞珉
旃蒙單閼 重陽節 承旨 安東 金甯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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良恭公(양공공) 安祖同(안조동) 墓域(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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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산 77-2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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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으로 오르는 길 입구쪽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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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興安氏良恭公墓所(순흥안씨양공공묘소) 標識石(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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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墓域(묘역)으로 오르는 길]
이 묘역에는 8세조 良恭公(양공공) 安祖同(안조동)외에도
9세조 仁剛(인강), 10세조 友孝(우효), 11세조 哲童(철동)등
四代(사대)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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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室(재실) 遠慕齋(원모재) 전경]
원모사는 1928년 藝文館(예문관) 副提學(부제학)
安祖同(안조동, 1345∼1388)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順興安氏(순흥안씨)의 사당으로 매년 음력 10월 5일에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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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仁門(성인문)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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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室(재실) 삼문 成仁門(성인문) 전경]
막다른 길 끝에 세워진 成仁門(성인문)은
외부인을 출입을 삼가하듯 닫혀 있었습니다.
잠시 주차를 해 두고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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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으로 오르는 계단과 위쪽 신도비 전경]
1990년 孔子(공자) 77대 손 衍聖公(연성공) 孔德成先生(공덕성선생)이
비문을 짓고 비문까지 써줘 후손들이 墓所(묘소)입구에 신도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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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道碑(신도비)]
神道碑(신도비)에는
良恭公 高麗藝文館副提學(양공공고려예문관부제학)
順興安公諱祖同之神道碑(순흥안공휘조동지신도비)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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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팔세) 諱(휘) 安祖同(안조동) 墓域(묘역) 전경]
맨 위의 묘소가 藝文館副提學(예문관부제학) 安祖同(안조동)의 墓(묘) 입니다.
문성공 安珦(안향)의 玄孫(현손)이며 문혜공 安元崇(안원숭)의 차남이다.
고려 충목왕(1345년)에 출생하여 우왕 병진(1376년)에 문과에 급제하시고
藝文館副提(예문관부제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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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祖同(안조동) 墓(묘) 앞 墓碑(묘비)와 석물]
고려 우왕으로부터 도덕과 학문 인품이 회헌 안향과
동일하다 하여 '祖同(조동)'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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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서 담은 安祖同(안조동) 墓域(묘역) 전경]
1388년 우왕이 폐위되던 그 당시 崇仁門禍(숭인문화)를 입자
공이 큰소리로 개탄하여 "내가 조정에 들어온지 13년만에 왕을 잘
보호하지 못하고 국사가 여기에 이르렀다"고 하시며 44세의 일기로 순절하시니
우국충정의 절의 신으로서 諡號(시호)를 良恭公(양공공)이라 하였다.
마음이화평한것을 良(양)이라하고,
일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잘받드는것을 恭(공)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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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之神(토지지신)]
土地之神(토지지신) : 땅을 맡아 다스린다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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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祖同(안조동) 墓(묘) 뒤에서 바라본 안산 전경]
公(공)은 슬하에 4형제를 두셨다.
장남은 固城郡守(고성군수)를 지내신 金剛(금강),
둘째는 修義校尉 中軍司正(수의교위중군사정)을 지낸 仁剛(인강),
셋째는 예산현감을 지낸 義剛(의강), 막내는 사정을 지낸 從剛(종강)이다.
배위는 郡夫人(군부인) 서원염씨로,
부친은 보리공신 판개성부사 예문관대제학을 지내고
瑞城君(서성군)에 봉해진 國寶(국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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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世(11세) 諱(휘) 副尉公(부위공) 安哲童(안철동) 墓(묘) 전경]
安哲童(안철동) 양공공파 11세손
修義副尉司猛(수의부위사맹)을 지내셨다.
安祖同(안조동) 墓(묘) 바로 앞쪽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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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哲童(안철동) 新(신). 舊(구) 墓碑(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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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9세) 諱(휘) 安仁剛(안인강) 墓(묘) 전경]
安祖同(안조동)의 둘째 아들로
고려 우왕 갑인년(1374) 출생하였으며
修義校尉 中軍司正(수의교위 중군사정)을 지냈다.
安哲童(안철동) 墓(묘) 앞 쪽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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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仁剛(안인강) 墓(묘) 앞 墓碑(묘비)와 석물]
묘소는 목천의 갈전 번촌동 건좌였으나
경오년 봄에 양공공파조의 묘소계하에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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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10세) 安友孝(안우효) 墓(묘) 전경]
良恭公(양공공) 安祖同(안조동)묘역내
安仁剛(안인강) 墓(묘) 앞쪽에 자리하고 있다.
