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역사박물관 건립되었으면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인물의 전기, 자서전, 평전, 소설 등을 읽고 소신을 밝히는 일은 조심스럽다.
최근 이태복 저서『윤봉길 평전』읽었다.
우리고장 출신 고인이되신 이상재 선생님의 표사의 글과 사못 다르다. 이책은 윤규상, 이상재 공저로 발간한 [인간 윤봉길 연구]이다. 발행연도 24년 차이가 난다. 표사의 글에서 두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재 선생은 1995년[인간 윤봉길 연구] 발행하면서 "40여년 자료수집하여 책을 발행했어도 미흡하고 보태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라고 술회했다.
아래의 글은 윤봉길 평전[강인한 사랑의 독립전사]
2019년 3월 8일 발행, 이태복 저자의 표사의 글이다.
아래의 글은 1995. 4.20일 이상재, 윤규상 공저 발행한
[인간 윤봉길 연구] 이상재 선생님의 표사의 글이다.
평소 내가 윤봉길 의사 관련 서적을 읽고 귀동냥으로 알았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윤 의사의 출사표는 윤의사의 우묵 가운데서 집자하여 만들 글씨.’라는 주장에 동감한다. 충의사내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안에 걸려있는 “장부출가 생불환” 한문 글자는 너무 잘 쓴 글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썻던 글이 유실되어 안타깝다.
1932. 4. 26 한인애국단에 선서한 윤봉길의사 글 원본을 보고 싶다.
고인이 되신 윤규상, 이상재 선생님은 윤봉길 의사에 관한 연구, 예산군 향토자료 발굴, 윤봉길 의사 기념관 건립 등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충의사 내 ‘윤봉길 의사 기념관’안에 소장중인 『농민독본』 설명서와 과거의 저서와 연구논문에 윤봉길 의사가『농민독본』을 저술했다. 라고 되어있다.
교과서에 실렸었던 윤의사가 투척한 폭탄은 “도시락폭탄”이 아니라 “물통폭탄”판명되었으면 이 부분을 교정했으면 한다.
실명도 아니고 가명으로 쓴 고영선『윤봉길 전』과 1994년 이현희가『이유필 연구』자료를 구입하여 읽어보지 못했다. 이태복 저서『윤봉길 평전』읽고서 수긍을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사)매헌 윤봉길 월진회장은 ‘이태복’ 이다. 현직 회장이다. 윤봉길 의사의 행적과 김구 선생의 행적에 대하여 다르게 주장하고 있다.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 양자관의 관계는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였다.
1)백정기, 이봉창, 윤봉길 3의사는 모두 일본에서 처형, 순국하여 일본에 묻혀
있었다가 윤봉길 의사의 유골은 그의 친아우 품에, 이봉창 의사의 유골은 경교장
인사의 품에, 그리고 백정기 의사의 유골은 이강훈 품에 안기어 서울역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애도를 받았았다.
한인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조직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이다.
2) 1932년 한인애국단은 많은 활동을 했다. 이봉창의 동경의거(1. 8), 상해 일본군
사령부 폭파 계획(중국인 용병, 실패, 2.12), 윤봉길 등의 상해 일본비행장 폭파
계획(좌절, 3. 3), 이덕주·유진식의 조선총독 공략좌절(3월), 윤봉길의사의 상해
홍구공원의 의거(4.29), 최흥식·유상근의 만주 관동성 공략 좌절(5월)이다.
의열단 투쟁이 테러와 다른 점은 정의의 공감대 형성된 점, 타격목표가 분명한 점,
자신의 공개적 행동이라는 점이다.
3) 이봉창은 김구를 끌어들이지 않았다. 일제는 그 배후를 임시정부로 지목하고,
많은 검사들을 상해로 파견하여 조사를 진행하였고, 김구가 배후 인물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봉창은 김구를 모른다고 했다.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의사는 일본인에 검거된 후 심문과정 진술에서 “자신이 행한
것과 같은 의거는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응징이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일본에
대한 경고성 발언’으로 추측된다.
이봉창 의사와 한국독립운동(이봉창 의사 장학회 엮음, 단국대학교출판부,(
2002.1.3.발행)에 적시된 “윤봉길 등의 상해 일본비행장 폭파계획(좌절, 3. 3)”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면 사)매헌 윤봉길 월진회에 밝혔으면 한다.
4)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에 뿌리를 두면서 별개 단체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폭탄단체로 공인 받으면 외교상 문제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석 김구가 알아서 거사를 추진하고 결과만 보고하게 되어 있던 것이다.
한인애국단은 상설된 조직이나 강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이 발생하면 "한인애국단"
이란 이름을 써서 대처하는 체계였다.
5) 이봉창, 윤봉길 양 의사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승인 하에 김구의 지휘로 계획
하였으며, 폭탄확보 및 거사자금 조달은 모두 김구의 주도적 역할과 도움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많은 자료를 통해 분명히 알려져 있다.
6) “그 세 사람(윤봉길, 백정기, 이봉창)죽으라고 보낸 것이 바로 나다. 그러나
세 사람을 보낸 나만이 살아 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니 3의사에
대하여 부끄럽기 한량없다는 회고를 금할 수 없다 – (조선일보 1946. 6.18)
『윤봉길 평전』을 읽은 후 윤봉길 의사에 관한 많은 양의 글을 쓰려고 했었다.
심사숙고한 결과 고증과 증명이 되지 않은 글을 발표하기에 다소 무리가 부담이 갔다.
그 동안 윤봉길 의사 이야기, 저서, 평전, 연구 등 많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되었다. 모순과 오류가 많다. 이런 것은 학술대회와 전문적인 역사연구가 논문, 여러 고증을
거쳐 바로 잡았으면 한다.
