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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중원 전사들의 북황벌 기습전
파천은 개봉으로 들어섰다. 북황인 상여락의 본거지로 들어온 것이다.
그가 이곳을 찾은 것을 보니 첫 번째 목표로 혈마천의 주력을 부수려는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상여락과 핵심 고수들을 치기 위해서라는 게 더욱 그럴 듯하다. 파천은 이를 위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다.
매번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는 상여락이었다. 그 지독히 강한 운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그의 위치와 도주로를 철저히 차단한다. 이런 계획 하에 수하들을 배치해 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중, 삼중으로 포위망을 구축하고 그것도 안심이 안 되어 파천이 미리 침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 뒤 도주로를 확보하는 것에도 적지 않은 정성을 기울였다.
한편 개봉 북황의 처소에서는 이런 것도 모르는 상여락이 수하들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목 밑에까지 다다른 살검을 낌새조차 채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운은 더 이상 효력이 없는 듯했다.
“아직도 진척 사항이 그 정도란 말이냐.”
상여락이 버럭 고함을 질러대자 혈마천 고수들은 황송하다는 표정들이었다. 혈마천주를 병신으로 만들고 그 자리를 꿰찼든 어쨌든 간에 현재의 그는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한 손에 거머쥔 절대자였다. 툭하면 짜증을 부리고 틈만 나면 수하들을 두들겨 패는 그의 폭군 기질이 예전부터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의 현재 감정 기복이 얼마나 심하냐 하는 것이었다. 이 절대자가 또다시 위험한 칼을 휘두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작은 실수를 저지르고도 목숨을 잃어야 했던 동료들을 떠올리며 그들은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소면살검.”
“폐하, 말씀하십시오.”
폐하라고 했다. 스스로 북황이라 자칭한 것도 모자라 수하들로 하여금 황제에게나 붙이는 극경칭을 사용토록 한 것인가. 그리고 무림맹을 배신하고 무황성에 투신했던 소멸살검 우현충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도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현재 상여락의 신임을 토대로 북황벌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몇 번의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으로써 상여락의 신임을 얻어낸 것이다. 특히 그는 타고난 아부 근성을 발휘해 상여락의 가려운 데를 잘 긁어 주었고, 북황 이외에는 사람이 없다는 듯 남들을 헐뜯어 격하시키는 재주가 탁월했다. 이런 점을 높이 사 상여락은 그를 한껏 높은 지위로 격상시켜 준 것이다.
수하들 사이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다수의 수하들이 배신자인 우현충을 경원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짐나 상여락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동류의식이라고 할 만한 묘한 감정마저 갖고 있었다. 자신도 사형을 배신했으니 초록은 동색이라고 죽이 맞는 건 당연했던 것이다.
“그들이 왜 이토록 진행을 지연시키는 거라 생각하나?”
“그야 한 가지 이유뿐이겠지요.”
“으응? 그게 뭐지?”
너무도 쉽게 대답이 나오려 하자 상여락은 궁금하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다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리 뛰어난 인재라고도 할 수 없는 우현충. 그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조금은 의외였다. 따지고 보면 밥 빌어 죽 쒀 먹을 놈이라 내심 판단할 정도였다.
“폐하의 지극히 높으신 영도력을 그들이 견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역시 그의 입에서는 아부 근성으로 똘똘 뭉친 발언이 서슴없이 튀어나왔다. 그의 말이 타당성이 있건 없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상여락의 얼굴은 금방 흐뭇함으로 번져 갔으니까. 결국 이런 걸 보면 간신은 다스리는 자의 그릇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흐음,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
“새외 세력 중 지금껏 남아 있는 저희 혈마천이나 남황벌의 천황부를 제외한 유일 세력인 사황성이 사사혈교나 북해빙궁의 잔존 세력을 흡수했다고는 하지만 세력면에서 우리들에게 미치지 못함은 당연합니다. 그들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건 마전을 비롯한 무황성에서 비호해 줬기 때문이지요. 최근의 무황성은 호광성 전역에 걸쳐 있던 전력마저 거두어들이고 있는 바 더 이상의 지원은 힘든 실정입니다.
결국 우리와 남황벌이 친다면 그들은 금세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야말로 시작만 하면 장악하는 건 여반장인 일이지요. 결국 이런 시점에서 남황께서는 소견이 좁으시다 보니 이후의 결과에 대해 염려하고 계신 듯 합니다.”
슬슬 상여락의 얼굴을 살펴 가던 우현충은 말을 간략하게 해야 될 시점이 도래했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폐하의 극히 뛰어난 영도력에 자신들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결과물에 대한 소유권 분쟁에서 힘의 열세를 느끼고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흐음, 그럴 듯하군.”
상여락의 호응에 우현충은 내심 흡족해졌다. 오늘의 발언으로 당분간은 저 무식하고 과격한 폭군으로부터 안심하고 지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두 사람과는 달리 다른 수하들은 어이가 없어 발작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생각해 누르고 또 눌렀다.
“그래도 너무하군. 벌써 예전에 시작되었어야 할 일이건만 아직도 망설이고 있으면 어쩐단 말인가. 우린 이 일 때문에 중원무림맹의 본진을 치는 것까지 미루고 있었는데 말야.”
“폐하, 너무 심려 마십시오. 결국엔 그들도 폐하의 크고 넓으신 뜻을 받들어 지극하신 영도력에 흠뻑 젖어들고 싶어할 때가 올 것입니다.”
밑에 부복하고 있던 수하들은 소름이 다 돋아날 지경이었다. 반면에 저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책하는 마음도 조금은 들었다.
“잘들 논다. 이놈이나 그놈이나 다 똑같군.”
갑자기 들려 온 소리에 상여락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고작이었다. 자신이 곧 법이요, 진리인 전당에서 이런 잡스런 발언을 듣고도 묵묵히 견디고 있는 건 이유가 다 있었다. 그 장본인이 바로 자신조차 상대하기 벅찬 천향옥봉이고 조면 자연스런 반응이었던 것이다. 그녀 정도는 솔직히 우습게 여기는 상여락이었지만 아직은 그녀가 필요했다.
“이 시간에 네가 여긴 웬일이냐?”
“사숙, 정신차려. 이런 것들 모래사장의 모래만큼 많아 봤자 소용 없어. 혀 끝에 꿀이나 처바른 것들은 어디 써먹을 데도 없단 말야.”
“너 아까 사형한테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사부에겐 이제 흥미 없어. 그 병신 봐 봤자 마음만 울적하고, 역시 패배는 아름답지 않거든.”
현천마녀 일곱을 뒤에 거느리고 다가간 천향옥봉 자운은 엎어져 있는 우현충의 머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야, 야.”
“네?”
고개를 발딱 쳐든 그의 머리통을 발끝으로 슬며시 내리눌렀다.
“지저분한 상판때기는 올리지 말고 대답만 해.”
“알겠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난 너같은 배신자가 가장 마음에 안 들어. 진작에 포를 뜨려 했지만 사숙이 말려서 내버려 둔거야. 알아?”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은혜 죽어도 잊지 않겠......”
“이게!”
발로 지그시 누르자,
“컥.”
다시 머리가 바닥에 처박힌다.
“나한테까지 되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려 하네. 너!”
“네.”
“네가 북황벌 정보 총괄 책임자 맞지?”
“그렇습니다만......”
“어제 오늘 이상한 놈들 못 봤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개봉에 고수들이 출몰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어. 내가 거느리고 있는 천향단에서 들어온 보고야.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허 참! 사숙.”
“왜?”
“이 자식 이 기회에 콱 죽여 버리지 그래?”
“내버려 둬라. 그 녀석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또 괜히 트집을 잡고 그러냐.”
“열심히? 하긴 뭐 열심히 아부는 하고 있지. 이 녀석 때문에 인근 꿀집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는 하더군. 그놈의 꿀을 얼마나 혀 끝에 발라대는지 말야. 아주 역겨운 놈이야.”
“그런데, 그것 정말이냐?”
“왜, 사숙도 관심있어? 신경 꺼. 내가 먼저 찍었으니까.”
“그래서 지금 나가는 길이었느냐?”
“그런 셈이지. 나 갔다올 테니 그 동안 사부나 내 처소에 모셔 놔. 이건 부탁이 아니고 경고야. 이미 병신 된 양반 너무 그렇게 내돌리다간 벌받아. 알았어?”
“저, 저 버릇없는 말투하고는......”
천향옥봉이 사라지고 나자 상여락의 얼굴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만히 두고 보자니 혀 밑에 돋은 가시오, 버릇을 고쳐 보자니 여간 힘에 부친 게 아니었다. 게다가 어쨌든 간에 전력에 크게 이바지하는 모양새니 이래저래 내버려 두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혼쭐 내주리라 내심 다짐하고 있었다.
“성질 머리만 좀 있다면 첩으로 들어 앉히면 딱인데 말야.”
고개 숙이고 있던 우현충은 속으로 욕을 해댔다.
‘사숙에게 반말해대는 년이나 사질을 첩으로 삼겠다는 놈이나......하긴 뭐 나도 이런 말할 처지가 아니지.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인가? 아니군, 나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하니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거군. 바보같은 놈, 고작 이런 대접이나 받자고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그도 사람이고 보면 후회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상황이 오면 또다시 배신할 사람이기도 했다.