安友孝(안우효)는 또 다른 이름으로는 安孝友(안효우)라고도 나와있네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몰라서..... 동명이인은 아닌듯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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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友孝(안우효) 墓碑(묘비)]
藝文館(예문관) 副提學(부제학) 安祖同(안조동) 묘역 맨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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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興安氏(순흥안씨) 墓(묘) 標石(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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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에서 담은 齋室(재실) 遠慕齋(원모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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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며 담은 신도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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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
묘역 답사를 위해 올랐던 돌계단
답사를 마치고 다시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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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고사 江皐祠
향토유적 제67호
(2015년 4월 17일 지정)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248
좌표
북위 36° 28′ 43″ 동경 127° 24′ 23″
강고사는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에 있다. 2015년 4월 17일 청주시의 향토유적 제67호로 지정되었다.
개요[편집]
1932년 지선정 오명립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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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립(吳名立)
자(字) 현백(顯伯)
호(號) 지선정(止善亭)
생년 1563(명종 18)
졸년 1633(인조 11)
시대 조선중기
본관 보성(寶城)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생원] 광해(光海) 2년(1610) 경술(庚戌)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5위(55/100)
오명립(吳名立)
1563년(명종 18)∼1633년(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현백(顯伯), 호는 지선정(止善亭).
부원군(府院君) 오천복(吳天福)의 후손으로, 조부는 오중형(吳仲衡)이고, 부친은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 오경(吳璟)이다. 모친은 사인(士人) 박세영(朴世英)의 딸이다. 전처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천우(成天宇)의 딸이고, 후처는 회덕황씨(懷德黃氏)로 첨추(僉樞) 황준남(黃俊男)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경술식년사마시(庚戌式年司馬試)에 생원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폭정(暴政)에 염증을 느껴 낙향하여 지선정(止善亭)에서 시를 읊으며 여생을 보냈다.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와 북창(北窓) 정렴(鄭𥖝)의 풍교(風敎)를 앞장서 이끌었고, 석천(石川) 위에 원사(院祠)를 세워 시서(詩書)를 강의하고 토론하였다.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과 교분을 쌓았다. 1633년(인조 11) 71세로 세상을 떠나, 문의현(文義縣) 서쪽 응봉(鷹峰) 아래에 장사 지냈다가 1685년(숙종 11) 백곡(白谷)으로 이장하였다.
저서로는 1908년 9대손 오영호(吳寧鎬), 오정호(吳正鎬) 등이 편집, 간행한 『지선정유고(止善亭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國朝人物考
司馬榜目
韓國民族文化大百科辭典
[집필자] 이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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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나들이
금강 옛 선비들의 정자를 찾아서 월송정, 지선정, 강고사
[출처] 금강 옛 선비들의 정자를 찾아서 월송정, 지선정, 강고사|작성자 최고닷 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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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향토유적 제66호 월송정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시목리 산 3-5
네비게이션에서 청주 월송정을 찍었더니 나오질 않는다. 청주시 현도면 시목리에 있다는 정보 하나로 네이버 지도를 검색한다. 금강 주변의 언덕 위주로. 대충 짐작 가는 곳을 찾았다. 현대월송정오일뱅크 뒤쪽이다. 주유소 근처 공터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본다. 주유소 바로 옆으로 '월송정 600m' 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길이 끝나는 곳에 주차장이 있다. 차를 세우고 돌계단을 오른다. 계단위로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수북하다. 초여름에 낙엽을 밟으며 산을 오르는 느낌 또한 그리 나쁘지는 않다. 5분 정도 오르니 오솔길 계단 끝으로 월송정이 빼꼼이 머리를 쳐들었다.
정자의 정면 좌, 우로 비석이 서있다. 좌측에는 1985년 성균관장 성낙서가 쓴 ‘월송정유적비(月松亭遺蹟碑)’와 월송정의 유래를 간략하게 적어 놓은 작은 안내석이 나란히 자리한다. 우측으로 ‘월송정 중수 및 유적비건 헌성금록(月松亭重修及遺蹟碑建獻誠金錄)’이라 적힌 비석이 있다. 비석의 뒷면으로 월송정을 중수하고 유적비를 세우는데 일조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새김 되어있다.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1779년(정조 3년)에 송환기가 쓴 ‘한수추월 대동정송(寒水秋月 大冬挺松)’이라는 현판이 좌, 우로 나뉘어 하나씩 걸려있다. 그 외에도 1882년(고종19년)에 임재 송근수가 지은 ‘월송정중수기’를 비롯한 4개의 기문과 제영 18개의 편액이 정자 안을 둘러싸고 있다. 아마도 이곳 월송정을 찾았던 이들이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며 써내려간 글과 시문이 아닐까 싶다.
