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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2025년 10월 19일 열왕기상 19:10, 14, 18 / 로마서 11:4
오늘 우리는 열왕기상 19장에 기록된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절망과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특히, 엘리야의 고독한 외침 속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소망의 메시지, 즉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에 대한 말씀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새로운 용기를 얻기를 소망한다.
1. 엘리야의 절망 :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단의 제물을 태우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온 이스라엘에게 증명했다. 그러나 승리도 잠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살해 위협 앞에 엘리야는 용기를 잃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광야 호렙산(시내산)의 동굴에 숨어 들어간 엘리야는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다.
왕상 19:10 /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지금 자신이 홀로 남겨진 유일한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온 세상이 어둠에 휩싸였고,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 꿇었으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서 신앙을 지켜온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런 것이 갈멜산에서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과 전투를 벌일 때 엘리야는 혼자였었다.
이세벨이 죽이려는 자는 엘리야 한 사람이었다. 이에 도망치는 엘리야는 외로움과 고독감에 깊이 절망했다. 마치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거대한 세속적 물결 앞에서 ‘나만 믿음을 지키는가?’, ‘교회가 너무 연약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고독감을 보는 듯하다.
2. 하나님의 응답 : 숨겨진 칠천 명
엘리야의 절망적인 부르짖음 앞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말씀을 해주셨다. 하나님의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 가운데, 엘리야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 말씀은 엘리야의 절망을 단번에 깨뜨려 버리는 소망의 메시지였다.
왕상 19:18 /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1. 칠천 명은 하나님이 남겨두신 자들이다.
엘리야는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전체를 통틀어 칠천 명의 신실한 남은 자들을 하나님을 남겨두셨다. 이들은 엘리야의 눈에 띄지 않았고, 갈멜산의 승리 현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바알 숭배가 온 나라를 휩쓸고 있을 때도, 핍박과 유혹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만을 섬기며 예배의 순결함을 지킨 숨겨진 신앙의 용사들이었다.
2. 칠천 명은 순결한 예배자들이다.
'무릎을 꿇지 않았다'와 '입 맞추지 않았다'는 표현은 당시 바알 숭배의 핵심적인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 것은 복종과 경배의 행위이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의 권력, 재물, 풍요를 상징하는 바알에게 절대복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입 맞추는 것은 언약 관계를 맺고 충성을 맹세하는 행위이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않았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에 영적인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들은 세상의 유행과 다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고 순종하는 ‘순결한 남은 자들’(The Remnant)이었습니다. 이들은 엘리야의 고독을 깨뜨리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거였다.
3. 오늘날의 바알 : 무엇에 무릎 꿇고 있는가?
이 7천 명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인용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끊어지지 않고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롬 11:4)고 선포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도 고대 이스라엘의 바알처럼 우리를 유혹하고 무릎 꿇게 만드는 현대의 바알들이 있다. 과거 예수님에게도 이러한 유혹은 있었다. 마귀는 다시 예수를 이끌고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한다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성경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그분만을 섬기라’라고 이르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마 4:8-10).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마 6:13)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1. 물질과 성공의 바알
가장 강력한 현대의 바알은 돈과 세속적인 성공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신앙의 원칙을 잠시 접어두어도 괜찮다는 유혹,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탐욕, 오직 재물만이 인생의 안전과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물질의 바알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 우리는 ‘돈을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칠천 명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다가 실패가 마귀는 오늘도 성도를 넘어뜨리려고 시험한다. 이에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되 승리한 사실을 상기하며 절대로 넘어져서는 안 된다.
2. 쾌락과 중독의 바알
순간적인 즐거움과 육체적인 만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쾌락주의는 또 다른 바알이다. 미디어, 음란, 각종 중독 등은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멀어지게 한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입 맞추지 않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칠천 명이 되어야 한다.
3. 여론과 다수의 바알
엘리야가 느꼈던 것처럼, 신앙인들도 종종 세상의 거대한 여론과 다수의 목소리 앞에서 위축된다. 세상의 가치관과 성경적 진리가 충돌할 때, 비난받고 소외될까 두려워 침묵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다수의 바알에게 무릎 꿇는 행위이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비판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서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는 칠천 명이 되자.
