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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4 /
자아가 비워질 때 ‘남겨진 것(Remains)’이 드러난다.
스베덴보리는 AC 1594를 통해,
주님을 향한 영혼의 문이 닫히는 원인이 자신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AC 1594
‘누구든지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졌다고 믿는 한,
그는 주님을 향해 스스로를 닫아버린다.
왜냐하면 그는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고유한 자아(proprium)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을 때,
비로소 그는 주님을 향해 스스로를 열며 그분의 인도를 허용한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7-18
이러한 원리는 중생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보여준다.
즉, 자신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며 스스로 선하다고 믿는 마음은
주님의 생명이 들어올 틈조차 허락하지 않지만,
자신의 철저한 무력함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그의 내면에 보존해 두신
‘남겨진 것(Remains)’, 즉 그 ‘작은 조각의 선’을 붙드는 마음은
그분의 생명이 자유롭게 유입될 수 있는 열린 문이 된다.
인간이 자기 의를 다 비워내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상태가 되면
비로소 내면에는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선(Good not from self)'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여러 항(AC 468, 530, 560 등)에서 강조하는
'남겨진 것', 즉 유년기부터 주님께서 영혼 깊숙한 곳에 보존해 두신
‘순수한 선의 흔적들’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보존된 선(a good preserved)'은
인간이 자기 의를 제거했을 때 그 바닥에 남아서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최소 단위의 선'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타락과 관계없이 지옥의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 인(印)을 쳐 두신
그분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결국 인간의 내밀한 곳에 보존된 이 ‘남겨진 선’은
주님과 인간을 잇는 생명의 접점인 동시에
인간이 아무리 무력해져도 주님께서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지옥과 같은 상태에 빠져 자신이 쌓아온 악의 무게에 짓눌린 상태에서는
자신의 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전적인 무력함을 고백하며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께서는 그 거대한 악의 잔해 아래 보존해 두셨던
아주 미세한 선의 흔적을 드러내신다.
이 흔적이야말로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끝까지 지켜내신
'최후의 보루'이자, 영원한 생명을 틔우는 단 하나의 씨앗이다.
AC 9716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자아(proprium) 안에 있는 만큼,
그는 주님 안에 있지 않다.
그리고 주님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는 사랑의 선과 믿음의 진리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유입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님 안에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정도로
그는 자신의 고유한 자아 안에 있으며, 따라서 악과 거짓 안에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고유한 자아는 악과 거짓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이 주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유한 자아로부터 물러나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물러날 때,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가지고 유입하신다.’
AC 10227
‘지혜와 총명을 구성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천국으로부터,
즉 그곳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유입된다.
모든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됨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의 내면을 천국을 향해 열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아래 설명) 진리와 선 중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식되는 만큼 자기 사랑은 물러나고
자기 사랑과 함께 거짓과 악으로 인한 어둠도 물러가며
사람은 순수함과 주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로부터 신성(Divine)과의 결합이 이루어지며,
그로부터 유입과 깨달음이 발생한다.’
(참고 : 여기 ‘이렇게 함으로써’라는 말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유입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단순히 머리로 사실을 아는 지적 동의를 넘어,
자신의 실존적 상태를 완전히 재 정의하는 영적인 결단이다.
이 거룩한 인정의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구체화된다.
첫째, ‘자기중심적 기원’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일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나’라는 주체로부터 나온다고 믿는다.
‘모든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유입됨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 본능적인 착각을 멈추는 일이다.
무언가 옳은 생각을 하거나 선한 마음이 들 때,
그것을 즉시 ‘이것은 내가 잘나서 생긴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이것은 주님의 빛이 내 마음이라는 창문을 통과하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라고 고백하며 즉각적으로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것이다.
그리할 때 자기 의가 허물어진 빈자리에
비로소 주님의 순수한 선의 조각이 온전히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둘째, 자아의 껍데기를 의도적으로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는 자아라는 불투명한 필터를 걷어내는 구체적인 수행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내가 지금 무엇을 고집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자기 사랑은 항상 ‘내가 했다’는 자취를 남기려 하지만,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함은
그 자취를 지우는 행위이다.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려는 충동이 일어날 때,
그 즉시 ‘나의 지혜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그 충동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셋째, 주님을 생명의 유일한 공급처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는 호흡과 같다. 숨을 들이마셔야 생명을 유지하듯,
선과 진리를 얻기 위해 오직 주님께로부터 유입되기를 기다리는 상태이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삶의 방향을 결정할 때
자신의 경험이나 계산을 앞세우기보다 먼저 잠시 멈추어,
‘주님, 이 진리를 제게 주십시오. 저는 스스로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내면을 천국을 향해 여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결국 ‘이렇게 함으로써’라는 말은
주님과 자신의 경계선에서 자신의 지분을 완전히 포기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주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자기 사랑’이라는 거대한 벽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이 바로 천국이 유입되는 통로이다.
