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神」과 「大地의 神」이 질투와 경쟁으로 만든 절경 민원정 칠레 가톨릭大 아시아프로그램 교수 한국외국어대학에서 中南美 문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몇 년간의 강사생활을 하다가 문득 어디로 떠나고 싶어 칠레에 도착, 칠레의 대학에 강의 계획서를 보낸 끝에 2004년부터 칠레 가톨릭大와 칠레 발파라이소 가톨릭大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다.
눈 덮인 화산과 호수
멀리 눈 덮인 화산이 보이는 잔잔한 푸른 호수를 헤치고 가는 배의 앞머리에 음악이 깔리며, 여인의 맨발이 보인다. 잠시 후 여인의 하얀 발이 내려가며 가까이 다가온 화산 위로 「오소르노, 칠레」라는 글자가 흐르고, MP3를 들고 있는 여인의 손이 보인다. 지난해 4월부터 CNN 방송을 통해 소개된 삼성전자 CF 광고다.
광고에 나오는 오소르노 화산을 끼고 있는 짙푸른 호수는 양키우에湖로, 총면적이 8만6000헥타르나 되는, 칠레에서는 가장 크고 南美 전체에서는 세 번째로 큰 자연호수다.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 페트로우에江 계곡에서 내려온 빙하와, 1575~1644년 사이에 세 차례, 그리고 1719년 이후 여덟 차례에 걸친 오소르노 화산 폭발로 형성됐다.
멀고 긴 나라
지금은 칠레라는 나라의 아름답고 다양한 모습에 빠져 있지만, 2년 전 한국에서 대학강사 일을 접고 산티아고에 처음 도착했을 때엔 南美의 기다란 나라에 그렇게 예쁜 구석이 많지 않았다.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낯선 나라에 도착한 한국의 여성에게 이곳 사정은 만만치 않아 나는 매사 불평으로 가득찬 나날을 보냈었다.
처음에 세 들어 살던 하숙집 주인 아줌마는 칠레 남부 출신이었는데, 그녀는 이런저런 일에 지쳐 불평하는 나에게 「칠레 남부의 아름다운 초원과 호수를 보기 전에는 칠레에 대해 불평하지 마라」고 타일렀다.
얼마 후 대학에서 한국학 강의를 시작하며 내 불평은 점차 줄어들었고, 칠레인들이 전자제품 잘 만드는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어 괜히 우쭐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말로만 듣던 칠레 남부를 드디어 여행할 수 있게 됐다.
총 길이가 4329km나 되는 칠레는, 수도 산티아고가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지역 등 13개 행정구역(우리나라의 道와 비슷하다)으로 구성돼 있다.
칠레의 북쪽은 건조한 사막이지만 남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많아 숲이 많다. 그래서 칠레 남부엔 축산과 목재 산업, 그리고 수산업이 발달해 있다.
긴 나라를 여행하는 일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쉬운 일이 아니어서, 칠레 사람들조차 정작 자기 나라 여행은 큰맘 먹고 해야 할 정도다. 한국에서 온 주재원과 교환학생은 물론이고 심지어 교민들도 칠레 남부 여행은 엄두를 못 낸다. 하기야 산티아고에선 이웃 나라 페루나 아르헨티나로 여행하는 것이 훨씬 더 가깝고 비용도 싸게 든다.
14시간 걸리는 버스여행
워낙 긴 나라라서 북쪽이든 남쪽이든 움직이는 것이 간단치 않다. 남쪽으로는 비행기·버스·기차, 더 남쪽으로는 배를 이용할 수 있는데, 내가 여행할 즈음에는 산티아고에서 푸에르토몬트까지 운행되던 기차가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던 터라 버스를 택했다. 버스에는 기사와 차장이 각각 2명씩 동승해서 다섯 시간마다 교대를 한다.
동양인을 처음 봤다는 차장은 우리 일행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더니, 『원래 북쪽지역 단거리 노선만 탔었는데 근무평가를 잘 받아 장거리 노선을 탈 수 있게 되었다』면서 『다음엔 꼭 운전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운전기사처럼 좋은 직업이 없다면서 잠잘 틈도 주지 않고 얘기에 열을 올렸다. 각박해진 한국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버스 안 풍경일 것이다.
열네 시간이나 걸리는 버스여행 중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과 과일 농장을 볼 수 있었다. 굴지의 포도주와 과일 생산국이 된 칠레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도중에 「로스앙헬레스」라는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우리 일행은 『여기가 「로스앤젤레스」』라고 농담을 했다. 로스앤젤레스와 영어 스펠링이 똑같은 로스앙헬레스는 스페인 말로 「천사」란 뜻인데, 南美 곳곳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도시가 많다.
