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길 걷기에 알맞도록 간편(簡便)히만 차리고 떠난다는 옷 치장(治裝)이
정작 푸른 하늘 아래에 떨치고 나서니 멋은 제대로 들었다.
스타킹(stocking)과 닉카아팬츠(knicker-pants)와 잠바(jumper)로 몸을
거뿐히 단속(團束)한 후(後) 등산모(登山帽) 제쳐쓰고 바랑을 걸머지고 고개
를 드니 장차(將次) 우리의 발밑에 밟혀야할 만이천봉(萬 二千峯)이 천리(千
里)로 트인 창공(蒼空)에 뚜렷이 솟아 보이는 듯하다.
그립던 金剛으로, 그리운 金剛山으로! 떨치고 나선 山莊에서는 어느새 山의
香氣가 서리서리 풍긴다. 산뜻한 마음으로 활개쳐가며 山으로 떠나는 지완
(之完)과 나는 이미 진고개에 彷徨하던 蒼白한 인텔리가 아니라 力拔山氣蓋
世의 氣槪를 가진 갈데없는 野人 文書房이요, 鄭生員이었다.
京原線 汽車에 몸을 실었다. 車안에서 무슨 홀게 빠진 體貌란 말인가? 우리
祖上들의 本을 떠서 우리도 할 소리 못할 소리 남 꺼릴 것 없이 聲量껏 떠들
었으면 그만이 아닌가?
스스로 野人의 矜持에 陶醉되어서, 뒤로 흘러가는 창 밖의 景槪를 우리는
豪華로운 心情으로 迎接하였다. 고리타분한 생활을 항간에 남겨두고, 잠시
나마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이처럼 快事였던가? 인산 생활이 코답지
근하고 한없음을 인제서 깨달은 듯 하다. 잠시나마 악착스러운 生活을 벗어
나 純粹한 自然의 품안에 들어본다는 것은 恒常 傲慢한 人間生活의 純化를
爲하여 얼마나 緊要한 일일까?
虛心坦懷 印畵紙와 같은 마음으로 앞으로 展開될 自然들을 우리는 海綿처럼
吸收했으면 그만이었다
鐵原서 金剛 電鐵로 바꿔 탄 것이 저무는 일곱 時쯤, 먼 산골에는 黃昏이 어
리고 大地는 刻一刻 灰色으로 溶解되어 가는데, 個性을 抽象당한 산령(山嶺)
들이 묵직한 윤곽(輪廓)만으로 서녘 하늘에 웅크렸다.
고요하기 太古같은 이 風景 속에서 瞬時도 멎음 없이 變化를 操縱하는 기막
힌 造化는 大體 누가 부리는 妖術이던가? 滄冥히 저물어가는 景槪에 心醉하
여 窓가에 기대인채 마음의 平和를 즐기다가 우리는 어느듯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이 지녔던 秘密들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보배로 여기던 秘密들
을 아낌없이 털어놓도록 그만큼 우리를 에워싼 雰圍氣는 純粹했던 것이다.
琉璃窓 밖으로 비치는 지완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의 靑春史에도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웠던 사랑談을 虛心히 들어 넘기며, 나는 몇 番이고
담배를 바꿔 피웠다.
沈着한 女人네가 欌籠에 옷가지 챙겨 넣듯 차근차근 條理있게 얽어나가는
지완의 能熟한 話術은 맑은 그의 音聲과 어울려서 귓가에 도란도란 香氣로
웠다.
사랑이 그처럼 淡淡할 수 있을까? 世上에 사랑처럼 쓰라린 것 매운 것은
없다는데 지완의 그것은 아침이슬같이 淡潔했다니, 그도 그의 性格의
所致일까? 창밖에 金風이 蕭瑟해서, 그 사람이 유난히 高邁하게 느껴졌다.
내금강 역사(驛舍)에 도착.