4. 칠천 명의 사명 : 은밀함 속의 순결함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에게서 우리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사명과 태도를 배울 수 있다.
1.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신실함
엘리야는 아합의 궁내대신인 오바댜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백 명씩 굴에 숨기고 돌보았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였다. 사실상 오바댜는 이 사실을 엘리야에게도 알렸다(왕상 18:13). 그런데도 엘리야는 여호와 편에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뿐이라고 한탄하였다. 또한 칠천 명은 엘리야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신앙은 과시적이지 않았고, 칭찬을 구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일터에서, 가정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은밀하게 하나님을 경배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화려한 무대 위의 신앙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서 정직과 순결을 지키는 칠천 명의 신실함이다.
칠천 명 가운데 상당수는 배도와 악행의 때에 여호와 종교가 힘을 얻을 날을 기다리며 아마도 엘리야의 사역을 뒤에서 기도로 후원하면서 자신들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엘리자가 새로운 사역의 부름을 받았을 때 이들 중에 일부는 선지 학교로 모여들어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에 헌신하였을 것이다.
2.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서 있는 확신
엘리야는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칠천 명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지속하고 계셨다. 역사의 주인은 엘리야의 능력이나 이세벨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아무리 고립되어 보이고 세상이 어둠에 휩싸인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자들을 통해 계획을 이루신다. 우리는 홀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믿음을 지키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우리와 뜻을 함께하고 있다.
3. 해야 할 일의 상실하지 말라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물리침으로 그의 할 일이 모두 끝난 것처럼 생각했다. 이제 모든 것을 끝냈다, 할 일이 없어져 버릴 때, 할 일을 잃어버릴 때에 영적 침체가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와 이 시대에서 할 일을 찾지 못하면 영적 침체에 빠질 위험이 있다. 다윗은 할 일이 없을 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는 죄악을 범했다. 할 일이 없는 믿음의 사람은 위험하다. 나름대로 새벽기도의 자리에 앉아 기도하시는 연세 많으신 어른들을 볼 때 늘 감사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기도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영적 침체에 빠질 수 없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세상 권력에 몰려 도망하고 쓰러졌을 때, 하나님께서 어루만져 주시며, 육신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며 새 힘을 얻어 일어나게 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답답하고 하늘이 아무리 캄캄해도 자세히 찾아보면 별 한두 개는 보이는 법이다. 이것이 소망의 별이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것을 보면 강한 바람이 아니고, 요란한 지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도 아닌 조용하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우리도 이런 음성을 들었으면 한다.
사도 바울은 비바람이 몰아쳐서 구원의 여망이 없는 캄캄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행 27:24) 그래서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풍랑을 만나 절망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쳤다. ‘여러분, 안심하세요. 우리는 마침내 이 풍랑을 극복할 것입니다.’(행 27:25) 그는 풍랑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발견했기 때문에 담대히 말할 수가 있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사명 감당하게 되시기 바란다.
4.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사명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시 사명을 부여하셨다(왕상 19:15-21).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위로하며 앞으로의 구체적인 사명에 대하여 일러주셨다. 그러자 비로소 엘리야는 용기를 회복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을 내렸다(왕상 19:19-21). 하나님께로부터 하사엘을 아람의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를 선지자로 임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 명령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시작하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엘리야는 지시에 따라 엘리사를 찾아갔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다가 엘리야를 만났다. 엘리야가 겉옷을 그에게 던지자 엘리사는 즉시 반응하여 자신이 부름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엘리사는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그는 자신의 과거 삶을 완전히 정리하고, 새로운 사명에 헌신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홀로 고립된 신앙이 아닌 다음 세대를 세우는 사역을 통해 신앙의 명맥을 이어가라는 뜻이다. 7천 명이 묵묵히 믿음을 지킨 것처럼, 우리는 이 시대를 지나 다음 세대에게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책임이 있다. 가정, 교회, 학교와 일터에서 믿음의 본을 보이며,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는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엘리사는 스승으로부터 전해 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메섹에 갔을 때 병들어있던 아람 왕 벤하닷 대신 하사엘이라 하는 자에게 아람 왕이 될 것을 알림으로써 그로 하여금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어 왕을 죽이고 그 대신 왕이 되게 했다(왕하 8:7-15). 또 엘리사는 그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예후를 찾아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말함으로써(왕하 9:1-10) 예후로 하여금 요람 왕을 배반하고 왕이 되게 했으며, 이세벨과 아합의 가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알리셨던 그대로 이루어지게 했다(왕하 9:30-37, 10:1-17).