천향옥봉은 개봉성 대로로 나왔다. 뒤에는 여전히 현천마녀들이 호위했고, 사방에는 알게 모르게 천향단의 수하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개봉 역시나 오가는 사람들이 뜸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었다. 북황이나 남황이나 두 사람 모두 그들 본거지에서만은 비교적 살생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개봉으로 몰려 온 사람들은 앞으로야 어찌 되었든 당분간만이라도 살길을 찾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수가 상당히 많았지만 흉흉한 인심 때문인지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천향옥봉은 거리를 거닐며 여기저기를 관찰했다. 당장 눈에 띄는 고수는 없었다. 아무리 숨기려 한다 해도 오랜 수련을 거친 자들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걸음걸이나 눈빛이나 풍기는 기운이 예사롭지 않은 법이었다. 일부러 숨기려 한다면 더 드러나는 경우도 있었다.
천향옥봉은 처음에 천향단으로부터 보고가 올라 왔을 때만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몇 건이 중첩되자 슬며시 호기심이 일기 시작했다. 현 무림에서 그 정도의 고수를 확보하고 더군다나 조직적으로 움직여 이곳까지 이르렀다면 이는 틀림없이 중원무림맹일 확률이 많았고 혹시나 예전에 대결했던 자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이었다.
그녀에게 그 당시의 패배는 충격이었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 할 길은 다시 그 자와 싸워 이기는 길뿐이라 생각해 왔다. 혈마천 삼대마공으로도 이길 수 없었던 자! 아니 처참하게 깨졌단 표현이 더 정확했다. 실신한 자신을 객점에 뉘여 놓고 떠났다는 신비인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 이유는 물론 재대결이었다.
그 동안 그녀는 생명을 걸고 수련을 쌓았으며 다른 무공들을 접목시켜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다시 붙는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상여락이, 제 멋대로인 자운을 묵인하는 것도 그녀가 조금은 껄끄럽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녀는 여자 고수들을 찾아내어 조직해 나갔고 천향단이라 명명했으며, 더 나아가 직접 수련시켜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현재는 혈마천 내에서도 중심 조직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시진의 번화가 중심까지 이른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며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 이십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단삼 차림의 여인이 천향옥봉을 향해 다가왔다.
[단주님, 앞에 있는 객잔 안에 약 오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자신들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보기에도 보통의 고수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상대의 전음에 천향옥봉은 약간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오십여 명씩이나......이것들 아주 대담한 놈들이군. 여기가 어디라고 멀쩡히 활개치고 다녀! 좋아 간만에 제대로 몸 좀 풀겠군.’
[천향단의 전 단원을 주변에 배치해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존명.]
현천마녀들을 보며 자운은 힘차게 말했다.
“가자.”
그들은 자운의 곁을 바짝 따르고 있었다. 그녀가 목표로 한 곳은 중화루였다.
한편 중화루 내부에서도 여러 사람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 이었다.
“분명 자운이 틀림 없느냐?”
“그렇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건 역시 파천과 그 수하들이었다. 중화루는 파천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처음 태산을 내려와 개봉에 발을 들였을 때 남궁혁련 일행을 만난 곳이었고, 소면살검 우현충과 첫 악연을 맺은 곳이기도 했다. 그곳을 다시 찾은 것이다.
이층에는 파천과 수하들뿐이었다. 일층에도 손님이라곤 십여 명 남짓에 불과했다. 여러 개의 탁자에 나누어 앉은 파천 일행들은 계단이 있는 곳을 향해 일제히 시선을 움직였다.
파천 일행들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간단했다. 처음 북황벌에 대한 조사를 하다 보니 천향옥봉 자운이 현재 이곳에 있으며 천향단 단주라는 신분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최근 행적을 볼 때 수상한 무림 고수들이 등장하면 꼭 자신이 직접 나와 상대했다는 정보를 파악했다. 그 점에 착안해 일부러 티가 나게 행동했고 그 결과 그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이런 걸 알 리 없는 천향옥봉 자운은 한 점 망설임 없이 이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규칙적이며 힘차기만 했다. 파천의 일행 중에는 그 소리에 따라 함께 가슴이 뛰는 자가 있었다. 광마존! 꿈에서조차 그리던 자운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심정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녀의 현 상황이 어떻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몰라 본다고는 꿈에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다해도 심정만은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단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잠깐의 기다림일지언정 광마존은 가슴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드디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딱 멈추며 그녀의 모습이 실내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층으로 올라선 천향옥봉은 얼굴이 급변했다. 수하의 보고대로 오십여 명이나 되는 수가 모여 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신형을 고정시키고 마치 기다리고 있는 듯한 태도 때문도 아니었다.
‘이들은......엄청난 고수들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자들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이 정도의 고수들이 이렇게 많이......그것도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지?’
솔직히 천향옥봉 자운은 기가 질렸다 천하의 천향옥봉이 계단을 다 오르고도 꼼짝 못한 채 멈추어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중앙에 앉아 있는 저 자. 두렵다.’
파천을 두고 하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광마존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가고 있음을 그녀는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동안 마주쳤다. 천향옥봉 자운은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그 순간 광마존의 두 눈에서 참고 있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천향옥봉 자운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가는 것 같았고 어지러움을 느꼈다.
‘저 자, 어디선가 본 듯한데.....기억에는 없다. 왜 날 보고 우는거지? 왜? 왜?’
자운은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걸 떨치기라도 하듯 그녀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지? 대체 무림에 너희들 같은 자들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군. 여기 개봉엔 무슨 일인가? 중원무림맹에서 왔나?”
그녀는 정확하게 파천을 직시하고 질문했다. 파천이 이들 무리의 수장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혈마천 대총사였던 상천일에게서 머물러 떨어질 줄 몰랐다.
“사숙, 당신이 어떻게 거기 있는 거지? 오호, 이제 보니 중원무림맹의 떨거지들이 맞았나 보군. 당신이 배신했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지.”
상천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천향옥봉 자운.”
파천의 부름에 자운은 움찔 떨었다.
‘나를 알고 있나? 하긴 사숙이 내 얘기를 했겠군.’
“나를 모르겠나? 그리고 여기 이 친구.......”
광마존을 돌아보다 파천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의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흐음.”
“난 북황벌의 천향단주 천향옥봉 자운이다. 너희들을 모두 체포 하겠다.”
파천은 그녀가 자신들을 전혀 알아 보지 못한다는 걸 확신하고서는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 몰라 보는군. 내 옆에서 울고 있는 불쌍한 친구조차도 말야. 안타까운 일이야.”
“쓸데없는 소리 마라. 순순히 날 따르겠는가 아니면.....”
“아니면?”
“강제로 너희들을 체포하겠다.”
“강제로?”
“그렇다. 너희 모두를 체포.....”
“자운”
광마존의 목소리엔 애절함이 담겨 있었다. 천향옥봉은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또다시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런 반응이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아득해지는 심정을 느끼곤 자운은 어딘 가로 자꾸만 달려가고 있었다.
‘저 음성,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하려 해도 확연히 떠올라 주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기이한 느낌에 전신이 떨려 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것 자리를 피해 줘야겠군.”
“닥쳐라. 어딜 가겠다는 거냐. 내 말을 우습게 여기고 있군. 너희들은 이미 포위되었다. 이 주위엔 천향단의.....”
“자운, 나를 자세히 보시오. 나를 모르겠소?”
자운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평소의 자신이 아니었다. 자꾸만 어딘 가로 추락해 가는 것만 같았다. 다리에 힘이 쭉 빠질 만큼 급강하하였고, 아득함이 밀려왔다. 믿을 수 없었지만 낯선 사내의 한마디에 이 지경이 되고 있었다. 자운은 몸을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온몸이 나른해지며 가슴이 사정없이 뛰는 건 무슨 이유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애써 그걸 부인했다.
“쳐라.”
결국엔 그녀의 단호한 음성이 토해졌을 뿐이다. 현천마녀들이 앞으로 쏘아져 나가자 파천은 싱긋 미소 지었다. 수하들이 일어서려는 걸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녀들이 노리는 건 오직 파천 하나였다. 자신에게로 집중되는 검 일곱 자루를 보며 파천은 여유 있게 웃고만 있었다.
현천마녀들의 검은 빠르고 강했다. 빠른 발놀림 이후에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이은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들의 얼굴엔 상대가 방비조차 하지 못한다는 확신으로 충만했다.
“멈춰.”
파천의 입이 열리며 흘러 나온 나지막한 소리! 그렇지만 짧은 그 한마디가 연출해낸 것은 경이 그 자체였다. 현천마녀들의 검이 파천과 한 자 거리를 두고 멈추어져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천향옥봉은 이내 입술을 잘근 씹으며 앞으로 신형을 쏘아 가려 했다. 그때 또 다시 광마존이 입을 연다.
“자운. 그만두시오.”
