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북 신광수의 외삼촌 간옹 이헌경의 족부..
崇祿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捴府都捴管 李公 諱 齊嵒 墓誌銘.
獻慶 事我族父知事公 自公中身距今五十年 竊瞷公處而在鄕黨 出而游太學 仕而接僚寀蒞郡縣 一辭稱之曰吉士善人 人人亦皆曰某愛我 無或有怨惡之人 或以是疑公之一於和。而徐考其行則與人羣居 輔友以仁 喜䂓人過失 居官不廢刑威 不悅人而人悅之者何故 曰惟誠而已 孟子稱周有二大老 而又以德一齒一爵一爲達尊三 今公以崇品之卿九耋之年 至誠之道 服人心又如此 宜其爲一國之大老 而數十年退居湖海 以花竹泉石自娛 其操介如 其聞煇如 歿之日 遠近吊者哭聲皆哀 嗟乎豈不賢哉 公長吾先君子一歲而同年科 偕朝出入 相引重如大車之有輪輻 自先君子下世 小子倚公如崩河之有巨防 公歿踰年 公之孤羽慶等 以公幽堂之銘屬諸獻慶曰 此吾先人遺意也 獻慶義不敢辭 於邑良久 謹按狀而序之曰 公諱齊嵒字季瞻 姓李氏 我世宗莊憲王十代孫也 世宗別子潭陽君諱璖早卒無嗣 以母兄桂陽君諱璔之子江陽君諱潚爲後 江陽生喜安君諱輯 喜安生錦川君諱瑊順川君諱琯兄弟 俱師事李仲虎先生 勵志篤學 比漢有河間焉 公本順川君之六世孫 而皇考贈戶曹判書諱千齡出後 于錦川君之玄孫贈戶曹參判諱震亮 系譜於所後法宜詳 錦川長子曰諱誠中號坡谷 官戶曹判書 龍蛇之亂 餉天兵有功 贈領議政完昌府院君謚忠簡 是生諱幼沈 宣務郞 是生諱命寬贈戶曹參議 皆隱德不仕 實爲公曾祖以上也 皇考判書公美風儀 有才學善草隷 與兄蓮亭公玄齡有聲士林間 妣贈貞夫人昌寧成氏 通德郞諱大亨之女 甚有婦度 以肅廟十六年庚午十月初六日 生公于保寧縣之東㙜里第 聡穎絶倫 於書一覽輒誦 八歲長老以火鐵命題 公應口對曰入則處囊中 發則燒秦宮 長老驚異 已知爲遠大器 弱冠文譽藉甚 丙午陞國子生員 旣游太學 始兼治講經 戊午殿講 比較製述居首 直赴庚申增廣殿試 爲洪重孝榜下及第 辛酉選付槐院權知正字 壬戌除成均館典籍 俄遷司憲府監察 癸亥轉兵曹佐郞宗廟令 乙丑除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 丙寅除吏曹佐郞 丁卯出爲萬頃縣令 庚午移正言 壬申除寧海府使 戊寅除司憲府掌令 己卯復爲掌令 疏論科塲不嚴 癸未陞通政階拜掌隷院判决事 己丑以年八十進階嘉善 拜同知敦寧府事都捴府副捴管 壬辰拜漢城府左尹 是時英廟聖壽七十九歲 朝臣方請慶賀禮 公雖篤老 遭逢晠際 不敢退處 入京肅謝 仍以翌年癸巳 推恩陞資憲階 英廟聞公筋力康旺 召見便殿 問及寢食 特除知中樞府事 許入耆英社 公感激恩數 