어느 외국인의 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한 멋진 양관(洋館). 외금강 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 역은 산을 찾아오는 사람에게 무한 정다운 호대조
(好對照)의 두 건물이다. 내(內)와 외(外)를 여실히 상징한 것이 더 좋았다.
십삼야월(十三夜月)의 달빛 차갑게 넘실거리는 역 광장에 나서니, 심산
(深山)의 밤이라 과시(果是) 바람은 세찬데, 별안간 계간(溪澗)을 흐르는
물소리가 정신을 빼앗을 듯 소란하여 추위는 한층 뼈에 스민다. 장안사
(長安寺)로 향하여 몇 걸음을 걸어가며 고개를 드니, 산과 산들이 병풍
처럼 사방에 우쭐우쭐 둘러선다.
기쓰고 찾아온 바로 저 산이 아니었던가고 금새 어루만져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힘껏 호흡을 들여 마시니, 어느덧 간장(肝臟)도 청수(淸水)에 씻기운
듯 맑아 온다. 청계를 끼고 물소리를 즐기며 걸어가기 십 분쯤, 문득 발부리
에 나타나는 단청(丹靑)된 다리는 이름부터 격에 어울려 함부로 건너기조차
외람된 문선교(問仙橋)!
문선교! 어느 때 어떤 은사(隱士)가 예까지 찾아와서 선경(仙境)이 어디냐고
목동에게 차문(借問)한 고사라도 있었던가? 있을 법한 일이면서 깜짝 소문에
조차 듣지 못한 것은, 역시 선경과 속계(俗界)가 스스로 유별(有別)한 탓이었
던가?
차문주가하처재(借問酒家何處在)
목동요지행화촌(牧童遙指杏花村)
은 속계의 노래로, 속계에서는 이만하면 풍류객이었다. 동양류의 선경이란
풍류객들이 사는 고장을 일컬음이니, 선경과 속계는 백지 한 겹밖에 아닐
듯이 믿어지니, 이미 세진(世塵)을 떨치고 나선 몸이라 서슴지 않고 문선교
를 건너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단한 마련해선 일찌감치 눈이 떠진 것은 몸이 지닌 기쁨이
하도 컸던 탓이었을까. 안타깝게도 간밤에 볼 수 없던 영봉(靈峯)들을 대면
(對面)하려고 새댁 같이 수줍은 생각으로 밖에 나섰으나, 계곡은 여태 짙은
안개 속에서, 준봉(峻峯)은 상기 깊은 구름 속에서 용이(容易)하게 자태를
엿보일 성싶지 않았고, 다만 가까운 데의 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것이 눈에 뜨일
뿐이었다.
모두 근심 없이 자란 나무들이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하늘을 향하여
밋밋하게 자란 나무들이었다. 꼬질꼬질 뒤틀어지고 외틀어지고 한 야산
(野山) 나무밖에 보지 못한 눈에는, 귀공자와 같이 기품(氣稟)이 있어 보이는
나무들이었다.
조반(朝飯) 후 단장(短杖) 짚고 험난한 전정(前程)을 웃음경삼아 탐승(探勝)
의 길에 올랐을 때에는, 어느덧 구름과 안개가 개어져 원근(遠近) 산악이 열병
식(閱兵式)하듯 점잖이들 버티고 서 있는데, 첫눈에 비치는 만산(萬山)의
색소는 홍(紅)! 이른바 단풍이란 저런 것인가 보다 하였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은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登)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복잡한 것은 색(色)만이 아니었다. 산의 용모는 더욱 다기(多岐)하다. 혹은
깎은 듯이 준초(峻峭)하고, 혹은 그린 듯이 온후(溫厚)하고, 혹은 막
잡아 빚은 듯이 험상궂고, 혹은 틀에 박은 듯이 단정하고 . 용모, 풍취가
형형색색인 품이 이미 범속(凡俗)이 아니다.
산의 품평회(品評會)를 연다면, 여기서 더 호화로울 수 있을까?