주님은 그 통로가 열리기만 하면
당신의 지혜와 총명을 그 안에 가득 채우기를 기뻐하신다.
우리의 모든 선한 생각은 사실 주님의 생명이
잠시 자신을 경유하고 있는 과정일 뿐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결합으로 나아가는 가장 확실하고도 겸손한 길이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우리가 왜 '자기 의'를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영적인 원리로 설명한다.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의지하는 동안에는
내면의 창문이 닫혀 있어 주님의 빛이 유입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마음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이것은 단순히 겸손한 태도를 가지라는 도덕적 권면이 아니다.
이것은 영적인 물리 법칙으로 실제적이다.
자기 사랑이 물러난 자리에 주님의 사랑이 유입되고,
그 자리에 비로소 우리 내면 깊숙이 보존되어 있던 '남겨진 것(Remains)'이
주님의 활동에 의해 생명력을 얻게 된다.
주님은 우리가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철저히 비워내기를 기다리시며,
우리가 그 빈 그릇을 내어드릴 때 당신의 영광을 그 안에 가득 채우고 계신다.
자기 의를 부정하는 겸손함이야말로
주님께서 인간 안에 당신의 선을 남겨두시는 그릇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선함은 주님의 것이고,
우리의 모든 지혜는 주님의 유입일 뿐임을 고백하는 그 자리야말로,
가장 위대한 천국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백은 단순히 그 자리에 머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온전히 수용하기 위해
자신의 영적 체계를 새롭게 구축해 나가는 능동적인 과정으로까지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영혼의 주권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은
그동안 영혼을 가두고 있던 견고한 장벽을 허물고
천국의 빛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은
자아로부터 비롯된 의지와 자기 공로(merit)를 악으로 인식하고
이를 비워내려는 노력으로 전환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AC 9716항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자신의 본성이 주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악임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영적 성장의 첫걸음이다.
이러한 자기 인식의 단계에서
인간은 마침내 자기 자신의 완전한 무력함을 직면하게 된다.
스스로는 단 한 걸음도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없으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이는 인간이 주님의 유입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의 내면을 비우는 필수적인 ‘항복’의 과정이다. AC 10227
인간이 자신을 비우고 무력함을 고백하는 순간,
영혼의 지형도는 놀라운 변화를 맞이한다.
주님께서 인간의 유년기부터
영혼 깊은 곳에 은밀히 심어두셨던 순수한 유입물들이,
그동안 인간의 타락한 자아에 억눌려 있던 상태를 벗어나
비로소 '남겨진 것(Remains)'이라는 실체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극히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이것은 주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생명의 통로이다.
바로 이 통로가 주님의 섭리에 의해 보존되어 남겨진 것,
즉 '작은 선의 조각'이라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AC 530, 560, 1906 등에서 말하는 '보존된 선'은
단순히 영혼의 구석에 머물러 있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를 완전히 비워내고
스스로의 무력함을 철저히 인정하는 그 결정적인 순간,
주님께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주시는 역동적인 생명의 흔적인 것이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남겨진 것(Remains)'이
타락한 자아의 영향력을 벗어나 드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 속에 머물던 선의 조각들이 표면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넘어선다.
그것은 영혼의 주도권이
자아(Self)라는 허상에서 주님(Lord)이라는 실체로 넘어가는,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실존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먼저 주님의 빛을 차단하는 자아의 '차폐 효과'를 제거하는
영적 필터의 교체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자아(Proprium)'를 붙들고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보면 스스로를 보호하는 불투명한 장막을 치고 있는 상태와 같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그 자체로 순수하고 밝은 빛이다.
그러나 자아라는 필터가 있으면,
이 빛은 사람의 이기심과 욕망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된다.
그 결과, 진리를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왜곡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차폐 효과’의 핵심이다.
그것은 주님의 진리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여
'나에게 유리한 진리'로 바꾸어버릴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자아의 불투명한 장막을 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유입을 감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마치 두꺼운 금속판이 전파를 차단하듯
자아는 주님의 영적 유입을 완전히 봉쇄한다.