與耆老諸公 設宴藥峯下 耆老會者十五人 其餘縉紳亦數十人 相與賦詩謌詠 以備太平盛事 將歸上疏陳勉淸心省事之要曰 攝養之道 惟在靜而應物 簡而臨事而已 健行之天 有無極之靜 厚載之地 有易從之簡 聖人之參天地而應萬機者 不外乎斯二者 大德必壽 良以此也 上優批嘉之 甲午除都捴府都捴管不赴 其後連陞資 自正憲至崇祿 累擬正卿 不果受點 戊戌二月初七日 以微感考終于正寢 享年八十九 計聞于朝 吊祭致賻如例 葬于縣西石峴甲坐之原 公白而長身 儀度儼然 莊重而和易 通敏而簡默 體無惰容 口絶褻語 事親以孝 生養死葬祭 不計貧匱 竭誠盡禮 居喪不見婦人面 嘗作祭禮圖式 務從儉約曰 儉則易具而精 濫則難辦而雜 待兄弟宗族 曲盡恩義 各得懽心 長於治民 所在有循吏聲 吏民愛之若父母 去輒攀轅出涕 至馬不得行 在萬頃則縣西南地卑下 數被海灾 公勸民築堰以障之 授以方略 不勞而成堤約三十里 自是海不爲灾 至今號爲李公堤 翁主宮差非理侵虐島民 公命逐之 奪還民錢五百緡 道伯怵宮勢以爲言 公不爲動 在寧海歲大歉 公捐俸拮据 得米粟千餘斛以賑之 凡賦役如大同錢倭舘米 悉自官辦備 俾民不知 所蠲惠錢以貫計者五百 米以斛計者三百 又於空地開水田 種稻收利 得錢七百緡 立雇馬廳 以省民馬徵括之弊 邑有律生 歲貢蔘費至四五百金 率破産徵族 公曰律生亦民也 奈何令獨困 遂捐財設廳 歲取贏利 以當其費 自是律生得不困弊 大抵爲治慈詳惠愛 專以誠懇 敎諭愚民 不要立名譽爲能 而經濟抱負 亦可以槩見於如右設施 惜不大展布云 旣老歸于鄕 訓飭子弟 勸戒鄕人 勉爲孝友善事 如節約以贍家用 稧飮以敦隣好 悉有䂓撫可法 置小築於磵上 亭曰臨磵 堂曰晩休 自號磵亭 喜看古人簡牘名畫筆 常置几案 嘯詠自適 有磵亭遺藁數卷藏于家 前配高靈申氏 義濟之女 監司涌之玄孫 溫淑有女士行 後配漢陽趙氏 鳳至之女 執婦道幹家事 晝夜不懈 雖甚貧窶 虔奉祭祀 與弟婦兪氏同居三十年 庭無間言 公嘗曰吾八年游學在外 不以寡嫂與家事爲念者 賴有內助之賢 有三子 凝慶進士 申氏出也 羽慶,承慶 承慶出後族父齊喬 凝慶有三女 適李宗溟,李柱溟進士,沈浹 羽慶有三女二子 女適洪樂衡,金瑞鎭,洪芝榮 子廷翼,廷翬 廷翬爲凝慶後 承慶有二子一女幼 內外曾孫不錄 銘曰,
肅英在宥 元氣厖厚 鍾毓薰龢 邦多黃耈 雖則多矣 孰德之茂 孰秩之高 似公兼有 翼翼鮐背 上殿趍走 王多寵錫 金犀芾綉 宜爲蓍蔡 訊失若否 公心西顧 公馬南首 獨行考槃 巖卧泉潄 雖有經緯 蛹不見紬 化行家鄕 州縣與究 是亦爲政 擧隅知袤 存爲衆愛 歿無人咎 和俗弗隨 孰察所守 我銘不多 尙眎來後.
숭록대부 지중추부사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이공 묘지명.
