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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동 순교성지 → 소양로성당 → 광암이벽묘터 → 포천순교성지 → 신암리성지
1.5Km 66Km 20.6Km 30Km
27. 소양로성당
소양로(昭陽路) 성당은 춘천교구 소속 본당으로
1949년 1월 죽림동(竹林洞) 본당으로부터 분리·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파트리치오(Patricius)이다.
8·15 광복 무렵 죽림동 본당 관할이었던 소양로 지역의 신자수가
그 후 나날이 늘어나자 사목적 차원에서 본당 설립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1949년 1월에 소양로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콜리어(A. Collier, 고)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설립 당시 신자수는 약 250명이었고,
이때 발산 공소와 금산 공소가 소양로 본당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복사 김 가브리엘과 함께 생포되어 6월 27일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집사 겸 복사인 김 가브리엘과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인민군 병사는 경고 한 마디 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콜리어 신부의 순교 이후 한국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소양로 본당에는 신부가 파견되지 못했다.
그 후 휴전이 되면서 1954년 8월에서야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있던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으로 인하여 소양로 본당은
설립된 지 7년 만에 성당을 마련할 수 있었다.
즉 1956년 4월에 3대 주임 버클리(J. Buckley, 부) 야고보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 3일 국내외 여러 은인과 교우들의 도움으로
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진두지휘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버클리 신부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했다.
밖에서 보면 원을 반 뚝 잘라 놓은 반달형이다.
내부는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다.
춘천교구장 퀸란 몬시뇰과 버클리 신부가 흔치 않은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한국 전쟁 중에 소양로촵묵호촵삼척 성내동에서 선교하던 신부들이
공산군에게 죽음을 당하자 그들의 순교혼이 서려 있는 터에 기념성당을 짓기로 한 것이다.
성당 건립 후로도 계속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부임하다가
1967년 9월 15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의 이응현(李應鉉) 티모테오 신부가
6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부터 한국인 사제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각종 신심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여 본당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소양로 성당은 건축기법에 있어서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이다.
아치형 버팀벽, 천정 몰딩 등은 교회건축에서 흔히 사용되는 고전적 기법이다.
반대로 외형을 반원형 평면으로 하고, 실내외 의장과 제단 주변을 소박하게 처리한 점은
현대건축이 추구하는 단순성 측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또 원형창 유리화를 제대 십자가 조형과 일치시키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 2005년 4월 1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소양로 성당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강원도 및 춘천시의 도움을 받아
원형 보존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음매가 낡은 함석지붕과 창호를 보수하고 없어졌던 성가대와 벽제대를 복원했다.
붉은 카펫이 깔려있던 제단을 나무널판으로 바꾸고
목조 난관으로 그 둘레를 둥글게 감았다.
성전 외벽을 두르고 있던 전선을 모두 지하로 넣어 원형을 최대한 살려
2009년 5월 3일 춘천 교구장 장익 주교의 주례로 중창(重創)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춘천교구는 양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명명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7권과 평화신문, 2007년 2월 11일,
김원철 기자의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28. 광암이벽묘터
한국교회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초기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인물이다.
이벽은 이승훈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아오게 했으며,
그 역시 1784년 겨울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식으로,
이벽의 집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 세례식이 집전된 역사적 장소이다.
이벽은 조선왕조 치하에서 순교한 신앙선조 가운데 제2차 시복추진 대상자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시복절차를 밟고 있다.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은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전통하고 언변도 좋아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이벽은 조선 천주교 창설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1777년 이래 주어사, 천진암에서 있었던 수사학(洙泗學)적 분위기의 강학을
그리스도교 진리 탐구와 실천적인 분위기로 바꿨고,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여 중국에 가 영세를 받게 함으로써
1784년 많은 조선인 신자 공동체를 이룩하게 하였다.
한국 천주교가 이 해를 천주교 창설의 원년으로 삼아 기념하고 있음을 미루어 볼 때
이벽의 선구자적 역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이에 이벽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가정의 박해속에 살다가 1785년(또는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 ~ 1785?)
한국 천주교의 선구자인 이벽은 경주 이(李)씨 부만(溥萬)의 둘째 아들로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광암(曠菴)이다.
건장한 신체에 무술에도 능했으며, 경서(經書)에 전통하고 언변도 좋아 물 흐르듯 했다고 한다.
아버지 부만은 이벽이 무관으로 출세하길 바랐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미움을 사서 벽(僻)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1년) 권철신 · 정약전 등과 함께 강학에 참가하여
하늘, 세상, 인성(人性)에 대해 토론하였고 옛 성현들의 윤리서 등을 함께 검토함과 아울러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한역판(漢譯版) 철학, 수학, 종교서적 등을 공부하였다.
1783년 정약전 · 약종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의 존재와 그 유일성, 천지창조,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면성, 후세에서의 상선벌악 등의 철학적 논제에 대해 토론하였다.
초보적인 지식 속에서 진리에 목말라 하고 있던 이벽은
1783년 겨울 이승훈이 북경사절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에게 찾아가 천주교에 대해 소개하고 북경에 가서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도 받아서 돌아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와 함께 천주교 서적을 구해 오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라몽(Grammont, 梁東材)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은 이승훈이
1784년 천주실의, 기하원본과 같은 서학서적, 상본, 망원경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이것을 받아든 이벽은 외딴 집을 세내어 천주교 교리연구와 묵상에 몰두하였다.