문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장안사(長安寺) 맞은편 산에 울울
창창(鬱鬱蒼蒼) 우거진 것은 다 잣나무뿐인데, 모두 이등변삼각형(二等邊
三角形)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는 품이, 한 그루의 나무가 흡사히 괴어
놓은 차례탑(茶禮塔) 같다.
부처님은 예불상(禮佛床)만으로는 미흡(未洽)해서, 이렇게 자연의 진수성찬
(珍羞盛饌)을 베풀어 놓으신 것일까? 얼른 듣기에 부처님이 무엇을 탐낸다는
것이 천만부당(千萬不當)한 말 같지만, 탐내는 그것이 물욕(物慾) 저편의
존재인 자연이고 보면, 자연을 맘껏 탐낸다는 것이 이미 불심(佛心)이 아니고
무엇이랴.
장안사 앞으로 흐르는 계류(溪流)를 끼고 돌며 몇 굽이의 협곡(峽谷)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과 물이 어울리는 지점에 조그마한 찻집이 있다.
다리도 쉴 겸, 스탬프 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구비된 기념인장을 찍으니,
그림과 함께 지면(紙面)에 나타나는 세 글자가 명경대(明鏡臺)! 부앙(俯仰)
하여 천지에 참괴(慙愧)함이 없는 공명(公明)한 심경을 명경지수(明鏡止水)
라고 이르나니, 명경대란 흐르는 물조차 머무르게 하는 곳이란 말인가!
아니면, 지니고 온 악심(惡心)을 여기서만은 정(淨)하게 하지 아니하지 못하는
곳이 바로 명경대란 말인가!
아무러나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찻집을 나와 수십 보를 바위로 올라
가니, 깊고 푸른 황천담(黃泉潭)을 발밑에 굽어보며 반공(半空)에 위연(威然)
히 솟은 절벽이 우뚝 마주 선다. 명경대였다. 틀림없는 화장경(化粧鏡) 그대로
였다.
옛날에 죄의 유무(有無)를 이 명경에 비추면, 그 밑에 흐르는 황천담에 죄의
영자(影子)가 반영되었다고 길잡이는 말한다.
명경! 세상에 거울처럼 두려운 물건이 다신들 있을 수 있을까! 인간 비극은
거울이발명되면서 비롯했고, 인류 문화의 근원은 거울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설일까?
백 번 놀라도 유부족(猶不足)일 거울의 요술을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일상
(日常)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경(可驚)할 일인가?
신라조(新羅朝) 최후의 왕자인 마의 태자(麻衣太子)는 시방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바위 위에 꿇어 엎드려, 명경대를 우러러 보며 오랜 세월을 두고 나무아미
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염송(念誦)했다니, 태자도 당신의 업죄(業罪)를 명경
(明鏡)에 영조(映照)해 보시려는 뜻이었을까!
운상기품(雲上氣稟)에 무슨 죄가 있으랴만, 등극(登極)하실 몸에 마의(麻衣)
를 감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 이미 불법(佛法)이 말하는 전생의 연(緣)일
는지 모른다.
두고 떠나기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며 계곡을 돌아 나가니,
앞으로 염마(閻魔)처럼 막아서는 웅자(雄姿)가 석가봉(釋迦峯)! 뒤로 맹호
(猛虎)같이 덮누르는 신용(神容)이 천진봉(天眞峯)! 전후좌우를 살펴봐야 협착
(狹窄)한 골짜기는 그저 그뿐인 듯. 진퇴유곡의 절박감을 느끼며 그대로 걸어
나가니, 간신히 트이는 또 하나의 협곡(峽谷)!
