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 산길 따라 한없이 걸었다. 때론 평지 같은 산길도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거의 비탈진 산길이었다. 쉬어 넘는 고갯마루에서도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차라리 고난 속에서 더욱 억세었다. 그것은 자식을 키우기 위한 인내였는지도 모른다. 이정옥 엄마는 3남 2녀를 거의 엄마의 손 안에서 키웠다. 입는 것, 먹는 것 모든 살림살이를 도맡아서 했다. 어릴 때 남다르게 손재주가 있었다. 남자들은 손재주가 있으면 목수가 됐다. 여자들은 미장원 아니면 의상실을 하였다고 한다. 이정옥 엄마도 양장점(서양식의 여자 옷을 짓고 파는 상점) 열었다. 그때 옷을 만든 분야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했다. 재단에서부터 바느질 그리고 완제품까지 빠른 시간 안에 만들어 냈단다. 그것도 모자라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옷 만든 강의를 하였다. 그때부터 남에게 무엇인가 준다는 것이 얼마나 기쁨인지 알았다. 처녀 때 열심히 배웠던 것이 결혼 이후 살림밑천이 됐다. 집안에 모든 살림은 엄마의 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일감이 밀려 밤새우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엄마는 아프지도 않고 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애들이 점점 커가면서 그것을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엄마는 좀더 위안을 가지게 된 것도 애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모습이다. 그때 저녁 내내 바느질로 손이 절여도 재미가 있었다. “내일은 더 큰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그 보람이 결국 찾아왔다. 둘째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던 것이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 가시밭길이었던 것이 이제는 비단길로 접어드는 것 같았단다. 막내딸까지 학업을 무사히 마치게 했다. 이정옥 엄마는 무척이나 노래를 좋아한다. 가수처럼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엄마의 삶을 사랑하는 것처럼 노래를 좋아한다.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엄마는 “노래는 나의 눈물이고 기쁨이다. 노래로써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을 함께 함은 배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노래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답게 살아간다. 어지간히 노래를 좋아하는지 막내딸이 10년 전에 노래방기기를 사주었다. 틈만 나면 노래를 부른다. 노인대학과 노인복지관, 마을경로당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어르신들이 엄마의 노래만 찾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노래는 잘 못해, 그러나 내 삶이 고스란히 노래 속에 숨겨져 있나봐. 그래서 노래가 감칠맛 나게 좋은 가봐” 이정옥 엄마는 어렵게 옷 만든 기술을 배워 많은 사람들에게 그냥 쉽게 가르쳐 주었다. 그때 그냥 주는 게 재미를 느끼게 됐다. 그 마음이 노래가 되었고 엄마의 삶 전체가 되고 말았다. 올해 엄마는 79살이다. 막내 사위가 음반취입을 해주었다. 총 다섯 곡인데 할미꽃 사연, 해운대 엘레지, 임진강, 고장난 벽시계, 유리벽 사랑이다. 모두 느린 노래로 실었다. 서울 유명한 음반 기획사에서 실었으니 엄마 나이에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음반 초입에는 할미꽃 사랑이다. 할미꽃 같은 삶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마치 엄마의 삶처럼 밤을 새워 들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특히 엄마는 눈물이 많다고 하니 그 노래가 얼마나 애절하랴. 젊은 날에 화려하게 한 번도 피지 못했다. 그래서 무척이나 화려한 장미꽃을 좋아하게 됐다. 안으로 감춰 두어야만 했던 눈물을 이젠 과감하게 노래로 비단 같이 펼쳐진다. 다섯 곡 중에 네 번째 노래는 고장 난 벽시계다. 요즘 젊은 가수가 부르고 있지만 원래 옛날 가수가 불렀던 노래다. 노랫말 속에 “나를 속인 사랑보다 네가 더욱 야속하더라. 한두 번 사랑땜에 울고 났더니 저만큼 가버린 세월.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추었는데 저 세월은 고장도 없네.” 어렵고 힘들 땐 고장 난 시계가 되고 싶었다. 그 세월의 흔적을 한꺼번에 지우고 싶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세월도 노래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고난도 사랑이 깃들면 참 아름답다는 것은 자식을 키워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사랑할수록 눈물이 많아지고 그 뜨거운 눈물은 강한 삶의 열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정옥 엄마는 올해가 뜻 깊은 해다. 더욱이 봄이 오는 들판에서 들꽃이 되어 노래하고 있으니 행복한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