산티아고에서 출발해서 남부로 가는 모든 버스의 종착역은 푸에르토몬트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려면, 그곳에서 다른 교통편을 이용해야 한다. 산티아고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 버스로 열네 시간 걸리는 푸에르토몬트市는, 칠레의 13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제10지역의 수도이다. 제10지역은 화산과 호수가 많아 「호수지역」으로 불리는데, 1845년에 칠레 영토로 편입됐다.
원래 이곳에는 마푸체 인디오들이 살았지만, 19세기 중반 들어 독일系 이민들이 영향력 있는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유명한 햄 제조업체인 「에르마노스 뫼딩거」社와 「물풀모」 치즈회사도 독일系이다. 마푸체 인디오들은 이제 비오비오江과 톨텐江 부근에서 그들만의 문화를 고집하며 살고 있다.
푸에르토몬트의 송지상씨 父子
푸에르토몬트는 인구 15만 명의 항구도시다. 1842년 베르나르도 필리피라는 탐험가가 이 지역에 발을 처음 들여 놓았으며, 1852년 최초의 독일계 이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은 요지가 되었다. 1853년 당시 대통령이던 마누엘몬트의 성을 따라 푸에르토몬트(「몬트 항구」라는 뜻)라고 명명된 이 도시엔 독일계 예수회 교회가 많다.
1960년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피해를 입었지만, 연어 등 수산물 수출로 점차 경제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제2위의 연어 생산국이 된 칠레에는 우리 교포 사업가도 연어와 성게를 가공해서 한국과 일본에 수출하고 있다.
교민 송지상씨는 이민생활 20년 만에 이제는 일본에 연어를 수출하는 어엿한 푸에르토몬트의 사업가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사업 실패 후 파라과이로, 그리고 다시 칠레로 건너와 고생 끝에 1997년 「사초」라는 연어 가공공장을 세웠는데, 이제는 제법 큰 수산물 회사가 되었다. 송씨는 칠레의 유명한 화가들의 미술작품을 취미로 수집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100점이 넘는다. 언젠가는 이 작품들을 사진과 함께 책으로 출간할 계획도 갖고 있다.
아들 송기찬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칠레로 건너와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젊은 송사장」(우리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은 『칠레에 오자마자 스페인語로 된 경제신문을 번역해 오라는 아버지 명령에 당황하던 때가 어느새 3년 전』이라며 웃는다.
갑작스레 찾아간 우리 일행에게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유익한 여행정보까지 알려 주었다. 그러면서 젊은 송사장은 『한국 사람들이 南美를 무한한 「기회의 땅」으로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푸에르토몬트에서 북쪽으로 호숫가를 따라 차를 몰면 호수 건너 멀리 오소르노 화산이 보인다. 호수가 얼마나 큰 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이게 과연 바다인가 호수인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화산과 호수는 그 장관은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
호수 전체를 돌려면 하루는 족히 잡아야 하니, 부근 농장에서 헬리콥터를 빌려 타고 호수 위를 날아 보기로 했다. 1인당 미화 100달러 정도 하는 적잖은 돈이 들어 몇 번의 망설임 끝에 헬기에 올랐다. 헬기는 화산 중턱까지 올라가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와 화산은 약간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로 오르는 순간 아름다운 푸른 빛을 보게 되자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호수 수면을 저공 비행할 때엔 헬기가 호수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켜 그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작 15분의 비행에 만족해야 했던 우리 일행의 아쉬운 마음을 알았던지, 헬기가 착륙 시도에 실패해 한 번 더 회전하느라 2분간 더 날았으니 우리는 작은 행운을 누린 셈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헬기 아래로 보이던 푸르디 푸른 광활한 호수가 눈에 선하다.
호숫가를 달리다가 잠시 차를 세우고 먹은, 송사장의 연어 가공공장에서 선물로 받은 연어와 올리브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의 맛은 잊을 수 없다. 일행 중 한 명이 전날 마시고 남은 포도주를 물병에 담아 왔는데,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포도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호숫가 주위에 늘어선 어마어마한 목장과 집들, 그리고 알프스 어느 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도시 푸에르토바라스, 아쉽게도 야외 음악축제를 놓치기는 했지만 인형마을 같던 프루티야르 등…. 그림같이 아름다운 작은 도시를 지날 때면,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칠 새라 눈도 마음도 바쁘기만 했다.
