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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2~234)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232>漢流 스타 황류솽(黃柳霜) 모국 방문 소식에 온 중국이 들썩 |제233호| 2011년 8월 28일
▲황류솽(왼쪽 셋째)은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배우기 위해 조국을 방문했다. 1936년 겨울 난징(南京).[김명호 제공]
무성영화시대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은 중국인들의 이국적인 생활상을 화면에 담기 좋아했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촬영이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엑스트라 구하기도 수월했다. 담배 한 갑이면 카메라 앞에서 온갖 능청들을 잘 떨었다.
황류솽(黃柳霜)은 재미 화교 3세였다. 할아버지는 캘리포니아의 금광에서 죽도록 일하다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로스앤젤레스(LA)의 작은 세탁소집 주인이었다.
인근에 사진관이 있었다. 황류솽은 어릴 때부터 사진관 앞에 서서 넋을 잃었다. 온갖 배우들의 사진들이 다 걸려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지쳐 곯아떨어질 때까지 영화나 사진에서 본 온갖 동작들을 따라 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황류솽의 머리카락은 일품이었다”고 기억하는중국인이 많다.
아버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후일 황류솽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부녀가 나눈 대화를 회고록에 남겼다. “영화를 찍으면 영혼을 상실한다. 영혼을 상실한 후라야 배우가 될 수 있다.” 딸이 물었다. “영혼이 뭔데요?”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영혼은 정신이다. 영혼을 상실하면 속이 텅 빈 껍데기일 뿐, 생각도 없고 희로애락도 없다. 명배우가 되려면 그래야 한다. 자신 있니?” 중년의 세탁소 주인은 딸에게서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들었다. “귀신이 되려고 기를 쓰면 되겠군요. 못할 것도 없죠.”
1919년, 14살 되던 해 여름, 단역으로 처음 출연했다. 비키니를 입은 노예 역이었다. 반응이 묘했다. 출연 요청이 잇따랐지만 제대로 된 역은 없었다. 창녀 아니면 시궁창 같은 남자에게 홀딱 빠져 이것저것 다 뜯기고 결국은 물에 빠져 죽는 역들만 맡았다. 지금 보면 별것도 아니지만 야한 의상에 넓적다리 노출은 기본이었다. 감독을 찾아가 항의했다. “내 역을 백인에게 맡겨 봐라. 나만 못하면 연락해라.” 황인종이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을 때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중국남자도 좀도둑이나 거지 아니면 사기꾼이었다.
황류솽은 무대극에도 심심치 않게 출연했다. 주어진 역이 영화와 큰 차이가 없었다. 막이 올라가기 전, 요염한 모습으로 관중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어떤 복장을 하고, 세상에 없는 악역을 하더라도 중국인의 모든 면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1935년 린위탕(林語堂)의 영문 산문집 My Country and My People(吾國吾民)이 출간됐다. 황류솽은 조국땅을 밟기로 결심했다.
이듬해 봄, 할리우드 스타 황류솽을 태운 여객선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전국에서 몰려든 기자와 영화계 종사자, 구경꾼들로 주변이 난리통이었다. 국제무대에서 Wellington Koo(웰링턴 쿠)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 외교관 구웨이쥔(顧維鈞)과 작가 린위탕의 모습도 보였다.
황류솽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백 대의 카메라가 펑펑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불을 뿜었다. 막 30대에 들어선 중국 최초의 할리우드 스타는 온갖 포즈를 취하며 매력을 뽐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지고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머리카락이라도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며 난리들을 치는 바람에 팔다리 부러지고, 머리통 터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깔려 죽은 사람은 없었다. “설중매(雪中梅)를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며 눈 오는 날 산속 헤매다 얼어 죽고, 맹수에게 물려간 시인묵객(詩人墨客)을 수없이 배출한 민족의 후예들다웠다.
이튿날 아침, 퍼스트레이디 쑹메이링(宋美齡)은 보던 신문을 집어던졌다. “구웨이쥔, 린위탕 할 것 없이 모두 주책바가지들”이라며 혀를 찼다. 악연의 시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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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첫번째 중국계 미국 여배우 황류솽(黃柳霜)은 Anna May Wong으로 불렸다.
<233>중국 남자배우 없어서 … 황류솽, 영화 ‘대지’ 주연 못 맡아 |제234호| 2011년 9월 4일
▲1943년 4월 13일 할리우드에 도착, 여배우들의 인사를 받는 쑹메이링.. [김명호 제공]
1961년 2월 황류솽(黃柳霜)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56세, 평소 알코올 중독이 심했다. “엄마 옆에 묻어라. 내 이름이 싫다. 묘비에 단 한 글자도 새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동생들은 그대로 따랐다.
황류솽은 어릴 때부터 인종차별에 시달렸다. 학교만 가면 뒤에 앉은 백인 남자애들이 머리끄덩이 잡아당기며 놀려댔다. “중국인들은 목욕도 안 한다던데, 넌 목욕한 적 있니? 남의 빨래만 하지 말고 네 세탁도 가끔 해라.”