광마존은 신형을 일으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을 적셨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붉어진 눈은 끝임없이 흔들렸다. 굳어있는 현천마녀들을 지나 자운에게로 향하는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그대에게로 가는 걸음이 왜 이리 힘들었는지 모르겠소. 내 마음은 하루라도 그대를 향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러나 매일 난 그리움만 담아 돌아와야만 했소. 자나깨나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소.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대가 나를 알아 보지 못한다 해도 난 그대를 느낄 수 있소. 그대의 영혼이 날 알아 보고 날 힘차게 끌어안고 있다는 걸 난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낄 수 있소. 사랑하오. 사랑하오, 자운.’
광마존이 곁에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그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파천은 그들의 모습 가운데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설란, 그녀는 아직 무사할까? 진정 ......보고 싶구나.’
광마존의 사랑을 지켜 주기 위해 마지막 기회를 제공하는 자리였다. 자운이 그 동안 중원에 끼친 해는 죽음으로도 보상받지 못한다. 광마존도 이런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운을 포기 할 수 없었다.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치려 했던 광마존은 차마 그녀를 져버릴 수 없었다.
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파천. 그 역시 자운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부여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기억을 못한다. 이건 두 사람의 사랑이 어쩌면 영원히 이어질 수 없는 최대의 위기인지도 몰랐다. 모두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자운, 나요. 일인지하 만인지상객 담대추광이오. 광마존, 광마존을 모르겠소?”
“담대추광? 광마존?”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그 이름만 연속해서 되뇌었다. 기억의 파편은 어둠 속 깊은 늪 아래에서 떠돌고만 있었다. 움찔움찔 떨어대며 제 존재를 알리고 있었지만 그 형체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낯이 익다. 그런데 모르겠어. 누구지? 저 얼굴, 저 음성.....모르겠어.’
자운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무슨 상관이야. 나랑 어떤 관계가 있든.....’
자운의 검이 부르르 떠는가 했더니 급속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검 끝에 매달린 투명한 형체는 정밀한 검강이었다. 너무도 급작스런 공격에 광마존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 짧은 순간 광마존의 뇌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살려야 한다.’
천만 번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눈앞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죽어 가는 걸 용납할 수는 없었다. 광마존의 눈에서 맺혀 있던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그는 두 팔을 힘차게 벌리며 오히려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이런 어리석은......”
광마존이 팔을 옆으로 벌리는 순간 파천의 몸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죽어”
자운의 눈엔 살기만이 존재했다. 예전의 눈에 가득했던 그리움이나 애틋함은 보이지도 않았다. 투명한 검강이 광마존의 심장 어림을 노리고 쇄도했다.
[자운, 죽어서도 그대를 잊지 않으리다.]
자운에게 마지막 전운을 남기고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챙강
“그만둬라. 너는 광마존을 두 번 죽일 참이냐.”
파천은 이형환위로 광마존의 앞을 막아서 있었고 자운의 검을 맨손으로 잡아 부러뜨려 버린 것이다. 광마존은 눈을 뜨지 않고도 어찌된 상황인지를 알 수 있었다. 자운은 파천의 압도적인 신위에 기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가 했더니 곧장 회전을 시작했는데 그녀의 중심에서 혈광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만 하라고 하지 않았나.”
꽈당
“으음.”
자운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파천의 두 손이 허공에서 기이하게 휘젓는가 싶었더니 그녀의 몸은 무엇인가에 결박당하기라도 한 듯 휩쓸렸고 허공에서 핑그르르 돌다 처박힌 것이다. 그녀는 넘어진 충격보다 상대의 이해할 수 없는 강함에 놀라고 있었다.
‘저자는 뭔가? 날 어떻게 한 거지?’
“네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았을 테니.....그만해라. 그리고 광마존.”
휘익
퍽
파천은 뒤로 돌며 손등으로 광마존의 뺨을 쳤다.
“누가 네 마음대로 죽음을 결정하라 했더냐. 네 생명이 네 것이냐.”
옆으로 돌아간 고개를 그대로 둔 채 광마존은 아무소리도 못했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대로 네가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여겼더냐. 네 생명으로 자운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그건 오산이다. 이런 식으로 네가 죽고 나면 내가 과연 자운을 사려 둘 것 같은가. 너 때문에 자운을 용서하려는 건데 자운 때문에 네가 죽는다면 난......단연코 그녀를 죽일 것이다. 설사 그녀가 살아 남아서 기억이 돌아온다면..... 과연 네 죽음으로 얻은 생명을 다행으로 여기며 모질게 이어 갈까. 왜 모든 걸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냐. 살아 있고 나서야 그녀를 지켜 줄 게 아닌가. 이번 한 번만.....더 용서하겠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마라.”
“지존.”
광마존과 파천은 다시 마주 보았다. 예전 천마비고에서 처음 마주 선 것처럼 그들은 다시 마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엔 처음에는 없었던 세월의 흔적들과 충정과 신뢰가 쌓여 있을 뿐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마주섰다.
“절 어리석다 생각하시겠지만.....이것이 제가 사랑한는, 살아가는, 섬기는 법입니다. 죄송합니다.”
“되었다. 자운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자운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충한 바람인지 모르지만.....살려 주십시오.”
“허 나원 참.......”
파천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그걸 묻고 있느냐? 살리는 건 당연한 거고......어찌했으면 좋겠냐고?”
“모르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광마존을 보며 파천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라고 해서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적이라고 보는 게 더 가까웠다. 그녀를 대동한다는 건, 더군다나 이 정도의 고수를 제압도 않은 채 데리고 다닌다는 건 품속에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넣고 다니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할 수 없군. 네가 책임져라. 제압을 하든 그냥 두든 넌 지금부터 자운 곁에서 그녀의 모든 걸 감시하고 지키고.....보호해라.”
“지존 감사합니다.”
파천은 자운 앞에 쭈구려 앉았다.
“엉뚱한 짓 하면 용서 않겠다. 잘 판단하고 얌전하게 굴어라 알겠느냐?”
“닥쳐! 내가 인질 노릇을 할 줄 알아. 얘들아 쳐라.”
우지끈 뚝딱
사방에서 쳐들어 오는 인영들이 있었다. 검은 무복 또는 단삼이나 경장을 차려 입은 여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손엔 하나같이 검이 들려 있었다. 파천은 독 오른 자운의 눈빛을 노려보며 수하들에게 명했다.
“하나 남김없이 모두 제압해라.”
“존명.”
“존명.”
그의 수하들은 사방에서 덤벼드는 천향단의 여 무사들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마중했다. 마치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녀딸을 안으러 가는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너무도 현격한 실력 차이라서 대결한다는 의미조차 없을 듯했다. 소군은 언니뻘 되는 천향단원의 검을 사부인 파천이 하던 것처럼 맨손으로 덥석 잡으며 뒤로 흘렸다. 중심을 잃고 딸려 오는 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차올렸다.
퍽
“으음”
그녀는 실신했는지 축 늘어지고, 금세 다른 자들을 향해 움직였다. 천살은 조금은 난감한 표정이었다. 단삼을 입은 여 무사가 다리를 휙휙 들어올리며 공격을 해오자 검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쩔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여태껏 사람을 죽이는 살검만을 펼쳐 왔었고, 단 한 번도 여자를 상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검을 다시 꽂고는 맨 주먹으로 상대의 복부를 노렸다.
율극은 오늘도 통제가 되지 않는 인간병기였다. 그에게서 자비심을 바라긴 힘들었다. 더군다나 파천의 ‘제압’ 하란 말의 정확한 의미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에게 가장 손쉬운 건 역시 죽이는 거였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며 두, 서너 명을 한꺼번에 죽여 갔다.
구음마장은 이제 거의 형체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투명했다.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몸이라도 푸는 듯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손짓에 그녀들은 맥없이 픽픽 쓰러졌다. 하나같이 하얗게 굳어 같다.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보던 빙궁주가 율극의 앞을 막아서며 교묘하게 방해하기 시작한 건, 아들이 살인마가 되는 걸 보지 않으려 하는 아비의 마음이었다.
광마존은 여전히 파천의 뒤에 서 있었다.
“자운, 수하들을 멈추게 해라.”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천향단원들을 보며 파천이 한 말이었다. 자운은 입술을 더욱 세차게 물며 두 눈에 살기를 피워 올렸다.
“뭐, 상관은 없겠지. 어차피 수하들을 소모품 정도로 여겼을 테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도 이리 독할 수 있는 거겠지.”
“모두 공격을 멈춰.”
자운이 빽 고함을 질렀다.
퍼퍽
“꺄악.”
막아 선 빙궁주를 교묘하게 따돌린 율극이 회심의 장력을 가녀린 여 무사의 몸에 정통으로 작렬시키는 소리였다.
“이놈아, 됐다. 그만해라.”
빙궁주가 뒤에서 율극을 끌어안았다. 격전은 한 순간에 멈췄다.
자운은 파천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독기 서린 말을 해댄다.
“잘들어. 오늘의 수모는 백 배, 천 배로 갚아 주마. 네 가장 소중한 것을 산산히 부셔 주겠다. 네가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내 꼭 보고야 말겠다.”
분함을 참을 수 없다며 파르르 떠는 모습에 파천은 실소를 했다. 단순한 승부욕의 차원이 아닌 것 같았다.
“광마존,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라. 난 모르겠다.”
파천이 뒤로 물러서는 순간 광마존이 앞으로 다가섰다. 두 사람은 다시 눈길을 마주했다.
