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김대중이 햇볕정책이란 구실로
북한에 송금한 돈과 비밀리에 송금한 돈의 일부가
김대중에게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다 북한이 무기개발에 관한
부담스러운 요청을 했다고 한다.
(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하고 있는 무기설계 및 생산
기술과 자금을 요청하였음)
정회장은 거부하였다.
결국 정 회장에게
이적 행위라는 짐을 지워
완벽하게 포섭하려던 김정일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고,
비밀 누설을 두려워 한 김대중에 의해,
국정원 김대중 팀 직원 3명이
그를 반 마취 상태에서 창 밖으로 던져 살해했다.
전 현직 국정원간부들의 고백!!
김대중은 남한 적화 최고 사령관이다!!
-전현직 국정원 간부들의 고백!!
김대중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벌해야 한다.
김대중은 오랫동안 남한을 적화시키기 위해 김일성, 김정일과
결탁하여 온갖 음모를 자행하여, 남한 내에 적화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다고 한다.
이 무서운 음모의 뿌리, 모든 실체가 아래와 같이 폭로되었다.
이 사실을 아는 많은 우익 정보원들이 살해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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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이 임명한 대남 혁명 사령관 DJ
전, 현직 국가 정보원들이 국민 여러분과 국군에게 드리는 시국 선언문:
이 글은 전, 현직 국가정보원 직원 4명이 그동안 본의 아니게
좌익에게 포섭되어 저지른 이적 행위를 국민 앞에 속죄하고,
이 땅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는 좌익 세력들의 엄청난 흉계와 범죄
사실을 폭로하여 그들을 징계함과 동시에, 발발 위기에 처해 있는
전쟁을 막고자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입니다. ━━━━━━━━━━━━━━━━━━━━━━━━━━━ 1. 좌익 혁명에 미쳐있는 김대중의 범죄 사실을 폭로한다. ━━━━━━━━━━━━━━━━━━━━━━━━━━━ 김대중은 이미 60년대 초에 김일성으로부터 대남 적화혁명의
남한 현지 사령관으로 임명받은 자이다.
지금까지 남한 내에서 일어난 북한의 대남공작 활동은 전부가
김대중과 협의를 거친 것이다.
김대중이 권력을 잡기 전에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는 인편으로 북한과
정보를 교류하였고, 대통령이 되고 부터는 자신의 측근인 고정간첩을
통해 교류하기도 한다.
오늘날 남한을 적화시키기 위한 북한의 대남 혁명 전략전술은
김대중이 대통령 재직시에 완성한 것이며, 김대중이 남북 좌익
세력들을 총 지휘하게 되어 있다.
육영수 여사 시해(弑害) 사건도 김대중과 일본 조총련의 합작이다.
박대통령을 시해하려다 빗나간 사건이었지만 만약 성공을 했다면
당시 그는 북한군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김대중은 10.26 사태 당시 호남인들을 봉기시켜 남침과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삼는다는 계획에 따라 남한 내의 고정간첩들을 앞잡이로 세워 호남인들을 충동질하는 악성 유언비어를 살포하였다.
결국 호남인들을 봉기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북한의 개입을
예측한 미국의 움직임 때문에 김대중은 망설이다가 기회를 잃어버렸다.
당시 언론에서는 남한을 해방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김일성이 크게
후회를 하고 있다고 보도하였으나 총 지휘를 한 김대중의 후회는
더 컸다.
김대중의 5.18 내란음모 죄는 과거의 우익정권이 전략상 유야무야
시켰으나 그의 내란 음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통령
재직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요약)
"과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땅굴 미확보) 기회를 놓쳤지만
이번에는 틀림없다. 늦어지면 다음 정권 때(노무현 정권 때)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나의 뜻을 이어줄 차기 대선 후보가 문제다.
후보만 마땅하면 당선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돈이 문제이긴 하지만..... 돈만 충분히 준비되면 쉬운
일이다. 그리고 호남인들을 한 번 더 봉기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호남인들은 내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한다."
이 말은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자살 압력을 받고
버티다가, 끝내 살해당한 (창밖으로 던져 죽인 사건)
정몽헌 회장이 김정일로부터 들은 것이다.
정몽헌 회장은 사업상 본의 아니게 북한 권력층에
포섭되어 있었고, 김대중의 정체와 그의 햇볕정책
내막을 알고 나서 괴로워했다고 한다. 특히 김대중과
북한으로부터 무리한 요구를 받고 나서는 더욱
힘들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