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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생명의 양식을 2일 거르고 *편식 금지*등 지적을 많아 받는 B급 ☞c급이 되면 타인 카페로 통합하든지 지역교회로 옯겨야 합니다. ※온양정씨 카페 성도님 영혼이 소중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새벽기도합시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9월 성령과 지혜로 충만의 달☜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마5:6절)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
우리는 북한 주민들이 극심한 기아(飢餓)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어떤 소년은 너무 배가 고파서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데, 그는 ‘배고픈 것보다는 낫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굶주리는 사람보다 더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런 사람이야말로 복(福)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내어 유도하고 계신 것은, 우리에게 모든 진리를 통째로 던져주시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어떤 암시(暗示)와 가능성을 제시해 주시면서 한번 따라오지 않겠느냐? 는 식으로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식이 없어서 주리는 것 이외의 다른 굶주림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본질이 이 한 구절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며, 복음의 목적도 이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데 있고, 하나님의 축복도 이런 목마름과 주림이 채워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모든 진리는 곧 이 한 구절의 말씀 속에 다 들어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Ⅰ.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
일단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자체가 그 사람이 살아 있고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중병에 걸린 사람이 여러 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서도 전혀 배고파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지금 수일 째 거의 미음 밖에는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배가 부르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 자신은 배가 부른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실제로는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소화 기관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배고픈 줄 모르고 목마른 줄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먹을 것부터 찾는다면 그는 건강을 되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무엇에 주리고, 무엇에 목말라 하느냐?' 것입니다. 물론 음식에 굶주린 사람은 먹을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먹는 것에 대한 굶주림 외, 또 다른 굶주림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식에 대한 굶주림이요, 목마름입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은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한평생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낮에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밤에 야간학교를 다니거나 혹은 늦은 나이에 검정고시를 쳐서 대학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식(知識)이란 사람이 살면서 경험하거나 얻은 것을 체계화해 놓은 것입니다.
혼자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을 다 경험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면 아무래도 독선적이거나 주관적이기 쉽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정말 지식에 굶주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보는 대로 모방하여, 마치 음식을 폭식하듯이 책을 읽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항상 마음속에 지식에 대한 굶주림이 남아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외국에 유학을 가서 고생하는 것도 지식에 대한 굶주림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의 주림 외(外) 더 중요한 굶주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유의 굶주림입니다. 한때 우리나라가 군사정권 아래 있을 때, 한 시인(詩人)은‘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詩)를 썼습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마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또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유에의 갈증이 너무나 심해서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자유에의 굶주림이 너무나 심해서 창자가 달라붙는 것 같았던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런 목마름과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자유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은 자유가 무엇인지? 한번 경험을 해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복(福)이 있는 사람은 먹을 것이나 지식이나 자유 때문에 목말라 하거나 굶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어리둥절해집니다. 왜냐면 의(義)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아주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았고, 자유를 찾아 자기 나라를 탈출하는 사람도 보았지만, 의(義)를 위하여 탈출하거나 방황하는 사람은 별로 만나본 적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의(義)’라는 것이 무엇인지? 를 정의하기 전, 우선 이 의(義)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의리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깡패들은‘우리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는 말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의(義)’는 사람 사이의‘의리(義理)’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이 쓰는 용어로 표현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곧 이‘의(義)’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려면 우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병든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사람은 의(義)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의에 배고파하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의(義)에 주리고 목말라 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비췬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84장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하나님이 있는지도 모르고 한 번도 전도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은 지식(知識)에 목말라 할 수는 있고, 자유(自由)에 목말라 할 수는 있지만, 의(義)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고, 그런 것이 있는 것 조차도 모릅니다.
Ⅰ.애통하는 것과 목말라 하는 것
예수님은‘팔복(八福)’앞 부분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가 복(福)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심령(心靈)이 가난하다는 것을 교만의 반대말로 사용합니다. 늘 자신만만하다가 어떤 큰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사람이 좀 겸손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마음이 가난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사실 자기가 머릿 속으로 만든 하느님을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그림 속의 하나님과 같습니다.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이 진정한 기독교인지도 모르고 무식한 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마음으로 상상해 낸 하느님을 만들어서 믿 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즉 갑자기 사업이 망하게 된다든지, 아니면 병에 걸려서 사형 선고를 받고 누워 있을 그때입니다.