5. 하나님은 모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크게 쓰신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의 무당들을 850명이나 죽이자 이세벨 왕후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엘리야를 잡아 죽이려 하였다. 이럴 때 선지자가 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겉옷을 입혀주며 나를 따르라고 할 때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죽음을 각오하고 엘리야를 따라갔다. 엘리야를 따라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그냥 쓰시지 않으셨다.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창세기 22:1-2을 보면 이삭이 점점 자라나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기로 하셨다. ‘아브라함아’ 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네가 무척 아끼는 외아들 이삭이 있지 않느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그리로 가면 내가 네게 산 하나를 일러 줄 터인데 그 산으로 올라가거라. 거기서 네 아들을 내게 번제물로 바치거라.’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자손인 이삭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번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말씀대로 순종하였다.
뒤이어 번제물이 된 이삭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고 있는 번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든 노인이었고, 이삭은 젊은 청년이었다.
창 22:9-12 / 이제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한 곳까지 다다랐다. 아브라함은 거기에다 제단을 쌓아 올리고 그 제단 위에 장작을 포개 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들 이삭을 꽁꽁 묶어서는 제단 위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칼을 들어 아들을 제물로 잡으려고 하는 순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왔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아브라함을 급히 부르는 것이었다. ‘예, 듣고 있습니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멈추어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흉내만 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 이삭을 100% 번제로 드리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뒤 이어 나오는 ‘멈추라’는 말씀을 하실 것이라고 추측도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있었다.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히 11:17-19 /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모험적인 사람은 세상 사람처럼 그렇게 무모하게 자기 목숨을 던지지는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약속의 자식으로 이삭을 주셨는데 이삭이 번제물이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부활케 하셔서 대를 잇도록 하실 것을 분명히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삭은 젊은 청년으로 어찌 자기를 번제로 드리려는 아버지의 의도를 몰랐으며 그 자기를 피할 힘이 없었겠는가? 자기 목숨을 끊으려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당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때의 모습을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는 것과 비교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체면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여 때로는 예수님을 부인도 하고 감추려고도 하고 베드로처럼 아닌 척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모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시고 크게 쓰신다.
결론 : 중요한 사실은 내가 바로 그 칠천 명 중 한 사람이어야 한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큰 이적을 일으킴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를 다 죽였다. 그 과정을 지켜보았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의 편이 되었다. 그러나 이세벨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아니하고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엘리야를 환호하던 백성들은 뒤로 물러섰다. 엘리야는 다시금 혼자가 된 것이다. 엘리야는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께 외로움과 고독감을 호소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절)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거나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삶의 절벽에 서 있는 엘리야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18절) 온 세상이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는 데 미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던 아합왕 치세 당시 북이스라엘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들이 칠천이나 있었다는 사실은 놀라움 그 자체이었으며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이스라엘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 곧 하나님을 이루기 위해 ‘남은 자(remnant)’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타락한 세상에서 이러한 ‘남은 자’를 구별하여 두셨다. 노아의 홍수로 세상이 멸망할 때에 노아와 그의 식구 여덟 명이 남은 자가 되어 구속사를 이어 나갔다. 다시금 온 세상이 죄악에 물들었을 때 아브라함 역시 남은 자로 선택되어 우상의 도시에서 빠져나왔다.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의 족속이 남은 자가 되었고, 출애굽 시대에는 죄악의 왕국 애굽에서 탈출한 선민 이스라엘이 남은 자가 되었다. 그리고 본문에서 볼 수 있는바, 아합과 이세벨의 극악한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남은 자는 어디에선가 살아있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세상에서 남은 자는 과연 누구이겠는가?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온 세상이 다 하나님 편에서 등을 돌린다고 할지라도 우리라도 하나님 편에 서도록 하자.