몸에 감길 듯이 정겨운 황천강(黃泉江) 물줄기를 끼고 돌면, 길은 막히는 듯
나타나고, 나타나는 듯 막히고, 이 산에 흩어진 전설과, 저 봉에 얽힌 유래담(由
來談)을 길잡이에게 들어가며 쉬엄쉬엄 걸어 나가는 도안에, 몸은 어느덧 심해
(深海)같이 유수(幽邃)한 수목(樹木) 속을 거닐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천하에 수목이 이렇게도 지천(至賤)으로 많던가! 박달나무, 엄나무, 피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 나무의 종족은 하늘의 별보다도 많다고 한 어느 시의
구절을 연상하며 고개를 드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단풍 뿐, 단풍의 산이요,
단풍의 바다다.
산 전체가 요원(燎原) 같은 화원(花園)이요, 벽공(碧空)에 외연(巍然)히 솟은
봉봉(峯峯)은 그대로가 활짝 피어 오른 한 떨기의 꽃송이다. 산은 때 아닌 때에
다시 한 번 봄을 맞아 백화난만(百花爛漫)한 것일까? 아니면, 불의(不意)의
신화(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진주홍(眞珠紅)을 함빡 빨아들인 해면(海綿)같이, 우러러 볼수록 찬란하다.
산은 언제 어디다 이렇게 많은 색소를 간직해 두었다가, 일시에 지천으로 내뿜
는 것일까?
단풍이 이렇게 고운 줄은 몰랐다. 김 형(金兄)은 몇 번이고 탄복하면서, 흡사히
동양화의 화폭(畵幅) 속을 거니는 감흥을 그대로 맛본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도
한 떨기 단풍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다리는 줄기요, 팔은 가지인 채, 피부는
단풍으로 물들어 버린 것 같다.
옷을 훨훨 벗어 꽉 쥐어짜면, 물에 헹궈 낸 빨래처럼 진주홍 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것만 같다.
그림 같은 연화담(蓮花潭) 수렴폭(垂簾瀑)을 완상(琓賞)하며, 몇 십 굽이의
석계(石階)와 목잔(木棧)과 철삭(鐵索)을 답파(踏破)하고 나니, 문득 눈앞에
막아서는 무려 3백단의 가파른 사닥다리―한 층계 한 층계 한사코 기어오르
는 마지막 발걸음에서 시야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여기가 해발 5천척의 망군대(望軍臺)― 아! 천하는 이렇게도 광활하고 웅장
하고 숭엄하던가!
이름도 정다운 백마봉(白馬峯)은 바로 지호지간(指呼之間)에 서 있고,
내일 오르기로 예정된 비로봉(毘盧峯)은 단걸음에 건너뛸 정도로 가깝다.
그밖에도, 유상무상(有象無象)의 허다한 봉들이 전시(戰時)에 할거(割據)하는
군웅(群雄)들처럼 여기에서도 불끈 저기에서도 불끈, 시선을 낮춰 아래로 굽어
보니, 발밑은 천인단애(千仞斷崖), 무한제(無限際)로 뚝 떨어진 황천계
곡(黃泉溪谷)에 단풍이 선혈처럼 붉다.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
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저물 무렵에 마하연(摩詞衍)의 여사(旅舍)를 찾았다.
산중에 사람이 귀해서였던가. 어서 오십사는 상냥한 안주인의 환대도 은근하
거니와, 문고리 잡고 말없이 맞아주는 여관집 아가씨의 정성은 무르익은 머루
알 같이 고왔다.
여장(旅裝)을 풀고 마하연함(摩詞衍庵)을 찾아갔다. 여기는 선원(禪院)이어서,
공부하는 승려뿐이라고 한다. 크지도 않은 절이건만 승려 수는 실로 30명은 됨
직하다. 이런 심산(深山)에 웬 중이 그렇게도 많을까?
한없는 청산 끝나 가려 하는데, [無限淸山行欲盡]
흰 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아라. [白雲深處老僧多]
옛 글 그대로다.
노독(路毒)을 풀 겸 식후에 바둑이나 두려고 남포등 아래에 앉으니,
온고지정(溫故之情)이 불현듯 새로워졌다.