헌경(獻慶)이 나의 족부 지사공(知事公)을 섬긴 것은 公의 중년부터 지금까지 50年에 이른다. 향당(鄕黨)에 살면서 公의 처신을 엿보았거나, 집을 떠나 성균관에 다닐 때나, 벼슬하여 군현을 맡아 다스리며 접했던 동료가 한결같게 “훌륭한 선비에 착한 사람이다.” 칭송하였다. 뛰어난 사람들도 모두가 “나는 아무개를 친애한다.” 하였고, 더러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 公이 더러 의심해 보았는데 오로지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 무리에 있을 때 모범이 되는 그 행실을 천천히 자세히 살펴볼 것 같으면, 어지신 까닭에 친구를 바르게 돕고, 사람의 잘못을 바르게 충고하길 좋아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위엄 있게 형벌을 폐하지 않으니,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나 기뻐하는 자가 무슨 까닭으로 “오직 참되게 하였을 따름. ” 이라고 말하였겠는가? 孟子가 “주위에서 훌륭하다고 일컫는 노인 둘이 있고 거기다 학식과 연령과 관작 세 가지를 갖추면 나라에서 존경받는 달존이 된다. ” 하였다. 公은 품계 높은 벼슬하며 연세가 구십에 다다르도록 지성스럽게 도를 깨우쳤고 사람들도 마음으로 이같이 따르며 마땅히 一國의 大老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십수 년간 충청도 바닷가로 물러나 거주하며 꽃과 대나무와 샘과 돌로 스스로를 달래면서 그 지조와 절개도 같게 하였으니 그 빛나는 평판도 같았다. 돌아가신 날 원근에서 온 조문객들이 소리 내어 곡하고 모두 애통하여 “어찌 어질다고 하지 않으리오? ” 하며 탄식하였다.
公은 나의 선군자 보다 1歲가 많고 같은 해 大科及第하여 함께 조정에 출입하며 서로 소중하게 이끌어주고 같이 임금을 보필하는 신하로 의좋게 지냈다. 선군자가 세상을 떠나고부터 소자가 公을 거대한 제방으로 여기고 의지해왔으니 강이 무너져 버린 것 같았다. 公이 돌아가시고 몇 년이 흘러 公의 고아 우경(羽慶) 등이 公의 유당(幽堂)의 비명을 여럿 가운데서 獻慶에게 부탁하며 “이것이 나의 선군자가 남긴 뜻이다. ” 하니 헌경은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한참 지나도록 흐느껴 울고 있었다. 삼가 행장을 접하고 차례대로 말하자면, 公의 諱는 제암(齊嵒)이고 字는 계첨(季瞻)이며 姓은 李氏로 우리 世宗莊憲王의 10代孫이다. 세종의 후궁 소생 담양군(潭陽君) 諱 거(璖)는 일찍 세상을 떠나 후사가 없어서 동복형 계양군(桂陽君) 諱 증(璔)의 아들 강양군(江陽君) 諱 숙(潚)이 후계자가 되었다. 강양군은 희안군(喜安君) 諱 집(輯)을 낳고 희안군은 금천군(錦川君) 諱 감(瑊)과 순천군(順川君) 諱 관(琯) 형제를 낳았는데 함께 이중호(李仲虎, 1512~1554)선생을 스승으로 섬기며 뜻을 가지고 독실하게 힘써 배워 河水 사이에 있었던 중국 사람과 견주었다. 公은 본래 順川君 琯의 6世孫이나 부친 증이조판서 諱 천령(千齡)이 금천군의 현손 증호조판서 諱 진량(震亮)의 후계자로 나가 계보(系譜)에서도 뒤에 존재하고 법적으로도 자세하고 마땅하다. 금천군의 장자 諱 이성중(李誠中, 1539~1593)은 號가 파곡(坡谷)이고 호조판서(戶曹判書)로서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으로 나왔던 중국군대에 군량을 보급한 공로로 영의정, 완창부원군(領議政, 完昌府院君)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이분이 선무랑 유침(幼沉)을 낳고 이분은 증호조참의 명관(命寬)을 낳았다.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셨으니 실로 公의 증조부 이상의 분들이다. 부친 판서 公은 풍채와 행동거지가 아름다우며 학식과 재주가 있어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형 연정공(蓮亭公) 현령(玄齡)과 더불어 士林 사이에서 명성이 있었다. 모친 貞夫人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통덕랑 대형(大亨)의 여식으로 부녀자의 법도가 깊었다. 1690年 肅宗16 庚午年 10月 初 6日 충청도 보령현(保寧縣) 동고리(東塙里) 집에서 公을 낳았다. 총명하고 영특하기가 절륜하여 책을 한 번에 훑어보면 쉽게 암송하였고 8歲에 長老가 火와 鐵로서 글짓기를 명하자 公이 입으로 응답하기를 “들어가면 주머니 속에 있지만 터져 나오면 진시황궁도 불로 태운다. ” 하니 장로가 그 남다름에 놀라서 반드시 원대한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글 잘하기로 명성을 크게 떨치더니 1726年 英祖2年 丙午年 37歲에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이윽고 성균관에서 노닐며 경서 강론을 비롯하여 나란히 다스려 겸비하고 1738年 英祖14 戊午 전강(殿講) 비교 제술 부분 수석을 차지하고 1740年 英祖16 경신증광시(庚申增廣試 51歲)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하여 홍중효(洪重孝, 1708~1772)의 방(榜) 아래로 급제하였다. 