그처럼 차폐 효과가 강할수록
인간은 자신이 만든 세계관이라는 감옥 안에 갇힌다.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즉, 차폐 효과는 외부와의 소통을 끊고
'자기 안의 어둠'을 안전하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심리적/영적 장벽이다.
이처럼 평소 인간의 자아는
'자기 의'와 '자기 공로'라는 두꺼운 필터를 쓰고 있어,
주님께서 유년기부터 영혼에 심어두신 천국적 기억이나 순수한 연민,
진리에 대한 경외심과 같은 원형의 선들이 유입되어도
이를 즉시 자신의 것으로 채색하거나
우월감을 증명하는 도구로 오염시켜 버린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완전한 무력함을 인정하고 자기 의를 철저히 비워낼 때,
비로소 자아라는 왜곡된 필터가 작동을 멈춘다.
그 순간 자아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주님의 선은
본래의 투명한 빛을 되찾고 인간의 의식 속으로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드러남은 곧 '소유권의 반환'이라는 분리와 식별의 과정을 동반한다.
본래 '남겨진 것'은 인간의 소유가 아닌,
주님께서 언젠가 인간이 자아를 내려놓을 때를 대비해 예비해 두신
그분만의 소유이다.
자아를 비워내기 전까지
인간은 이 선한 마음조차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지만,
무력함을 고백하는 순간
‘이 선한 마음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 심어두신
그분의 생명이었구나.’라는 깊은 깨달음이 찾아온다.
이 깨달음을 통해 선의 소유권은 자아에서 주님께로 공식적으로 이전되며,
더 이상 이 선은 허영심을 자극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통로로서만 기능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정지된 영적 에너지를 다시 흐르게 하는
'생명의 회로'를 연결한다.
타락한 자아 속에 있을 때 이 '남겨진 것'들은 마치 전원이 꺼진 회로와 같다.
주님의 생명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으나, 자아라는 단락(Short-circuit)이
중간에서 에너지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의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그 단락된 회로의 스위치를 끄는 행위와 같다.
스위치가 내려가는 즉시 주님의 생명력이
막힘없이 그 '남겨진 것'을 관통하여 영혼 전체로 퍼져 나가며,
인간은 비로소 이론적으로만 알던 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뜨겁게 요동치는 주님의 사랑과 평화를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드러남'이며,
영혼이 비로소 살아있는 선을 호흡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이처럼 생명의 회로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근거는
주님의 선행하시는 사랑에 있다.
주님은 우리가 타락한 이후에야 급히 구원의 방법을 마련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유년기부터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선과 진리의 씨앗을 보존해 두셨다.
우리가 가장 연약해진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이 ‘남겨진 것’을 통로로 삼아 우리를 붙드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지할 근거를 잃어버렸다고 절망하지만,
주님께는 구원의 근거가 훨씬 이전부터 마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남겨진 것’의 깊은 신학적 의미이다.(AC 530, 560 연산)
그렇다면 인간은 이 보존된 선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먼저 스베덴보리의 기록을 통해 그 영적 원리를 살피고자 한다.
AC 560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지 않고서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받은 선과 진리는 그 안에 저장된다.’
AC 468 ‘이 남겨진 것들은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으며,
사람은 그것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AC 530 ‘사람에게 남겨진 것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다.’
AC 1906 ‘사람 안에 있는 남겨진 것들은 주님의 것이며, 사람의 것이 아니다.’
위의 가르침들처럼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 깊숙이 보존해두신 선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감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이 거룩한 유산은 인간의 경험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가?
그 답은 인간의 의지가 꺾이는 지점에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이 나온다고 믿는 자기 의가 약해질수록,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오래전부터 보존해 두신 남겨진 것(Remains)을
더욱 자유롭게 사용하신다.’ (AC 468, 530, 560, 1594 연산)
즉, 인간이 ‘자기 의’를 비워내는 행위는
주님께서 당신의 소유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공간을 내어드리는 겸손한 응답이다.