이를 통해 이벽은 종교의 진리에 대해 더욱 해박한 지식을 얻게 되었고,
중국과 조선의 미신에 대해 철저히 반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칠성사와 연중기도, 성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도 연구하였다.
이벽은 드디어 1784년 음력 9월경 수표교에 있던 자기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복음의 전파에 나섰다.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김범우, 지황 등의 중인계급과
마현의 정약전 · 약용 형제,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 등의
양반계층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유림(儒林)은 천주교 교리가
국가의 지도이념인 성리학적 윤리체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중 이가환은 “서교(西敎)가 비록 명설(明說)이긴 하지만 정학(正學)은 아니다”고 하면서
이벽을 토론으로써 설득하려 했으나 이벽의 정치한 논리와
장하(長河) 같은 웅변에 오히려 설득 당했다 한다.
이기양도 이벽과 토론했으나 이벽이 세상의 기원, 우주의 질서, 하느님의 섭리, 영혼의 본성,
후세의 상벌과 조화에 대해 설명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로부터 1년 후인 1785년 중인 김범우가 형조에 잡혀가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형벌을 받다가
단양(丹陽)으로 귀양가는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화로 평소 천주교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들고 일어났다.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그는 성질이 급한 사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벽의 이야기는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배교만을 강요하였다.
이벽이 말을 듣지 않자 그는 목을 매어 자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이벽은 두 가지 뜻을 가진 말을 써서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배교적 행위에 대하여 무서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다가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
생가터
29. 포천순교성지
홍인과 그의 부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이를 계기로 춘천교구는 같은 해 9월 홍인 레오의 순교터를 순교성지로 선포했다.
포천 성당은 순교터인 한내천변에 부지를 마련해
2015년 복자 홍인 레오의 순교 정신을 기리는 순교현양비를 건립해
축복식을 갖고 포천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복자 홍인 레오의 집안은 본래 한양의 이름 있는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인 복자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경기도 포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성장했다.
1801년 서소문에서 순교한 홍교만 프란치스코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781년 양근에 살던 고종사촌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홍인 레오는 부친에게 교리를 배웠는데, 오히려 부친보다 먼저
천주교 신앙을 진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 홍인 레오는 세속의 꿈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러면서 효성을 다하는 길은 부친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해
부친을 설득해 178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함께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석했다.
1801년 부친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당시 부자를 함께 처형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홍인 레오는 포천으로 이감되어 약 10개월 뒤인 1802년 1월 30일
포천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저잣거리에서 순교하였다.
부친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이미 1801년 4월 8일
동료들과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뒤였다.
[출처] 춘천교구-포천 순교 성지
구 포천성당
포천 성당 경내에 들어서면 사제관 앞 언덕을 둔중하게 두른 거대한 축대 위에
지붕은 온데간데 없고 벽체만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석조건물 ‘성 가브리엘 성당’이 있다.
1955년 경 당시 육군 6군단 군단장이었던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이
군의 원조를 받아 지은 고딕 양식이 가미된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석조 건물이다.
1950년대엔 유난히 석조 건물을 많이 지었는데 포천 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다.
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이 성당 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벽체만 남긴 채
지붕이며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불이 난 뒤 지역 신자들이 건물 붕괴를 우려해 성당을 헐어 새로 짓자고 했지만
문화재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포천 성당 신부,
학자들의 주장으로 등록문화재 목록에 올랐고,
2006년 9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비록 성당안 구조물은 모두 소실됐지만 서쪽 벽에 뚜렷하게 남은 감실과
제의 때 신부들이 감실을 오르내리던 계단은 신자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제대가 놓여 있던 제단이 두개의 층으로 구분된 것도 흥미롭다.
건물 정면 중앙에 종탑을 두고, 벽체가 60~65cm 정도로 두꺼우며,
건축물을 외부에서 지탱해주는 버트레스 장치를 했다.
화강석 조적구법, 단일 홀로 구성된 강당형 평면, 종탑과 뾰족한 아치 창호 등
6.25 전쟁 전후 석조 건축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종교사적·건축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1950년대 중반 군부대에 의해 지어져 역사는 그다지 오래지 않지만
훼손된 뒤 복원의 손길을 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포천 지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홍교만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이다.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포천 지방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치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한다.
포천 지방은 1921년경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전교 활동을 하고 있던
손성재 야고보 신부에 의해 사목되다가 그 후 1930년 개성 본당,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행주 본당,
1935년부터 덕정리 본당(현 의정부 주교좌본당)의 관할 지역에 속하였다.
1956년 포천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포천 일대에 주둔한
6군단 군단장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의 도움이 컸다.
독실한 신자였던 이한림 장군은 익명의 독지가가 기증한 1,000여 평 대지에
공병 부대의 도움을 받아 성당 건축을 추진하였다.
1955년 11월 60평의 석조 건물로 된 성당과 사제관 20평을 완공하였고,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성당 건축을 전후로 잠시 6군단 조상익(趙相益) 베드로 군종 신부가
포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다가 1956년 2월 김진하(金瑨河) 요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었다.
김진하 신부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공소들을 방문하면서 사목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미국 가톨릭 복지협의회 산하 전쟁 구호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한국 전쟁 직후 기아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구제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본당의 발전을 논의하기 위해 사목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뒤이어 신심 단체인 성모 성심회를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