하나님 편에 서는 고독감,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손가락질과 따돌림을 당하는 그 어려움을 감내할 각오를 가지지 않고서는 이 시대의 남은 자로서의 귀한 사명을 감당할 수는 없다. 이때 참고할 것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조용히 숨기셨듯이 경고망동((輕擧妄動)하여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 예수님도 제자들을 성령으로 무장시키신 후에 세상을 향해 복음을 외치게 하셨다.
성경에 나타나는 매 시대마다 남은 자는 고독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남은 자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자로서 사명을 다할 때 그 상급 또한 크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우리가 진정 이 시대의 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결심하면 남은 자들을 향해 주어졌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가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다.
창골산 봉서방 컬럼의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 설교를 마치려 한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사람들이다.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 / 세상이 아무리 병들고 불의가 판을 치며 소망이 없어 보여도
하나님이 다스리기에 결국은 인간의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가슴 답답함을 토로하지만, 인간은 세상을 바꿀 수가 없다. 하지만 낙심할 이유가 없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승리로 끝이 날 것이다. 내가 역사를 바꾸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세상에 사탄·마귀가 날뛰어도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불의와 죄악에 대한 심판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지금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없다. 결국 하나님이 성취하시고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염려하며 걱정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 앞에 홍해가 놓여 있을지라도 그 홍해를 가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환란을 당하여도 낙망하지 않으며 소망 중에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갈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시다. 부족해도 괜찮다. 실수해도 주안에 있으면 아주 넘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모든 악과 사탄의 계략은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우리가 믿은 만큼 앞이 보이고 믿음만큼 일하게 되며 그 믿음도 성장하는 것이다. 역사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이를 믿고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가 있다.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을 뚜렷하게 경험하며 사는 자가 성도다.
참고로 할 수 있는 글들
❚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는 성경에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생명의 위협이나 세상의 유혹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믿음을 지켰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도 있지만 무엇보다 다니엘과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 실례로 손꼽을 수 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지만, 왕의 명령과 문화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다. 다니엘은 왕이 내린 진미와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단 1장). 또한 왕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거나 기도하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법이 선포되었을 때도 하루 3번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단 6장).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거대한 금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풀무 불에 던져질 위협에도 불구하고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하며 믿음을 지켰다(단 3장).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 외에는 어떤 권력이나 우상에게도 굴복하지 않은 용기 있는 믿음의 소유자였다.
▮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 / 히브리서의 믿음의 선진들이 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들 중 일부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과 투옥을 당하였고...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히 11:35-38) 이들은 세상의 영광이나 잠시의 편안함과 타협하지 않고,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켰다.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다.
원어적인 의미를 포함하여 이 구절은 단순히 '세상이 이 사람들을 이길 수 없다'라는 것을 넘어, 다음과 같은 깊은 뜻을 담고 있다.
❶ 세상이 그들을 품을 자격이 없었다(The world was not worthy of them) : 이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을 초월하는 높은 영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죄와 타협하는 세상은 그들이 살기에 합당한 곳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❷ 믿음을 꺾을 수 없었다 : 세상은 그들을 고문, 결박, 투옥, 조롱, 채찍질, 심지어 죽음(돌에 맞거나 톱에 켜서 죽임)으로 위협했지만(35-37절),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그들의 영혼과 신념을 정복하거나 굴복시킬 수 없었다.
❸ 더 좋은 부활을 바라봄 : 그들은 이 땅의 짧은 생명이나 잠시의 안락함과 타협하는 대신,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습니다’(35절). 영원한 가치를 믿었기에 현세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었다.
