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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후추통 - 개별성이 살아 있는 구멍들
후추는 '향료'지만, 향수나 화장품이 아니다. '먹는 향료'다. 후각을 자극하기 위해 먹는 향료는 최대한 '기체(냄새)'에 가까운 음식물 형태가 돼야 한다. 그래서 후추 열매는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휘발되는 공기가 실은 매우 가볍고 미세한 분자 알갱이들로 구성된 것처럼. 먹는 향료는 그것 자체를 직접 먹지 않고, 다른 음식물에 '묻혀' 먹는다. 사람들은 '본요리'에 후추를 뿌린다고 생각하지만, 후추 관점에서는 그 자체를 먹을 수 없기에 '묻힐 음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 중요한 레시피는 향료가 음식물에 공기처럼 고르게 퍼져야 한다는 것이다. 후춧가루는 음식물 특정 부위에 덩어리로 뭉치면 안 된다. 알갱이 하나하나가 균등하고 개별적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뿌리는 요리 도구'를 '드레저(dredger)'라고 부른다. 드레저에 담는 대상은 밀가루, 설탕, 소금 등 여러 가지다. 후추통은 그중에서도 남다르다. 요리사에게 후추는 손으로 뿌려도 상관없는 부수적인 도구가 아니다. 손으로 직접 뿌리기엔 후춧가루는 미세하며 골고루 공기처럼 '날리게' 하기 위해서 후추통의 여러 구멍들은 필수적이다.
통후추가 아니더라도 후추는 설탕이나 소금처럼 뿌린 음식물에서 녹아 사라지지 않는다. 커피에 탄 설탕은 커피 '속(in)'으로 '사라진다'. 설탕 알갱이 낱낱의 존재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설탕통이나 소금통이 후추통 형식처럼 존재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반면 스테이크 위에 뿌린 후추에서 후추통은 중요하다. 요리부터 식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흑갈색 알갱이들 낱낱이 개별성을 유지한 채 음식물 표면에 붙어 맛을 '풍긴다'. 낱낱의 알갱이들은 골고루 퍼져서 먹는 이의 눈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수프 위에서 후추 알갱이들은 녹지 않고 떠 있다. 저 개별적이고 동일한 후추통 구멍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철학자 헤겔은 대상들의 결합 유형에 세 가지 형식이 있다고 봤다. A와 B가 합치나마나 그대로 두 개의 개별성으로 남는 경우(기계적 결합), 개별성이 사라진 새로운 존재 변이(화학적 결합), 개별성이 살아 있으면서 플러스 알파가 생기는 경우(유기적 결합).
개별성(개인)이 존중되면서도 창의성이 확장된 전체(공동체)는 어떻게 가능할까. 후추통 구멍들을 문득 골똘히 쳐다본 점심시간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소금통. *51가지 사물체험
(중략)
우리는 그 존재를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소금이 필요해지면, 식탁 한구석에 있는 소금통으로 손을 뻗는다. 이처럼 소금통은 우리 의식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사물, 간헐적인 사물이다.
소금통은 부동성과 연속성을 실현한다. 그러나 그런 안정성은 소금통 혼자만의 몫일 뿐, 거기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단지 소금통이 늘 제자리에서 어김없이 자기 역할을 해주기만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소금통은 항시적으로 짠맛을 유지하기 위해 대기 상태에 있는맛의 119'인 셈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항상적인 대기 상태에 있는 수많은 사물이 있다. 우리를 위해 늘 대기하고 있는 것이 이 사물들의 본질적인 모습일 것이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