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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행함의 일치
2011년 5월 22일 / 대예배 / 약 2:14-16
눅 16:19-24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최고의 의상인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갖춰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즐겼고, 거지 나사로는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잔칫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근근이 연명해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 두 인물로서 이 세상의 현실을 축소판으로 그려냅니다. 이 두 사람의 생활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부자는 자색옷에 고운 베옷을 입고 거지는 헌 누더기를 입었습니다. 입는 것만 아니라 먹는 것도 달랐습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고 했습니다. 싱싱하고 좋은 재료를 곳곳에서 구해다가 맛있고 진기한 음식들을 별미로 만들어서 끼니마다 잔칫상처럼 차려 먹었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먹을 것이 없어 거기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습니다. 입는 것, 먹는 것뿐만 아니라 사는 곳 또한 달랐습니다. 특이한 것은 부자가 죄를 지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후 그 영혼이 불꽃 속에서 고통과 고민을 받으며 자기 집 대문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만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원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물론 부자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남을 멸시하며 교만한 말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문전 박대를 하면서 욕을 하거나 때린 것은 아닙니다.
▶ 죽은 후에는 그 형편이 바뀌어져 불꽃 속에서 그 혀가 타 들어가나 물 한 방울 허락되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온 몸에 헌데를 핥으며, 먹다 버린 쓰레기나 뒤져 먹고 살던 이 거지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몇 번은 하인들을 통해 먹을 것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놓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 긍휼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의 영혼 문제나 사후 문제에 대해여 부인했다기 보다는 무관심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가난하기에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까? 거지 나사로는 세상적으로 가난하다보니까 받는 많은 서러움도 있었지만, 그것을 신앙으로 승격시켜 하나님을 찾았고, 이 세상의 삶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닌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나름대로 경건의 생활을 했습니다. 부자가 자기에게 선을 베풀지 않는다고 하여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부자를 위하여 기도했을 것입니다. 세상 것에만 집착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바라보도록 기도와 때로는 부자가 듣지 않았고 비웃었을지라도 전도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지인 자기 입장에서 베풀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눅 16:27-31 / 그러자 그 부자가 말하였다. “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러면 제발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내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이 죽을 때에는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성경이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네 형제들이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 성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0) …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들은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 죽었던 사람을 보내면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 물질이 있는 사람은 물질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있는 사람은 신앙이 없거나 연약한 신앙의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돈만 알고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이 개나 돼지처럼 살아간다.”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믿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두개인들은 세상적으로 부요하여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부요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기에 부활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졌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물질로 바리새인은 신앙으로 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다면 서로 도와주는 성도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당연히 예수님처럼 희생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1. 믿음이 행함과 연결되게 하십시오.
우리는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이 풍만하다고 믿음이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말만을 앞세운 믿음은 요란한 빈 수레요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믿음을 하나의 사상이나 정신세계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믿음에 대한 많은 지식이나 이해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 믿음은 행함을 통해 훈련되고 성장합니다. 운동선수가 한 팀에 소속되면 그 소속이라는 의미로 유니폼을 입습니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었다고 훌륭한 선수가 된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면, 그때부터 경건의 훈련과 실전을 통해 선수로서의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경기에 출전하거나 훈련을 받는 일없이 유니폼만 입고 다니는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 고여 있는 물이 썩고, 사용되지 않는 기계는 녹이 슬듯이 행함 없는 믿음은 쇠퇴하고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 쓰여 지고 활용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값진 보물을 창고에 쌓아두고서도 행함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믿음은 이 같은 훈련과 검증의 과정을 통과할 때 참으로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알의 겨자씨는 그 자체로서도 귀한 것이지만 땅에 떨어져 심겨짐으로 자기 사명을 다 하는 것입니다.
마 13:31-32 / …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32)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2. 생명(빛)되시는 예수님을 주인(구주)으로 모시고 삽시다.