여자 애들도 못되게 굴었다. “빨래 많이 해야 손이 예뻐진다는 말이 사실이냐”며 샘을 냈다. 황류솽의 손만 보면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화내는 애들도 있었다. 황류솽은 손이 유난히 예뻤다. 후일 “할리우드 최고의 손”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
◀황류솽의 대표작 ‘용의 딸(龍女)’의 한 장면.
할리우드에 진출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국은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시대였다. 그들의 눈에 비친 중국인은 무지하고, 게으르고, 겁 많고, 더러운 냄새나 풍기고 다니는 열등민족이었다. 신통한 배역이 주어질 리가 없었다. 약관 22세 때 아카데미상의 제정자 중 한 사람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함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마를레네 디트리히, 크라크 게이블 같은 세기의 명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항상 남자들에게 얻어맞거나 죽는 역이었다. 오죽했으면 한 신문에 “묘비명은 천 번을 죽은 여인이 마땅하다”는 기사가 대문짝만 하게 실릴 정도였다.
1930년대 말 펄벅의 대지가 영화화됐다. 중국 농민의 순박함과 끈질긴 생명력을 묘사한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었다. 황류솽은 평소 펄벅과 자선단체 활동을 함께하며 교분이 깊었다. 미국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고 자신의 이미지를 변신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중국인 역은 중국인이 해야 한다”며 여주인공 역을 따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남자 주인공 역이 서양인이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간 맡았던 배역과 너무 동떨어진다. 관객들이 헷갈린다. 주인공의 첩 역이라면 생각해 보겠다”는 등 맥 빠지는 답변만 돌아왔다. 할리우드에는 중국인 남자배우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쑹메이링(宋美齡)이 훼방 놨다는 소문도 한동안 나돌았다. ‘대지’의 여주인공 역을 따낸 루이즈 레이너는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황류솽은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황류솽은 미국 전역을 다니며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모금운동을 벌이며 자신이 소장했던 패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시 후원금으로 내놨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외면을 당했다. 미국 유학을 마친 상류사회 부인들이 특히 심했다. “황 뭔지 하는 애 때문에 미국 친구들 만나면 창피해 죽겠다. 중국 여자들은 아무데서나 홀딱 벗고 궁상만 떠는 줄 알까 봐 미국 가기가 겁난다. 전부 저거 때문이다.” 이구동성으로 남편들을 들볶아 황류솽이 출연하는 영화의 중국 상영을 금지시켜 버렸다.
1942년 가을 장제스(蔣介石)는 루스벨트에게 쑹메이링의 미국 방문 수락을 요청했다. 이틀 후 루스벨트는 전용기를 보냈다. 쑹메이링은 뉴욕·워싱턴·시카고·샌프란시스코 등 가는 곳마다 국가원수 대접을 받았다. 미 하원과 상원에서 한 연설은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하루에 수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역시 미국의 명문대학 출신답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하고 미국의 신문과 잡지에 실린 관련기사가 3000여 편이 넘었다. 쑹메이링의 마지막 방문지는 할리우드였다. (계속) <234>몰락한 황류솽 “고독이 엄습했다, 사방엔 이방인들뿐” |제235호| 2011년 9월 11일
▲황류솽과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무성영화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바그다드의 도적’에 함께 출연했다. 오른쪽은 이들을 취재하러 할리우드에 온 상하이 양우화보(良友畵報) 기자 우렌더(伍聯德). 1927년 7월 양우화보 제17기(期) 17쪽. [김명호 제공]
1943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쑹메이링(宋美齡)은 미국 영화계 인사들을 초청했다. 타임(TIME)과 라이프(LIFE)지의 설립자 헨리 루스의 부탁을 받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 행사를 주관했다.
산둥(山東)성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낸 헨리 루스는 부모들 때부터 쑹메이링의 집안과 보통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과 제작자, 배우들이 앰배서더 호텔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쑹메이링이 정좌하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부인이 의자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부인이며 무성영화 시대의 명배우였던 메리 픽포드를 필두로 로버트 테일러, 험프리 보가트, 밥 호프, 게리 쿠퍼, 타이론 파워, 헨리 폰다 등 남자 배우와 캐서린 헵번, 잉그리드 버그먼, 셜리 템플 등 여배우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황류솽(黃柳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쑹메이링과 루스벨트.
루스벨트의 전용기와 전용열차로 미국 전역을 누비던 쑹메이링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상대로 명연기를 펼쳤다. 겸손과 도도함이 뒤엉킨 묘한 자태로 이들을 압도했다.