따라서 중생의 과정이란,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이룰 수 없다는
완전한 무력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이 보존해 두신 ‘선의 흔적’을 꺼내어,
그 사람의 영혼을 천국적 형상으로 다시 빚어가시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이제 끝났다’라고 느끼는 순간이,
역설적으로 주님께서 오랫동안 예비해 두신
회복의 날이 밝아오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인간이 자기 의라는 견고한 성을 쌓고 있을 때,
주님은 그 성벽 너머에서 조용히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을 돌보고 계신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을 내려놓고 무력해지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비로소 우리 안에서 주도권을 갖게 되는 거룩한 전환점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내면에
주님께서 이미 당신의 생명을 갈무리해 두셨다는 사실이야말로,
지옥 같은 삶의 순간에도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근거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남겨진 것들이 평소 인간의 의식 영역에서는
거의 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그것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AC 468, 561 참조)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중생 과정에서 이 남겨진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주도적으로 그 존재를 확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것을 활동하게 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상태가 열린다는 뜻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께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주님께서는 창고에 보관해 두셨던 선과 진리를 실제로 작동시키신다.
예를 들어, 화를 내고 싶지만 참아내고, 거짓의 유혹 속에서도 정직을 선택하며,
절망 중에 선한 쪽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이 바로 그러하다.
본인은 그 선택의 근원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그 사람 안에 저장된 어린 시절의 순진함,
선을 좋아했던 기억, 진리에 대한 애정을 꺼내어 그를 붙들고 계신다.
스베덴보리의 중생 교리에서 인간의 역할은 분명하다.
인간이 스스로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악을 피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회개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남겨진 것은 창고에 보관된 씨앗과 같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먼저 땅이 갈아엎어지고 단비가 내려야 하듯,
우리 역시 자기 의라는 굳은 마음을 갈아엎고 주님의 자비를 구할 때
비로소 그 씨앗이 활동을 시작한다.
결국 중생은 내가 내 안의 남겨진 것을 발굴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이 심어두신 생명의 흔적을 가지고
나를 다시 빚어 가시는 과정이다.
‘사람 안에 있는 남겨진 것들은 주님의 것이며, 사람의 것이 아니다.’(AC 1906)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마음을 열어드릴 뿐이다.
우리의 모든 선한 행위는 사실상 주님께서 우리 안에 보존해 두신
당신의 선이 흘러나오는 결과물인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의를 붙들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의 유입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나’라는 존재가 자신의 의로움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곳은 이미 닫힌 문과 같아서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선한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실패, 그리고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은 결코 저주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내면의 닫힌 문을 두드리며, 당신이 오래전부터 심어두신
생명을 꺼내 쓰기 위해 우리를 비우시는 거룩한 과정이다.
스베덴보리는 중생의 과정을
인간의 의지적 성취가 아닌, 주님의 섭리가 맺은 결실로 설명한다.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적 변화는
실상 주님의 치밀한 계획과 그분이 보존해 두신 ‘남겨진 것’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겪는 고난과 무력함 또한
주님께서 당신의 섭리를 완성하시기 위해 허용하신 필연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 의를 포기하는 것은
단순한 도덕적 결단이나 지적 동의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시인하고,
내면의 주권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영적인 항복이다.
주님은 바로 그 항복의 자리에서,
인간이 유년 시절부터 인지하지 못한 채 간직해 왔던
‘남겨진 것’들을 비로소 활성화하신다.
AC 1906의 말씀처럼, 이 선은 인간의 소유가 아닌 오직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해야 할 몫은 자신의 거짓된 자아를 깎아내는 일뿐이다.
그 비워진 자리를 통해 주님의 선이 막힘없이 흐르도록
통로를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곧 중생의 실체이다.
우리가 화를 내고 싶을 때 참는 마음,
욕심을 내고 싶을 때 정직을 선택하는 마음, 절망 중에도 희망을 찾는 마음 등은
결코 우리 안에서 스스로 생산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붙들고 계시기에 나타나는, 보존된 선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자아의 확장'이 아니라 '자아의 해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내가 사라진 자리마다 주님의 생명이 채워지는 것, 그것이 곧 거듭남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당신의 남겨진 것을 사용하시기에 가장 좋은 때이다.
그분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당신이 심어두신 그 거룩한 씨앗을 통해
반드시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내실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악을 피하고 진리를 구함으로써,
우리 내면의 창고를 주님께 열어드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보존된 선을 찾아내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앞에 나를 낮추어 당신의 생명이 내 안에서 숨 쉬게 하는 것이다.
모든 과정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의 낙심은 비로소 주님을 향한 의존으로 변한다.
주님은 쉼 없이 당신의 선을 사용하여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시며,
그 섭리의 손길은 우리가 잠든 시간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영혼의 영역에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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