1741年 英祖17 辛酉年, 承文院에 선입되어 권지정자(權知正字)를 부여받았다. 1742年 英祖18 壬戌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별안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 1743年 英祖19 癸亥年, 兵曹佐郎과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전출되었다. 1745年 英祖21 乙丑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1746年 英祖22 丙寅年, 이조좌랑(吏曹佐郎)에 제수하였다. 1747年 英祖23 丁卯年, 전라도 만경현령(萬頃縣令)으로 나갔다. 1750年 英祖26 庚午年 사간원정언(司諫院 正言)으로 옮겼다. 1752年 영조28 壬申年 경상도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하였다. 1758年 英祖34 戊寅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제수하였다. 1759年 英祖35 己卯年, 다시 사헌부장령이 되어 과거 시험장이 엄숙하지 못함을 거론 상소하였다. 1763年 英祖39 癸未年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 堂上官, 74歲)로 오르고 장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가 되었다. 1769年 英祖45 己丑年에 연세가 80歲가 되어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오르고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도총부부총관(同知敦寧府事都捴府副捴管)이 되었다. 1772年 英祖48 壬辰年 83歲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이 당시 英祖大王의 춘추 79歲로 조정 신료들을 초청하여 나란히 하례하는 경사에 公이 비록 몹시 연로하였으나 현신이 명군을 만나 서로 뜻이 맞았던 밝은 시대에 감히 물러나지 못하고 입경하여 謝恩肅拜 하였다. 이어서 다음 해 1773年 英祖49 癸巳年 임금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를 올려주고 英祖가 公이 근력이 강건하고 왕성하다는 소문을 듣고 초정하여 편전(便殿, 正殿이 아닌 별전)에서 접견하며 침식(寢食)을 묻고 나서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며 기영사(耆英社)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였으니 公은 여러 번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였다. 기로소 제공들과 함께 낙봉(藥峯) 아래에서 잔치를 벌였으니 耆老會에 모인 사람이 열다섯이었고 그 고관들도 수십 인이었다. 서로 함께 詩와 賦에 노래를 지어 불렀으니 태평성대에 갖추어진 일로 생각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맑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사를 성찰하라고 진술한 상소를 보냈으니 요약해 보면 “건강관리를 잘하여 오래 사는 방법을 말씀드리자면 오로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물을 대하며 살면서 간단하게 일에 임할 뿐입니다. 하늘은 굳세게 베풀면서 고요하여 끝이 없는 것 같아도 끝이 있고 땅은 후덕하여 만물을 싣고 간단하고 쉽게 따르고 있습니다. 성인은 천지와 덕을 같이하고 제왕으로 모든 정무에 응하면서 이 둘을 벗어나지 않으시고 큰 덕으로 반드시 장수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더니 이에 상이 가납 하여 칭찬하는 비답을 내렸다. 1774年 英祖50 甲午年 도총부도총관(都捴府都捴管)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후 연달아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부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도록 누차 정경대신들과 헤아리고 비교하여 점 찍어 받은 것에 불과하다. 1778年 正祖2 戊戌年 2月 初 7日 감기(感氣) 기운이 조금 있더니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享年 八十九. 부고가 조정에 전해지자 전례와 같이 조문오고 치제에 부의를 내려 주었으며 현의 서쪽 石峴 언덕에 甲坐 하여 묻히셨다.