중국 퍼스트 레이디의 고급영어와 교양에 취한 참석자들은 황류솽의 불참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쑹메이링이 부르지 말라고 한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쑹메이링이 황류솽을 초청자 명단에서 뺀 이유는 간단했다. “미모를 무슨 통행증 정도로 생각하는 연예인들이 해외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위험하다. 황류솽은 세탁소와 싸구려 음식점 안주인, 폭력배와 건달들의 노리갯감인 구시대의 중국인을 대표한다. 중국에는 좋은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많다. 그들의 형상이 신중국을 대표해야 한다.” 이틀 후 할리우드의 노천광장에서 쑹메이링의 강연회가 열렸다. 3만 관중이 운집했다.
쑹메이링의 할리우드 방문을 계기로 황류솽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모든 사람들이 나만 떠받드는 줄 알았다. 고독이 엄습했다. 사방을 둘러봤다. 모두 이방인들뿐이었다.” 그간 출연했던 50여 편의 영화와 167편의 무대극은 신기루와 다를 게 없었다.
영화 ‘대지’의 주인공에서 탈락했을 때보다 더 큰 상처를 입은 황류솽은 할리우드를 떠났다. 중국 양생(養生)미용의 전도사를 자처하며 미용학원을 차렸다. 손님들에게 금붕어를 기르라고 권했다. “중국인들이 세숫대야에 금붕어를 놓고 들여다보는 것을 외국인들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비웃는다. 안구운동이 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안경 쓴 애들이 드물다.”
황류솽은 평생 결혼이라는 것도 해보지 못했다. 당시 미국에는 두 부류의 중국인들이 있었다. 차이나타운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중국인 특유의 미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보수적이고 문화 수준이 낮았다. 황류솽 같은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대단한 모험으로 간주했다. 전문 업종에 종사하며 미국 주류사회에 뿌리를 내린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장난만 치려고 들었다.
황류솽은 백인들 중에서 신랑감을 찾았다. 아버지 나이 뻘인 영화제작자와 눈이 맞았다. 알고 보니 유명한 플레이보이였다. 여자친구가 50명도 넘었다. 그래도 황류솽은 포기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법률에 “백인은 중국 여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별 거지 같은 조항이 있을 때였다. 멕시코에 가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조르자 남자가 증발해 버렸다. 무슨 놈의 팔자가 영화 속의 배역과 비슷했다.
황류솽 사망 40년이 지나서야 중국 출신 배우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Tribute to Anna May Wong
Anna May Wong (黃柳霜) (January 3, 1905 - February 3, 1961) was the first Chinese American movie star, and the first Asian American actress to gain international recognition. Her long and varied career spanned both silent and sound film, television, stage, and radio.
Born near the Chinatown neighborhood of Los Angeles to second-generation Chinese-American parents, Wong became infatuated with the movies and began acting in films at an early age. During the silent film era, she acted in The Toll of the Sea (1922), one of the first movies made in color and Douglas Fairbanks' The Thief of Bagdad (1924). Wong became a fashion icon, and by 1924 had achieved international stardom. Frustrated by the stereotypical supporting roles she reluctantly played in Hollywood, Wong left for Europe in the late 1920s, where she starred in several notable plays and films, among them Piccadilly (1929). She spent the first half of the 1930s traveling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for film and stage work. Wong was featured in films of the early sound era, such as Daughter of the Dragon (1931) and Daughter of Shanghai (1937), and with Marlene Dietrich in Josef von Sternberg's Shanghai Express (1932).
In 1935 Wong was dealt the most severe disappointment of her career, when Metro-Goldwyn-Mayer refused to consider her for the leading role in its film version of Pearl S. Buck's The Good Earth, choosing instead the German actress Luise Rainer to play the leading role. Wong spent the next year touring China, visiting her family's ancestral village and studying Chinese culture. In the late 1930s, she starred in several B movies for Paramount Pictures, portraying Chinese-Americans in a positive light. She paid less attention to her film career during World War II, when she devoted her time and money to helping the Chinese cause against Japan. Wong returned to the public eye in the 1950s in several television appearances as well as her own series in 1951, The Gallery of Madame Liu-Tsong, the first U.S. television show starring an Asian-American. She had been planning to return to film in Flower Drum Song when she died in 1961, at the age of 56.
For decades after her death, Wong was remembered principally for the stereotypical "Dragon Lady" and demure "Butterfly" roles that she was often given. Her life and career were re-evaluated in the years around the centennial of her birth, in three major literary works and film retrospectives. Interest in her life story continues and another biography, Shining Star: The Anna May Wong Story, was published in 2009.
"A Hundred Million Miracles" is from the play Flower Drum Song. This version is from the original cast album of the Broadway play. Flower Drum Song was the eighth musical by the team of Richard Rodgers and Oscar Hammerstein II. It was based on the 1957 novel, The Flower Drum Song, by Chinese-American author C. Y. Lee. |
첫댓글 난 이 여인을 들어본 적도 없으니 연기에 대해 노코맨트이지만, 얼굴로만 치면 무성영화 시대의 우리나라 여배우가
훨씬 나은 듯하네.
황여인은 그렇다치고......
쑹메이링 눈밖에 나면 끝장이었던 게 인상이 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