“자운, 지존께 무례하게 대하지 마시오. 자, 일어나오.”
그가 손을 내밀자 자운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그 손을 뿌리치고는 스스로 일어섰다. 발딱 몸을 일으킨 그녀는 아직 멀쩡히 서있는 천향단원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색한 눈길을 다시 광마존에게 고정시키며 물었다.
“우릴 어쩔 셈이냐?”
“내가.....어떻게 해주길 바라오?”
“수하들만은 돌아가게 해다오.”
“지존 괜찮겠습니까?”
자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한 말이었다. 그러자 파천은 모두를 둘러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같이 가는 게 좋겠군. 어차피 우리도 상여락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
“들었소, 자운.”
“사숙을 만나러 간다고? 왜?”
“왜긴? 그놈을 홀딱 벗기려고 가는 거지.”
파천의 말에 자운은 별반 놀라지도 않았다.
‘하긴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더군다나 저 정도의 고수들이라면 북황벌 수뇌들을 모조리 처치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 그렇다고 이런 대낮에 정면으로 치고 들어간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냐. 자신들의 능력을 과신한 데서 오는 쓸데없는 만용이지.’
광마존과 자운은 어께를 나란히 하고 걸었고, 그 뒤를 파천과 소군이 함께 걸었다. 율극은 소군의 옆에 있었는데 영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파천이 그에게 몇 번이나 당부한 말 때문이었다.
“너는 오늘만은 소군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면 안 된다. 알겠느냐?”
율극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북황벌 총단인 옛 북검회의 거대한 장원 안으로 들어서자 좀처럼 있을 수 없는 갈등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 말해 벌 때 같은 혈마천 무사들이 덤벼들기 시작 한 후부터는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이다.
나머지 전사들은 파천의 곁에서 일정한 간격을 벌리고는 덤벼드는 자들을 무차별 공격해 갔다. 파천은 일부에게 반대편으로 갈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중앙에 버티고 있는 옛 신검각 주위를 포위하는 형세를 자연히 갖추게 되었고, 파천과 광마존 등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오늘은 그 어디에도 살길은 없을 것이다.”
파천의 그 말은 상여락에 대한 사형선고인 셈이었다. 그의 의지는 이미 상여락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그를 살려 둘 이유보다는 죽여야 할 이유가 훨씬 많았다. 독고무가 죽었을 때 파천은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그의 복수만은 꼭 해주겠노라 다짐했었다. 이제 그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뭐야? 고수들이라고? 몇 놈 되지도 않는다면서 이리 호들갑을 떤단 말이냐?”
바닥에 부복한 노인은 다급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저, 그것이 상대들은 수의 많고 적음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닌지라......”
“닥쳐라.”
펑
“끄악.”
고개를 쳐들던 노인이 묵사발이 되어 한쪽에 구겨지듯 팽개쳐진다. 그것을 본 자들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벌써 몇 번째인가. 수하의 목숨 알기를 땅 위에 기어다니는 개미만도 못하게 여기는 자를 주군으로 모시고 있으니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생명을 뺏어 버린다는 건 너무 심했다. 기본적인 주종간의 충정마저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수긍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반발하자니 저 괴팍한 성질에 살려 둘 것 같지도 않으니 잠자코 있는 게 그나마 오래 살길이었다.
“있는 놈들이라고 하나같이 이런 허약한 놈들뿐이니 내밀원과 마전이 우릴 우습게 여기는 거다. 모두들 들어라. 오늘 여길 침입한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잡아들여 내 앞에 끌고 오너라. 내 그놈들은 친히 문초해 본 뒤,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내리겠다.”
자기 딴엔 한껏 위엄을 부리며 하는 말이었지만 듣고 있던 수하들은 속으로 욕을 해댔다.
“모두 나가 봐라.”
밖으로 나가는 자들 중엔 소면살검도 끼어 있었다. 그들이 아래로 내려가며 투덜거릴 때 누군가가 위로 빠르게 올라 오는 게 보였다.
“큰일입니다. 방어선이 모두 무너져 천환각 안으로 들이닥칠 것 같습니다.”
상여락은 예전 북검회주로 있으면서 이곳 신검각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처소이자 집무실인 이 건물을 천환각으로 고쳐 부르게 한 건 그의 특별한 야심이 작용했다. 그는 처음부터 황제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내밀원도 마전도 아직은 힘에 부치지만 언젠가는 전 세력을 하나로 통일해 이 땅의 진정한 황제가 되길 염원했다.
“이런 머저리들. 대체 뭘 했기에 성지 안으로 적을 들인단 말인냐?”
소면살검 우현충은 평소 하던 게 습관이 된 탓인지 상여락이 없는데도 천환각을 ‘성지’라 불렀다. 그런 그를 보며 모두들 코웃음을 쳤다.
“아악.”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성이었다.
“끄악.”
비명성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순간 서로의 눈을 찾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위에 올라가서 맞는 게 좋을 듯 한데......어떻소?”
하긴 지금 이들이 서 있는 곳은 계단이었다. 이런 협소한 곳보다는 좀더 넓은 곳에서 적을 맞고 싶은 건 본능적인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황제께서 그걸 용서하실지.......”
“끄악.”
또다시 들려오는 비명성은 바로 아래층이었다.
“그, 그럽시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층으로 뛰었다. 그들은 방금 우르르 몰려 나왔던 8층의 태룡전으로 들어섰다.
콰당
“으응? 너희들 뭐하는 거냐? 왜 이곳으로 다시 들어오는 거지?”
“적이 바로 아래까지 들이닥친지라.”
고개도 들지 못하고 문 앞에 선 수하들을 보며 상여락은 머리를 짚었다.
“그래서 꽁지에 불붙은 개들처럼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섰단 말이더냐?”
꽈지직
우당탕
“헉, 웬놈들이냐?”
“저, 적들이.....”
8층인 이곳 태룡전은 천황각의 의사청인 가장 큰 대전이었다. 예전엔 태의전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지금 사방에 있는 창을 부수고 적들이 들어섰다는 건 그들로서도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 층에 최소 2장에서 3장에 달하는 높이로 건축되어 있으니 이곳 8층까지의 높이는 최소 16장.
또한 천환각은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처소였기에 외벽에 각종 기관을 설치하여 외벽을 통해 오르지 못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결국 창으로 누군가가 들어서려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든가 바닥에서 단숨에 솟아 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적의 침입이 없었던 곳에 자그마치 십 수 명이 한꺼번에 들이닥쳤으니 이들이 널랄 만도 했다. 상여락은 여전히 태사의에 고요히 좌정한 채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저놈들은 전 무림맹의 수뇌들이군. 결국 오늘 쳐들어 온 놈은 파천이란 애송이였군.’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이곳이 태의전이었던 시절, 파천에게 비참하게 쫓겨났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오늘이야말로 기회가 온 것인가. 네 놈을 작살내고 진정한 무림황제로 등극하겠다.”
그의 호기로운 외침에 때를 맞춰 파천이 정문을 박살내며 들어섰다.
꽈당
콰지직
파천과 소군, 율극과 광마존, 그리고 자운이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미리 창으로 들어선 이들은 대부분이 전 중원무림맹의 인물들이었으나 대총사 상천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만이야. 사형도 왔군. 처치해야 할 놈들이 한꺼번에 찾아와줘서 무척이나 고맙다.”
상여락이 한 점 동요없이 태연해 하자 광마존 옆에 있던 자운이 비웃음을 흘렸다.
“사숙,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다간 제대로 팔다리 한 번 노려 보지 못하고 죽는 수가 있어. 긴장하는 게 좋아. 이 자는 엄청 강해.”
“하하하하.”
미친 듯 웃어대는 상여락의 광소에 태룡전이 부르르 진저리를 칠 정도였다.
“자운아, 넌 어쩌다가 그 꼴이 되었느냐. 엉덩이에 뿔 난 계집도 별 수 없었던가 보지? 난 그래도 네 실력이 꽤나 대단할 거라 여겼는데.......이제 보니 그런 어수룩한 놈한테도 당한단 말이냐.”
자운은 얼굴을 홱 돌려 그의 말을 외면했다. 어느새 혈마천 고수들은 상여락 쪽으로 몰려 들어 있었다. 수적인 면에서는 자기들 쪽이 월등했고, 실력 면에서도 지고 싶지 않은 그들이었다. 창문을 부수고 들어섰던 중원측 고수들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였다.
파천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상여락을 응시했다.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고 입술은 굳건히 다물렸다.
“네 놈이 이렇게 빨리 찾아 올 줄은 몰랐군. 네 놈이 죽게 되면 우리는 좀더 쉽게 모든 걸 움켜쥘 수 있겠구나.”
상여락이 하는 말을 파천은 귀담아 듣지도 않았다. 어느 집 개가 짖느냐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찾아 간 곳은 상여락 근처에 서있는 소면살검 우현충이었다.
“우현충.”
“매, 맹주님.”
아직도 그는 파천을 맹주라 불렀다. 그러자 상여락의 얼굴이 확 일그러지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놈이 뭐라고 하는 거냐? 네 놈은 아직도 네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른단 말이더냐?”