公은 살결이 희면서 키가 크고 거동과 법도가 엄연하였다. 장중하나 온화하게 바뀌고 민첩하게 통하면서 과묵하고 간결하고 게으른 모습이 없고 무례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효도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장례나 제사에는 살림이 부족하여도 계획하지 않고 있는 힘과 성심을 다하여 예식을 치르고 상제로 지내는 동안에는 부인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일찍이 제례도(祭禮圖) 그려놓고 검약하게 힘써 따르도록 말하며 “검소하다는 것은 간단하면서 정성스럽게 구비 한 것이고 넘쳤다는 것은 갖추고 준비하기도 어렵거니와 뒤섞여 천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형제와 종족을 대함에 은혜와 의리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각기 환심을 얻었다.
수령으로서 주민을 다스리는 곳에 있으면서 법을 잘 지키는 관리라는 소리를 들었고 아전과 주민을 부모와 같이 사랑하였으니 눈물 흘리며 떠나는 수레를 잡고 가지 못하게 하고 가려고 힘쓰는 말을 제어하기도 하였다. 전라도 만경현(萬頃縣)에 재직할 때 현의 서남쪽 땅이 지대가 낮아 바닷물의 피해를 수차례 입고 있었다. 公이 주민들에게 권장하여 방죽을 쌓아 가로막아 지키도록 방법과 꾀를 가르쳐주어 힘들이지 않고 30리에 약속한 제방을 이루어 이로부터는 바다로 인한 재앙이 없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李公의 제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옹주(翁主)의 심부름하는 벼슬아치가 섬 주민들을 학대하며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적발하여 公이 쫓아내도록 명령하고 다시 빼앗아 되찾아 온 주민의 돈꿰미가 오백 냥이었는데 全羅道 觀察使가 옹주의 권세가 그와 같이 두렵다는 말을 하였으나 公은 동요하지 않았다. 경상도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있으면서 큰 흉년이 든 해 公이 봉급을 덜어내고 손과 입을 함께 놀려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벼와 쌀 천여 곡(일곡=10말)을 얻어와 나누어 주었고 모든 부역에 차별을 두지 않고 돈과 왜관 쌀로 대신하고 모두 스스로 관에서 판별하여 비축해 놓았으나 아전이나 주민들이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하였다. 고을 호적에 등록된 남자 중에 부역 대신 관아에 돈을 낸 사람이 도합 오백이고 곡미를 낸 자는 도합 삼백이었고 또 버려진 쓸모없는 땅을 개간하여 논으로 만들어 씨를 뿌려 벼를 수확하여 이득을 얻은 돈 꾸러미가 칠백이라 주민들에게 조사하여 고마청(雇馬廳)을 세워 부역에 나가는 대신 낸 돈으로 말을 구하여 대신 일을 시켜서 주민을 귀찮게 하는 부역을 한 체계로 묶어 버렸다. 고을에 율생(불교의 한 소수 종파의 우두머리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인삼에 드는 비용이 사오백금에 달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파산을 요구하자 公이 “율생도 우리 주민인데 어찌 내가 단독으로 곤란한 명령을 내리겠는가? ” 하며 마침내 재량으로 설치한 청에서 손해 보고 해마다 이자 쳐서 남는 것으로 그 비용을 감당하였다. 이로부터 율생은 곤란한 폐단이 없어 고맙게 여겼다. 