"남포등은 참말 오래간만인데." 하며, 불을 바라보는 김 형의 말씨가 하도 따뜻
해서, 나도 장난삼아 심지를 돋우었다 줄였다 하며, 까맣게 잊었던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리운 얼굴들이, 흐르는 물의 낙화(落花) 송이 같이 떠돌았다.
밤 깊어 뜰에 나가니, 날씨는 흐려 달은 구름 속에 잠겼고, 음풍(陰風)이 몸에
선선하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기에 바람 소린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 보면 바람 소리만도 아니요, 물소린가 했더니 물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린가 했더니 나뭇잎 갈리는 더구나 아니다. 바람소리와 물소
리와 나뭇잎 갈리는 소리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가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春香)이
태형(笞刑) 맞으며 백(百)으로 아뢰는 대목일 것도 같고, 누명(陋名) 쓴 장화
(薔花)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告祝)하는 대목일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定配)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伯爵)이 쫓아가는 대목일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 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
갔다.
자꾸 깊은 산속으로만 들어가기에, 어느 세월에 이 골을 다시 헤어나 볼까 두렵다.
이대로 친지와 처자를 버리고 중이 되는 수밖에 없나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이키니, 몸은 어느새 구름을 타고 두리둥실 솟았는지, 군소봉(群小峯)이 발밑에
절하여 아뢰는 비로봉 중허리에 나는 서 있었다. 여기서부터 날씨는 급격히 변화
되어 이 골짝 저 골짝에 안개가 자옥하고 음산(陰散)한 구름장이 산허리에 감기더
니, 은제(銀梯), 금제(金梯)에 다다랐을 때, 기어이 비가 내렸다. 젖빛 같은 연무
(煙霧)가 짙어서 지척을 분별할 수 없다. 우장(雨裝)없이 떠난 몸이기에 그냥 비를
맞으며 올라가노라니까, 돌연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어디서 불어 왔는지, 휙 소리
를 내며 운무(雲霧)를 몰아가자, 은하수같이 정다운 은제와, 주홍 주단 폭 같이
늘어놓은 붉은 진달래 단풍이, 몰려가는 연무 사이로 나타나 보인다.
은제와 단풍은 마치 이랑 이랑으로 섞바꾸어가며 짜 놓은 비단결 같이 봉에서 골짜
기로 퍼덕이며 흘러내리는 듯하다. 진달래꽃보다 단풍이 배승(倍勝)함을 이제야
깨달았다.
오를수록 우세(雨勢)는 맹렬했으나, 광풍이 안개를 헤칠 때마다 농무(濃霧) 속에서
홀현홀몰(忽顯忽沒)하는 영봉(靈峯)을 영송(迎送)하는 것도 과히 장관(壯觀)이었다.
산마루가 가까울수록 비는 폭주(暴注)로 내리붓는다. 만 이천 봉을 단박에 창해(滄
海)로 변해 보리는 것일까. 우리는 갈데없이 물에 빠진 쥐 모양을 해 가지고 비로봉
절정(絶頂)에 있는 찻집으로 찾아드니, 유리창 너머로 내다보고 섰던 동자(童子)가
문을 열어 우리를 영접하였고, 벌겋게 타오른, 장독 같은 난로를 에워싸고 둘러앉았
던 선착객(先着客)들이 자리를 사양해 준다. 인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은데, 밖에서
는 몰아치는 빗발이 뒤집히는듯하다. 용호(龍虎)가 싸우는 것일까? 산신령이 대로
(大怒)하신 것일까? 경천동지(驚天動地)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지, 이렇게 만상
(萬象)을 뒤집을 법이 어디 있으랴고, 간장(肝腸)을 죄는 몇 분이 지나자, 날씨는
삽시간에 잠든 양같이 온순해졌다. 변환(變幻)도 이만하면 극치에 달한 듯싶다.