“폐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지른 소리에 중원측 인물들의 반응은 한가지였다.
‘미친놈!’
파천은 그런 그가 오히려 측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현충, 이러고 싶어서 배신했더냐. 너의 수하와 동료들을 판 대가가 고작 이런 거였다면.....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구나. 어디 또 기어오를 데가 있다고 아직도 무림에 남아 있었더냐. 차라리 심산에 쳐박혀 지은 죄나마 속죄하고 살았다면 우리가 다시 조우할 일은 없었을 텐데. 소면살검 일어나라. 죽음이나마 깨끗하게 맞아라.”
파천의 말에 소면살검의 엎드린 신형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때 상천일이 앞쪽으로 나서며 파천을 바라본다. 그러자 파천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여락아.”
“사형이라도 날 그렇게 부르지 못한다. 나는 북황이다. 지금은 무림의 절반이지만 장차 이 땅의 모든 걸 다스릴 자가 나란 말야. 예전의 사형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던 내가 아니란 말이다. 하하하하.”
“그래서 사형마저 그 꼴로 만들었느냐?” 상여락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던지 흠칫하는가 싶더니 진득한 살기를 흘려내었다.
“흐흐흐, 그래 나보다 약한 놈이 제 주제도 모르고 까불다가는 그런 꼴을 당하게 되는 거다. 얌전히 자리를 물려 줬으면 병신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사형은 지금 어디 있느냐?”
“사숙 그건 내가 알아.”
자운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운을 슬쩍 일별한 상천일이 상여락 쪽으로 걸어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상 대협.”
철혈검객 표행수가 상천일의 걸음을 붙들어 매었다.
“지존, 저놈 소면살검을 먼저 처단하게 해주십시오.”
전 북검회의 노고수가 원하는 일이었다. 파천은 상여락에게 제의했다.
“어떤가? 두 사람이 먼저일 것 같은데......그대 같은 초고수는 원래 제일 마지막을 장식해야 멋있지 않겠는가?”
상여락은 한껏 거드름을 피워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일리는 있군. 우현충, 일어나서 저 늙은 놈을 깨끗하게 절단내 버려라. 이건 명령이다.”
소면살검 우현충은 우거지상이 되어 어정쩡하게 일어섰다. 일어서긴 했지만 자신이 없어서인지 앞으로 나서지도 못했다.
상천일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표행수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철혈검객 표행수는 북검회 출신, 그것도 율령대 수장이었던 놈이 배신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껏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네 놈이 살아 활개치는 꼴은 내가 살이 있는 한은 보지 못하겠다. 너를 하루 빨리 돌아가신 태상회주님과 회주님에게 보내지 않고선 이 가슴이 터져 버릴 것이다. 더군다나 네 놈이 배신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회주님을 시해한 놈에게 빌붙어 아부나 하고 있으니 네 놈을 어찌 사람이라 하겠느냐. 그나마 양심이라도 있으면 이 자리에서 자결해 북검회의 원혼들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이놈아.”
한때는 상관이며 존경까지 했던 어른 앞에서 검을 꺼내 마주서기 주저하던 우현충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자 마지못하고 나섰다. 그는 기름을 먹여 새파란 광채를 뿌리는 검을 꺼내고선 검집을 한쪽으로 버렸다.
“죄송하오. 나로선 최선의 선택이었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나라도 살아야 했소. 내가 하지 않았다 해도 그 누군가는 했을 것이오. 중원인이라는 자부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요. 어차피 죽으면 끝인 세상.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아니겠소.”
“닥쳐라. 그 입을 찢고 오물로 가득 찬 그 머리통을 떼어내 주마. 타앗.”
더 이상 마주 대면하고 얘기하자면 자신의 입만 더러워진다. 여긴 표행수가 선공을 취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있던 우현충은 검 자루를 힘주어 꽉 쥐었다.
‘이번이 마지막 고비다. 저 늙은이만 처리한다면 당분간은 위험이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놈들을 모두 처치하고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도 있을 거다.’
우현충은 이런 생각을 일구며 나름대로 투지를 불태웠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패는 삶 아니면 죽음이었다. 예전의 실력차로 본다면 자신은 몇 초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배신의 대가는 그에게 권력과 영화뿐만 아니라 힘도 주었다. 그는 언젠가는 한 번쯤 자신의 삶을 저울질하는 피할 수 없는 고비가 올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게을리 하지 않고 준비를 해왔었다.
쇄애액
오히려 소면살검의 검이 먼저 빛을 뿌려 갔다. 검강이 솟구치는 분수 마냥 터져 오르며 표행수를 압박했다. 허공에 신형을 띄운 채 양단해 들어오는 공격 방위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적절히 상대의 허점마저 노리는 최선의 공격이었다.
“이놈, 그 동안 실력이 늘긴 했다만 어림도 없다.”
표행수는 내리꽂히는 그대로 더욱 가속을 더하여 검을 위에서 아래로 힘껏 그었다.
츠츠츠츠
검끝이 갈라지며 수십 개의 검강이 피어났다. 연 이어 검이 그의 손을 떠나 허공을 직단했다.
콰아아아
“이기어검술?”
소면살검은 경악하며 공격을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빌어먹을! 할 수 없다.”
그는 뒤로 몸을 뉘이며 데구르르 굴렀다.
“이놈이 어디로 오는 거야?”
상여락은 자신 쪽으로 우현충이 굴러 오자 짜증을 내며 손을 휘저었다.
콰콰쾅
“으음.”
표행수는 다섯 번 이상 공중제비를 돌고서야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그의 손에 검이 회수되긴 했지만 검날이 조금 상해 있는 게 보였다. 대충 아무렇게나 휘저은 장력 같았는데도 이 정도의 위력이자 그는 조금 놀란 상태였다.
퍽
상여락이 자기 발 밑에 처박힌 우현충의 머리통을 찼다. 공력을 운용하지 않았지만 꽤 큰 타격이었던지 우현충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병신 같은 놈, 어서 일어나지 못해!”
우현충은 황급히 발딱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제, 제가 도저히 당해낼 수준이 아닙니다. 폐하, 폐하의 지극한 위엄을 보이시옵소서. 저런 벌레 같은 자들은 폐하의 손짓 한 번이면 단번에......”
퍽
“으윽.”
아구통을 한 대 얻어 맞은 우현충은 이빨이 모조리 나가 버렸는지 벌린 입 사이로 핏덩이가 뭉쳐져 나왔다. 사이사이로 하얀 이빨도 여러 개 보였다.
“어서 나가서 싸워라. 등을 보이면 내가 죽여 버리겠다.”
우현충은 정말이지 나가고 싶지 않았다. 이기어검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건 스스로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이중에 그 정도의 고수란 몇 명에 불과했고, 안타깝게도 자신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너무도 잘 아는 그였지만 당장이라도 죽을지 몰랐기에 일단은 고개를 숙여 보여야만 했다.
“조, 조며.”
이 빨이 빠져서일까, 그의 말은 분명치 않았다.
“조아. 이래 주으나 저래 주으나 마차가지. 도바글하느 수 바께.”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분명치 않은 발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에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기 딴에는 비장하게 외친 소리였으나 상황이 긴박하지 않았다면 한 바탕 웃음이 터졌을 노릇이었다. 살기 위한 우현충의 몸부림은 꽤나 처절했다. 그는 검을 다시 한 번 꼬나쥐고는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놈, 더 이상 네 놈이 살아날 길은 없을 거다.”
한 점 흔들림도 없이 살수를 펼치는것만 봐도 표행수는 자신의 호처럼 철혈의 노검사였다.
“비어머글 노치네. 이저 사저이라고느 어꾸나. 이파사파이다.”
우현충은 자신이 한 말처럼 이판사판이라는 식으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짧은 보폭으로 빠르게 돌진해 가며 공력을 있는 데로 끌어올린다.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표행수는 검에 진기를 모조리 집어넣고는 검을 움직였다.
핑
“으아.”
소면살검의 한 팔이 어께에서 분리되며 피가 솟구친다. 얼마나 검을 꽉 잡았는지 떨어진 한 팔이 아직도 검을 쥐고 있었다. 그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았다. 그 순간 회전한 검이 되돌아오며 마지막 한 팔마저 몸통에서 분리해 버린다.
“커커.”
그는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대었다. 표행수가 손에 안착한 검을 들고 소면살검에게로 다가설 때였다.
“저런 머저리 같은놈.”
파앙
퍼퍼퍼퍽
상여락이 손을 흔들자 마치 몸 안에 폭약을 넣어 놓고 터트린 것처럼 소면살검의 전신 여기저기가 터져 올랐다. 비릿한 피 내음이 진동했다. 다가서던 표행수는 멈칫했다.
“선배, 물러서십시오.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상천일이 표행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표행수는 뒤로 물러서며 한 소리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저놈은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구나. 상 대협, 저놈을 꼭 처치해 버리시오. 살려 두면 두고두고 세상에 해악을 끼칠 놈입니다.”
“뭐라고 나불거리는거냐? 어차피 모조리 죽일 놈들이지만 네 늙은 놈은 더 잔인하게 죽여 주마.”
“여락, 정말이지 악취가 나서 못 견디겠다. 너는 구제받을 수 없는 인간 말종이다.”