■ 영화의 고장 할리우드에서는 가끔 배우들과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아침식사를 나누는 모임이 있습니다. 이때에는 당대의 최고 인기 배우나 유명 인사를 초빙하여 간단한 연설을 듣는다고 합니다. 한번은 매우 아름다운 용모의 여성이 연사로 등단했습니다. 그녀는 미국의 최고 미인 열 명중의 한 사람으로 뽑힐 만큼 아름다운 영화배우였습니다. 이 여자가 마이크 앞에 나오자 박수가 요란스럽게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지금 사랑에 빠졌습니다.” 장내는 이상야릇한 흥분으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도대체 그 행운을 잡은 사나이가 누굽니까?” 여자는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배우의 일도 그만두려고 합니다.” 과연 그 여자는 자신의 말처럼 할리우드를 떠나서 후에는 목사의 아내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그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당신은 할리우드의 명예와 부를 물리치고 예수님을 택하신 일에 전연 후회가 없으십니까?”, “할리우드의 스타나 영국 여왕의 자리도 지금의 저와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저에게 이처럼 귀하신 분이십니다.” 참으로 멋진 답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부귀, 명예, 행복과 바꿀 수 없는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빌 3:7-8 /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 겉모양이 달걀이라고 해서 모든 달걀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유정란(有精卵) 달걀과 생명이 없는 무정란(無精卵) 달걀이 있습니다. 유정란은 암컷과 수컷이 교미해서 낳은 것이고 무정란은 성숙한 암탉의 몸에서 수컷의 수정이 없이 배출되는 난입니다. 유정란이 무정란에 비해 영양도 높지만, 무엇보다 생명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좋은 먹을거리입니다. 유정란을 만들려면 적어도 암탉 10-15마리에 수탉 한 마리를 같이 넣어주어야 하며, 닭들이 뛰어놀고 자유롭게 먹이를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생식 행위도 활발하게 할 수 있습니다. 무정란을 낳게 하는 시설은 닭을 밀집 사육하고 24시간 내내 불을 켜서 강제적으로 알을 뽑아내는 데 치중을 하므로 그런 곳에서 알을 낳는 닭은 스트레스와 병이 많아 수명이 짧습니다. 당연히 그런 닭의 고기는 물론 달걀에는 영양도 적을 뿐더러 많은 독소가 들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방목 상태에서 키운 닭은 적어도 2, 3년은 사는데 비해, 양계장 속에서 키운 닭은 기껏해야 2달 정도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런 조건의 차이가 겉보기엔 그게 그것 같은데 계란의 내용물에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유정란은 영양이 풍부하고 생명 에너지가 충분한 먹을거리라면 무정란은 빈약한 영양에 생명 에너지라곤 없고 사료나 스트레스에서 온 독성물질이 많은 먹을거리입니다.
▶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약간의 깨달음은 있으나 잘못된 것을 고치려는 마음과 그 뜻을 따르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반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행동으로 옮긴 세리나 죄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으로 여리고에 사는 세리장 삭개오는 동네 사람들에게 욕심꾸러기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눅 19:8-10 / 삭개오는 주님 앞에 일어서서 말하였다. “선생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세금을 누구에게 더 부과한 것이 발견되면 제 돈으로 네 배를 갚겠습니다.” 9-1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오늘 이 집이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중의 하나이다. 나, 인자는 이와 같은 이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왔다.”
반대로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많은 것을 보고 배웠지만, 예수님의 뜻과 정신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하여 결국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요 12:6 /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는 제자들의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으면서 가끔 그 돈을 훔쳐내는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거듭났다고 하여 죄를 안 짓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죄를 지으면, 진리와 생명이신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자백하여(눅 18:13-14) 사함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눅 18:11-12)처럼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이 없다면 많은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할 뿐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자신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이것은 불신앙으로 온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분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요 1:12)고 하셨으니,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지 않고 누구를 주인(구주)으로 모시겠습니까!