윤 의사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유품, 유물과 윤봉길 의사 행적 관련 자료 공개 했으면
한다.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은 힘든 일이다.
나는 그동안 윤봉길 의사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주장하였다.
1. 우리나라에서 기 출간된 윤봉길 의사 일대기 책 내용에 역사적인 사실과 다른 글이 많이
발견된다.
2. 윤의사가 저술했다는 ‘농민독본’은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조선공산당 당수 이성환의
‘조선농민사’ 글을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교과서에 나오는 ‘도시락폭탄’은 자결용으로 준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압수
당했다.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이 아닌 ‘물통폭탄’이다
4. 부흥원은 대들보는 박세현 부친이 만들었다. 부흥원 이름만 지었다.
5. 현재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충의사 윤봉길기념관에 전시중인 ‘한시집’, ‘옥타’,
‘명추’, ‘임추’, ‘염락’ 시문집은 윤 의사 생존연대와 맞지 않는 시이다. 윤의사가
직접 다 쓰셨다고 하기 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6.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전시중인 사료 중 원본이 없다. 윤봉길 의사 친족이 보관중인
물품을 예산군에 기증하여 ‘윤봉길 의사 역사박물관’을 만들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1) 항일혁명투사 구파 백정기((사)구파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 박기수, 저자 조광해, 2009.1215발행)
2) 이봉창 의사와 한국독립운동(이봉창의사 장학회 엮음, 단국대학교출판부, 2002.1.3발행)
3) 이봉창 의사와 한국독립운동(이봉창의사 장학회 엮음, 단국대학교출판부, 2002.1.3발행)
4)윤봉길 의사 일대기(신호웅, 이상재, 윤규상 공저, 경혜사, 2006. 4. 24.)
5) 항일혁명투사 구파 백정기((사)구파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 박기수, 저자 조광해, 2009.1215발행)
6) 항일혁명투사 구파 백정기((사)구파백정기의사 기념사업회 박기수, 저자 조광해, 2009.1215발행)
첫댓글 좋은글
평전
찬찬히 잘 읽었습니다
최병교 시인님 감사합니다.
평정이 평전에 대한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사명감 이란
단어가 생각납니다.
무릇 한 개인, 그것도 역사적 인물의 일대기이자 전기에 해당하는 평전을 기술한다는 것은 문학적 묘사나 개인의 가설이 아닌, 철저한 사료 중심의 사관史觀이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태복이 쓴 윤봉길평전에서의 김광이 쓴 나의 친구 윤봉길을 들어 김구의 매헌의거 개입사실을 회의시하는 태도는 가설를 역사적 진실로 포장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대표적 경우라 할 것입니다. 나는 윤봉길의사 실제 윤남의 선생과 수 없이 대작을 한 사람입니다. 김원상, 곧 윤의사 모친은 14남매를 두셨고, 이 중에서 5남2녀만을 상장시켰습니다. 평전은 5남2녀 출생이라 하여 오류입니다. 또 과도한 중국의 당대역사 기술은 평전에 맞지않습니다
윤봉길 의사 평전이라
큰 기대를 했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가 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매헌 선양사업을 핑계로 무위도식하는 부류가 양산되어 하는 일 없이 호가호위 또는 호의호식하는 무리의 양산입니다. 매헌을 선양하는 첫번째는 매헌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며 이는 이웃과 지역사회에의 헌신이 그 요체가 되는 것이지, 무슨 요란한 축제로 수억원의 금원을 헌신짝처럼 써버리거나 명함을 파서 호가위하는 작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특히 매헌을 팔아 문학적 성과가 저열한 문인들에게 <윤봉길문학상>을 수상하는 등의 행악은 큰 문제라 할 것입니다. 김창배 동지, 언제 단 둘이 만나 쇠주 한 잔 하도록 합시다.
좋은 지적을 해 주신
신익선 문학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참고로 김광이 쓴 중국어로 출간 된 이 책은 저의 서재에 있습니다. 이봉창 관련 서적도 갖고 있습니다. 김광을 일러 이 책에서는고영희라 하였고, 안창호의 비서실장이엇던 구익균 선생은 고영선이라하여 각각 이름이 다름니다. 고영선은 프랑스조계철도검표확인자엿습니다. 흥사단 단원인데 독립운동사전이나 명부, 독립표창, 훈장의 명단은 없는 분입니다. 김광, 의 쓴 책인 [나의 친구 윤봉길]은 구익균선생 말에 의하면 "고영선이 대학입시에 자금을 보태기 위하여 쓴 책이나 재미를 못봤다" 고 합니다. 저는 그런 자료들을 다 갖고 있습니다. 농민독본도 매헌 저작이 아님은 명확합니다. 매헌의 시340수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나
평전은 수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붓가는데로 써서는 않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을 이 책 저책에서
옮겨서도 않됩니다.
340편 모두를 매헌이 기술한 것이 아님 역시 명확합니다. 장부출가생불환은 집자, 가 맞고 더하여 매헌을 일러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윤봉길이 김구의 행동대원이다, 아니다, 라는 프레임을 갖고 말하거나 글을 쓴 사실이 없음에도 이번 이태복의 윤봉길 평전에서는 마치 무슨 훈장인양 그를 주창하는 일은 오로지 독자적인 혼자만의 망상을 과대포장하는 것으로써 평전의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 심각한 견강부회, 또는 수석침류의 증좌라 할 것입니다. 윤봉길 소유라는 시량리 논밭 등의 재산상의 설명도 오류가 확실하며 더 이상 일일히 살펴 말하기로 하면 끝이 없으나 당장 나도 원고청탁에 의한 집필로 시간제약이 극심하므로 그만 줄이오
많은 것을 지적하려고 했으나
자제를 하였습니다.
조목조목 지적을 해 주어 감사합니다
조금씩 그러한 일들이
이루워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