칠로에 섬
푸에르토몬트의 안젤모港에서 페리를 타고 차카오 해협을 건너면 칠로에 섬에 갈 수 있다. 차카오 해협을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수십 년 전부터 있었지만, 언제 실현될지는 요원하다. 칠로에 섬에 가까이 다가가자 숲이 우거진 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폭 50km에 길이 180km인 칠로에 섬은 총면적이 8394km2로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총면적이 약 1847km2인 제주도의 4배 정도 되는 셈이다. 「칠로에」라는 명칭은 원주민 말로 「갈매기」를 뜻하는 「치예」와, 「장소」를 뜻하는 「우에」가 합쳐진 데서 유래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 섬에 처음 도달했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북쪽의 마푸체族과 원주민 초노族 사이의 혼혈이었다. 그 후 마푸체와 스페인 혼혈이 오늘날 칠로에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하게 됐다. 1710년 약 300세대가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초노族은 전염병으로 전멸했다고 한다.
17세기부터 약 300년 동안 칠로에 섬은 다른 지역과 격리되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19세기 말부터 독일·영국 등 유럽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은 변하기 시작했다.
칠로에 섬에는 150개가 넘는 교회와 성당이 있다.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교회의 건축양식으로 나무를 이용해 지은 것이 눈에 띈다. 그중 16곳은 유네스코가 정한 「사라져 가는 세계 100大 기념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스페인 정복 당시 세워진 中南美 도시들의 공통점은 광장을 중심으로 성당과 公共기관 등이 있는 정방형 구조이다. 칠레도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칠레 남부에는 독일 이민의 영향이 많아서인지 다른 中南美 도시들과는 색다른 풍광의 도시들이 많고, 개신교 교회들이 많다.
19세기 초에 들어온 독일 이민들 외에 1931~1945년에는 독일 나치 戰犯(전범)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칠레 역사책에서 읽은 일이 떠올랐다.
칠로에의 석양
목재가 풍부한 이 지역 특성은 교회뿐만 아니라, 주택과 가구 그리고 공예품에서도 두드러진다. 칠로에의 주택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기와 양식은 마푸체 인디오들의 영향이라고 한다. 우리네 「됫박」에 해당하는 「알무드」·「사초」라고 부르는 닻, 방아 등 다양한 목재 가공품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습기가 차지 않아 썩지 않는다는 알레르세 나무로 기와를 얹은 주택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칠로에에서 가장 큰 도시인 앙쿠드에는 이 지방 최고의 식당이라는 「엘 캉그레호」(스페인語로 「게」)가 있다.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문을 연 이 식당 벽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명함이 가득하다.
자그마한 식당이 자랑하는 메뉴는 이 지역 전통음식인 「쿠란토」이다. 쿠란토는 장작을 피우고 그 위에 커다란 돌과 풀 등을 얹은 후 쇠고기·닭고기·해산물·감자·콩·생선·소시지 등 재료를 올린 다음 뚜껑을 덮어 쪄내는 독특한 음식이다. 재료 자체의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칠로에의 도로에는 외딴 남쪽 섬 같지 않게 오고 가는 자동차가 많다. 특히 수산물을 나르는 냉동차량들과 목재를 실은 트럭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어, 저 멀리 차카오 해협의 아름다운 바다에서 생기가 느껴질 정도다.
수산물 냉동차량은 꼭 쓰레기통을 싣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 통 안에 금방 잡아들인 연어 등 싱싱한 물고기가 가득 차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 일행은 한참을 웃었다.
저녁이 되면 칠로에를 달구던 태양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은 숙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배가 끊어지기 전에 푸에르토몬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 준다.
「물의 神」 카이카이와 「大地의 神」 텐텐의 질투와 경쟁이 이토록 아름답고도 독특한 지형을 형성했다는 칠로에의 전설을 생각하며 여행객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게 된다. 「내 사랑하는 땅 칠로에여, 끝없는 들판과 해변, 그래서 네 구름은 행복한 미래를 예견하며 너를 덮는다」고 읊은 여행객 마누엘 안드라데의 「칠로에에 바치는 찬가」가 귀에 울리는 듯하다.
칠로에 섬에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지상의 천국 중 하나라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과 빙하를 여행할 수 있는데,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 쉽게 갈 수 있는 곳도 아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 못 보고 온 것이 내내 아쉽다.
다채로운 풍경과 다양한 문화가 공존
칠레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산티아고 시내를 흐르는 흙탕물 같은 마포초 江과 스모그가 자욱한 하늘을 보며 실망한다. 스페인 정복 시절에도 오지로 취급됐던 칠레의 역사를 하찮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칠레 남부에서 나는 칠레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었다. 다채로운 자연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해 있어 한꺼번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 본 것도 큰 수확이었다.
풍성함과 여유로움이 가득 찬 칠레 남부는 만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하이디와 피터가 뛰어놀 것 같은 평화로움과,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칠레의 역동성이 느껴지는 경이로운 곳이다. 지리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멀게 느껴지는 칠레 남부는 꼭 한번 가 볼 만한 곳이고, 또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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