비로봉 최고점(最高點)이라는 암상(巖上)에 올라 사방을 조망(眺望)했으나, 보이는
것은 그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운해(雲海)뿐, ―운해는 태평양보다도 깊으리라 싶
었다. 내외해(內外海) 삼금강(三金剛)을 일망지하(一望之下)에 굽어 살필 수 있다는
한 지점에서 허무한 운해밖에 볼 수 없는 것이 가석하나, 돌이켜 생각건대 해발 육천
척에 다시 신장 오척을 가하고 오연(傲然)히 저립(佇立)해서, 만학천봉(萬壑千峯)을
발밑에 꿇어 엎드리게 하였으면 그만이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마음은 천군만마(千軍萬馬)에 군림하는 쾌승 장군(快勝將軍)보다도 교만해진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
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
(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무덤가 비에 젖은 두어 평 잔디밭 테두리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석양이 저무는 서녘
하늘에 화석(化石)된 태자의 애기(愛騎) 용마(龍馬)의 고영(孤影)이 슬프다. 무심히
떠도는 구름도 여기서는 잠시 머무르는 듯, 소복(素服)한 백화(百花)는 한결같이
슬프게 서 있고, 눈물 머금은 초저녁달이 중천에 서럽다.
태자의 몸으로 마의(麻衣)를 걸치고 스스로 험산(險山)에 들어온 것은, 천 년 사직
(千年社稷)을 망쳐 버린 비통을 한 몸에 짊어지려는 고행(苦行)이었으리라.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入山)할 때에, 대장부의 흉리(胸裡)가 어떠했을까? 흥망(興亡)이 재천(在天)
이라. 천운(天運)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信義)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蒼氓)에게 베푸신 도타운 자혜(慈惠)가 천 년 후에 따습다.
천 년 사직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 년이 지났으니,
유구(悠久)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七十生涯)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角逐)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
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 글 : 정비석
○ 낭독 : 달빛
○ 편집 : 송 운(松韻)
정비석(鄭飛石, 1911∼1991)
본명 정서죽(鄭瑞竹)
정비석은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에 일본 니혼(日本)대학 문과를 중퇴
하였고,
1935년 동아일보에 시 〈여인의 상〉, 〈저 언덕길〉 등을 발표하였으나 1936년 소설로 전향하여
단편〈졸곡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37년 단편 〈성황당〉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에 당선되어 데뷔하였다.
데뷔작인 〈졸곡제〉는 아내가 죽은 뒤 과거에 아내와 나누었던 애정을 회고하는 내용의 작품이다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없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아내의 모습과 주인공의 사랑이 작품의 중심
을 이루고 있다.
정비석을 본격적인 작가의 대열에 합류시킨 작품은 1937년에 발표된 〈성황당〉이다. 이 작품은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순이’라는 인물이 겪는 사랑과 자연에의 순응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 성향은 당시 일반화되었던 모더니즘적 소설이나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의 유형
과는 크게 차별화된 것으로 원시적 자연의 신성함과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 창작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경향은 지속되지 못하고 자연과의 교감과 예찬은 〈산정무한〉과 같은 수필을 통해 표출
되어 나온다.
이후에는 지식인의 입장에서 현실에 대해 고민하고 사상적으로 갈등을 겪는 이야기나, 종교와 인간
의 미덕을 다룬 작품 등이 창작된다. 첫 번째 계열의 작품으로는 〈저기압〉, 〈삼대〉 등이 있으며
종교적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는 〈제신제〉가 있다.
〈제신제〉는 〈성황당〉과 더불어 정비석의 해방 이전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한 신학도의 방황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도 대자연과 토속적 세계의 아름다
움이 잘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주제 면에 있어서는 종교적 번뇌와 인간적 감정의 흐름이 중심에
놓여 있다.
정비석이 소설가로서 유명해진 것은 해방 이후 발표한 세태 풍자적 장편 소설을 통해서이다.