정자 뒤쪽으로 계단이 보인다. 금강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계단이 끝나고 눈앞에 금강이 펼쳐진다. 대청호 물과 대전 갑천 물이 신탄진 합수머리에서 만나 월송정 바로 밑을 휘돌아 흐른다. 우측으로 세종시 부용면의 간이역인 매포역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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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지선정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서 검색에 들어간다. 인터넷에도 매봉리로 나온다. 몇몇 블로그 정보에 현도면 시목리에 지선정이 있다고 쓰여 있다. 시목1리와 2리를 샅샅이 둘러본다. 마을주민에게 물어도 보고.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지선정이란 정자는 여기에 없어요.’
인터넷 지방신문의 토막뉴스에서 지선정 앞쪽으로 캠핑장이 들어선다는 내용을 언뜻 본 것 같다. 무작정 금강이 보이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캠핑장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근처 도로에 차를 잠깐 세우고 마을 주변을 살폈다. 마을 오른쪽으로 사당이 하나 보인다. 지선정 맞은편에 강고사라는 사당이 있다는데. 야트막한 언덕위에 수 백 년은 됨직한 아름드리 느티나무 몇 그루가 서있다. 나무 옆으로 한참을 찾아 헤매던 지선정이 담장을 두르고 단아하게 터를 잡았다. 지선정의 정확한 주소는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산25 번지이다.
지선정(止善亭) 앞마당에 마을을 내려다보고 서있는 비석이 하나있다. 1937년 송재용이 짓고 오운수가 쓴 ‘강고사원정비(江皐祠院庭碑)’이다. 강고사는 지선정의 주인인 오명립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정자 바로 건너편에 있다.
정자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24미리 광각렌즈 안으로 다 들어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사진을 나누어서 찍어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오명립 선생이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낙향을 한 4년 뒤인 1614년에 이 정자를 지었다. 지선정은 선생의 호를 딴 것이다. 이곳은 단순히 지역의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논하던 장소로만 사용되었던 게 아니라 마을의 아이들을 교육하던 서당의 역할도 함께 했다고 한다. 담장과 중문은 고종 때 지어진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던 월송정의 주인인 오유립 선생과 지선정의 주인인 오명립 선생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친족이다. 거룻배를 타고 두 분이 서로 왕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 두 정자 사이의 직선거리는 1km 남짓이다. 지선정에는 우암 송시열이 오명립 선생에게 준 ‘충효일생 와차강분(忠孝一生臥之江濱 : 일생을 벼슬을 마다하고 충과 효에 매진하며 강가에서 조용히 살아간다.)’이란 편액과 수암 권상하가 쓴 ‘지선정(止善亭)’이란 현판이 있다. 우암 선생이 써 준 편액으로 유추해 보건데 그 당시 보성오씨 가문은 당파에 있어서 노론이 아니었나 싶다. 이밖에도 글과 시문을 적은 기문과 제영이 정자안의 대들보와 서까래 주변에 잔뜩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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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시 향토유적 제67호 강고사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산 24-1
청주시 향토유적 제67호인 강고사(江皐祠)는 1932년에 보성오씨 문중에서 지선정의 주인인 오명립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1971년 청주시 현도면 하석리에 있었던 노봉서원(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함.)에 배향되었던 문헌공 대사헌 규암 송인수와 포천현감 북창 정렴을 추가로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을주민의 말을 빌리면 원래 사당이 있던 자리는 주민이 사는 집 뒤에 밭 자리였으나 몇 년 전 이곳에다 사당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안쪽은 칸을 나누지 않은 통칸으로 된 마루방을 두었다. 중앙에는 쌍문을 달고, 좌, 우로 쪽문을 하나씩 매달았다. 서까래 바로 밑에 ‘강고사(江皐祠)’라는 편액을 걸었다. 마당 앞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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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균
2014년 10월 19일 오후 07:21 - 수정됨
오늘은 조선중기(광해군)학자로 저의 보성오씨문중 13대 지선정
명자 립자(1563~1633)할아버지의 사상과 철학을 배웠습니다ᆞ
지선정 할아버지는 유교주자학의 대가이신 우암 송시열선생(1607~1689)과 깊은 교분을 갖으시었다ᆞ
지금도 후학을 강론 했던 지선정에는 우암선생의 "충효일생와차강분"의 편액이 있다ᆞ 이는 보성오씨 지선정파 후손들의 사상철학으로 자리잡았다ᆞ
14대손 국진과 철제 옥진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각자장 106호 인간문화재 이다ᆞ
오늘부터 우암선생친필을 서각으로 새기고자 오재 선생이 재료를 준비해 주고,포정선생의 지도와 단헌선생의 사사로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ᆞ
13대 손 석강 노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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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길 143-33