그럴 때 어느 한순간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인식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까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것에 대해 엄청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동안 학벌이나 사회적 신분하나 믿고 까불었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런 것들이 마치 헌 누더기와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목숨과 같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것은 죄 용서를 위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위해 부르짖는 것입니다. 즉 신세가 처량해서 애통한 것이 아니라, 시험에 떨어져서 애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전 울지 않던 사람도 자기 아이가 시험에 떨어지니까 애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애통(哀慟)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새 사람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애통하는 것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사실 어떻게 보면 애통하는 것이나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둘 다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를 애석해하고 안타까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같은 것이라면 예수님이 같은 말을 반복할 리가 없습니다. 애통해하는 것과 목말라 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애통해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려면 고통을 격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해산의 수고는 산모가 하지만, 아기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탯줄로 호흡하던 것에서 자기가 스스로 호흡을 해야 하고, 또 산문(産門)을 통과해서 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해서 모든 것이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아기들은 먹어야 하고, 자라야 하고, 또 튼튼해져서 더 장성한 분량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청소년 때가 되면 그들이 부쩍 자랍니다. I년에 10센티 이상 자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아직 더 자라야 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아직 영적(靈的)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아직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지 않은 새가 주리고 목마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 자신이 완전하지 않고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수양이 부족해서 그렇지, 마음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의롭게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먹어도 절대로 안 되고, 오히려 마음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더 죄짓게 만드는 죄의 세력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부르짖게 됩니까?
롬7:24절)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몸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는 아무리 옳게 살려 해도 자기 안에 어떤 엄청난 죄의 세력이 있어서 자기를 죄 아래로 잡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무시무시한 야수(野獸)가 살고 있습니다. 그 짐승이 한번 성질을 내게 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야 만다는 것을 발견하고 애통(哀慟)해 합니다.
그러나“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속에 새로운 생명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다른 것을 주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신(神)적인 능력의 일부를 주십니다. 마치 우리 안에 어떤 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우리에게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변화가 주어지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 안에 우리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작은‘하나님의 성품’즉‘신적인 능력’이 심어집니다. 우리가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은 곧 이 신적인 능력이 자라면서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Ⅱ.우리 육체의 중요성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영혼(靈魂)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생활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나 해서 영혼(靈魂)만 살찌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인간의 육체(肉體)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피조물이 있다면, 그것은 곧 우리의 육체(肉體)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 일본과 중국이 영토 분쟁을 하고 있는‘조어도'(생가쿠 제도)라는 섬과 비슷합니다.
이‘조어도’라는 섬은 아무 생물도 살지 않는 돌 섬입니다. 거기에는 배추 한 포기 생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일본과 중국은 이 섬의 소유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섬 자체는 별것 아닐지 몰라도 이 섬의 소유권은 지하에 있는 엄청난 양의 석유 채굴권과 바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것이 곧 우리의 육체(肉體)입니다. 우리 육체(肉體)자체는 별로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 육체는 귀찮을 때가 많습니다. 즉 먹어야 하고 쉬어야 합니다. 옷을 입혀 주어야 하고 병이라도 들면 몇 주씩 병원에 입원해서 아픈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또 수술이라도 하고 나면, 그 통증이 얼마나 심합니까?
그러나 우리 육체(肉體)는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셔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감정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 놓기만 하면, 우리의 몸은 무한한 능력을 가진 피조물로 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은 단지 우리 영혼(靈魂)만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육체를 사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우리 육체의 소유권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사탄(詐誕) 사이에 가장 큰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육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죽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제멋대로 굴렸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했고, 마음대로 화를 내고 마음대로 못된 짓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바뀔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조금씩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감정이 변하고, 삶이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기적이라고 하면 마리아 상이 눈물을 흘리거나 아니면 불치의 병이 치료되는 것만 생각하는데, 진정한 기적은 성령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우리의 행동이 바뀌고 삶이 변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피조물이 우리의 육체(肉體)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지음으로 육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정욕대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여 삶이 변하게 되면 우리 몸은 육체를 가진 천사가 됩니다. 우리가 가진 잠재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몸 안에는 거의 무한대의 능력이 공급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몸으로 오셨고, 그가 죽음 가운데서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의(義)’라고 할 때, 그‘의(義)’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기서의‘의義)’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라면 즉 죄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주리고 목마른 것’ 이나‘애통하는 것’이 다를 것이 없어집니다. 왜냐면 애통하는 것이 곧 죄 용서받기 위해 애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義)’라는 것은 내 육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이루어드리는 이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역사를 보면 정통 교회와 이단이 여기서 많이 차이가 납니다.