파천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우현충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 건가. 죄 값을 치르는 거라지만 기분이 좋지가 않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따지고 보면 누가 누구를 정죄한단 말인가. 우현충, 네가 진정 빚이 있는 건 너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다. 그들이 너를 용서했을지.....’
두 사형제간은 마주섰다. 한 사람은 중원의 편에, 또 한 사람은 사문의 수장으로. 한쪽은 파괴하고 지배하려고, 또 한 사람은 그 손에서 중원을 지키고자 하는 입장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상대가 지나 온 인생의 흔적들 중 상당 부분을 공유했던 두 사람은 조금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특히 상천일의 심사는 말이 아니었다. 하나뿐인 사제는 돌아가신 사부가 늘상 일렀듯이 언제까지나 지켜 줘야 할 대상이었다. 그런 그를 죽이고 처단하기 위해 서 있는 자신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건 당연했다.
어린 철부지에서 기회주의자로, 다시 배덕자요. 폭군으로 변화하는 사제를 상천일은 연만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무엇이 잘못된 건 지. 어디서부터 둘의 운명이 꼬이기 시작한 건지는 두 사람도 알지 못했다. 단지 한 사람은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며, 두 사람의 관계를 오히려 떼어내고 싶은 꼬리표 정도로 여긴다는 것 정도였다.
“이제 보니 넌 바라보기 역겨울 정도로 추악해졌구나. 지금이라도 네 과오를 뉘우치고 용서를 빈다면......내 생명을 걸고서라도 널 변호해 주마.”
“상천일, 너야말로 역겨운 소리 그만해.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딴 소리를 하지? 넌 예나 지금이나 그 뻔뻔한 얼굴이 여전하군. 너야말로 배신자고 너야말로 사문의 대역죄인이야. 혈마천은 강한 자가 법이며, 진리이며, 순수한 정의지. 그걸 부인한다는 것 자체가 네 스스로를 속이는 거다.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하마. 너의 잘못을 회개하고 내 밑으로 들어 온다면 후히 대접해 주마. 중원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적! 거기서 무얼 얻고자 하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쓸데없는 짓이지. 저들의 입장에서 우린 영원한 이방인일 뿐이다. 그걸 모르다니 참 한심하군. 말이 많았어. 시작하지. 옛정을 생각해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끝내 주마. 고통은 없을 거야.”
자신만만한 태도에 상천일은 긴장했다. 마주서 보니 그의 당당함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예전의 사제는 아니구나. 나도 물론 강해지긴 했지만.....과연.......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겨야 한다. 저 녀석에게도 기회를 주려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 내가 지면 저 녀석은 죽는다.’
상천일은 그래서 더 긴장했다. 단 한 수에 결정 난다는 걸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절기는...어검강이다..그걸 저놈이 막아 낸다면......나로선 방법이 없다.’
지켜보고 있는 파천도 내심 불안했다.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이 어떠하든 두 사람은 전 내공격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자세로 보아 삼대마공 중 가장 강한 혈섬이다.’
상여락의 몸 중심선을 타고 오르는 혈광이 점차로 짙어갔다. 어찌나 선명한지 혈룡이 살아 꿈틀거리며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흐음, 혈섬이군.”
자운의 중얼거림에 파천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사실 자운도 중화루에서 그걸 펼치려다 채 펼치지 못하고 파천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크카카카, 아예 모조리 죽여 주마. 내 앞에서 감히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
상여락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폭발하는 마기와 함께 혈광은 점차 짙어지고, 상천일은 검을 허공 중에 세워 곧바로 진격시켰다.
쇄액
검 끝에서 피어나 검을 감싸고 있는 건 검강이었다. 어검술을 펼치며 검강을 뻗어내는 걸로 보아 상천일은 심어검을 터득하고 있는 듯 했다.
상천일은 두 눈마저 감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 길지 않은 거리였기에 촌음에 도달했는데 어이없게도 그가 노린 부위는 심장도 목도, 머리나 단전도 아닌 심장과 어께 사이였다.
“가라.”
상여락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모공에서 혈광이 사방팔방으로 화려하게 폭발했다.
‘이건 심상치 않아.’
파천은 두 사람의 격전 주위로 강기의 막을 쌓았다. 폭발력을 우려한 조치였다.
콰쾅
단 한 번의 부딪침.
드드드드
파천이 막을 쌓고 있었음에도 진동이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였다.
“으윽.”
“으음.”
두 마디의 신음은 거의 동시에 흘러 나왔다. 상여락은 뒤로 주르륵 밀려나 간신히 몸을 세우고 상천일은 붕 떠올랐다 바닥으로 떨어진다. 파천의 손이 슬쩍 끌어당기자 그가 뒤로 날아오고 한쪽에 있던 의노가 그의 신형을 낚아챘다.
“어떠냐?”
“혼절했습니다.”
“그리 큰 부상은 아닙니다. 진력을 한꺼번에 쏟아내서 생긴 일종의 탈진 현상입니다. 맥이 조금 불규칙할 뿐입니다.”
“다행이군.”
파천은 앞을 바라보았다. 상여락 또한 무사할 수 없었는지 피를 한 움큼이나 토해내고 있었다.
“크크크크, 내가 이겼지? 크하하하, 결국 난 두 사형을 모두 이긴 거야. 크크크, 사부가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자., 이제 파천 네 놈이 나설 차례다.”
“그 몸으로 말인가? 이제 그만 굴복하는 게 어떻겠나? 자결할 기회를 주겠다.”
“오만한 놈, 내가 지닌 힘은 채 발휘도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포기 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다. 네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날 이기지는 못해.”
‘대체 저 자신감은 뭐지?’
“날 잘 봐라. 잠시 후면 나조차 날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 있는 놈들은 모조리 죽을 거다. 내 장담하지.”
“형아, 나 저놈이랑 한번 붙어 보고 싶어.”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율극이 용케도 지금까지 참고 있다 파천에게 한 말이었다. 파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저놈은 내가 처리해야 해.”
“씨이, 알았어. 형아니까 내가 봐줬다.”
파천은 웃으면서 앞을 보았다.
“먼저 공격해라. 내가 시작하면 너에겐 기회가 없을 거다.”
이때 자운이 상여락에게 고함을 지른다.
“사숙,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공격도 못해 보고 끝날 테니 후회 없으려면 처음부터 전략을 쓰란 말아야.”
“염려마라. 저놈은 역천기공을 익히고서도 안심이 되지 않는 놈이야. 내 아무려면 저 놈을 앞에 두고 힘을 아끼겠느냐. 일월교주가 아니 한 이 역천기공 잎에서 버틸 수 있는 인간은 하늘 아래 없을 거다.”
“역천기공?”
파천은 생소한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알고 있기에 그런 이름을 가진 무공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금의 절대 무공들 가운데 파천이 알기로 그런 이름을 지니고 있는 건 없었다.
“일월교주가 가르쳐 준 건가?”
“허허허, 그렇지. 대사형도 이걸로 부수어 버렸다. 역천기공을 단지 3성만 끌어 올리고도 혈마천주를 이겼단 말이지. 하하하하, 조심해라.”
콰아아아
상여락의 몸을 휩싸고 검은 흑기류가 뭉실뭉실 떠올랐다. 그의 모공에서 뿜어지는 흑기류는 그다지 짙은 건 아니었지만 몸을 띠처럼 두르고 있어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상여락의 한 자 근처까지 뿜어져서는 얇은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으아아아.”
상여락이 고함을 지르자 그 막은 점차로 짙어져 갔다. 파천은 상여락의 기가 급작스럽게 상승해 가자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내공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마치 증폭되는 것 같다.’
“심상치 않다. 모두 아래로 피하라.”
파천의 명에 그의 수하들은 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후루루룩
천황각 주위에서 혈마천 무사들을 막고 있던 파천의 수하들은 위에서 떨어지는 동료들을 보며 벌써 끝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모두 멀리 피해라.”
그들은 의심하거나 따져 볼 겨를이 없었다. 다급해 하는 모습만으로도 위기를 감지했다. 달려드는 혈마천 무사들은 아랑곳없이 그들은 될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신형을 날려 갔다.
한편 상여락과 마주한 파천은 곰곰이 따져 보기 시작했다.
‘저것이 역천기공의 힘인가? 잠력을 격발시키는 건가? 그렇다면 저건 펼치는 자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상여락 더 이상 끌어올리면 너도 위험하다.”
파천의 말이 귀에 들어올 상여락도 아니었고, 이미 그는 이지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혈마천 고수들은 손에 땀을 쥐고 바라 보고만 있었다.
콰카카카
기류가 더욱 힘차게 대전 내를 휘돌아다녔다. 인간의 몸에서 뿜어진 거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맹했다.
드드드득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수하들은 겁이 덜컥 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모두 죽어라.”
번쩍
파천은 그 순간 역천기공의 힘을 측정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호신강기를 최대한 상승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의 기운을 최대한 응축시켜 몸 주위에 둘렀다. 수십 겹의 호신막이 쳐진 것이다.
콰콰콰쾅
우지끈
와르르르
9층에 달하는 천황각이 요란한 굉음을 지르며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다.
“살려 줘.”