〈자유부인〉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울신문』을 통해 8개월 간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
한 것인데 지식인 계급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해방 이후 번져갔
던 퇴폐적 풍조를 날카롭게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에는 〈소설 손자병법〉을 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상의 작품 이외에도
〈청춘산맥〉(1949), 〈여성전선〉(1951), 〈홍길동전〉(1953), 〈산유화〉(1954), 〈야래향〉
(1957), 〈여성의 적〉(1960) 등의 소설과 수필집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1963) 등이 있다.
첫댓글정비석(본명 정서죽鄭瑞竹)은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에 일본 니혼(日本)대학 문과를 중퇴하였고, 1935년 동아일보에 시 〈여인의 상〉, 〈저 언덕길〉 등을 발표하였 으나 1936년 소설로 전향하여 단편〈졸곡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37년 단편 〈성황당〉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데뷔하였다
정비석을 본격적인 작가의 대열에 합류시킨 작품은 1937년에 발표된 〈성황당〉이다. 이 작품은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순이’라는 인물이 겪는 사랑과 자연에의 순응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 성향은 당시 일반화되었던 모더니즘적 소설이나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의 유형과는 크게 차별화된 것으로 원시적 자연의 신성함과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 창작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경향은 지속되지 못하고 자연과의 교감과 예찬은 〈산정무한〉과 같은 수필을 통해 표출되어 나온다.
정비석이 소설가로서 유명해진 것은 해방 이후 발표한 세태 풍자적 장편 소설을 통해서이다. 〈자유부인〉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울신문』을 통해 8개월 간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인데 지식인 계급에서 벌어지 는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해방 이후 번져갔던 퇴폐적 풍조를 날카롭게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에는 〈소설 손자병법〉을 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상의 작품 이외에도 〈청춘산맥〉(1949), 〈여성전선〉(1951), 〈홍길동전〉(1953), 〈산유화〉(1954), 〈야래향〉(1957), 〈여성의 적〉(1960) 등의 소설과 수필집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1963) 등이 있다.
첫댓글 정비석(본명 정서죽鄭瑞竹)은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에 일본 니혼(日本)대학 문과를 중퇴하였고,
1935년 동아일보에 시 〈여인의 상〉, 〈저 언덕길〉 등을 발표하였
으나 1936년 소설로 전향하여 단편〈졸곡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37년 단편 〈성황당〉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데뷔하였다
정비석을 본격적인 작가의 대열에 합류시킨 작품은 1937년에
발표된 〈성황당〉이다.
이 작품은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순이’라는 인물이 겪는 사랑과
자연에의 순응을 다루고 있다.
이와 같은 작품 성향은 당시 일반화되었던 모더니즘적 소설이나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의 유형과는 크게 차별화된 것으로
원시적 자연의 신성함과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 창작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경향은 지속되지 못하고 자연과의 교감과
예찬은 〈산정무한〉과 같은 수필을 통해 표출되어 나온다.
정비석이 소설가로서 유명해진 것은 해방 이후 발표한 세태 풍자적
장편 소설을 통해서이다.
〈자유부인〉은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서울신문』을 통해 8개월
간 연재된 것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인데 지식인 계급에서 벌어지
는 남녀 간의 애정 문제를 세밀하게 추적하면서 해방 이후 번져갔던
퇴폐적 풍조를 날카롭게 비판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에는 〈소설 손자병법〉을 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으며 이상의 작품 이외에도
〈청춘산맥〉(1949), 〈여성전선〉(1951), 〈홍길동전〉(1953),
〈산유화〉(1954), 〈야래향〉(1957), 〈여성의 적〉(1960) 등의
소설과 수필집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1963) 등이 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너무 상세히 설명을 해 주셨네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
한국 날씨 너무 무덥고 습하다고 하던데
건강 조심하셔요..
^^~~~***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찾아 주시여
감사 드립니다. 행복한 여름 되세요
감사 글 담아갑니다