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는 사랑의 국경선
정동식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달서구 도원동 S 타운이다.
수년 전, 수목원 동문 쪽에 대곡 2 지구가 생기면서, 먼저 지어진 9개 마을, 약 1만 세대는 대곡 1 지구로 불리고 있다. 당시 부모님을 모시려고 아파트를 사면서, 대출금 8,000 만원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내 암보험을 해약했던 소중한 집이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세로로 쓴 ‘하해불택세류’의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서예 작가 효정이 선물해 준 작품이다. 큰 강이나 바다처럼 살려고 노력은 했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다 품고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효정은 나를 이 동네로 이사 오게 한 고종사촌 여동생이다.
집주인이 이사 간 뒤 텅 빈 아파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 거실은 서울광장만큼 커 보였다. 24평형에 살다가 43평형을 선택했으니 거의 두 배가 아닌가? 지금 기준으로 보면 3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아파트이지만, 2004년에 나는 이 아파트의 두 번째 주인이 되었다. 조만간 이사를 위해 천장과 벽면도배, 그리고 세면장 수리 등 공사를 중학교 동창 K에게 맡겼다.
특히 거실은 별도로 거금 150만 원을 들여 나무 장판을 깔았다. 예전 서울에서 무주로 여행 갔을 때, 갈색 나무장판의 그윽한 마루 분위기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한 세월이 흘렀지만 거실 바닥은 우리 집에서 가장 변함없이 처음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입주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신축아파트에 장판이 부풀어 오른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20년째 아무런 하자가 없으니 이 공사는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거실은 가족이 모여서 생활하는 공간이다. T.V가 귀하던 시절에는 같이 앉아 연속극을 보기도 하고, 차도 한잔 나누면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살림이 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거실은 너르고 깔끔했다. 남쪽에는 처음부터 기본으로 세팅된 아담한 크기의 서랍장과 장식장, 북쪽에는 아이들을 위해 서울에서 샀던 삼익 피아노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은 소파, 컴퓨터책상, 쌀통, 내가 관사 생활하던 시절의 살림살이, 각종 과실 진액이 담긴 용기 등으로 가득 차 있어 그 크던 거실이 솔아진 것처럼 보인다. 원래 우리 부부는 안방에, 큰아들은 건넌방, 둘째 아들은 현관 좌측 방에 각각 살았다. 그리고 현관 우측 작은 방은 옷방이었다. 우리가 이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전반 10년은 비교적 평온했다. 애들이 입대하면서 잠시 비운 적은 있어도 방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었다. 그런데 10년 전쯤일까. 둘째 아들 방을 어머니가 사용하시면서 아들은 옷방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부산으로 가시면서 아들은 다시 원래 방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이번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재작년 9월, 장모님을 모시면서 우리 가족의 방 배치에 크나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뇌경색으로 입원 치료를 받으신 장모님께 안방을 내 드렸기 때문이다. 혈관성치매 진단이 내려진 장모님의 빠른 회복과, 낯선 환경에 대한 적응을 위해 아내도 안방에서 같이 생활하기로 했다. 나는 부랴부랴 안방을 떠나 둘째 아들 방으로 옮겼다. 마침 아들은 스웨덴 출장 중이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서너 달 정도 지나니 장모님의 거동은 좋아졌지만 치매 어르신에게 자주 나타나는 환상과 망상 증상은 오히려 심해졌다. 밤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헛소리를 해서 아내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출근하는 내 차 안에서 조는 일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핼쑥해진 아내를 보니 가슴이 짠해 왔다.
궁여지책으로 아내를 안방에서 거실로 나오게 했다. 그래도 만일을 위해 방문은 열어 둔 채 몇 개월을 지냈다.
어느 날 장기출장을 갔던 둘째가 돌아왔다. 여장도 풀 겸 자기 방을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다 해놓고 나에게 말했다. “아버지, 저도 일하고 집에 오면 휴식이 조금 필요해요. 제 방을 깨끗이 정돈해 두었으니, 다음에 쓰시더라도 이 상태를 유지해 주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이미 난민이 되어 표류 중이던 나는 약간 서운했지만 아들의 기분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싫은 내색이나 얼굴 한번 찡그린 일도 없었던 아들 아닌가. 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둘째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은 둘째가 집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으면 우리 부부는 분주해진다. 방을 빼 주어야 하니 신속하게 침구도 정리해서 밖으로 옮기고, 방청소도 하고, 보고 있던 책들이랑, 내가 사용하던 물건들을 거실로 재빨리 옮긴다. 아내는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려고 식단을 짜고 시장에 간다. 연락이 도착 직전에 오는 날에는 더 바쁘다. 미처 치우지 못한 내 물건을 아들이 용케 찾아 건네주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집주인인 나는 흠칫 놀라며 방주인을 쳐다본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둘째가 집으로 오는 날에는 호들갑을 떨며 거실 유랑민이 되는 것이다.
평소에는 소파를 거실 중간에 놓고 생활한다. 차례를 지낼 때나 손님이 오는 날엔, 소파를 피아노 쪽으로 완전히 붙이면 거실은 광장처럼 탁 트여, 십여 명도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하루 일을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약간의 보정이 필요하다. 평소보다 소파를 피아노 쪽으로 한 뼘 정도만 더 옮기면, 거실은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눠진다. T.V와 소파 사이의 제법 너른 공간은 안방, 소파와 피아노 사이는 아담한 사랑방이 된다.
사랑방이 좁은 것은 불빛을 막기 위함이다. 키가 내 허리까지 오는 소파의 높이는 마치 주문 제작한 듯 환상적이다. 아내가 거실 탁자에서 불을 켜고 다른 일을 해도, 내가 누운 상태에서는 불빛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유랑 생활치 고는 제법 근사한 모양새를 갖춘다. 지난해 늦봄부터 어쩌다 아들방과 거실 사랑방을 오가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으나, 장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평생 한 이불을 덮고 지냈다.
오래전 각방 쓴다는 친구들의 사연을 접할 때면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렸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도 태산준령 같은 소파를 사이에 두고 예기치 않게 각방살이를 하고 있다. 사실 아내가 처음 소파를 사자고 했을 때 ‘그딴 소파는 어디에 쓸 거냐?’ 며 쏘아붙였지만 이처럼 유용하게 쓰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라도 떨어지면 그리운 존재가 된 밤색 소파!
가끔 일상에 지친 나의 허리를 쉬게 해 주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주인을 깜박 꿀잠이 들게 할 때도 있다.
이를테면 나의 다양한 생활공간이자 쉼터이며 힐링 특구인 셈이다.
이렇듯 우리 집 소파는 둘도 없는 나의 벗이지만, 밤이 찾아오면 감히 넘을 수 없는 사랑의 국경선이 되고 마는 점은 참 유감스럽다.
(2023. 2.04 )
(2023. 5.21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