정통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남들이 잘 알지 못하는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준다고 꾀어서 가정을 버리게 만들고 직장도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을 이전에는 정욕대로 사용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 뜻대로 사용하는 것을‘의(義)’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생각이나 감정이나 몸이 올바른 상태에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순간적인 충동이나 분노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진다는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복음의 핵심(核心)입니다.
Ⅲ.의에 주리고 목말라 한다는 것
복음을 듣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는 그의 생각 속에 하나님이란 분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갈망하던 그 모든 것이 빛을 잃어버립니다.
즉 전에는 박사가 되고 싶었고,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었는데,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없어져버립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어 실천하려고 하면 몸이 옛날처럼 말을 듣지 않는 이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알았고, 이제는 영생(永生)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이 직장에 계속 다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그만두고 선교사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내 안에는 구원의 기쁨이 있고, 새 생명이 있는데도 부끄럽게도 아직 청산하지 못한 옛 습관들이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 몰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담배를 끊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좋지 못한 포르노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속에 있는 양심은 엄청나게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런 통곡 소리를 들으면서도, 알기는 다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제‘의를 위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미 거듭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적으로 어린 상태이기 때문에 분별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분명히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나이는 들어가는데, 아직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함께 교제를 할 때는 엄청나게 기쁜데, 혼자 있을 때는 때로는 옛날 습관에 빠져서 엄청난 영적인 침체를 겪기도 합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보면, 얼마나 아름답고 귀엽습니까? 그의 존재 자체가 어른들에게는 엄청난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아기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뇌성마비 환자들을 보면, 그의 정신은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생각으로는 달려가고 싶습니다. 말도 자유롭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습니다. 입에서 말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거듭난 후의 영적인 침체가 예수를 믿지 않을 때보다 더 클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을 때는 아예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모든 것이 운명이요, 팔자라고 하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난 후도 여전히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리고 분명히 아는 하나님의 뜻도 옛날의 죄의 습관 때문에 실천하지 못하고 또 죄에 빠지게 될 때, 그때의 답답함과 절망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이런 상태에 빠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가 무능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임을 증명하는 산 증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첫째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고 먹어야 합니다.
벧전2:2절)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함이라”
영적으로 거듭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고 자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지 못하면 우리 영혼은 완전히 기아(飢餓) 상태에 빠지게 되고,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움을 받지 못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암8:11절)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고통인지 모르고 정신없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그 마음이 엄청나게 황폐(荒廢)하게 되고 비판적이 되며, 이 세상 어느 것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됩니다.
펜더믹 코로나 재앙이후로 지방의 여러 교회를 돌면서 느끼는 것이 이런 영적인 기갈이 하늘에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즉 노인이나 젊은이나 할 것 없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북한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영적인 기근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목회자들은 왜 교인들이 그렇게 교회 생활에 힘들어하는지 조차 모릅니다.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 아닐까? 교인들은 거의 다 굶어서 죽어가게 되었는데도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은 왜 교인들이 그러는지? 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런 목마름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있는데 못 할 일이 무엇입니까? 밤이면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또 겁이 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환한 생명의 말씀의 빛이 있는데도 못 할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는, 우리는 늘‘성령’으로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령으로 새롭게 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더욱더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내 안에는 선(善)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감정을 주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욱 성령님으로 충만해지며, 더욱더 내 속에 있는 악(惡)한 기질들과 추악한 본성들이 성령님께 지배당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두 구멍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욕의 더러운 구멍이요, 또 하나는 성령의 새 구멍입니다. 아무리 내가 신앙이 좋아도 가만히 있으면 정욕의 구멍에서 더럽고 썩은 물이 흘러나와서 한순간에 온 마음을 더럽혀 놓습니다. 그래서 항상 더러운 구멍은 막고 성령의 역사는 간구해야 합니다.