“으악.”
“피해.”
밑에 웅성거리고 있던 자, 천황각 상층으로 뛰어 올라가던 자, 대전에 남아 있던 자들이 졸지에 무너지는 건물더미를 피하지 못하고 매몰되어 갔다. 비명소리마저 내려않는 괴음에 깔려 버리고 말았다. 근처에 있던 자들은 누구도 멀쩡할 수 없었다.
콰쾅
건물이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2차 굉음이 진동하고도 한참 동안이나 그 공간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자욱한 먼지구름이 30장 넘게 치솟은 까닭이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버섯 모양을 한 괴물이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소리마저 잠잠해질 무렵.
물러났던 파천의 수하들이 근처로 다가오며 고함을 질렀다.
“지존, 어디 계십니까?”
“지존.”
“저, 저기다. 하늘이다!”
모두의 시선이 희미해지는 먼지구름 사이로 빠르게 옮겨졌다. 허공 중에 두 사람이 떠 있었다. 양팔로 얼굴과 가슴을 가린 파천과 상여락! 두 사람은 멀쩡했다.
‘거의 다섯 배 이상이나 힘이 강해지다니. 역천기공, 이건 분명 마계의 힘일 것이다.’
파천은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결론은 일월교주란 놈이 마계의 힘을 어느 정도는 지니고 있단 건가?’
그의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눈 앞에 떠 있는 상여락이 문제가 아니었다.
“상여락, 네 놈은 익혀서 안 될 걸 익혔구나. 네 몸이 그걸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야.”
“으아아아.”
상여락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살인 욕구만 남아 있는 야수에 불과했다. 그는 체내에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파천은 혀를 찼다.
“어리석은 짓.”
파천이 두 손을 교차하며 가슴 앞으로 모았다가 활짝 펼쳤다.
고오오오
“인간의 몸으로 대자연의 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
파천의 신형은 먼지가 가라앉은 천황각 자리의 폐허 위로 점차로 내려왔다. 그가 내려옴에 따라 상여락도 함께 내려온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파천의 의지에 따라 그는 끌려 내려오고 있었다.
“으으으으.”
그는 역천기공으로 잠력을 격발하며 저항했다. 그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변해 갔다. 핏줄이 불거지며 흉측하게 변해 가는 것이었다.
“으아아아.”
“소용없는 짓이야. 네 힘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완전히 땅으로 내려선 파천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네가 밟고 있는 대지와 네가 숨쉬는 대기와 이 땅의 모든 생명체가 지닌 기는 결코 인간을 거스르지 않는다. 네가 익힌 역천기공은 결국엔 너 자신을 파멸로 이끈다. 너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과 이 세상마저 역행시키는 저주받은 마공이지. 그것 한 가지만으로도 넌 죽어 마땅하다.”
파천은 서서히 힘을 가중시켜 갔다.
“헉헉.”
상여락의 몸이 점차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로서도 불가항력인 듯했다.
상여락은 파천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통에 가득한 눈이었다.
“네 고통은 알면서 남의 고통은 몰랐더냐.”
“지존, 그를 살려 주십시오.”
어느새 깨어났는지 상천일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서 있기가 힘에 겨운 듯했지만 굳건히 두 발로 버티었다. 평생 가도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을 것 같던 그의 눈에서 쏟아져 나온 건 분명 눈물이었다. 파천은 갈등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안된다. 이 자는 살려 두어서는 안 될 자다. 이미 한계를 넘어선 자. 살려 줘도 소용이 없다. 이미 인간이 아니다.”
“여락아, 여락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단지 보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고통을 줄여 주는 게 최대의 자비다.”
“지존.”
상천일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삐뚤어지기는 했어도 상여락은 자신의 하나뿐인 사제였다. 어릴 때의 그는 얼마나 귀엽고 착하기만 했던가. 그를 변하게 한 건 사부가 인정해 주길 바랐던 집착 한 가지였다.
‘여락아, 잘가라.’
“지존, 고통을.....없애 주십시오.”
상천일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파천은 벌리고 있던 두 손을 한데 모았다.
퍼억
착각이었을까, 상천일은 상여락의 눈에서 반짝이는 걸 보았다 여겼다.
상여락의 신형은 흔적 없이 흩어져 갔다. 그가 지닌 채취마저 바람에 흩날리고 나니 과연 그곳에 무엇인가가 있었던가 싶었다.
“이곳을 떠난다. 다음은 남황벌이다.”
살아남은 그 많던 혈마천 수하들은 이미 어딘 가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난 뒤였다.
그 웅장했던 천황각이 있던 자리는 폐허로 남았고, 그 폐허 아래엔 추악한 욕망에 몸부림 치던 자들이 묻혀 있었다. 그들을 남겨 두고 중원 전사들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상천일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눈물이었을까......’
상천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누가 생각해도 다음은 여기야. 그건 분명해.”
초량은 혈마의 말이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그는 아직까지 북황벌의 멸망에 대해 믿을 수 없었다.
“중원무림맹이 총공격을 한 것도 아닌데.....그들이 아무리 중원의 최고수라고는 해도 어찌 이런 일이......나는 믿을 수가 없소.”
약간은 얼이 빠진 목소리였다.
“나도 좀 의외이긴 하지만 놈들이 그만큼 강하다는 걸 알았으니 총력으로 준비하면 되는 거지. 차라리 잘 되었어. 이것저것 따져 보고 재볼 것도 없이 다음 그들의 목표가 어디인지를 알았으니 말야.”
혈마는 초량보다는 차분했다.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흥분마저 담겨 있었다. 역시 이름 값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당한다면?”
초량은 그 말을 해놓고선 흠칫했다.
“우리가 당할 알은 없지. 그는 혼자였으니 당했겠지만.......여긴 우리가 모여 있으니 당하지 않아. 필요하다면 혈영신들 이외에 혼세 마인들도 동원하면 되고.”
초량은 그 말에 조금은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겐 훌륭한 인질들도 있지 않은가?”
“정도사령들 말인가요?” “그렇지. 그들을 앞세운다면 그리 쉽게 덤벼들지는 못할 거야. 더군다나 그놈들은 정에 약한 중원 놈들이니 효과는 의외로 클지도 모르지.”
초량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그에게 혈마는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너무 긴장하는 것 아냐? 북황이 당한 게 그렇게 충격적이었던가?”
“북황은......나와 비슷한 실력자요. 그런 그가 죽었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란 말. 어찌 긴장 하지 않을 수 있겠소. 더군다나 파천, 그자는 내 생애에 두 번이나 치욕을 안겨 주었던 자.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상대요.”
“흐음, 그래 네 말대로 승부의 관건은 그 자의 실력이지. 천마조차 경계할 정도로 강한 자. 그런 자가 중원에 있다는 게 너무 극적이군. 만약 그가 없었다면 중원을 먹어치우는 게 너무 재미없었을 거야.”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 봤다면 그런 소린 하지 못할 거요.”
“그런가? 그래 봤자 그는 혼자야. 그 한 사람 강하다고 해서 우리 전부를 상대하지는 못해.”
‘차라리.....“
“차라리, 뭐?”
“내밀원과 마전, 무황성과 힘을 합하는 게 어떻겠소? 솔직히 그들과 적이 되어야 할 이유를 아직 난 모르겠소.”
“그건 말야, 서로의 뜻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거다. 만약......우리나 그들이 개별적으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막강한 적이 출현한다면 모를까. 지금 정도라면 굳이 연합할 이유는 없지.”
“그들 뒤엔 천마교와 신수궁이 버티고 있소. 그 전력 또한 무시할 수 없잖소? 게다가 중원무림맹까지. 첩첩산중이거늘......”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잘 알아. 지금 파천이란 놈의 움직임을 보면 결코 세력을 움직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아. 결국 그놈만 제거하면 세상은 우리 손 아래 놓이는 거지. 어떤 수를 쓰던 그놈만 죽이면 되는 거야.”
“교주는.....교주는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이럴 때 곁에 계시면 든든할 것 아닙니까?”
“나도 몰라. 교주는 가끔 자신의 뜻만 보내 오지. 교주의 직계 수하들은 나도 잘 모른다. 게다가 혼세마인의 상위자들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고. 그들은 교주의 뜻에만 움직인다. 이걸 보면 교주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초량은 계속 목이 타는지 차만 들이킨다. 슬쩍 쳐다본 혈마는 내심으로 그를 비웃었다.
“현재 그들의 움직임을 뒤쫓고 있어. 내일이면 혈영신들이 이곳에 모인다. 혈영신과 나만으로도 그들은 살아 나가지 못한다.”
“.........”
‘과연 그럴까? 당신이 역천기공을 알고서 그런 말을 한다면 믿어주지. 그렇지만 솔직히 나로선 두렵기만 해. 역천기공을 익힌 상여락이 어찌 그렇게 맥없이......더군다나 역천기공은 잠력 격발 이외에도 상대의 힘을 받아들여 약화시키는 공능도 있거늘. 시체라도 있어야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를 알겠건만.......’
초량은 답답했다. 큰소리치는 혈마조차 미덥지 않았다. 차라리 무황성으로 자진해서 들어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라리 우리 모두 무황성으로 들어갑시다. 그게 아무래도 최선일 것 같소.”