대저 자비롭게 다스리려면 자세히 검토하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오로지 진실한 정성으로 어리석은 주민을 가르쳐 깨우치고, 명예 세우는 일은 잘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구제하고 경영하고자 하는 포부와 베풀고 시행한 것도 우측과 같이 설명하였으니 대강 드러났다고 하겠으나 크게 펼쳐 시행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하겠다. 이윽고 늙어서 고향에 돌아가서 아우와 자식들에게 조심하도록 엄하게 훈계하고 향리 사람들에게 착한 일은 권장하고 악한 일은 징계하며 부지런히 효우 하며 착한 일을 하였다. 절약하는 것 같았어도 집에서 넉넉하게 비용을 대거나 추수하여 잔치를 열고 이웃과 돈독하게 지내기를 좋아하고 모두 법에 맞고 규범 있게 어루만졌다. 산골짜기 흐르는 물가에 작게 지어 설치하고 “임간정(臨磵亭)” 이라 하고 집은 “ 만휴당(晩休堂)” 이라 하고 스스로 “간정(磵亭)” 이라고 불렀다. 성현의 간찰을 읽거나 유명한 그림과 글씨 보길 기뻐하여 항상 안석이나 책상에 넣어 두었다. 구애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가를 읊고 “간정유고(磵亭遺稿)“ 몇 권을 집에 저장하였다.
전배위 고령 신씨(高靈 申氏)는 의제(義濟)의 여식이며 監司 통(涌)의 현손으로 온화하고 정숙하며 여사와 같은 학행과 덕행이 있었고 재배 한양 조씨(漢陽 趙氏)는 봉지(鳳至)의 여식으로 부녀자의 도리를 지키며 집안일을 떠맡아 처리하는데 밤낮으로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고 비록 매우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제사를 정성껏 받들고 동서 유씨(柳氏)와 30年을 같이 살았어도 가정에서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므로 일찍이 公이 말씀하길 “내가 일찍이 8年 동안 학교(성균관)에 다니느라 집 떠나 살면서 과부가 된 제수와 집안일을 거느리지 못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어질게 내조하였다.” 하였다.
아들은 셋이 있다. 進士 응경(凝慶)은 申氏 소생이고 우경(羽慶) 승경(承慶)이 다. 승경은 나중에 족부 제교(齊喬)의 후계자로 나갔다.
응경은 딸 셋이 있고 이종명(李宗溟), 進士 이주명(李柱溟), 심협(沈浹)의 정실이다.
우경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는데 여식은 홍낙형(洪樂衡, 洪義老),김정서(金鼎瑞, 金瑞鎭) 홍지영(洪芝榮)의 정실이고 아들은 정익(廷翼),정휘(廷翬)이다. 정휘는 응경의 후계자가 되었다. 승경은 어린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다. 내외 증손은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묘비 글을 지어 새기고 이릅니다.
숙묘 영묘 시대 보좌하였고
크고 두텁게 타고 난 정기
거듭 모아 기르고 합쳐 감화되고
나라에 노인 많고 본받을 사람 많다하나
누구의 덕이 빼어났습니까?
누구의 관직이 높습니까?
이와 같이 둘을 갖추고 정돈한 노인으로
대궐로 달려 올라가 많은 은총 내려주시니
작게 수놓은 황금 서각을 두르고
마땅한 훌륭한 본보기 되었네
과실을 따져 물어 부정을 가리며
공의 마음은 서쪽을 향하여 돌아보고
공의 말은 남쪽으로 향하여 머리 두고
홀로 노래 장단 맞춰 쟁반 두드리고
샘물로 씻고 바위에 누워
비록 가로 세로로 얽어매어 있는
번데기로 비단은 보지 못할지라도
시골집 돌아다니며 교화시키고
주현을 같이 연구하여 옳게 다스리고
구석에서 행하여도 길이를 알아내니
무리의 사랑 받으며 살았고
죽어서 허물 말 하는 사람 없고
세속을 떨쳐내며 화합하여 따랐으니
누가 태수의 살피는 도리 하였는가?