조금 전까지 아무리 성령 충만했다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옛날 잠수부들은 유리로 된 헬멧을 쓰고 잠수복을 입고 바다로 들어가는데, 밖에서 계속 펌프질 해서 공기를 주입해 주어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곧 그와 같습니다. 한순간이라도 교만하거나 자기를 자랑하거나 음란한 생각을 하면 숨 막히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고 능력을 받았어도 한번 교만하면 숨이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되고, 더욱더 성령께서 나에게 부어지도록 기도하게 됩니다. 물론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십니다. 또 기도하지 않아도 성령 충만케 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내가 패역한 본성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경건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아직 거의 뇌성마비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과 몸이 움직여지는 것이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즉‘아’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입에서는‘어’라고 나올 때가 많습니다.
다시말해서 처음에는 사과(謝過)하려고 말을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자기 변명만하고 다툼으로 끝날 때도 많습니다. 또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다가 얼굴을 보자마자 그런 말하고 싶은 생각이 감쪽같이 없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남을 구제하는 것도 생각만큼 잘되지 않습니다. 헌금이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만 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자기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저는 종종 동네에서, 중풍에 걸렸던 분들이 피눈물 날 정도로 재활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 추운 날씨에도 온전치 못한 몸을 이끌고 나와서 동네를 한없이 걷는 연습을 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재활훈련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즉 사랑한다는 말을 수없이 해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자꾸만 해보아야 하고, 예배도 자꾸만 드려야 합니다. 한순간에 천사와 같은 예배를 드리고, 또 천사와 같은 섬김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멋진 연설을 하고 난 후도 계단에서 내려오다가 쓰러지는 장애인처럼, 우리는 멋진 봉사 후도 얼마든지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한번 쓰러지고 실수한 것으로 너무 낙심하거나 너무 절망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심한 뇌성마비 환자들입니다. 심한 영적 자폐아들이요, 저능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조금씩 하고 있는 것들도 모두 대단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쓰러져도 또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연습입니다.
딤전4:8절)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의 연습도 유익이 있습니다. 즉 화를 내지 않는 연습, 거짓말하지 않는 연습, 남에게 요구하기 전에 먼저 주는 연습, 좋지 않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 연습, 신문이나 텔레비전보다 성경을 먼저 보는 연습, 돈을 빌리지 않는 연습, 과식을 하지 않는 연습, 말을 절제하는 연습 등입니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이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으며, 나에게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한평생 기도 하고 고민하면서 찾아야 할 뜻입니다.
그것을 이루어드리기까지 우리는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한꺼번에 그 엄청난 뜻을 알려고 하는 자보다 더 미련한 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하나님의 뜻에 만족하면서 하루하루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의 가정을 지키며, 때로는 적성에도 맞지 않는 직장에서 일하면서 대부분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에 성실하지 못하면서 거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허풍입니다.
우리는 한평생에 걸쳐서 그 크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13:12절)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당장은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평생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뜻대로 된다 해도 그것이 근본적인 뜻이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모르고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고 붙드신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의지하고 산 삶은 절대로 헛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어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나의 이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이루어드리는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직접 육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찾아야 합니다. 즉 주리고 목마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아-멘
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오늘의 묵상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오늘의 기도제목 ▣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주님! 셀(cell)공동체, 예배공동체, 선교공동체로 부흥.성장케 하옵소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신 주님! 내게 맡겨주신 재물과 나의 생명 주님께 드려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합니다.아-멘 주님! 경기 동탄에 성경연구원을 설립할 후원, 동역자를 보내주소서.아-멘 주님! 신실하고 충성된 후임자와 추수의 일꾼들을 보내 주옵소서. 아-멘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자립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정착완료. 양식보존. 새벽기도. 교갱원설립후원. 춘추심방. 실명소통) 교갱원은 1단계 묵상, 생명의 양식과 필수과목(26과). 2단계 생명의 양식과 전도학교(13과).3단계 생명의 양식과 청지기 대학(17과)으로 정예부대가 됩니다. 9월1일부터 누구든지 전화신청받습니다(유료 : 각 교재 1과당=1만원, 방법 : 교갱원 설립 때까지 카톡영상으로) 교갱원카페.카톡.천국백성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기쁨의 열매.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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