❚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치 아니하였다(11:35). '악형을 받았다'라는 말은 '북을 치듯이 죽도록 때린다'라는 뜻이다. 이 형벌은 죄수를 형틀 위에 누인 후에 사지가 팽팽해지도록 말뚝에 잡아맨 뒤에 사지의 연결 부분을 창으로 찔러 피를 내고 나서, 배와 가슴을 북을 치듯이 쳐서 죽이는 비인간적인 극형을 가리킨다. 이천 년 기독교 박해사(迫害史)는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러 유형의 악형이 예수 신앙이 죄목이 되어, 가해졌다. 그런데도 저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이런 죽음의 고난 때문에 예수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 로마 트라야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가 안디옥에서 로마로 호송을 당하여 맹수의 밥이 되었다. 이것은 구원의 진리를 의심하지 않고 확실히 붙들었기 때문에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만약 기독교의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일이라면 내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구속당하고 있겠는가? 이 진리가 거짓이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겠는가? 또 이것이 거짓이라면 무슨 까닭에 내 몸을 사자밥이 되도록 맡기겠는가?’라고 말하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 한마디면 살려주겠다는 재판관의 말을 거절하고 마침내 사자 앞에 던져지고 말았다.
❚ 요한을 제외한 예수님의 열두제자 역시 예수님으로 인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갔다. 위대한 순교자들이란 책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군병에게 붙잡혀 채찍질을 당한 후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방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스스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 빌린은 아시아 지방 히에라 볼리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지도자들에게 잡혀 지독하게 매를 맞은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AD44년에 복음을 전하다가 칼로 목 베임을 당했다. 마태는 소아시아 지방 파르디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AD60년에 팔로 목이 베임을 당하였다. 가롯 유다 대신에 뽑힌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로 맞은 후, 목 베임을 당했다. 다대오는 파사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며 바돌로매는 우상숭배자들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의심 많았던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 제사장들에게 분노를 사서 창에 찔려 죽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애굽 사람에게 붙잡혀 몸을 꽁꽁 묶인채 말 뒤에 끌려다녔는데 그가 지나간 거리에는 온통 핏자국이었고 그렇게 끌려다녀도 죽지 않자 불에 태워죽였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고난 닥쳤고, 순교했다. 앞으로도 복음 증거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받고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 어떤 사병이 군에 갔을 때에 상사가 교회 나간다고 구박하며, 수요일 밤과 주일 밤에 교회에 다녀오면 군화발로 차며 힘들게 했다. 이 사병은 그럴 때마다 그 상사의 구두를 밤에 몰래 일어나 깨끗이 닦아서 놓아두곤 했다. 이런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다. 욕하면 듣고, 때리면 맞고 하는 것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인 것이다.
❚ 장로는 감옥에 끌려가 240대의 매를 / 바실레아 슐링크((M.Basilea Schlink)는‘사랑의 승리’라는 글에서 중국의 문화혁명 때 엄청난 핍박은 받은 기독교인들을 소개하였다. 지하 교회를 섬기던 장로가 끌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풀려난 뒤에 간증한 내용이다. 장로는 감옥에 끌려가 240대의 매를 맞았다. 살라고 때리는 게 아니라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라 죽도록 아팠다. 매일같이 맞고, 쉬었다가 또 맞고, 쉬었다가 또 맞고, 그렇게 계속해서 240대를 맞았는데, 맞던 중에 장로는 스데반을 생각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 같았고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에게도 예수께서 나타나셨다.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오셔서 품에 안으시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하였다. 안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맞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 카타콤 / 지금도 로마의 카타콤에 1,400만 개의 뼈가 있는데 그들은 모두 순교자들이다. 초대 교회 당시 로마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다. 하나는 땅 위에 화려하지만, 도덕적으로 퇴폐한 도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땅속에 있는 어둡고 처절했지만, 신앙과 사랑이 넘치는 도시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카타콤의 길이는 약 560km 이상이 된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신앙인이 토굴 속에서 고난당하며 죽었는가를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이 세상의 무엇보다 신앙이 더 가치가 있었으므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땅속에 숨어 살다 죽어야 하는 카타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인간은 재물이나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압받아서는 안 되며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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