나는 묘비에 많이 쓰지 못하였지만
바라 건데,
후세에 내려가도록 보이리라.
[주D-001] 이제암 李齊嵒: 1690年 肅宗16年 庚午生-1778年 正祖2年 戊戌卒. 享年89.
英祖 祖 文臣. 本貫, 全州. 字, 季瞻. 號, 澗亭. 문집, 澗亭集. 耆英會에 들었다.
1726년 英祖2年 丙午式年試 生員3等41位, 生員 合格者 100名 中 71位. 37歲.
1740年 英祖16年 庚申增廣試 文科 乙科6等, 及第者 51人 甲科3 乙科7 丙科 41, 總 9位. 51歲. 孝宗 대왕대비 임금 중전 존호를 올린 경사로 11月 치러진 시험. 시제 “명나라 侍郞 丘濬이 大學衍義補를 바치다.”였다.
全北 萬頃縣令: 1747年 英祖23年 丁卯年- 1749年 英祖25年 己巳年 58-60歲.
慶北 寧海府使: 1752年 英祖28年 壬申年- 1757年 英祖33年 丁丑年. 63歲-68歲.
품계는 正一品 崇祿大夫, 관직은 한성부 우윤에 이르렀다.
宗統으로 世宗王子 潭陽君의 9世孫, 宣祖 祖 戶曹判書 坡谷 李誠中의 5世孫.
血統은 世宗王子 桂陽君의 9世孫, 8대조 江陽君 潚이 계양군의 차남으로 태어나 자식 없이 미장가로 죽은 숙부 潭陽君의 후계자가 되었다. 강양군이 희안군 집을 낳고 희안군이
순천군 관을 낳았는데 이 분이 6대조이다. 부친 李千齡이 이유침의 孫子 李震亮의 양자로 입적 되었는데 파곡 이성중의 4남이 이유침이다. 은퇴 후 충청도 보령현 청라동 거주, 문장에 능하였으며 甥姪 석북 신광수 4남매가 그 영향을 받았다. 영 정조시대 4대 문장가 간옹 이헌경, 번암 채제공, 해좌 정범조 등이 쓴 만사가 있다.
1762年 英祖38年 壬午年 사헌부 掌令으로 재직 시, 파곡 이성중의 종손인 이흥경(이홍경)과 족제 형조참판 이제화와 함께 영의정 김재로를 찾아가 임진왜란 공신인 선조 파곡 이성중과 그 아들인 이유징의 시장을 얻어 봉상시에 제출하여 시호를 받았다. 또 이해 담양군파 최초 족보 임오보 발간에 참여하였다.
[주D-002] 比漢有河間焉: 하분 사이 있었던 사나이로 견주었다. 1756年 英祖32年 丙子年, 성호 이익이 英祖 祖 문신 李鳳齡 묘지명에 쓴 말이다. 이봉령과 李齊嵒의 先祖 王族 順川君 형제가 친구였던 李仲虎를 스승으로 섬기고 배운 일을 중국 수나라 河水와 分水 사이에서 강론한 王通에 견주며 칭송하였다.
[주D-001] 李獻慶: 1719年 肅宗45 己亥-1791 正祖14 庚戌. 英正祖祖 문신, 4대 문장가. 본관 全州. 字 夢瑞. 호 艮翁. 문집 艮翁集24卷. 영 정조 조 문장가. 호조참판 역임. 증 이조판서.
세종왕자 담양군의 10세손, 파곡 이성중의 6세손. 완흥군 이유징의 5세손, 완양군 송사 이명웅의 현손. 형조참판 이제화의 아들. 혈통으로는 세종왕자 계양군 이증의 10세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