(지번)충북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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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248
(도로명) 중척길 143-33
(우) 28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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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정비터
현도면 하석리 20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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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정 문화유적
충북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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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지선정
(淸州 止善亭)
종목
유형문화재 제111호
(1982년 12월 17일 지정)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중척리 산25
좌표
북위 36° 38′ 40″ 동경 127° 28′ 41″
정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청주 지선정(淸州 止善亭)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82년 12월 17일 충청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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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명칭 변경
3 각주
4 참고 자료
개요[편집]
조선시대의 정자로 광해군 2년(1610)에 오명립이 벼슬을 단념하고, 광해군 6년(1614)에 세운 건물이다. 자신의 호를 따서 ‘지선정’이라 하였으며, 이곳에서 강의하고 제자를 길렀다. 숙종 30년(1704)에 다시 짓고, 영조 14년(1738)과 순조 2년(1802)에 수리하였다. 그 뒤 고종(재위 1863∼1907) 때 담장과 중문을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집이다. 현재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현판과 권상하가 쓴 ‘지선정’현판이 있다. 지선정 주변에는 같은 시대에 오유립이 세운 월송정이 있다.
명칭 변경[편집]
당초 지선정으로 문화재 명칭이 지정되었으나, 2013년 1월 18일 행정구역을 추가하여 "청원 지선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1] 2014년 7월 1일 청주시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현재의 문화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2]
각주[편집]
1.↑ 충청북도 고시 제2013-11호 Archived 2017년 11월 15일 - 웨이백 머신, 《충청북도 지정문화재 지정 명칭 변경 고시》, 충청북도지사, 2013-01-18
2.↑ 충청북도 고시 제2014-190호 Archived 2017년 11월 15일 - 웨이백 머신,《충청북도 지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 명칭 및 소재지 변경 고시》, 충청북도지사, 충청북도 도보 제2828호, 250-254면, 2014-06-27
참고 자료[편집]
청주 지선정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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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봉서원(魯峯書院)
충북 청원군 현도면 노산리 양공공 산소 옆에는 노봉서원이 있으며, 노봉서원에 배향되었던 정렴(鄭磏)은 양공공 산소 바로 밑 노산리에서 살았다. 을사사화에서 가장 먼저 억울하게 사화를 입은 이조판서 유인숙도 양공공 산소 바로 아래 노산리 사람이다.
설립
광해군2년(1610)에 오시립(吳時立), 오유립(吳裕立), 오명립(吳名立), 보성오씨 일문과 정렴(鄭磏)의 처갓집 자손인 유흥림(柳興霖)이 송인수(宋麟壽)와 정렴(鄭磏)을 모시기 위해 구룡산 자락 노봉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광해군7년(1615)에 완공하고 청액소(請額疎)를 올려 효종9년(1658)에 허락을 받아 현종3년(1662)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을 내림, 즉 국가 공인 서원)받았다. 1694년(숙종20) 송준길(宋浚吉, 1706년 검담서원으로 옮김),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 1725년(영조1) 권상하(權尙夏)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송준길은 부용면 검시에 검담서원을 지어서 빠져 나갔다. 오시립, 송시열, 권상하가 원장을 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다음 복원하지 못하고, 터에는 노봉서원묘정비(魯峯書院廟庭碑)만 남아 있다.
노봉서원은 청원군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고 가장 먼저 사액(賜額)받았다. 검담서원과 송천서원은 후에 사액받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가치와 비중이 가장 큰데도 복원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던 문인과 석학, 정치인, 충신을 모셔서 그들의 뜻과 학문을 따르던 곳으로 그들의 자취와 글을 듬뿍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료를 발굴하고 복원하여 문화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노봉서원 자료는 다행히 조선왕조실록, 한수재문집, 규암집, 동춘당문집, 죽천집, 송자대전, 지선정유고, 영모재집 등에 남아 있다(현도면지, 19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