▶ 마 16:13-20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막 8:27-30; 눅 9:18-21; 요 6:66-69에도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똑바로 아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도착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불륜을 지적하다가 목숨을 잃은 선지자입니다(마 14:3-12). 또 사람들 중 일부는 예수님을 엘리야로 이해를 했습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일으킨 선지자였습니다. 왕하 2:1-12에서 엘리야는 죽음을 직접 보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했습니다. 말 4:5-6을 보면 엘리야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세상에 다시 와서 메시아의 강림을 준비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했는데,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을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로 인정을 하였지만 정작 자신들을 죄악에서 건져주실 메시아로 인정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설령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알고 그의 말씀을 순종하였더라면 백부장(마 8장)이나 가나안 여인(마 15장)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선물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견해를 물어 보셨고 베드로가 대답을 하였습니다.
마 16:15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기뻐하시며 놀라운 권능까지 주셨습니다.
마 16:17-19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으로 복되구나.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18) 내가 네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 어떤 죽음의 세력도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잠가 둔 문은 어떤 것이든 하늘에서도 잠길 것이고, 땅에서 열어 둔 문은 하늘에서도 열릴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16절의 뜻은 이렇습니다. 희랍어로 그리스도(ho christos)는 히브리어로 메시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one)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워주신 구세주,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요 1: 14).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위에 오신 분으로 하나님의 신성이 인간 예수님의 영혼과 육신 안에 깃들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나 선지자들이 자기를 메시아로 선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조항을 덧붙임으로서 예수님만이 메시아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실을 믿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삭개오나 세리처럼 구원을 받습니다.
▶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을 봅니다.
계 3:14-21 /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내라. “너는 확고히 서 계시고 신실하신 분, 지금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 있을 만물의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분의 말씀이다. 15)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어느 한쪽이면 좋겠다. 16) 그러나 너는 미지근하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다. 17) 너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는 네 자신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충고한다. 불로 제련된 순금을 내게서 사라. 그것만이 네가 참다운 부자가 될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깨끗하고 순결한 흰옷을 내게서 사라. 그래야 너는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네 눈을 치료하려거든 내게서 안약을 사라. 그러면 시력을 되찾게 될 것이다.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훈련과 징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무관심한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열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벌할 수밖에 없다.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후에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보좌에 나를 함께 앉히신 것처럼 나도 내 보좌 곁에 그를 앉게 하겠다.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자’요 ‘나의 영원한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나의 삶의 모든 것의 주인임을 인정하여 영접하십시다. 나의 삶,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내가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있지 않고, 나의 주인이 누구냐?에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진정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이 나를 새롭게 재창조하셨고, 그 분만이 나를 죄 가운데서 건져주시려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고, 그 피로 나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믿는 사람은 그 주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주인 뜻대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입니다.
마 6:24-34 / 아무도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며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극진히 위하며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5) 그러므로 …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 … 26)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어들이거나 양식을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으나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이다. … 27) 너희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 걱정이 너희 목숨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겠느냐? 28) 왜 의복 때문에 걱정하느냐? 들의 백합화는 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으나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 30)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 … 33)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룰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면서 그분을 생활의 중심에 모시고 살면 그분은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더불어 주실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희의 내일 일도 돌보아주실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족하다.
3. 행함이 따르는 산 믿음
믿음에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는데, 산 믿음은 행위를 낳지만 죽은 믿음은 행위를 낳지 못합니다. ‘산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새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사람마다 믿음의 수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행위를 수반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새 생명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이해로만 끝나는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헌신이나 봉사, 선행을 수반하는 실천적인 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머릿속으로만 이해하고 승인하는 차원에만 머무는 교리적인 믿음으로 그 자체에 생명이 없는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행위를 낳지 못합니다.
참된 믿음을 통해서 삶이 변화를 받고 인격이 성숙해 집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가치와 이념이 달라지며,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말과 행동이 변화되며, 새로운 인격자로 변화되어 성장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도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축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나 살아있는 믿음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신자의 삶은 믿음을 밖으로 나타내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그 믿음이 우리 주위에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자매를 향해서 도움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나면 의무가 따르는데 그 의무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선행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행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하나의 의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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