“헛소리 집어쳐라. 그가 아무리 강해도 나를 이길 수는 없어. 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교주와 천마뿐이다. 그 이외에는 내 상대가 없어. 내 자부심에 흠집을 내지마라. 그건 너라도 용납 못한다.”
초량은 더 말해 보았자 소용없음을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너라도라고? 그건 무슨 의미일까? 혹시?’
초량의 두 눈이 의미심장한 빛을 발했다.
‘그럴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왜지?’
“아 참, 빙화가 여기 와 있는데 만나 보셨소?”
“무슨 소리냐? 그 계집을 왜 내가 만나 봐야 하지?”
“그냥 해본 소린데 왜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거요?”
“흐음, 하여간 난 계집한테는 관심 없다.”
“난 이만 나가 보겠소.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니 수하들의 경계 상태를 점검해 봐야겠소.”
초량의 등에서 혈마는 엉뚱한 생각의 고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빙화가 여기 있다고? 그래도 엉뚱한 데로 가지 않았다니 다행이군. 그건 그렇고 교주가 원하는 게 뭔지는 대충 알겠는데 도무지 어떤 방법을 쓸 건지를 모르겠단 말야. 나 같으면 전 수하를 중원으로 풀어 버리겠다. 그런 후에 핵심 고수들 몇만 데리고 방해하는 놈들을 솎아내면 될 텐데......’
어쨌든 자신이 명령권자가 아니니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다.
쥐 한 마리가 쏜살같이 구멍으로 사라졌다. 벽은 축축한 습기가 잔뜩 배어 있었고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으며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슴푸레한 야등 하나를 의지해 실내는 어둠을 두르고 고요히 가라 앉아 있었다.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죽을 것만 같아. 저들이 날 죽이지 않으면 내가 먼저 미칠거야.”
실내 곳곳에 웅크리던 자들이 그 소리에 잠시 반응들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죽음처럼 달콤한 권태의 유혹을 그들은 이기지 못하고 순응하는 모습들이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실내는 뇌옥 이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철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그 위로 작은 공간은 쇠창살로 가로막혀 있다. 야등의 빛이 그곳을 향해 내부로 비추고 있지 않았다면 실내를 분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제발, 말들 좀 해봐. 답답해. 답답하단 말야.”
여자였다. 지친 목소리가 힘겹게 뇌까린 말은 자신들을 가둔 저 철문에다, 저 둘러친 견고한 벽돌에다 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입을 가진 자들은 널리고 널렸다.
누구 하나가 그녀의 말에 간신히 대답한다.
“너는 아직도 말할 기운이 있나 보구나. 그냥 얌전히 있어. 떠들어 봐야 우리 삶은 다섯 평 뇌옥을 벗어날 수 없어.”
그 대답도 여자 목소리였다.
“언니는 벌써 포기한 거야? 이대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자는 말이야, 뭐야?”
“그럼 무슨 방법이라도 있니? 난 스스로 죽을 용기가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야. 차라리 저들이 날 죽여 줬으면 좋겠어.”
“그런 소리 하지 마. 죽긴 왜 죽어? 살아야 해. 살아서 이놈들에게 복수도 하고..... 중원의 푸른 하늘도 다시 한 번 보고야 말겠어. 이대로 죽기엔 너무, 너무 억울해.”
“혜미 말이 맞다. 연아야, 기다리자. 우리 힘으로 여길 탈출할 수는 없지만..... 난 믿어. 언젠가는......언젠가는 우린 구출될 거다.”
“누가, 누가 우릴 구출해 주는데? 중원이? 중원무림맹주가? 다 틀린 거야. 우리에겐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벌써 병들고 지쳐 죽어간 사람들도 많아. 주변을 한 번 둘러봐. 몇 명이나 살아 있지?”
그녀는 치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울기 시작 했다. 이들은 정도사령대의 사령들이었다. 사령들은 이곳 남황벌 뇌옥과 무황성에 각기 분산 수용되어 있었다.
남궁혁련과 남궁아연, 남궁혜미뿐만 아니라 다수의 정도사령들이 보였다. 다섯 평 정도의 뇌옥에 20여 명이 있었다. 이곳 남황벌에 갇혔던 사람들의 수만 2백여 명이었지만 그 중의 절반 이상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거나, 병들거나 다쳐 죽었다. 살아 남은 사람들은 고작 40여 명. 7일마다 그들은 모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혹시라도 무슨 꿍꿍이라도 펼칠까 봐 죄수를 서로 교체하는 작업을 7일마다 한 번씩 해오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살아 남은 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한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큰일이구나. 몸이 불덩이인데 약 한 첩 쓰질 못하니.....”
“내버려 둬. 차라리 그냥 죽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나아.”
“넌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느냐. 어떻게든 살려 볼 생각은 않고.”
남궁혁련이 동생 아연에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대며 ‘후우’ 한숨을 내 쉬었다.
병자 옆에 있던 팽정후가 남궁혁련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겠어요.”
남궁혁련이 생각해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마음 속으로 빌고 기원하는 것 이외에는.
철컹
모두의 얼굴이 자신들을 가둔 철문을 향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하루 한 번 열리는 철문이었지만 그때마다 그들은 잠들지 않는, 아니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여망에 상기된 표정들을 했다.
끼이이잉
듣기 싫은 소음을 내며 녹슨 철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건 뇌옥을 지키는 간수들이었다. 모두의 얼굴 위로 빠르게 절망이 엄습해든다. 남궁아연은 고개를 다리 사이에 묻어 버렸다.
간수들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손에 들고 온 자루를 안으로 던져 넣었다.
“끈질긴 놈들. 나 같으면 벽에 머리 처박고 자살하겠다. 이런 놈들을 왜 살려 두고 먹이는지 이해를 못하겠어. 무슨 생각들인지 원.”
간수는 가래침을 자루 위에다 뱉어내며 등을 돌렸다.
철컹
다시 문은 닫혔다. 누군가 밖에서 열어 주지 않는 한 저 문은 언제까지나 닫혀 있을 것이다. 자신들의 마음에 빗장을 지른 것 같은 저 견고한 문을 누군가 열어 주기를 바랐지만 솔직히 이제는 모두 지쳤다. 배가 고플 텐데도 자루에 손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궁혁련이 생각을 떨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자 자, 모두 이리 와서 식사들을 해라. 인내하고 기다리려면 뭐라도 먹지 않고서는 안 된다. 어서들 와.”
슬금슬금 다가오는 자들은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사람들이었다. 벽에 기대 앉거나 누워 운신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남궁혁련은 자루 안의 음식들을 갖다 주기도 했다. 음식이라고 해봐야 먹다 남은 쓰레기나 다름 없었지만 이들에겐 너무도 소중했다. 지금껏 생명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적선이라도 하듯 던져주는 음식쓰레기 때문이었다.
마르고 딱딱하고 기름이 뒤엉켜 있는 음식들을 그들은 능숙한 솜씨로 나누어 먹었다. 문제는 병자들이었다. 이빨로 씹어 삼킬 기력도 없는 그들은 누군가 먹여주지 않으면 그대로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이 뇌옥 안에서도 세명의 병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살리기 위해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이 대신 씹어 입으로 먹여 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마저 받아먹지 못할 정도가 되면 곧 죽기 마련이었다. 그런 식으로 죽어간 자들이 꽤 되었다.
“흑.....흑흑......”
가장 어린 남궁혜미가 참고 있던 울음을 터트리자 음식을 입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던 동작들이 일시에 정지했다. 지금껏 그녀는 절망하는 자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지친 모두를 위로하고자 구호처럼 ‘조금만 더’ 라는 말을 쉬지 않으며 좌중의 분위기를 이끌어 왔다. 그런 그녀가 울음을 토한 것이다.
옆에 앉아 있던 아연이 혜미의 등을 토닥였다. 그녀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나오긴 마찬가지였다. 모두는 비통에 젖어 음식을 먹지도 못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남궁혁련은 중단없이 음식을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울긴 왜 울어. 난.......화신한다. 우리는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다. 절망하지 않고 기다린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분명히.......”
“대형은 전맹주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들은 새로운 맹주인 천의 취임을 극구 반대했었다. 정도사령대의 반발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맹주로 취임한 천 공자는 이들을 외부 임무, 그것도 특수 작전이라 불릴 만한 위험한 작전에 자주 동원했다. 정도사령들은 맹주 취임을 반대한 때문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묵묵히 명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들의 생각은 동일했다.
‘진정한 중원무림맹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자.’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파천을 기다릴 수 없었다. 모두 적들에게 사로잡히고야 만 것이다.
“그래, 그 분이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면......분명히 우릴 찾아 오신다. 이건 신앙이라고 해도 좋아.”
남궁혁련은 파천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두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간절히 염원했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제대로 죽고 싶다는 거였다. 이런 식으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지가 않았다. 적을 향해 검을 쥐고 투혼을 불태우며 전장에서 죽고 싶었다.
밤은 깊어 가건만 그걸 감지할 수 있는 변화는 이곳 뇌옥 안에 베풀어지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새로운 식사가 전해져 올 때뿐이었다. 다시 그들은 꺼져가는 희망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